조선시대 질병과 치료, 그리고 의사①
김 성 수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머리말
1. 조선 사람들이 걸린 질병
1) 피할 수 없는 두려움, 전염병
2) 일상에서 등장하는 질병
2. 그들은 어떻게 치료했는가?
1) 아프기 전에 조심하자, 양생
2) 국립 병원과 약계
3. 의사의 등장
1) 조선후기 의료의 상업화
2) 상업의사의 등장
머리말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현재의 사람들처럼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다. 그들에게 고통을 준 질병들은 여전히 존재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의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다. 물론 지금은 있지만 당시에는 두드러지지 않았거나 아예 없었던 질병도 있다.
가령 성홍열 같은 경우는 현재 거의 사라진 질병이며, 천연두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재 한국인의 사망원인 가운데 높은 순위에 있는 암(癌)은 조선시대에는 많이 보이지 않으며, AIDS의 경우는 당연히 없었다.
질병과 치료를 통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통해서 조선 사회의 특징을 알 수도 있다. 또한 질병을 포함하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대응을 살펴볼 수 있다는데 또 다른 의의가 있다. 물론 조선시대의 질병과 치료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의학적인 내용 외에도 당시 사회의 실상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질병, 즉 사회적 개인적 의미부여가 있었던 질병과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치료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자연과 질병에 대한 이해 등을 차례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어서 의료현실을 통해서 나타나는 조선사회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한다.
1. 조선 사람들이 걸린 질병
1) 피할 수 없는 두려움, 전염병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질병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아마도 전염병을 손꼽을 수 있다. 일상에서 겪게 되는 여러 질병들에 비해, 전염병-특히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은 그저 개인적인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 문제를 일으키기에 그 두려움은 매우 컸다. 서양 중세의 페스트 유행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전염병이 여러 차례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전염병으로는 티푸스, 천연두, 말라리아 등이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콜레라가 들어와 많은 사상자를 냈다.1
조선 시대 내내 가장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통상 역병(疫病)이라고 하는 전염병인데, 이외에도 여역(癘疫), 질역(疾疫), 여질(癘疾), 역(疫), 역려(疫癘), 역질(疫疾) 등으로도 불렸다. 이런 역병들은 대개 급성 열성 질환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전통의학에서는 주로 상한(傷寒)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즉 오한(惡寒), 발열(發熱), 기침, 근육통(筋肉痛), 복통(腹痛), 설사(泄瀉), 두통(頭痛), 청색증(靑色症)과 같은 증상을 보이는 질환군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상기도감염증(上氣道感染症)으로부터 기관지염(氣管支炎), 폐렴(肺炎) 등의 호흡기(呼吸器) 감염증이 주로 속하며, 대부분의 유행성질환인 발진티푸스, 재귀열(再歸熱), 장티푸스 등도 비슷한 증상을 나타낸다.2
보통 전염병은 인구가 밀집하는 상태에서 발생하기 쉬었는데, 대규모 건설과 군대 등에서 나타났다. 가령 조선의 건국 이후 수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력 동원이 필요하였고, 전염병이 발생할 가능성 높았다. 이에 태조는 왕도 공사의 시작에 앞서 하늘과 땅, 산천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임금이 하루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은 이러하였다.…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질역(疾疫)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한다.3
당시에도 인구가 밀집하는 곳에서 전염병이 발생하기 쉽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연유는 음양이 어그러져서 발생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인력이 밀집하는 군대의 경우도 전염병이 발생하기 쉬었는데, 조선 초부터 선군(船軍)을 중심으로 군대에서도 주기적으로 역병이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조선시대 여러 차례 역병이 계속 되었는데 특히 16세기에는 전국적으로 발생한 역병이 많은 피해를 낳아, 중종 19년~22년(1524~1527), 명종 원년~4년(1546~1549), 선조 10년(1577) 등에는 엄청난 사상자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피해가 가장 컸던 평안도의 경우에는 중종 19년에서 20년 8월 1일까지 대략 1년 반 동안 22,3494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였다.
물론 이 기록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16세기에도 이미 호적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사상자로 기록된 숫자는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사람들만을 지칭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상자는 훨씬 많을 것이다. 반면에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기아에 허덕이다 죽는 경우도 많았는데, 아사(餓死)인 경우 지방관이 처벌받는다는 점 때문에 아사자를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고 보고하는 경우도 꽤 되었다. 이 경우 실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줄어들 것이다. 현재로써는 그러한 사정을 모두 감안하여 수치화 할 수 없기에 우선 기록을 그대로 따른다고 할 때, 2만 명의 사상자는 절대로 적은 수는 아니다.
현재 조선시대의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학자들마다 추정하는 수치가 매우 다른데, 중종14년(1519) 가구 수는 754,146호 인구는 3,745,481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를 감안하고 생각한다면 평안도에서만 2만 명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것이었으며, 당시의 사관은 “불쌍한 우리는 왜 이다지 곤궁한 운명을 만났는가.”5라고 심경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림 6 1871년 음죽현(陰竹縣) 읍지(邑誌)
이러한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의서에서 알려주는 여러 가지 방법, 즉 역병을 피하는 법이나 치료법 등을 사용했다. 또한 국가에서는 활인서 등에서 구료하고,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에 의원과 약재를 보내며, 전염병 의서들을 편찬하여 전국에 보내곤 하였다. 그와 함께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달래는 여제(癘祭)도 지냈는데, 이를 위하여 전국에 여제단이 설치될 정도였다. 이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치료로써 효과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실제로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온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치료하려고 하였을까? 16세기 중엽 온역의 치료에 관심을 갖고 『언해벽온방(諺解辟瘟方)』을 간행하였던 김안국(金安國)이 중종 37년(1542)에 편찬에 참여했던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분문온역이해방』은 김안국의 주도 아래 의원인 박세거(朴世擧)·홍침(洪沈)․문세련(文世璉)·유지번(柳之蕃)·정추(鄭樞)·홍세하(洪世河)·이척(李倜) 등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내용은 진양(鎭禳)·불상전염(不相傳染)·복약(服藥)·노복(勞服)등의 4문(門) 아래에, 약명과 채법(採法)을 더하여 이를 모두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여하간 『분문온역이해방』에서는 온역의 원인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먼저 거론한 것은 계절의 기후가 일정치 못한 이상 기후 현상이었다.
그 병은(瘟疫: 필자주) 시기(時氣: 계절병 혹은 전염병)와 온열병(溫熱病) 등과 서로 비슷하니, 모두 한 해 안에 절기(節氣)가 조화(調和)롭지 못하고 추위와 더위가 계절에 어긋나거나 혹 폭풍과 비바람이 불고, 안개가 흩어지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역병(疫病)이 많게 된다. 그 질병에는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증상이) 모두 비슷하여 마치 귀신[鬼癘]의 기운이 있는 것 같은 까닭에 역려병(疫癘病)이라고 한다. 병의 기운이 서로 전염되기 쉬워, 멸문(滅門)의 화(禍)에 이르고 다른 사람에게도 미치는 까닭에 모름지기 미리 약을 먹고 술법(術法)을 행하여 막아야 한다.6
기온, 기상의 이상 등이 농업생산력에 영향을 미쳐 질병의 발생률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이지만, 굳이 역병[온역]의 발생 원인을 절기(節氣), 한열(寒熱), 폭풍(暴風), 질우(疾雨), 무로(霧露) 등에서 찾는 것은 왜 많은 사람들에게 역병이 동시에 발생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이외에도 생활환경 속에서 찾기도 하였는데, 가령 온역의 발생은 도랑을 청소하지 않아서 그 더러운 것이 훈증되어 생겨나기도 하며, 혹은 땅에 사기(死氣)가 가득 발산하여 이루어진 것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사회적 원인도 있어서 관리의 폭정으로 원한이 쌓여서 생기기도 한다. 이 밖에 세속(世俗)에서 말하는 감옥에서 생긴 온역, 시장에서 생긴 온역, 무덤에서 생긴 온역, 사당에서 생긴 온역, 신사에서 생긴 온역, 산에서 생긴 온역, 바다에서 생긴 온역, 집에서 생긴 온역, 부엌에서 생긴 온역, 날씨로 생긴 온역, 하늘에서 생긴 온역, 땅에서 생긴 온역 등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러한 온역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7
결국 온역의 발생은 자연계의 기운이 순환하는 일정한 궤도에 이상이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상을 발견해내어 원인을 제거하거나 그에 맞는 치료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문온역이해방』에서는 이어서 온역을 치료하거나 예방하기 위한 방법들을 서술하고 있다. 약 100여 가지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조선 전래의 방법이나 독특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중기인 1226년 최종준(崔宗峻)이 편찬·간행하였다는 『어의촬요방(御醫撮要方)』의 처방을 소개한 신명단(神明丹)은 일년의 온역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창출(蒼朮) 4냥, 복령(茯笭) 3냥, 인삼(人蔘) 2냥, 감초(甘草) 1냥을 재료로 만들며, 매년 정월 초하루 5경에 복용한다고 하였다. 이때에는 하늘의 운기(運氣)에 맞추어서 하늘의 기운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가령 자년(子年)인 경우 자방(子方) 즉 북쪽을 향해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면서 약을 먹어야 했다.8
그리고 병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향을 피우는 방법 등도 동원이 되었는데, 『간이벽온방』에서 가져온 “정월 초 상인일(上寅日: 초순에 寅이 들어간 날)에 측간에 난 풀을 가져다가 정원에서 피워서 온기를 피한다.”9거나, 역시 『간이벽온방』의 “소합원(蘇合元)을 탄환 크기로 하여, 비단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10 등의 간편한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렇게 하여 온역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온역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치료하거나 돌보기 위해서 환자와 대면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 더 면밀한 대처가 필요하였는데, 가령 전염병이 발생한 집에 들어갈 때에는 숨을 참음으로써 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하거나,11 소합원(蘇合元)을 마당에서 끓이는 방법 등이 동원되었다.12 또한 환자가 사용했던 물품들 역시 전염의 통로가 되기에, 환자의 의복 등을 소독하는 것 또한 제시되기도 하였다.13 온역을 피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들에는 미약하나마 온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이 담겨져 있었다. 가령 숨을 참는 법은 결국 병이 호흡기를 통해서 전염된다는 인식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며, 환자의 의복을 끓는 물로 소독하는 것 역시 전염의 경로를 차단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전염의 차단 외에, 치료의 방법으로 간단한 처방들도 소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치료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편찬된 만큼 주목하는 부분이었는데, 고삼(苦蔘), 마늘, 승마(升麻), 치자인(梔子仁), 갈근(葛根), 월경수(月經水) 등이었다. 그 밖에 아예 약을 구할 수 없을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두 손가락을 교차시켜서 머리 뒤의 풍부혈(風府穴)을 두드리면서 절을 백여 차례 하여 땀을 냄으로써 역의 기운을 풀어내는 『향약집성방』의 처방 같은 것도 소개하고 있었다.14
주)
1. 1821년(순조 21)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평양에 수만 명, 서울에 13만 명으로 전국으로 따지면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1859년(철종 10)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40만 명이었다.
2. 이상의 내용은 권복규, 2000, 「朝鮮前期의 역병 유행에 관하여」, 『韓國史論』 43, 4~5쪽 참조. 역병으로 기록되어 있는 기사 중에서, 아래의 온역이나 두창 등 특정질병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질병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3. 『太祖實錄』 卷6, 太祖 3年(1394) 12月 3日(戊辰).
4. 『中宗實錄』 卷53, 中宗 20年(1525) 8月 1日(戊子), “兵曹啓曰 平安道 癘疫死亡者多…癘疫死亡者 多至二萬二千三百四十九”
5. 『中宗實錄』 卷96, 中宗 36年(1541) 11月 18日(庚子), “史臣曰 …哀我人斯 一何運命之窮也?”
6. 『分門瘟疫易解方』, 鎭禳門, 「疫癘病候」, “其病 與時氣․溫熱等病相類 皆有一歲之內 節氣不和 寒暑乖候 或有暴風疾雨 霧露不散 則民多疾疫 病無長少 率皆相似 如有鬼癘之氣 故云疫癘病 病氣轉相染易 乃至滅門 延及外人 故須預服藥 及爲法術以防之”
7. 『分門瘟疫易解方』, 鎭禳門, 「疫癘病候」, “疫之所興 或溝渠不泄 其穢惡薰蒸而成者 或地多死氣 鬱發而成者 或官吏枉抑 怨讟而成者 世謂獄溫․傷溫․墓溫․廟溫․社溫․山溫․海溫․家溫․竈溫․歲溫․天溫․地溫等 不可不究”
8. 『分門瘟疫易解方』, 鎭禳門, 「疫癘病候」, “御醫撮要方 神明丹」 主一年溫疫之災 蒼朮四兩炒 茯苓三兩去膜焙 人蔘二兩去蘆頭 甘草一兩炙 右件爲末 煉蜜和丸彈子大 以朱砂爲衣 每歲旦五更初 虔心祈告 面向天運受氣方 溫酒嚼下一丸 如不飮酒者 乳香湯下 亦可天運受氣方 假令子年向子方 丑年向丑方 服之餘倣此”
9. 『分門瘟疫易解方』, 鎭禳門, 「疫癘病候」, “簡易辟溫方 正月初上寅日 取廁前草 燒中庭 辟溫氣”
10. 『分門瘟疫易解方』, 鎭禳門, 「疫癘病候」, “簡易辟瘟方 蘇合元 如彈子大 一丸蠟紙裹 緋絹袋盛 當心帶之 一切邪神 未敢近”
11. 『分門瘟疫易解方』, 「不相傳染門」, “鄕藥集成 凡入時氣病人房內 須舌柱上齶 努力閉氣一口 使氣充滿毫竅 則病不能染者”
12. 『分門瘟疫易解方』, 「不相傳染門」, “又方 凡入瘟疫家 先令開啓門戶 以大鍋盛水二斗 於堂中心 用蘇合元二十圓煎 其香能散疫氣 凡病者 各飮一甌後 醫者却入診視 不致相染”
13. 『分門瘟疫易解方』, 「不相傳染門」, “簡易辟溫方 家染時疫 卽初病人衣服浣洗 令淨飯甑中蒸之 卽無傳染之患”
14. 『分門瘟疫易解方』, 「服藥方術門」, “鄕藥集成方 治時氣 無藥處可用 兩手指相交緊 叩腦後風府穴 向前禮百餘拜 汗出自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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