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경(張仲景)과 <상한잡병론>
張仲景 張機(AD150년?~219년간)
중국 후한의 관료이자 의사. 일반적으로 "장중경"(중경은 자)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의학상의 공적이 커 의성이라 추앙받아 왔다. 이름은 張機이다. 서양에서 그리스의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의성이라고 불려지는 것과 대비된다. 히포크라테스도 환자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중시하고, 환자에게서 병의 본질을 배운다고 했던 점에서 두 사람은 유사한 관점에 서 있다고 할 만하다.
형주의 南陽(이설도 있지만)에서 태어난 장기는 효자였고 청렴하여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료생활을 보냈고, 헌제의 건안 연간 초기에는 장사 태수를 역임하였다. 수 십년 전 장기의 무덤이 후난성 장사에서 발견됨으로써 실존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건안 원년은 196년에 해당한다. 또한 그 4년 전까지는 손견이 장사 태수였고, 건안 삼년인 198년에는 장기가 아닌 장선張羨이 장사 태수로 유표에 반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때부터 총기가 남달라 벼슬에 나갈 것으로 기대되기도 하였으나, 의술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시 남양 일대에 이름 높은 명사 중에 하옹(何顒)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동탁(董卓)도 여러 차례 등용을 권유했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듭 고사하고 칩거했던 인물), 16세 되던 해 아버지는 중경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자 하옹을 만나러 갔다. 하옹은 중경을 보고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의사가 될 자질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의학공부에 전념하다 고향에서 장백조張伯祖로부터 의술을 배우게 되고 명성을 쌓게 된다. 그리고 양려공(陽勵公) 왕신선 등 수 많은 명의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비방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는 후한 말기의 혼란으로 더욱 심해진 역병(2백명에 달하던 친척 중 3분의 2가 10여년간의 역병으로 사망했고 이 중 7할이 "傷寒病"(급성열성질환, 즉 감염증)이었다고 한다)을 안타까워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의학의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대체 병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장티푸스나 파상풍, 콜레라, 말라리아 등 감염증(급성열성질환)이었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감염증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을 것이다.
저 유명한 그의 저술인『상한잡병론』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의서의 지식과 자신의 경험을 더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후에 "상한론"과 "금궤요략방론"의 2종류의 책으로 분할되었다. 그는 의술에 정통하고서 치료에 임해야 한다는 점, 또 매우 신중함과 동시에 유연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강한 책임감을 중요시한다. 선인의 지식을 존중하면서도 환자 개개의 상태에 따라 필요하면 독창적인 치료를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대 중국은 신화 전설의 삼황오제가 중국을 다스리던 시대였다고 한다. 三皇은、伏義・女媧・神農이고、五帝는、黄帝・顓頊・帝嚳・尭・舜을 말한다. 중국 선사문명은 황하문명과 장강문명이고, 황하문명이 흥했던 것은 5000년 전이다. 황하의 치수에 공적이 있던 우임금은 다섯 황제의 마지막인 순임금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는다. 선양은 중국에서 그 지위를 세습하지 않고 유덕자에게 양위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요가 순에게 또 순이 우에게 황제를 내준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또 우가 제위를 순에게 물려받으면서 "하"나라를 만들게 되는데, 이 하나라가 유사시대의 시작에 해당하는 중국 최고의 왕조라 할 수 있다. 하나라는 기원전 21세기에서 기원전 16세기경까지 이어진다. 하나라 마지막 군주는 폭군으로 유명한 걸이다. 이 걸이 "은"의 탕왕에게 정벌되어 하나라는 망하고 은 왕조가 성립된 것이 BC1600경이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병은 반드시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따라서 병을 고치는 일도 황제의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삼황의 한 분인 신농은 백성의 행복에 마음을 쓴, 농경과 의약의 시조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떠받들어 지고 있다. 이 황제의 이름을 넣어 작성된 것이 바로 한방약제를 정리한 『신농본초경』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농은 모든 초목의 맛을 보고, 최초로 의약물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오제의 첫 번째인 黄帝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신농의 세상을 평정하고 이어 천지를 관장하는 음양오행의 운행을 처음 정했다고 한다. 이 황제의 이름을 써서 『황제내경』이라는 책이 쓰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장중경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갖가지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알려져 왔다. 일족의 대부분이 상한의 병으로 숨진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던 그는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황제내경 소문』이나 『음양 대론』 『평맥 변증』 등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의서를 연구하여 『상한잡병론』을 저술하였다. 물론 감염증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을 바이러스나 세균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겠지만, 약물요법인 한의생약제를 이용한 처방으로 환자들을 구해냈다. 이 한방생약의 사용법을 증세에 맞게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논한 것이 바로 『상한론』이다.
그는 환자의 증상에 "傷寒"라는 병명을 붙이고 그 증상의 상태나 질병의 진행 과정에 따라 6개의 병명으로 나누었다. 태양병, 소양병 양명병, 태음병, 소음병, 궐음병의 6가지이다. 지금부터 2000년이나 전에 질병이 내외의 邪에 대응한 인체의 면역반응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환자의 증세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위에서 설명한 6개의 단계로 나누어 그 단계에 따라 사용하는 약초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가 설파한 6가지 상한의 병과 그 처방접근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고대로부터 쌓아온 경험의 토대 위에서 그 독창적인 처방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멀리 원시시대부터 수천 년 동안 축적된 풍부한 경험적인 의학 지식이 누적되어 왔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의학 전문 서적도 있었다. 221년 진시왕에 의해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의료를 담당하는 太医令이라는 관직이 있었다고 한다. 전한(BC202~AD8) 초기에, 약초, 즉 약용식물을 다룬 「본초」라는 책이 완성되었다. 이 「본초」에는 다양한 약초의 성질이나 약효는 물론 채취법 및 조제방법과 배합 그리고 금기(증세를 건강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 사용해서는 안되는 약제나 치료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약제)는 물론 복약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항목이 망라돼 있다. 이러한 책을 기초로 그의 "상한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중국뿐만 아니라 그 주변 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물론 동남아 전체에서도 지금도 한의학의 가장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이용되어 았다. 이렇듯 상한론은 동의학에서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만큼 동의학 백미로 평가된다. 오늘날까지 동의학 수련에 빠뜨려서는 안되는 책이 되고 있다.
상한론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감염병의 발병부터 치유 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병태의 변화를 매우 상세히 설명하며, 각각의 증상에 대한 한방치료법을 제시하고 있다. 병태 자체를 중심으로 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 당시까지 의학계를 지배하던 도교-불교-신성사상 등으로부터 거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이 점은 의학사상의 기조가 음양오행적 철학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병태를 중심으로 보다 밀착된 구체적이고도 인간적인 접근으로 발전해 가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곧 실증적인 의학의 길을 열어가는 모범이 된 것이다.
약을 복용하고서 瞑眩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는 병은 치유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점도 주목을 요한다. 이는 아마도 약의 복용이 면역력을 증강시켜 병사에 대한 면역반응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으로 현대 면역학적 이해와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동의학의 치료방식이 침뜸이든 약제든 서양의학과 달리 면역을 증강시켜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에 의해 병을 물리치도록 하는 접근방식을 취한다는 의미가 보다 명확해 지는 셈이다. 물론 그 당시에 면역기구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겠지만..
『傷寒雑病論』은 이미 지적한대로 『傷寒論』과『金匱要略』으로 나뉘는데, 金匱要略은 말그대로 금으로 만든 상자에다 넣어둘 만큼 귀중한 비방을 모은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상한론이 감염병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라면 金匱要略은 그 외의 모든 질병, 예컨대 성인병 부인병 정신병 등에 대한 치료법을 다루고 있다.
(*芝雲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