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동의학 : 역사와 명의

침구인을 위한 [중의학의 역사] 2 : 송대~금/원대

지운이 2019. 1. 10. 12:42

침구인을 위한 [중의학의 역사] 2 : 송대~금/원대 

 

*중의학의 역사를 아는 것이 침구를 공부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관점에서 정리해 봅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3회로 나누어 올려둡니다. 그 두 번째편으로  '송대~금/원대'까지입니다

 

 

宋代(960~1279)

 

송대로 넘어오면, 그 왕조가 유교를 규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의학도 국가사업의 요소가 강한 의학으로 자리잡게 된다. 침술 치료도 북송의 황제 삼대는 의학 진흥에 주력하여 「難経」「素問」「傷寒論」「金匱要略」「鍼灸甲乙経」「脈経」등을 교정 간행했다.

 

해부에 관해서는, 옛날에는 "황제내경 · 霊枢" 骨度篇에 해부의 기록이 보이며, "漢書"에 王莽이 의관에게 생체 해부를 명하고 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청동제의 표준인체모형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모형에 경혈을 붙인 ‘銅人’을 만들어 교육과 국가시험에도 활용하였다. 송대에 시작된 銅人의 관습은 金・元・明에 전해져 중국 중세의 의학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晋唐 이후에 유행한 뜸법은 송나라에서도 계속되었다. 긴 세월에 걸친 임상을 통해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도 晋唐 시대보다 진보하였고, 적응증에 대한 평가도 추가되었다. 그리고 『備急灸法』에는 ‘화기가 운송되는게 느껴지고 온몸을 돈다. 매우 뜨겁다. 다시 보면 종창은 50~60% 빠지니, 奇効나 異効란 이러한 것을 말한다’라는 기록이 있다든가, 송나라 침구의 명의인 王執中은 『鍼灸資生経・第四』에서 ‘어느 날, 심와부가 심하게 아파 바로 중완에 뜸을 여러 장 떴다. 하복부 양쪽에 있던 냉기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와 뜸 뜬 곳까지 와서 흩어졌다. 이것이 곧 뜸의 효과이다.’라고 말하여, 뜸감의 전달이 치료 효과를 높여 준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실증하였다. 이것이 다음 金元시대에  '기가 병소부에 이르는' 방법을 만들어내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하지만 식견있는 의사는 뜸법의 남용으로 인한 폐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鍼灸資生経』에는 ’큰 애주로 반복하여 많이 뜸을 뜨면 오랫동안 心力이 약해진다’고 지적하고 ‘지금 사람들은 침을 알면 뜸을 모르고 뜸을 알면 침을 모른다’고 당시의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남송시대가 되자 『備急灸方』에 ‘부귀하고 호사한 사람은 자칫 고통이 두려워 뜸 얘기만 듣고도 노하여 돌아 간다’고 관료나 부자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도 기재하고 있어, 송대에는 뜸요법이 여전히 주도적인 지위에 있었지만 침술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침술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그 처방도 누적되어 갔다. 王執中이 『鍼灸資生経』에서 송대 이전의 침구 처방을 모아 병증에 따라 분류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그의 친척들을 통한 임상경험이나 갑자기 다리가 붓는 증상에 火鍼으로 자락 출혈하거나 급성 요통에 대해서는 火鍼을 광범위하게 반복하고 叩刺하는 매화침과 비슷한 치료로 효과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金・元代

 

金・元시대는 중국 의학사상에서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대는 빛나는 대가들이 많았던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주요 학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何若愚와 竇漢卿를 대표로 하는 毫鍼의 鍼法을 중시한 파와, 다른 하나는 河間과 易水의 학파로 刺血요법과 뜸을 제창했다.

 

何若愚는『霊枢・衛気行』에 "주의 깊게 기의 행방을 찾아 거기에 刺鍼한다. 이를 逢時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기혈이 経脈을 순환하여 경혈에 이르는 시각으로 해석하여, 기혈의 流注에 기초하여 刺鍼 치료를 하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른바 ‘子午流注鍼法’을 고안하였다. 또한 竇漢卿은 「鍼経指南」에서, 현재의 팔맥교회혈 配穴法에 해당하는, 8혈로 4쌍의 조합을 만들어 交経 八会穴法을 제시하였다. 또한 刺鍼十四法을 창시하여 한열의 複合補瀉法과 "기를 이르게 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들은 鍼尖, 호흡, 염전, 提挿 등의 수기법을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기를 촉발하여 병소부에 도달케 한 다음 질병의 허실에 따라 한열 補瀉을 시행하여 경기의 "상하를 연결하면 그 고통은 곧 없어진다"고 하였는데(『鍼経指南』), 이는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특히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鍼経摘英集』에는 많은 급성 질환의 치료 방법에 "기가 병소에 이르렀을" 때의 鍼感을 기재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鍼経摘英集・治病直刺訣』에는 "갑자기 심통이 일어나 참을 수 없을 때는, 任脈의 상완을 찌른다. 흉골병 아래 삼촌 ... 刺鍼하고 鍼下로 기가 가면 환자는 계란이 굴러 뱃속에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고 하며, 竇漢卿과 동시대의 치료가들 역시 "기가 병소에 이르게 하는" 기법의 효과를 인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劉河門은 사지의 특정 경혈에서 刺血함으로써 欝熱을 ​​瀉하여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素問病機気宜保命集・巻下』에 "열이 끝없이 올라 멈추지 않을 때는 陥骨穴을 찔러 출혈시킨다", "大頻熱로 밤낮 내리지 않으면 열 손가락 사이를 찔러 출혈시킨다. 이를 八関大刺라 한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刺血清熱法의 하나이다. 八関의 위치는 후세에 八邪穴이라 생각되고 있다. 또한 사혈을 하면 기의 흐름에 효과가 있어 막힌 부분이 통한다고 생각하여, 李東垣과 朱丹渓는 사혈은 피를 활성화하여 막힌 것을 없애 준다 하였다. 예를 들어 한 소년이 만성 설사에 지사제를 사용하여 효과가 있었지만, 통풍이 되어 아파하게 되었다. 朱丹渓는 진찰을 하고 어혈이 경락에 머물러있는 것이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四物湯을 복용토록 한 다음, "위중을 찌르면 黒血가 삼합 정도 나오고 해소되었다"고 『古今医案按』에 나온다.

 

뜸에 관해서는 張仲景이 三陰에는 뜸이 좋다는 원칙을 세워,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때문에 뜸 치료에는 陰症, 寒症, 虚症이 많다. 金元시대에는 더욱 발전하여 열증도 뜸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劉河問은 뜸이 열을 瀉하고 급성 발열을 치료한다고 주장하고, 뜸에 열을 뽑아내 아래로 내리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素問病機気宜保命集・巻中』에는 ‘熱厥로 心痛이 나는 것은 몸은 뜨겁고 발은 차서 통증이 심해서 煩躁하여 토기가 있고 이마에 땀을 흘리기 때문에 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洪大脈이다. 太谿와 崑崙에 뜸을 떠 표리를 모두 瀉한다. 이것은 열병임에도 땀이 나지 않기 때문에 열을 당겨 아래의 발로 이끌어 간다‘라고 한다. 다음 뜸으로 독맥을 瀉한다. 督脈은 제양을 총괄하므로 督脈을 瀉하는 것은 양열을 瀉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설사에 대해, "목이 말라 마시는 것은 열이 횡격막에서 위에 있고, 물을 많이 마시면 ​​횡경막 아래 복부에 들어가지만 위경에는 열이 없기 때문에 물로 인해 장애를 받는다. 이것을 水恣라 한다. 미곡이 일시적으로 배설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에는 大椎에 뜸을 3~5장 뜨면 곧 낫는다. 督脈을 瀉하기 때문이다"라고 『素問病機気宜保命集・巻中』에 적고 있다. 또 음이 다하고 양이 위험한 위독한 상태일 때 金元시대의 의사는 뜸으로 脾土을 따뜻하게 보충하고 元陰 元陽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羅天益은 瘧痢가 계속되어 맥이 뜨고 실처럼 가늘며 손발에 냉감이 있으며 구토가 멈추지 않는 환자에게는 우선 중완에 뜸을 떠 비장을 보하고 다음으로 気海에 뜸을 뜨고 신(元)을 돕는 방법으로 효과를 올렸다. 여기에는 이론도 있는데, 송대의 許叔微는 뜸은 신양을 따뜻하게 하여 치료한다고 하였고, 竇材는 脾腎을 温補하면 된다고 하며, 羅天益은 비를 보해 元을 기른다고 하였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어느쪽이나 서로 연관성을 보이며 이론의 완성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한편 金・元時代에는 특히 劉完素、張子和、李東垣、朱丹渓 등 이른바 金元四大家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특징적으로만 언급하자면, 劉完素(1110~1200)는 火熱이 인체에 여러 병증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본 火熱論을, 張子和(1156~1228)은 인체에 밀려드는 邪気를 제거하는 관점을 중시한 攻邪論을, 그리고 李東垣(1180~1251)은 元気의 원천으로 脾胃를 중시하고 이 元気가 쇠퇴하면 질병이 발생한다는 脾胃論을, 朱丹渓(1281~1358)는 인체는 양은 남아돌고 음은 부족하다고 보아 滋陰降火(陰을 補하여 火를 끌어내린다)의 약을 쓸 것을 강조한 相火論을 각각 주창하였다.

 

劉完素는 病은 대부분 火熱로 인해 일어나거나 알화된다고 보았다. 風・湿・燥・寒 등의 사기도 火로 화하여 火熱이 신체를 소모시킨다고 보아, 火熱論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 火熱에 대해 寒涼薬으로 공격을 가하는 치료를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 이유로 후대에 寒涼派로 불렸다. 防風通聖散이 그 관련 처방으로 만들어졌다.

 

張従正(張子和라고도 함)는, 病이란 人体의 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風・暑・湿・火・燥・寒의 邪気가 외부로부터 체내로 침입해서 생기는 것으로 보아, 이 사기를 공격하여 몰아내는 것을 곧 치료로 이해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攻邪論이라 한다. 発汗, 吐, 排便 등을 治療法으로 제시하여, 후대에 攻下派라 불렸다.

 

李杲(李東垣)은 脾胃가 상하여 百病이 생긴다고 보았다. 脾胃가 生命活動의 원천이자 健康의 근본인 元気의 성쇠를 좌우한다고 보아, 脾胃論을 중시하였다. 치료법 역시 脾胃의 기를 보하는데로 모아져, 補土派(脾胃는 五行에서 土에 속함) 혹은 温補派로 불린다. 補中益気湯이 중시되는 처방이다. 

 

朱丹渓(朱震亨)은, 人体에는 心의 君火、肝의 相火、命門의 相火가 있는 반면, 水은 腎 뿐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언제나 陽이 有余하고 陰은 不足하다고 보는, 相火論을 주창하였다. 陰을 滋養하여 火를 진정시키는데 치료의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후대에 養陰派 또는 滋陰派라 불린다. 

 

한편, 이 시기에는 (伯仁, 1304~1386)가 『十四経発揮』를 저술하여 침구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당시 유포되던 경맥경혈도에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経脈이 体表 어디를 통해 어떻게 体内로 흘러가는지의 유주를 해명하고 経脈의 性質이나 작용, 각각의 경혈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을 부가하였다. 

 

이상과 같이 金元시대는 침, 뜸 모두 신천지를 열어갔으며, 특히 복합보사의 출현은 명대에 각종 기법을 낳는데 영향을 끼쳤다. 鍼法이 깊이 연구되어 자침조작이 널리 이용됨에 따라 침술의 지위도 점차 높아져 뜸법 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南宋에서는 「太平恵民局」이라는 공립 약국이 설치되어 의사와 백성들에게 양질의 약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바 있고, 宋慈가 『洗冤集録』이라는 세계 최초의 法医学書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芝雲 씀)

 

ㆍᆢㆍ

블로그의 다른글 참조

*중의학의 역사 1(고대~당대)

*중의학의 역사3 (명/청대~현대)

 

*芝雲이의 책 소개

코로나19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동의학 요법의 활약과 그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래의 책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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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코로나19와 동의학 그리고 침뜸요법

blog.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