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名醫〕
명의〔名醫〕
*의림촬요(醫林撮要) 중에ᆢ
양예수(楊禮壽, ?~1597)
의학을 궁극까지 밝힌 사람들이다.
편작(扁鵲 진월인(秦越人),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5세기 전후)
성(姓)은 진(秦)이고 이름은 월인(越人)이며, 호(號)는 편작(扁鵲)이다. 진(秦)나라 노국(盧國)의 발해군(渤海郡)의 정(鄭) 사람이다. 손님〔仙客〕인 장상군(長桑君)의 가르침을 얻어서 유부(兪跗)의 의술을 알게 되었다.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素問〕과 《황제내경영추(黃帝內經靈樞)》〔靈樞〕의 뜻을 밝히고, 여기에 문답 형식을 추가하여 《팔십일난경(八十一難經)》을 지어 그 의심나는 부분을 풀이하였다. 직접 맥을 짚을 필요도 없이 환자의 얼굴빛을 보고 소리를 듣고 형체를 살피고서 질병의 위치를 말하였으며, 질병의 양(陽)의 속성을 들으면 그 음(陰)의 속성까지 논하였고, 질병의 음(陰)의 속성을 들으면 그 양(陽)의 속성까지 논하였다. 천리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증상만 듣고 질병 이름을 단언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괵(虢)나라 태자(太子)는 시궐(尸厥)로 이미 죽은 듯한 상태였는데, 편작이 치료하니 다시 살아났다. 제(齊)나라 환후(桓侯)가 병이 나기도 전에 환후가 5일 뒤에는 병으로 인하여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편작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한단(邯鄲)을 지날 때는 부인(婦人)을 귀하게 여긴다는 소리를 듣고 대하의(帶下醫 산부인과 의원)가 되었고, 낙양(雒陽)을 지날 때는 주(周)나라 사람들이 노인(老人)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목비의(耳目痺醫)가 되었으며, 함양(咸陽)에 들어가서는 진(秦)나라 사람들이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소아의(小兒醫)가 되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병에는 여섯 가지 못 고치는 경우가 있다. 교만하고 방자하여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못 고치는 것이다. 몸은 가벼이 여기고 재물을 중히 여기는 것이 두 번째 못 고치는 것이다. 입고 먹는 것을 적절히 하지 못하는 것이 세 번째 못 고치는 것이다. 음양(陰陽)과 장기(臟氣)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 네 번째 못 고치는 것이다. 몸이 수척해져서도 약을 먹지 않는 것이 다섯 번째 못 고치는 것이다. 무당을 믿고 의원을 믿지 않는 것이 여섯 번째 못 고치는 것이다. 후세의 맥법〔脉理〕이 이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의학의 시조가 되었다. 후학(後學)들은 편작의 제사를 모시면서 장유이주(張劉李朱 장종정(張從正), 유완소(劉完素), 이고(李杲), 주진형(朱震亨))를 함께 배향하였다.
순우의(淳于意 중국 전한(前漢) 시기, 기원전 215~?)
임치(臨淄) 사람으로 서한(西漢 유방(劉邦)이 기원전 202년에 건국한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에 태창(太倉)의 책임자〔長〕가 되었다. 편작(扁鵲)을 굳게 믿었으며, 의도(醫道) 및 도인법(導引法)에 정통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이 그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여 《사기(史記)》에 기록하였으며, 창공(倉公)으로 봉증(封贈)되었다.
곽옥(郭玉 중국 후한(後漢) 시기)
광한(廣漢)의 낙(雒)사람으로, 화제(和帝) 때에 태의승(太醫丞)이 되었다. 황제가 그를 기이하게 여겨서, 시험 삼아 예쁜 손을 가진 남성 폐신(嬖臣)과 여자들을 휘장 안에서 뒤섞여 있게 한 후, 곽옥에게 각자의 손 하나씩만 진맥하여 아픈 곳을 진단하게 하였다. 곽옥이 말하기를 “왼쪽은 음(陰 여성)이고 오른쪽은 양(陽 남성)에 해당하는데, 맥(脈)에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나타나서 보통 신하들과는 다르니, 그 까닭이 의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감탄하면서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의완(醫緩 고완(高緩),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진(秦)나라 사람이다. 성(姓)은 고(高)이며 이름은 완(緩)이다. 진(晉)나라 경공(景公)이 질병에 걸려 의완에게 치료를 요청하였다. 의완이 도착하기 전에 꿈속에서 두 아이를 보았는데 그 아이들이 말하기를, “나는 명치〔肓〕 위에 있을 테니, 너는 고(膏) 아래에 머물러라.”라고 하였다. 의완이 도착하여 말하기를, “질병이 고황(膏肓)에 들었으니 약으로 치료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의화(醫和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진(秦)나라 사람이다. 그 성(姓)은 알 수 없다.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질병에 걸려 의화에게 진찰하게 하였는데, 의화는 그가 여자를 가까이 한 탓에 몸속에 열이 쌓여 고질(蠱疾)이 되었고 치료할 수 없음을 알았다.
문지(文摯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전국시대(戰國時代) 송(宋)나라의 뛰어난 의원이다. 의도(醫道)에 아주 밝았을 뿐만 아니라 이술(異術)도 겸했는데, 사람들의 등〔背〕을 꿰뚫어보고 사람들의 심장〔心竅〕도 알 수가 있었다.
화타(華陀 중국 후한(後漢) 시기, ?~208)
자(字)는 원화(元化)이고, 한(漢)나라 말기 폐국(沛國) 초(譙)의 사람이다.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경(五經)과 양성술(養性術)에 통달했으며 의술〔方脉〕에 정통하고 도인술(導引術)을 잘했다. 일찍이 몸속이 불편하자 일어나서 오금희(五禽戱)를 펼쳤는데, 약간 땀이 나면서 나았다. 나이 100세에도 정정한 모습이어서 사람들이 신선이라고 하였다. 병을 치료할 때는 탕제를 만들어도 약재 몇 종류 이상을 쓰지 않았고, 약제 구성〔分劑〕을 깊이 이해하여 약제 분량을 다시 반복하지 않고 잘 달여 곧바로 마시면 되었으며, 환자에게는 적절하게 설명했으므로 병이 떨어지면서 금방 나았다. 뜸을 놓을 때는 뜸자리가 1~2곳에 지나지 않았고 한 곳에 7~8장만 떠도 병이 이에 응해서 없어졌다. 침을 놓을 때 역시 1~2곳에 지나지 않았고 침을 꽂으면서 이르기를, “어느 곳 근처를 침 기운이 지날 테니, 그곳에 이르면 말하라.”라고 하고 환자가 “막 지났다.”라고 하면 곧바로 침을 뽑으니 병 또한 낫게 되었다. 병이 몸 안에서 뭉친 탓에 침ㆍ탕제로 치료할 수 없어서 수술〔刳割〕해야 하는 경우에는 곧 마비산(麻痺散)을 먹여서, 잠시 후에는 술 취하거나 죽은 것처럼 의식이 없게 만들었다. 이때 몸을 절개하여 병소(病所)를 찾았는데 병이 장(腸)에 있으면 곧바로 장을 잘라 씻어내고 배를 봉합하고 연고를 발랐다. 4~5일이면 나아서 고통이 없어졌고, 환자 역시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며 1달이면 완전히 회복했다.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감릉부인(甘陵夫人)이 임신 6개월에 복통이 있으면서 불편했다. 공(公 화타)을 부르니, 진찰하여 말하기를 ‘태아가 이미 죽었다. 사람을 시켜 태아 위치를 손으로 만져 보게 해서, 태아가 오른쪽에 있으면 딸이고 왼쪽에 있으면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만져 본 사람이 말하기를 ‘왼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탕제를 만들어 배출을 시키니 과연 남자 아이 형상이었으며, 환자는 나았다.”라고 하였다. 또 어느 군수(郡守)의 위중한 병을 치료할 때였다. 화타는 환자에게 심한 분노를 일으키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로부터 보수를 많이 받은 다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떠나면서 글을 남겨 군수를 꾸짖었다. 화가 난 군수는 검은 피 몇 말을 토하고 나았다. 어떤 사람의 뱃속 통증을 치료할 때였다. 환자는 10여 년 동안 귀밑털이 모두 빠질 지경이었다. 공(公 화타)이 진찰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비장〔脾〕이 절반이나 썩었기 때문인데 배를 수술해야 나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병자로 하여금 약을 먹고 편안히 눕도록 한 뒤 칼로 배를 절개하니 병자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 비장〔脾〕을 살펴보니 과연 반이나 썩어있어서 칼로 악육(惡肉)을 도려낸 다음 연고를 바르고 다시 약으로 감싸니 며칠 만에 즉각 나았다. 위(魏)나라 태조(太祖)가 듣고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였다. 공(公 화타)을 불러 항상 곁에 두었다. 태조가 하루는 두풍(頭風)에 시달렸는데, 발작할 때마다 심란(心亂)하거나 현기증이 났다. 태조의 횡격막에 침을 놓으니 그 질병이 침을 놓지 마자 나았다. 나중에 공을 불렀는데 가지 않자 결국 태조에게 해를 입었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후 명의(名醫)들이 더욱 많아졌는데, 장기(張機)ㆍ화타(華陀)의 무리들이 비로소 고학(古學)을 근간으로 삼고 신설(新說)을 덧붙여, 365종의 약품에 관한 책을 편찬했으니 《신농본경(神農本經)》ㆍ《화타내조(華陀內照)》라고 불렀다. 그 제자인 오보(吳普)는 《한온오미본초(寒溫五味本草)》 1권을 편찬하였고, 이당지(李當之)는 《신농본경(神農本經)》을 수정하였다.
기붕(紀朋 중국 당(唐)나라 시기, 8세기)
사람들의 얼굴빛과 말하고 웃는 모습을 살펴, 진맥하지 않고도 병의 위중함을 알았다. 현종(玄宗)이 듣고서 그를 궁중〔掖庭〕으로 불렀다. 어떤 궁인(宮人)을 보았는데, 매일 해질녁이면 웃으며 노래 부르거나 소리 지르는 모습이 마치 미친 듯하고, 발로는 땅을 딛지 못하였다. 기붕이 보고 말하기를, “이 증상은 반드시 배가 부른 상태에서 힘을 크게 쓰다가 땅에 넘어져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운모탕(雲母湯 운모(雲母)를 달인 것)을 먹이고 푹 자게 하였더니, 잠에서 깨어나자 아픈 곳이 없어졌다. 병에 걸린 까닭을 물으니, 그 궁인이 말하기를, “태화공주(太華公主)가 탄생한 것으로 인해 궁궐에서 잔치를 크게 벌였을 때, 저는 노래를 맡았는데 목소리가 맑고 길게 나오지 않을까 걱정되어 돈제갱(㹠蹄羹 돼지 발톱을 우린 국)을 마시고 배부른 상태에서 잔치에 나아가 대곡(大曲)을 불렀습니다. 대곡이 끝나자 가슴 속에서 심한 열이 느껴져서 체대(砌臺) 위에서 바람을 쐬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시간이 지나서 정신이 들자 광증이 나타나고 발로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범구사(范九思 중국 송(宋)나라 시기)
의술에 종사했으며 침(鍼)을 잘 놓았다. 옛날에 어느 어머니가 목구멍에 유아〔蛾〕가 생겼는데, 탕제만 복용하려고 하지 침(針)은 맞으려 하지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범구사가 말하기를, “나에게 어떤 약이 있는데 새 붓에 묻혀 인후에 바르기만 하면 된다.”라고 하였다. 몰래 피침(鈹針 외과 처치에 사용되는 칼)을 붓 끝 속에 숨겨 인후를 찌르니 유아가 터지면서 피가 나고 곧바로 나았다. 의술〔醫〕이란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법개(于法開 중국 동진(東晉) 시기)
의술에 밝았다. 난산을 치료하는데 양고기 10여련(臠 덩어리)을 먹게 하고 침을 놓으니, 잠시 후 아이가 양 기름에 쌓여 밖으로 나왔다.
임도(任度 중국 송(宋)나라 시기)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노련(老鍊)한 의원이었다. 어떤 환자가 배고파서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가슴까지 내려가다가 곧 토하였다. 의원들이 열질(噎疾 기(氣)가 막혀서 통하지 않는 질병)ㆍ격기(膈氣)라고 진단하고 치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임도가 보고 말하기를, “아니다. 이 질환은 대체로 뱀고기를 먹었는데 소화가 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단지 배 위만 만져 봐도 뱀의 형상이 있다.”라고 하였다. 병자가 말하기를, “평소에 대풍(大風)이 있어서 일찍이 뱀고기를 구해서 먹으니 대풍은 조금 나았지만, 이번에는 이 질병에 걸렸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풍화초와 포황〔硝黃〕을 합해서 치료하니 조금 설사하고 나았다. 의원들이 모두 이 경험을 기록하면서 사하(蛇瘕)라는 질병을 알게 되었다.
막군석(莫君錫 중국 수(隋)나라 시기)
대업(大業) 연간(605~617) 중에 의승(醫丞)이 되었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여색을 좋아하여 단약(丹藥)을 복용하고 몸이 번조(煩燥 가슴에서 열이 나면서 답답한 증상)해졌는데, 약제를 진상하여 치료하였다. 또한 얼음 대야〔冰盤〕를 황제 앞에 두어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도록 하였으니 이 역시 번조(煩燥)를 다스리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장묘(張苗 중국 진(晉)나라 시기)
어느 지역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의술을 아주 좋아하였는데, 땅에 펼쳐둔 잎을 태워 그 열기로 땀을 내도록 하는 것이 그의 치료법이었다.
당신미(唐愼微 중국 송(宋)나라 시기, 1056~1093)
자(字)는 심원(審元)이고, 촉(蜀)의 화양(華陽) 사람이다. 외모는 비루하고 말은 어눌하였지만 핵심을 찔렀고 아주 명민하였다. 질병을 치료할 때는 백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비용본초(備用本草)》와 《경사증류(經史症類)》를 지었다.
왕숙화(王叔和 중국 서진(西晉) 시기, 3세기)
서진(西晉)의 고평(高平) 사람인데, 태의령(太醫令)이 되었다. 성격과 도량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경사(經史 유학(儒學)과 역사학)에 두루 능통하였고, 의도(醫道)를 면밀히 연구하고 수양법(修養法)도 잘 알았다. 기백(岐伯)과 화타(華陀) 등의 책을 모아 《맥경(脉經)》과 《맥결(脉訣)》을 만들었는데, 중경(仲景 장기(張機))의 《상한방론(傷寒方論)》에 버금갔다. 결국 그 기백과 화타의 원래 책이 세상에서 유통되지 않게 되었으므로, 후대 사람들의 비판을 면하지 못하였다.
마사명(馬嗣明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제(南齊)의 하내(河內) 야왕(野王) 사람이다. 진맥을 잘하였으며, 1년 전에 사생(死生)의 여부를 알 정도였다. 마사명이 침이나 뜸을 놓는 자리〔孔穴〕는 명당도(明堂圖)와 달랐으며, 의술〔藝術〕이 아주 신묘하여, 당시의 명의(明醫)들이 모두 하찮게 되어버렸다. ○등에 난 옹종(癰腫)을 치료할 때는 돌을 구워서 바르면 곧 나았다. 그 치료법은 거위알이나 오리알처럼 생긴 거친 황색 돌을 뜨거운 불에 붉게 되도록 구운 후, 순초(醇醋)에 넣어 돌가루가 저절로 순초 속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 돌이 완전히 없어지도록 달궈서 그 돌가루를 말려 가루로 만든 후 순초와 섞어서 옹종 위에 바르는 것이니, 효과가 없던 적이 없었다.
요승탄(姚僧坦 요승원(姚僧垣)이라고도 함,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자(字)는 법위(法衛)이고, 후주(後周)의 오흥(吳興) 무강(武康) 사람이다. 양(梁)나라에서 벼슬에 올라 태의정(太醫政)이 되었으며, 위(魏)ㆍ주(周)ㆍ수(隋)나라를 거쳐 북강군공(北絳郡公)에 봉작되었고, 나이 85세에 죽었다. 본관(本官 원래 관직)에 더해 형주(荊州)와 호주(湖州) 등 세 주의 자사(刺史)로 추증되었다. 선생(先生)의 의술은 높고도 신묘하여, 여러 번방과 외역(外域 세상 밖의 지역)에서 모두 그에게 치료를 부탁할 정도였다. 《집험방(集驗方)》 12권을 썼고, 《행기(行記)》 3권을 편찬하였다. 그의 큰아들 요찰(姚察)은 《남사(南史)》에 별도의 열전이 있다.
요최(姚最 중국 수(隋)나라 시기, 537~603)
자(字)는 사회(士會)이며, 요승탄(姚僧坦)의 둘째 아들이다. 경사(經史 유학(儒學)과 역사학)에 두루 능통하였고, 관직은 학사(學士)였다. 천자(天子)가 그에게 가업을 익히도록 명하니, 10여 년 만에 그 신묘함을 대강은 터득하여서 치료 효과가 아주 많았다.
이수(李脩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북위(北魏) 시기, 6세기)
자(字)는 사조(思祖)이며, 원래 양평군(阳平郡)의 관도(舘陶) 사람이다. 승려〔沙門〕 요승탄(姚僧坦)의 침구술(鍼灸術 침과 뜸으로 병을 고치는 의술)을 계승했다. 《약방(藥方)》 100권을 편찬했으며 관직은 태의령(太醫令)이고,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추증되었다.
소원방(巢元方 중국 수(隋)나라 시기)
수(隋)나라 사람이다. 대업(大業) 연간(605~617) 중에 태의령(太醫令)이 되었다.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病源〕 50권을 편찬하였는데 모든 것에 병론(病論)이 있었지만, 풍기(風氣)와 한기(寒氣)의 두 기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고, 습기(濕氣)와 열기(熱氣)의 설명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후대 사람들의 비판〔遺議〕을 면하지 못하였다. 풍역(風逆)으로 앉거나 일어설 수 없는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반년 된 새끼 양을 죽여서 그 오줌보〔腔〕를 꺼내, 약재 가루와 섞었다. 약재 가루를 다 먹였더니 병이 나았다.
위신(韋訊 중국 당(唐)나라 시기, 644~741?)
호(號)는 자장(慈藏)이다. 당(唐)나라 사람들이 의원 중의 성인(聖人)으로 모두 추앙하였다. 현재도 의원들〔醫家〕 가운데 그의 초상을 그려서 제사지내는 이가 많다.
원주(元珠 중국 당(唐)나라 시기)
선생(先生)은 왕빙(王冰)의 스승으로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素問〕에 아주 밝았다.
왕빙(王冰 중국 당(唐)나라 시기)
호(號)는 계현자(啓玄子)이고, 당(唐)나라 보응(寶應) 연간(762~763)에 태복령(太僕令)이 되었다.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素問〕에 주석을 달았으며, 《현주밀어(玄珠密語)》를 썼다. 그 주된 논지〔大要〕는 대체로 오운육기(五運六氣)와 황극경세(皇極經世)를 논한 것인데, 주석에는 그의 견해가 실려 있다.
진무택(陳無擇 진언(陳言)의 호, 중국 송(宋)나라 시기)
송(宋)나라 사람이다. 《삼인방(三因方)》을 저술했다.
장정(張鼎 중국 당(唐)나라 시기)
맹선(孟詵)의 《식료본초(食療本草)》를 보완하였다.
장문중(張文仲 중국 당(唐)나라 시기, 7세기)
당(唐)나라의 낙주(洛州) 낙양(洛陽) 사람이다. 젊어서는 이건(李虔)ㆍ위신(韋訊)과 함께 의술로 이름을 날렸으며, 측천무후 때〔天時〕 시어의(侍御醫)가 되었다. 특진(特進) 소양사(蘇良嗣)가 막 조회를 하려할 때 병이 나서 조정(朝廷)에서 넘어졌다. 공(公 장문중)이 진찰하고 말하기를, “걱정 분노로 인해 생겼다. 옆구리에 통증이 있다면 아마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소양사가 옆구리 통증을 호소하니, 장문중이 또 말하기를, “질병이 심(心)에까지 도달하면 위태롭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 소양사는 심통(心痛)이 있더니 죽었다. 공(公 장문중)은 풍병(風病)과 기병(氣病)에 특별히 정통하였다. 장문중은 말하기를 “특히 풍(風)의 124가지 증상과 기(氣)의 80가지 증상을 적절한 때에 치료하지 못하면 죽게 된다. 다만 두풍(頭風)과 족기(足氣)는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 풍(風)을 앓는 사람은 음력 3월과 9월에 통리(洞利 설사) 시켜서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되면, 그 나머지는 모름지기 적절하게 치료하여 가라앉힌다.”라고 하였다. 이에 총 18종을 다루고 있는 《사시경중술(四時輕重術)》과 《수신비급방(隨身備急方)》 3권을 저술하였다.
소병(蕭炳 중국 오대시대(五代時代), 10세기)
당(唐)나라 난릉(蘭陵)의 처사(處士)로서, 《사성본초(四聲本草)》를 편찬하였다.
진사량(陳士良 중국 오대시대(五代時代), 10세기)
후당(後唐)〔僞唐〕의 배융부위(陪戎副尉) 검남의학조교(劒南醫學助敎)였다. 여러 의학자들의 본초학(本草學)을 취합하여 음식과 관련 있는 것을 분류하면서, 장부(臟腑)를 조양(調養)하는 방법을 부연하였다. 그 책을 《식성본초(食性本草)》라고 하였다.
양손지(楊損之 중국 당(唐)나라 시기, 8세기)
당(唐)나라 개원(開元) 연간(713~741) 이후 사람이다. 윤주의박사(潤州醫博士) 겸 절도(節度)로 종군(從軍)〔隨軍〕하였다. 《산번본초(刪繁本草)》를 편찬하였다.
우지녕(于志寧 중국 당(唐)나라 시기, 581~659?)
자(字)는 중밀(仲謐)이며, 경조(京兆) 사람이다. 당(唐)나라 영휘(永徽) 연간(650~655)에 태부(太傅)로 자리를 옮겼다. 이적(李勣)과 함께 《본초(本草)》를 수정(脩定)하고 그림을 덧붙였는데 모두 54편(篇)이었다. 그 책이 크게 유행하였다.
감백종(甘伯宗 중국 당(唐)나라 시기)
《역대명의성씨(歷代明醫姓氏)》를 편찬하였는데, 복희씨(伏羲氏)로부터 감백종이 살았던 당(唐)나라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총 120명이다. 《철경록(輟耕錄)》에 나온다.
손조(孫兆 중국 송(宋)나라 시기, 11세기)
송(宋)나라 때의 사람으로, 관직은 전중승(殿中丞) 상약봉어(尙藥奉御) 태의령(太醫令)이다. 손용화(孫用和)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의술로 이름이 알려졌다. 치평(治平) 연간(1064~1067)에 어느 현관(顯官)이 건물〔堂〕에 앉아 있다가 홀연히 이명(耳鳴)에 걸린 것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손조)이 진찰하고 말하기를 “심맥(心脈)이 크게 성하여 신맥(腎脈)이 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약으로 심(心)을 차갑게 하니 신맥이 원래대로 돌아가면서 이명이 곧 나았다.
왕찬(王纂 중국 송(宋)나라 시기)
송(宋)나라 해릉(海陵) 사람이다. 젊어서 의경(醫經)과 방서(方書)를 익혔으며, 침술〔鍼石〕에는 더욱 뛰어났다. 어떤 여자가 매일 밤마다 수달〔獺〕의 정액〔精〕을 받아서 수달을 자기 남편으로 받아들여 미혹된 것을 치료할 때였다. 귀혈(鬼穴)에 한번 침을 놓자 수달이 귀혈로부터 빠져나갔다.
방시(龐時 방안시(龐安時), 중국 송(宋)나라 시기, 1042?~1099)
자(字)는 안상(安常)이며, 송(宋)나라 기수(蘄水) 사람이다. 대대로 의료에 종사하였으나 아버지가 준 《맥결(脉訣)》로는 부족하다고 여겨서, 혼자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과 《난경(難經)》을 구해서 그 이론에 정통해졌고, 시의에 맞춰 새로운 의견을 냈으며, 《난경》을 주석하고 설명하는 수만(數萬) 글자를 썼다. 《본초보유(本草補遺)》를 지어서 중경(仲景 장기(張機))의 이론을 보완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화타(華陀)의 의술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역사가의 망녕된 서술이 아닐까?”라고 하였다. ○난산(難産)을 치료할 때였다. 손으로 배 위를 만져 태아 손이 있는 곳을 더듬어 태아의 호구혈〔虎口〕에 침을 놓으니, 태아가 곧바로 통증을 느끼고 손을 움츠리면서 산모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부잣집 아이가 달리다가 사형당한 시체에 넘어지는 바람에 크게 놀라서 미친 것〔發狂〕을 치료할 때였다. 이때 사형수의 목을 맸던 줄을 구한 다음, 그것을 태운 재를 술에 타서 복용시키니 나았다.
주굉(朱肱 중국 송(宋)나라 시기, 1068~1165)
호(號)는 무구자(無求子)이며, 송(宋)나라 오흥(吳興) 사람이다. 상한(傷寒)에 조예가 깊었으며 《활인서(活人書)》를 저술하였다. 휘종(徽宗)〔道君〕대에 궁궐에 나와 《활인서(活人書)》를 바치니, 봉의랑(奉議郞) 의학박사(醫學博士)를 제수받았다. 남양(南陽)에 있을 때는 남양태수가 질병에 걸렸는데, 다른 의원이 소시호(小柴胡)를 가루 내어 3번 연달아 환자에게 주니 그 가슴이 부풀었다. 공(公 주굉)이 말하기를, “소시호를 달여서 맑은 즙을 복용하면 그 약효가 경락(經絡)에 들어가서 질병을 공격하여 개운해지게 된다. 지금은 도리어 가루 내는 바람에 가슴에 체증이 생겼으니,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이 타당한 치료인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시호 2제(劑)를 달여서 환자에게 주니 단번에 편안해졌다.
오정소(吳廷紹 중국 송(宋)나라 시기)
오정소가 태의령(太醫令)이었을 때, 열조(烈祖)가 엿을 먹다가 목이 메였는데 의원들 누구도 치료할 수 없었다. 공(公 오정소)이 저실탕(楮實湯)을 드리니 나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목이 멘 것은 단 음식으로 말미암아 생겼으므로 저실탕으로 치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희(許希 중국 송(宋)나라 시기, 11세기)
개봉(開封) 사람이다. 의술을 직업으로 삼았다. 송(宋)나라 경우(景祐) 원년(1034) 인종(仁宗)의 몸이 불편할 때 공(公 허희)이 심포락(心胞絡) 사이에 침을 놓아 낫자, 한림의관(翰林醫官)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신응침경요결(神應針經要訣)》을 저술하였다.
조자화(趙自化 중국 송(宋)나라 시기, 949~1005)
송(宋)나라 덕주(德州) 평원(平原) 사람이다. 고조(高祖) 할아버지가 일찍이 경주자사(景州刺史)가 되었는데, 나중에 온 가족이 거란(契丹)의 수중에 떨어졌다. 아버지 조지암(趙知嵓)이 거란의 수중에서 빠져나와 남쪽으로 돌아가 낙양(洛陽)에서 살았다. 의서〔經方〕에 실린 명약(名藥)의 치료술을 익혔다. 관직은 한림의학(翰林醫學)이었으며, 《사시양이록(四時養頤錄)》 과 《명의현질전(名醫顯帙傳)》 3권을 편찬하였다.
진문중(陳文仲 중국 송(宋)나라 시기, 13세기)
자(字)는 문수(文秀)이며, 송(宋)나라 숙주(宿州) 사람이다. 안화랑 판태의국 겸한림양의(安和郞判太醫局兼翰林良醫)가 되었다. 대소방맥(大小方脈)에 밝았고 어린이 진두(疹痘 홍역과 천연두 등의 질병)에서는 그 신묘함이 더욱 정교했다. 순우(淳祐) 연간(1241~1252) 중에 보안 한림의정(保安翰林醫正)인 정혜경(鄭惠卿)과 함께 《활유신서(活幼新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소아병원방론(小兒病原方論)》 1권을 저술하였다.
송도방(宋道方 중국 송(宋)나라 시기, 12세기)
자(字)는 의숙(毅叔)이고, 송(宋)나라 남경(南京) 사람이다. 의술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왕진 요청에는 달려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병자가 부축을 받아 그에게 와서 진맥을 요청하였다. 정화(政和) 연간(1111~1118) 중에 어느 태수(太守) 어머니의 병이 고황(膏肓)에 들었다. 좋은 약으로 병을 늦출 수 있었지만 10일 만에 죽었다.
승 지연(僧智緣 승려 지연, 중국 송(宋)나라 시기, 11세기)
수주(隨州) 사람으로 《황제내경태소(黃帝內經太素)》〔太素〕에 뛰어났다. 아버지를 진맥하면 그 아들의 길흉을 말할 수 있었다. 왕안석(王安石)이 그를 신뢰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진(秦)나라의 의화(醫和)는 진후(晉侯)를 진맥할 때 그 진후의 훌륭한 신하가 장차 죽을 것을 알았다. 지금 아버지를 본 것으로 자식을 알아챈다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황보원(皇甫垣 중국 송(宋)나라 시기, 12세기)
촉(蜀)의 협강(夾江) 사람이다. 눈병〔目疾〕을 잘 고쳤으므로, 송(宋)나라의 고종(高宗)과 효종(孝宗)이 모두 황보선생(皇甫先生)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고종에게 진언하기를, “마음이 무위(無爲)여야 몸이 편안하고, 인주(人主 군주)가 무위여야 천하가 편안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진언하기를, “장생(長生)하는 방법은 먼저 많은 욕심을 금하고 멋대로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경(丹經 장생과 신선 되기를 추구하는 단학(丹學) 즉 도교의학(道敎醫學)의 책) 만권(卷)이 자기 마음 하나를 지키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왕극명(王克明 중국 송(宋)나라 시기, 1069~1135)
자(字)는 언소(彦昭)이며, 요주(饒州) 악평(樂平) 사람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젖이 부족하여 죽을 먹였는데, 비질(脾疾)에 걸렸고, 성장할수록 심해졌다. 의원이 치료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그가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과 《난경(難經)》을 읽은 후 그 의서의 본의(本意)를 마음에 새겨 약을 쓰니 나았다. 침과 뜸〔針灸〕 치료술은 더욱 정통했다. 치료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반드시 심사숙고하여 그 핵심을 짚어 약을 썼다. 질병이 여러 증상이 있더라도 한 가지 약만을 써서 질병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였다. 또한 약을 쓰지 않고서도 “어느 날이 되면 저절로 나을 것이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한의관(內翰醫官)에 임명되었다.
장예(張銳 중국 송(宋)나라 시기, 12세기)
자(字)는 자강(子剛)이며, 송(宋)나라 정주(鄭州) 사람이다. 관직으로는 성주단련사(成州團鍊使)가 되었는데, 의술로 이름이 알려졌다. 정화(政和) 연간(1111~1118) 중에 상한(傷寒)으로 이미 사망 상태에 이르렀고 하루 밤낮이 지난 후에도 얼굴이 붉은 경우를 치료할 때였다. 약을 환자 입에 흘려보낸 후, 아침 일찍 눈 대변과 소변을 이어서 먹이니 환자가 살아났다. 평위산(平胃散) 1첩을 먹였더니 마침내 나았다. 어떤 산모가 크게 설사를 하면서 동시에 목구멍이 막힌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부자이중환(附子理中丸)을 자설(紫雪 처방 이름)로 싸서 한 번 복용시키니, 두 가지 질병이 모두 나았다.
학윤(郝允 중국 송(宋)나라 시기)
송(宋)나라 박릉(博陵) 사람이다. 이인(異人)에게서 의술을 전수받았는데, 세상에서는 신의(神醫)라고 불렀다. 어떤 부인이 밤에 구금(口噤 입이 꽉 다물어져 벌릴 수 없는 증상)으로 죽은 듯했다. 공(公 학윤)이 말하기를, “혈맥(血脈)이 막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약을 쓰지 않고,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도록 기다리자 저절로 나았다. 또 두 부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한 명의 부인이 마구 달리다가 곧바로 넘어졌다.〔一行踸踔輒踣.〕 공(公 학윤)이 말하기를, “맥궐(脈厥)이다. 마땅히 근육을 치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약으로 근육을 찜질하니 자연히 나았다. 어느 임산부는 아주 장건(壯健 씩씩하고 강건함)하였다. 공(公 학윤)이 진찰하고 말하기를, “산모의 기운은 이미 죽었으니, 장건한 것은 태아의 기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출산할 때가 되자 태아는 살고 산모는 죽었다.
왕황(王貺 중국 송(宋)나라 시기)
자(字)는 자형(子亨)이다. 원래는 사대부〔士人〕였는데, 송도방(宋道方)의 사위이므로 송도방의 의술을 완전히 전승하였다. 나중에는 의술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선화(宣和) 연간(1119~1125) 중에 조청대부(朝請大夫)가 되었다. 《전생지미론(全生指迷論)》을 저술하였다. ○어떤 소금 상인이 크게 놀라서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온 채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는데, 10일이 지나도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서 날이 갈수록 심하게 초췌해졌다. 공(公 왕황)이 혀 아랫부분에 침을 놓은 다음 침을 잡아당기자, 그 사람이 움찔하면서 곧바로 혀가 예전처럼 입 안으로 들어갔다.
송(宋)나라 태종(太宗)
여러 태의(太醫)에게 《성혜방(聖惠方)》과 《성제총록(聖濟總錄)》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양개(楊介 중국 송(宋)나라 시기, 12세기)
자(字)는 길로(吉老)이고, 사주(泗州) 사람이다. 의술로 사방(四方)에 이름이 알려졌다. 저서로 《존진도(存眞圖)》가 있다. ○휘종〔徽廟〕이 얼음을 먹고 비질(脾疾)로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의원들이 이중탕(理中湯)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공(公 양개)이 얼음을 달여서 복용시키니 곧바로 나았다. 광주부판(廣州府判) 양립지(楊立之)가 목에 난 악창〔癰〕으로 농혈(膿血)이 물처럼 흐르고 침식(寢食)을 완전히 폐한 지경에 이른 것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양개)이 생강(生薑) 한 쪽으로 그 단맛〔甘香〕을 맛보게 하였는데, 생강 반 근(斤)을 복용시키자 아픈 곳이 누그러졌다. 1근을 복용시키자 비로소 생강의 매운 맛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농혈이 돌연 멈추고 음식을 먹어도 체하지 않았다. 대체로 그는 남방(南方)에 거주한 탓에 자고(鷓鴣 메추라기처럼 생겼지만 메추라기보다는 큰 꿩과의 새)와 죽계(竹鷄 자고새와 비슷하지만 약간 작은 새)를 많이 먹었다. 이 두 짐승은 반하(半夏) 먹기를 좋아하므로 오래되면 반하의 독이 사람 몸에 나타나기 때문에, 생강〔薑〕으로 약을 만든 것이었다.
손림(孫琳 중국 송(宋)나라 시기, 12세기)
노검(路鈐 지방행정조직인 노(路)의 무관(武官))으로 본전(本殿)의 전사(前司)였다. 소아를 잘 돌보고 치료를 잘하였다. 송(宋)나라 영종(寧宗)이 군왕(郡王)이었을 때 임질〔淋〕을 앓아서 하루 밤낮 동안에 300번을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변을 볼 정도였다. 손림이 마침내 묽은 두시(豆豉)ㆍ대산(大蒜)ㆍ떡〔蒸餠〕 세 가지를 곱게 갈아서 환(丸)을 만들어 따뜻한 물에 30환씩 복용하도록 하되, 이렇게 하루에 세 번을 약을 올리니 3일 만에 나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공(公 손림)이 말하기를, “어린이에게 어떻게 임질 증상이 생기겠는가? 이것은 수도(水道 수액(水液)이 흐르는 통로)가 잘 통하지 않은 것이다. 대산과 두시는 모두 잘 배설시키는 약재이니, 별다른 기교는 없다.”라고 하였다.
유원빈(劉元賓 중국 송(宋)나라 시기, 11세기)
호(號)는 통진자(通眞子)로 송(宋)나라 사람이다. 《맥결(脉訣)》을 저술했다.
정약(程約 중국 송(宋)나라 시기)
자(字)는 맹박(孟博)이고, 송(宋)나라 무원(婺源) 사람이다. 대대로 의술이 정교했는데, 특히 침법(鍼法)에 정통했다. 《의방도설(醫方圖說)》을 저술했다.
장제(張濟 중국 송(宋)나라 시기)
무위(無爲)의 군인(軍人)이었다. 침(鍼)을 아주 잘 놓았다. 어떤 임산부가 땅에 넘어지는 바람에 배가 왼쪽으로 쏠린 것을 치료할 때였다. 임산부의 오른손 손가락에 침을 놓자 임산부의 배가 바로잡혔다. 탈항(脫肛)에는 머리 정수리 한가운데에 침을 놓자 항문이 위로 들어갔다. 상한(傷寒)으로 인한 반위(反胃)와 구역(嘔逆)으로 여러 날 식사를 못할 때는 눈초리에 침을 놓자 곧바로 식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무릇 초목(草木)과 금석(金石)으로 된 약재에 대해 모두 신맛〔酸〕, 짠맛〔醎〕, 싱거운 맛〔淡〕, 단맛〔甘〕, 매운 맛〔辛〕 등의 오미(五味)〔味〕를 감별하였다.
당여정(唐與正 중국 송(宋)나라 시기)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열주(熱酒 뜨거운 술)를 마신 탓에 정수리가 몇 치〔寸〕나 솟구친 것을 치료할 때였다. 갈화(葛花 칡꽃)를 배(倍)로 늘려 복용시키니 저절로 나았다. 흑석단(黑錫丹)을 복용한 이후에, 누워서는 소변이 조금씩 나오지만 서서는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배설시키는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해도 효과가 없었다. 공(公 당여정)이 진찰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결사(結砂)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납〔鉛〕이 불사약(不死藥)이라고 하여 유황(硫黃)에서 납을 뽑아내어〔飛去〕 다량으로 복용하였다. 납이 방광에 들어갔을 때 누워서는 납이 한쪽으로 치우치므로 소변을 눌 수 있지만, 서서는 수도(水道)를 꼭 막으므로 소변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금액단(金液丹) 300환을 10회 복용 분량으로 나누고 구맥탕(瞿麥湯)에 달여서 복용시켰다. 대체로 방광에 금액단의 유황이 들어가면 쌓인 납이 재처럼 되어 수도를 따라 배출되는데, 잔모래처럼 줄줄이 흘러나오면서 그 병이 곧 낫게 되는 것이다.
반경(潘璟 중국 원(元)나라 시기)
자(字)는 온수(溫叟)이며, 명의(名醫)이다. 어떤 부인이 5년 동안 임신하고, 다른 부인은 14개월 동안 임신하였지만 모두 출산하지 못한 것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반경)이 보고 말하기를, “질병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제(大劑)를 만들어 마시게 하니, 5년 동안 임신했던 부인은 눈썹과 눈동자처럼 생긴 고깃덩이 100여 개를 배설하고, 14개월 동안 임신했던 부인은 큰 뱀 같은 것〔大蛇〕을 배설하고 나았다.
유종주(劉從周 시기 미상)
소주(韶州) 곡강(曲江) 사람이다. 의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견해가 있어서 10편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질(痢疾)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손발이 따뜻한 것은 열리(熱痢)이고, 궐랭(厥冷)한 것은 한리(寒痢)이다. 한여름에 발열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모서(冒暑 더위병)이고, 한결같이 열이 나면서 식지 않는 것은 상한(傷寒)이다.’라고 하였으니, 아주 타당한 말이다.
승 봉진(僧奉眞 승려 봉진, 중국 송(宋)나라 시기, 11세기)
사명(四明) 사람으로 훌륭한 의원이다.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인 허원(許元)이 강회발운사(江淮發運使)가 되어 경사(京師 개봉(開封))로 물자를 바치고 궐에 들어가서 황제(신종(神宗))를 뵈려고 하였는데, 자식의 병이 빨리 낫지 않는 상태였다. 허원이 공(公 봉진)에게 며칠이라도 자식의 생명을 늘려달라고 강청하였다. 공(公 봉진)이 말하기를, “여러 장부(臟腑)가 모두 쇠하였으며 간장(肝臟)만 괜찮은 상태입니다. 비장(脾臟)은 간장의 통제를 받는 것이니, 서둘러 간장을 사(瀉)하여 비장을 보(補)한다면 3일은 수명을 늘릴 수 있으나, 3일을 경과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순(周順 중국 송(宋)나라 시기)
파양(鄱陽) 사람이다. 의술에서는 만병치통〔十全〕의 재능이 있었다. 각약병(脚弱病 다리가 약해지는 병)에 걸린 어떤 사대부〔士人〕를 치료할 때였다. 산처럼 쌓인 약은 모두 치워버렸다. 그리고 삼나무로 부목〔桶〕을 만들어 발을 씻기고, 장뇌(樟腦 녹나무)를 양쪽 넓적다리 사이에 넣고, 베〔布〕로 묶어 고정하니 한 달여 만에 다리가 예전처럼 튼튼해졌다.
조만(趙巒 중국 명(明)나라 시기)
진양(晉陽)〔晉陽山〕 사람으로 병의 증후를 잘 살폈다. 어떤 사람이 물가를 따라 걸어가다가, 큰 두꺼비〔蝦蟆〕가 몇 자나 뛰어오르며 갑자기 소리를 내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다가 바로 오른쪽 옆구리에 통증을 느낀 것을 치료할 때였다. 옆구리 아래에서 나는 소리가 마치 두꺼비 소리 같았으며, 소리가 계속 나서 손으로 만지면 괜찮아졌는데, 그 맥(脈)은 오른쪽 관맥(關脈)이 복맥(伏脈)ㆍ결맥(結脈)이었다. 공(公 조만)은 설사약을 썼다. 설사한 것을 보니 두꺼비 껍질처럼 푸른 침〔涎〕이었으며, 마침내 나았다.
왕도(王燾 중국 당(唐)나라 시기, 670?~755?)
수(隋)나라 사람으로, 《외대비요(外臺秘要)》를 저술하였다.
석장용(石藏用 중국 송(宋)나라 시기)
촉(蜀) 사람이다. 어느 사대부〔士人〕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로 손을 씻다가 어떤 물체가 손톱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실이나 머리카락 같았는데 며칠이 지나자 점차 선(線)처럼 길어져서 손가락을 평상시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비로소 용(龍 지렁이〔土龍〕)이 몸속으로 숨어든 것을 깨달았다. 이에 공(公 석장용)에게 치료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의서〔方書〕에 수록된 것이 아니므로 이치를 따져 없애야 한다. 돌아가서 쇠똥구리〔蜣螂〕를 가루 내어 그 가루를 손가락에 바르면, 아마도 용(龍)이 가슴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아서 후일 불의의 근심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대부가 이 말대로 따랐다. 나중에 맹렬한 천둥에 번갯불이 나타나자 번쩍하는 빛이 사대부의 온몸을 비추었다. 사대부가 두려워하면서 급히 침으로 혈위(穴位 침자리)를 찌르자 손가락 속에서 과연 어떤 물체가 보였는데 그 물체가 혈위를 따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침내 더 이상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게 되었다.
조경(趙卿 중국 당(唐)나라 시기)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며, 훌륭한 의원이었다. 질병의 기미(機微)만 보고도 대비할 수 있었다. 일찍이 어떤 소년의 눈에 자그마한 거울 같은 것이 보였는데, 여러 의원들이 치료하지 못하였다. 공(公 조경)이 살펴보고 소년과 함께 다음날 새벽에 만나서 생선회로 식사하기로 약속하였다. 소년이 시간에 맞춰 도착하자 안으로 맞이한 다음, 차분하게 다른 손님들이 물러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서둘서 상〔臺〕을 마련하여 소년을 접대하면서, 그 상 위에는 개초(芥醋 겨자를 섞은 식초) 한 사발만 두고 다른 음식은 전혀 두지 않았다. 공(公 조경) 역시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 우중(禺中 오전 10시 경)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이르지 않으니, 소년은 심하게 배가 고프다가 잠깐 개초 향기를 맡자 홀짝 마실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면서 마시고 또 마시니, 가슴속이 뻥 뚫리고 안화(眼花 앞서 말한 거울 같은 것)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사발을 기울여 계속 마셨다. 그제서야 공이 방으로 들어가니, 소년이 개초를 마신 것을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예전에 회를 먹었을 적에 개초가 많이 있었으나 그대는 개초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생선 비늘이 가슴 속에 있어서 안화가 피어났던 것이어서, 여기에 개초를 준비한 것이다. 그대가 배가 고파서 개초를 마시도록 하고자 한 것이니, 생선회를 먹자는 이야기는 임시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임(杜任 중국 송(宋)나라 시기)
문양(汶陽) 사람이다. 치료를 잘했으며, 유과(幼科 소아과)에 더욱 정통하였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먼저 위(胃)를 따뜻하게 해서 음식을 먹도록 한 후 다른 질병을 치료하였다.
두 태사(竇太師 두걸(竇杰)의 원(元)나라 관직명, 중국 금원(金元) 시대)
이름은 한경(漢卿)이다. 금(金)나라의 합비(合肥) 사람으로 침술(針術)을 잘했다. 편찬한 책으로 《표유론(標由論)》이 있다.
성무기(成無己 중국 금(金)나라 시기, 12세기)
금(金)나라의 요섭(聊攝)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유의(儒醫 의학적 소양을 갖춘 유학자(儒學者))였으며, 10권짜리 《상한론(傷寒論)》 주석ㆍ《명리론(明理論)》 3권ㆍ《논방(論方)》 1권을 썼다.
장종정(張從正 중국 금(金)나라 시기, 1156?~1228?)
자(字)는 자화(子和)이며 금(金)나라의 저주(雎州) 고성(考城) 사람이다.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과 《난경(難經)》에 정통하였으며 유 하간(劉河間 유완소(劉完素))의 법통을 계승하였고, 《육문삼법(六門三法)》을 저술하였다.
나천익(羅天益 중국 원(元)나라 시기)
자(字)는 겸보(謙甫)이며, 동원선생(東垣先生 이고(李杲))의 뛰어난 제자이다. 원(元)나라의 진정(眞定) 사람이다. 《위생보감(衛生寶鑑)》ㆍ《약오영감(藥誤永鑑)》ㆍ《약류법상(藥類法象)》을 저술하였다.
오서(吳恕 중국 원(元)나라 시기)
자(字)는 여심(如心)이고 호(號)는 몽재(蒙齋)이다. 원(元)나라의 인화(仁和) 사람인데, 《상한지장도(傷寒指掌圖)》를 저술하였다.
직로고(直魯古 중국 요(遼)나라 시기)
토곡(吐谷)의 혼(渾) 사람이다. 애초에 요〔元〕나라 태조(太祖)가 토곡을 깨뜨렸을 때 그를 얻었다. 순흠황후(淳欽皇后)가 그를 거두어 길렀는데, 커서는 침과 뜸〔針灸〕 치료에 능했다. 관직은 태의(太醫)였으며, 《맥결침구서(脉訣針灸書)》를 편찬하였다.
위역림(危亦林 중국 원(元)나라 시기, 1277~1347)
호(號)는 달재(達齋)이다. 원(元)나라 때에 그 비조(鼻祖)가 무(撫)에서 남풍(南豐)으로 이주했다. 고조(高祖) 할아버지 위운선(危雲仙)은 동경(東京 요양(遼陽))에서 유학(遊學)하면서, 우연히 동봉(董奉)의 25세 후손으로부터 방맥(方脈)을 배웠다. 위운선에서 공(公 위역림)까지는 5대(代)인데, 위역림대에 이르러 학문은 더욱 갖춰지고 의술은 더욱 공교해져서 살린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관직은 본주(本州 남풍주(南豐州))의 의학교수(醫學敎授)였다. 무릇 10년 동안 노력하여 《세의득효방(世醫得効方)》 19권을 편찬하였다.
서문중(徐文中 중국 원(元)나라 시기)
자(字)는 용화(用和)이며 선주(宣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현의 이속〔縣吏〕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안륙부(安陸府)의 이속이 되고, 소흥로(紹興路)의 지사(知事)에 제수되었는데, 침과 뜸〔針灸〕 치료를 잘하였다.
왕 중광(王仲光 왕빈(王賓), 중광(仲光)은 왕빈의 자(字), 중국 명(明)나라 시기)
오군(吳郡) 사람이다. 뜻이 굳어서 벼슬길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볼품없게 여겨서, 평생 혼자 살면서 처자식이 없었다. 상투머리에 베옷 차림으로 저자거리를 떠돌면서 약을 팔아 생활하였다. 군수(郡守)가 만나려고 하였으나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 후일 군수가 격식을 차리지 않고 홀로 그의 집을 찾아왔다. 처음 대면할 때 왕중광은 좌석에 걸터앉아 절을 받고, 도(道)로써 군수를 가르치니, 마치 스승과 제자 같았다. 소사(少師) 요광효(姚廣孝)가 귀하게 되어 돌아가는 길에 찾아왔으나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갈응뢰(葛應雷 중국 원(元)나라 시기)
자(字)는 진보(震父)이며 오(吳) 사람이다. 의학을 공부하였고, 관직은 의학제거(醫學提擧)였으며, 《의학회동(醫學會同)》 20권을 저술하였다.
항흔(項昕 중국 원(元)나라 시기, 14세기)
자(字)는 언창(彦昌)이며 호(號)는 포일옹(抱一翁)이다. 원(元)나라의 동교(東敎) 사람이며, 대대로 의료에 종사하였다. 아직 어렸을 적에 기백(岐伯)의 책ㆍ편작(扁鵲)의 책ㆍ《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ㆍ《난경(難經)》ㆍ왕숙화(王叔和)의 《맥경(脈經)》을 암송했다. 점차 자라면서 역(易)을 배웠다. 어머니의 질병에 약을 잘못 쓰게 된 것을 계기로 더욱 의술에 뜻을 굳혔다. 월강(越江)의 대유(大儒) 한명선(韓明善)의 제자가 되었으며, 또한 절강(浙江)으로 가서 갈 가구(葛可久)를 뵙고, 유완소(劉完素)와 장종정(張從正)의 의학을 토론하였다. 태의원(太醫院)의 사(使)에 제수되었으며 안마(按摩)를 잘하였다. 《비위론(脾胃論)》을 써서 동원(東垣 이고(李杲))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였다. ○어떤 사람이 협통(脅痛 옆구리 통증)을 앓는 것을 치료할 때였다. 여러 의원들이 악창〔癰〕이라고 하여 여러 향(香 정향 등)들과 생강〔薑〕ㆍ육계〔桂〕 등을 투약하였지만, 더욱 심해져서 양맥(陽脈)은 현맥(弦脈)이고 음맥(陰脈)은 미맥(微脈)ㆍ색맥(濇脈)이었다. 공(公 항흔)이 말하기를 “현(弦)한 것은 통증이고, 색(濇)한 것은 신(腎)에서 사기(邪氣)가 넘치는 것이다. 신(腎)이 바로 위쪽에 위치한 옆구리의 압박을 받아서〔腎上薄於脅〕 배설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인데, 또한 신(腎)은 건조한 것〔燥〕을 싫어한다. 지금은 건조한 약〔燥藥〕을 너무 지나치게 복용하니, 빨리 배설 시키지 않으면 낫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먼저 신보환(神保丸)을 써서, 검은 소변〔黑溲〕을 배설시키니 통증이 그쳤으며, 다시 신궁환(神芎丸)을 복용시켰다. 어떤 사람이 약이 너무 지나치다고 의심했다. 공(公 항흔)이 말하기를 “처음에〔向〕 신보환을 쓴 것은, 신(腎)의 사기(邪氣)가 횡격막〔膜〕을 투과하는 데는 전갈(全蝎)이 아니면 인도(引導)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두(巴豆)는 약성이 뜨거우므로 초황탕(硝黃蕩 풍화초(風化硝)와 포황(蒲黃)을 달인 물)으로 세척하지 않으면 나중에 언젠가 열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몇 차례 크게 설사시키니 병이 나았다. 경(經)에 말하기를 “통증은 설사를 하면 줄어든다.〔痛隨利減.〕”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어떤 부인이 배가 북〔鼓〕처럼 부르고 온몸〔四體〕의 뼈가 돌출되었는데, 의원들은 임신하였다 하고, 고독(蠱毒)에 걸렸다 하고, 채병(瘵病)이라고도 하였다. 공(公 항흔)이 진찰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기운이 자궁을 공격한 것이다. 혈약(血藥)을 많이 복용하여 기의 운행〔順氣〕에 착오가 생긴 것이다. 경(經)에 말하기를 ‘기(氣)와 혈(血)은 함께 나온 것이되 이름이 다를 뿐이다.〔氣血同出, 而異名.〕’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혈(血)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기(氣)를 순조롭게 해서 경(經)의 경로〔經隧〕를 통하게 한 후에 혈(血)이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합향환(蘇合香丸)을 투약하니 3일 만에 요통(腰痛)이 일어났다. 공이 말하기를, “혈(血)이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급히 풍화초와 포황〔硝黃〕 같은 준제(峻劑 약성이 강한 약)로 공격하니, 오이만한 어혈(瘀血) 10여 매를 배설하고 나았다. 그 환자는 육맥(六脈)이 현맥(弦脈)ㆍ활맥(滑脈)이면서도 삭맥(數脈)이었는데, 현(弦)이란 기가 뭉친 것이고 활(滑)이란 혈이 엉긴 것으로 실사(實邪 사기(邪氣)가 왕성해져서 실(實)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기를 행하게 함으로써 크게 설사를 시키는 치료법을 항흔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어떤 여자가 질병은 동일한데 진단은 달랐다. 공(公 항흔)이 말하기를, “고칠 수 없다. 의당 몇 달 뒤면 죽을 것이다. 예전에 여자의 맥(脈)이 활맥(滑脈)이어서 실사(實邪)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맥이 허(虛)하니 원기(元氣)를 빼앗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여자의 질병 역시 동일하였는데 육맥(六脈)만은 현맥(弦脈)이었다. 공(公 항흔)이 말하기를 “진장맥(眞臟脈)이 보이니, 의당 한 달이 지나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에 두 사람 모두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여름철에 병이 심해졌는데 많은 의원들이 채병(瘵病)이라고 하였다. 공(公 항흔)이 그 맥(脈)을 짚었는데 세맥(細脈)ㆍ삭맥(數脈)이면서 실맥(實脈)이었다. 항흔이 말하기를 “세맥과 삭맥은 더위와 관련이 있다. 더위에 기(氣)를 상하면 마땅히 맥이 허(虛)해야 하는데 지금은 허하지 않고 반대로 실(實)하니, 바로 열(熱)이 혈(血)을 손상시킨 것이다. 약(藥)으로 치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환자에게 백호탕(白虎湯)을 주어 마시게 하니, 곧바로 나았다. 어떤 사람이 흉격(胸膈)으로 옹만(壅滿)이 심하여 혼수상태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항흔)이 그 맥(脈)을 짚어보니, 양맥(陽脈)은 부맥(浮脈)ㆍ활맥(滑脈)이고 음맥(陰脈)은 부족하였다. 맥이 부맥이면 풍(風)이 되고, 활맥이면 혈(血)이 엉기게 되니, 처음에는 풍(風)이 폐(肺)를 상하게 했지만, 음맥(陰脈)이 부족하여 지나치게 위축된〔宣逐〕 것이었다. 여러 기(氣)는 폐(肺)로 몰려드는데, 폐기(肺氣)가 제대로 다스려지면 기의 출입이 순탄하며 어혈〔菀陳〕이 제거된다. 따라서 그 폐기(肺氣)를 순행(順行)시키면 질병은 마땅히 저절로 그치게 된다. 처음에 행인(杏仁)ㆍ의이인(薏苡仁) 등의 약재를 환자 입속에 흘려주니 곧바로 살아났다. 이어서 승마(升麻)ㆍ황기(黃耆)〔黃蓍〕ㆍ길경(桔梗)으로 그 농(膿)을 소멸시키니, 이 약재를 복용한 후 한 달만에 낫게 되었다.
조량(趙良 조량인(趙良仁), 중국 원명(元明) 시대, 1304~1373)
자(字)는 이덕(以德)이며 호(號)는 운거(雲居)이다. 원(元)나라의 포강(浦江) 사람이다. 단계선생(丹溪先生 주진형(朱震亨))을 좇아 의학을 배웠다. 《의학종지(醫學宗旨)》ㆍ《금궤방연의(金匱方衍義)》를 저술하였다.
왕리(王履 중국 원명(元明) 시대, 1332~?)
자(字)는 안도(安道)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곤산(崐山) 사람이다. 단계선생(丹溪先生 주진형(朱震亨))에게 의학을 배우면서 그 의술을 완전히 습득하였는데, 박학(博學)하고 시(詩)에도 능했다. 《소회집(溯洄集)》ㆍ《백병구현(百病鉤玄)》ㆍ《의학운통(醫學韻統)》을 저술하였다.
주한경(周漢卿 중국 명(明)나라 시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송양(松陽) 사람이다. 침과 뜸〔鍼灸〕 치료를 잘하였다. 어떤 여자에게 나력(瘰癧)이 생겨서 목 주위와 겨드랑이에 19개의 구멍〔竅〕이 난 것을 치료할 때였다. 구멍을 절개하니 흰 즙〔白瀋〕이 분출하면서 오른손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고 몸은 아주 뜨거웠다. 공(公 주한경)이 구멍마다 2치〔寸〕 길이로 자르고 그 나머지는 불을 이용하여 차례로 지지니 며칠 만에 딱지〔痂〕가 생기면서 나았다. 어떤 사람이 등이 아파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엎드린 채 다니는 것을 치료할 때였다. 사람들이 풍(風)이라고 하면서 그를 치료하였다. 공(公 주한경)이 말하기를, “풍(風)이 아니다. 혈(血)이 삽(澁)하여 운행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쪽 다리의 곤륜혈(崐崙穴)에 침을 놓았다. 잠시 후 환자가 지팡이를 버리고 갔다.
장이(張頤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양정(養正)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 오하(吳下)의 명의(明醫)이다. 중년에 눈이 멀었지만 기운은 뛰어나서 엄준한 모습이 쇠하지 않았다. 주 문양공(周文襄公)이 오중(吳中)을 순무(巡撫)할 때 그를 빈객의 예로 대하였는데, 의론(議論)이 강직하여 전혀 굽힘이 없었다. 그의 의학 이론의 핵심은 원기(元氣) 보호를 위주로 삼는 것이었다. 약제를 처방할 때는 인삼(人蔘)과 백출(白朮)을 자주 썼는데 매번 뛰어난 효과를 드러냈다. 그는 연(年), 월(月), 일(日)을 미리 짚어서 사람들의 죽고 사는 것을 예언할 수 있었는데, 왕왕 신기하게 맞췄다. 일찍이 세상을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동원(東垣 이고(李杲))과 단계(丹溪 주진형(朱震亨))는 의학의 왕도이니 믿을 만하지만 그 효과는 더디다. 하지만 잘 사용하면 신기한 효과를 자주 드러낸다.”라고 하였다.
전영(錢瑛 중국 명(明)나라 시기, 15세기)
자(字)는 양옥(良玉)이고 세상에는 노신의(顱顖醫)로 전해진다. 선덕(宣德) 연간(1426~1435) 중에 태의원(太醫院)에 들어갔다. 영양후(寧陽侯)의 손자가 태어난 지 9개월만에 경기〔驚悸〕에 들리고 자주 울면서 땀을 흘렸는데 백방으로 노력해도 효과가 없었다. 공(公 전영)이 아이를 땅에 앉혀 놓고서 물장난을 치며 놀도록 하였는데 경기와 우는 증상이 뚝 멈췄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공이 답하기를, “때가 늦봄인데도 아이에게 두꺼운 옷을 입혀 휘장 안에 두고 놓아주지 않으니, 그 뜨거움을 어디로 배출할 수 있겠는가? 아이에게 물을 가까이 하도록 하면 나쁜 불의 기운〔火邪〕이 줄어들며, 흙 기운을 얻도록 하면 장부(臟腑)가 평온해지므로 약을 쓰지 않아도 나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하(吳下)의 소아의(小兒醫)들이 전영을 훌륭하다고 하였다.
유준도(劉遵道 중국 명(明)나라 시기)
국조(國朝 명(明)나라) 초창선생(草窓先生)의 아우뻘 되는 친척이다〔族弟〕. 어떤 어부가 미늘(낚시용 고리)을 잘못하여 삼켰다. 공(公 유준도)은 밀랍을 녹여 환(丸)을 만들도록 하여 선에 꿰서 목구멍에 넣었다. 날카로운 미늘 끝이 밀랍 속에 들어가자 바로 끌어서 빼내었다.
오걸(吳傑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사기(士奇)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무진(武進) 사람이다. 양곡(暘谷)이라고 스스로 호(號)를 붙였는데, ‘곡(谷)’이란 곡신(谷神)의 뜻이었다. 대대로 의업에 종사하다가 천거되어 어약방(御藥房)에 들어갔으며, 당 형천(唐荊川)과 사이가 좋았다.
은부(殷傅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조상(朝相)이고 호(號)는 호선(壺仙)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과주(瓜州) 사람이다. 상한(傷寒)에 걸렸는데, 열약(熱藥)을 잘못 복용해서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을 치료할 때였다. 혀가 검게 변하면서 흐물거리고 양쪽 뺨이 부었으나 목구멍은 통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였다. 공(公 은부)이 말하기를, “혀가 흐물거리지만 목구멍이 통했다는 것은 태음경(太陰經)과 소음경(少陰經)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화제(火劑 뜨거운 성질의 약제)를 주니, 한 번 마시자 땀이 나고, 두 번 마시자 열이 사라지며, 세 번 마시자 병이 나았다. 임력(淋瀝)으로 몸이 돌변하면서 구금(口噤)하고 궐역(厥逆 사지에 냉증이 드는 것)한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다른 의원들은 풍(風)이라고 진단하였다. 공(公 은부)은 진단하면서 척맥(尺脈)이 침대(沉大)한 데서, 병이 하초(下焦)에 있음을 알고, 팔정산(八正散)을 투약하니 나았다.
한침(汗忱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익경(益敬)이고 호(號)는 부암(孚菴)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흡(歙) 사람이다. 몸이 허약한 데다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의학을 익혔다. 《절굉록(折肱錄)》을 저술하였다.
예유덕(倪維德 중국 명(明)나라 시기, 14세기)
자(字)는 중현(仲賢)이고 호(號)는 칙산(敕山)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 삼오(三吳)의 명의(名醫)이다. 송(宋)나라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예창사(倪昌嗣)의 후손으로, 그 집안은 대대로 고전〔墳典丘索〕을 연구하였다. 예유덕은 《의설(醫說)》 및 《원기계미(原機啓微)》를 저술하였는데, 특히 공(公 예유덕)은 환자를 우선 치료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8살짜리 어린이가 갑자기 혼비(昏憊 몸이 혼몽하고 피곤한 증상)한 것을 치료할 때였다. 어린이가 며칠 동안 앓다가 깨어났는데 마치 목각 인형처럼 지각이 없어서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배부름을 모두 깨닫지 못하고 토탄(土炭 흙과 숯)을 먹으면서 입으로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풍(風)을 소통시키고 비장(脾臟)을 돕는 약제를 여러 차례 복용시키자 나았다. 대체로 비장은 지의(智意)를 관장하는데, 풍(風)에 걸리면 인사불성이 되기 때문이었다.
여복(呂復 중국 명(明)나라 시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사명(四明) 사람으로, 의도(醫道)에 조예가 깊었다. 어떤 사람이 크게 취했을 때 심하게 많이 토하고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눈에 보이는 사물이 모두 거꾸로 보였다. 그 맥을 짚어보니 왼쪽 관맥(關脈)이 가벼우면서 촉급했다〔浮促〕. 다시 여로(藜蘆)와 과체(瓜蒂)를 써서 아침〔平旦〕에 토하도록 만드니 사물이 제대로 보였다. 대체로 술에 취해 토할 때는 상초(上焦)가 뒤집어지면서 담부(膽腑)가 거꾸로 되기 때문에 보이는 사물이 모두 거꾸로 보이는 것이다. 반드시 다시 토하도록 해서 담부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천(李梴 중국 명(明)나라 시기, 16세기)
국조(國朝 명(明)나라) 사람이다. 《의학입문(醫學入門)》을 편찬하였다.
호중례(胡重禮 중국 명(明)나라 시기)
진주(眞州) 사람이다. 국조(國朝 명(明)나라) 초기에 의술로 이름을 세상에 날렸다.
심역(沈繹 중국 명(明)나라 시기, 14세기)
자(字)는 성장(誠莊)이고 오군(吳郡) 사람이며, 학문을 좋아하고 실천에도 힘썼다. 홍무(洪武) 연간(1368~1398) 중에, 숙왕(肅王)이 유락(乳酪)을 좋아하다 질병에 걸렸다. 환자에게 진한 차(茶) 몇 사발〔碗〕을 마시도록 하여 가슴 속을 완전히 씻어내니 나았다. 숙왕이 그를 신통하다고 여겨서, 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본부양의(本府良醫)를 제수하였다.
하 언징(何彦徵 하연(何淵), 중국 명(明)나라 시기, 15세기)
이름은 연(淵)이고 자(字)는 이행(以行)이며, 진강(鎭江)의 단도(丹徒)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의업에 종사하였다. 영락(永樂) 연간(1403~1424) 중에 의술로 이름을 떨쳤으며, 황제의 부름을 받아 태의원(太醫院)의 원사(院使)가 되었다.
황반(黃㻞 중국 명(明)나라 시기, 15세기)
자(字)는 몽상(夢祥)이고 호(號)는 희춘(熙春)이며, 황존례(黃存禮)의 아들이다. 유학(儒學)을 공부했고 의학이 뛰어났다. 정통(正統) 연간(1436~1449) 초에 황제의 부름을 받아 태의원(太醫院)의 태의(太醫)가 되었는데, 그 의술이 더욱 정밀해졌다.
육언공(陸彦功 중국 명(明)나라 시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흡(歙) 사람이다. 대대로 의업에 종사했는데 공(公 육언공)에 이르러 더욱 정밀해졌다. 황제가 불러서 태의(太醫)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늙어서는 《상한유증편람(傷寒類證便覽)》 10권을 편집하였다.
도화(陶華 중국 명(明)나라 시기, 15세기)
자(字)는 상문(尙文)이고 호(號)는 절암(節菴)이며, 여항(餘杭)의 명의(名醫)이다. 어려서부터 유서(儒書)를 읽었지만 여러 분야〔百氏〕에도 두루 능통했다. 《상한쇄언(傷寒瑣言)》을 저술하였는데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 정통(正統) 연간(1436~1449)에 황제의 부름을 받았지만 질병을 핑계하여 그만두고 돌아오니, 당시 의논이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추복(鄒福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노제(魯濟)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구녕(甌寧) 사람이다. 맥(脈)을 잘 살폈으며 《경험양방(經驗良方)》을 저술하였다. 둘째 아들인 추손(鄒遜) 역시 아버지의 의업〔業〕을 물려받았다. 관리〔有司〕가 의관(醫官)으로 천거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웅종립(熊宗立 중국 명(明)나라 시기, 15세기)
호(號)는 도헌(道軒)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건양(建陽) 사람이다. 유염(劉剡)에게 찾아가 의학을 배웠고, 아울러 음양(陰陽)과 의복(醫卜)의 기술에도 능통하였다. 《난경(難經)》과 《맥결(脉訣)》을 주해(註解)하였고, 《약성부보유집(藥性賦補遺集)》과 《부인양방(婦人良方)》을 편찬하였다.
왕시면(王時勉 중국 명(明)나라 시기)
환자의 얼굴빛을 관찰하고 맥을 짚는 데 뛰어났고, 질병의 예후를 잘 알아 맞혔다.
장지화(張至和 중국 명(明)나라 시기)
의술에 정통했다. 왕시면과 장지화 두 사람은 모두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오군(吳郡) 사람이다.
유육(劉毓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덕미(德美)이고 호(號)는 익재(益齋)이다.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금릉(金陵) 사람으로 소주(蘇州)의 장주(長洲)로 이주하였다. 유학을 공부하였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차마 부모님 봉양을 어길 수 없었기에 의학을 공부하였다. 천거를 받아 태의(太醫)가 되었으며, 단계(丹溪 주진형(朱震亨))의 의학을 훌륭하게 배운 사람이었다.
왕새(王璽 중국 명(明)나라 시기)
국조(國朝 명(明)나라) 사람이다. 《의림집요(醫林集要)》를 편찬하였다.
왕위(汪渭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이망(以望)이고 호(號)는 고박(古朴)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 기문(祁門) 임청(臨淸)의 박서(朴墅) 사람이다. 당(唐)나라의 월국공(越國公)로부터 갈라져 나온 후손이다. 대대로 의업에 종사했는데, 선생에 이르러 더욱 정밀해졌다. 일찍이 말하기를 “동원(東垣 이고(李杲))은 양기(陽氣)를 승강시켜 기(氣)를 보완하는데 치중하고, 단계(丹溪 주진형(朱震亨))는 음기(陰氣)를 넉넉하게 하여〔滋陰〕 화기(火氣)를 떨어뜨리는데 치중하였다. 만약 음(陰)이 허(虛)하고 양(陽)이 솟구친다면, 마땅히 동원(東垣 이고(李杲))과 단계(丹溪 주진형(朱震亨)) 두 치료법을 합하여 치료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전비(劉全備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극용(克用)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가성(柯城) 사람이다. 《편주병기(編註病機)》와 《편주약성(編註藥性)》에 주석을 달았다.
우단(虞摶 중국 명(明)나라 시기, 16세기)
자(字)는 천민(天民)이고 호(號)는 항덕노인(恒德老人)이며, 정덕(正德) 연간(1506~1521)의 화계(花溪) 사람이다. 《의학정전(醫學正傳)》ㆍ《의학권여(醫學權輿)》ㆍ《의학집성(醫學集成)》을 저술하였다.
방광(方廣 중국 명(明)나라 시기, 16세기)
자(字)는 약지(約之)이고 호(號)는 고암(古菴)이며, 가정(嘉靖) 연간(1522~1566)의 휴녕(休寧) 사람이다. 유학 책을 읽는 틈틈이 의경(醫經)에도 신경을 써서 명의(名醫)가 되었다. 단계(丹溪 주진형(朱震亨))의 치료법을 잘 사용하였다. 《단계심법부여(丹溪心法附餘)》ㆍ《약성서(藥性書)》ㆍ《상한서(傷寒書)》를 저술하였다.
설기(薛己 중국 명(明)나라 시기, 1486~1558)
자(字)는 신보(新甫)이고 호(號)는 입재(立齋)이며, 오군(吳郡)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명의(名醫)였는데 공(公 설기)에 이르러 여러 의가(醫家)의 치료법을 모두 모았다. 가정(嘉靖) 연간(1522~1566)에 관직이 남경(南京) 태의원(太醫院)의 원사(院使)였다. 《외과추요(外科樞要)》를 저술하였다.
정이(程伊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종형(宗衡)이며 신안(新安) 사람으로, 국조(國朝 명(明)나라) 회부(淮府)의 훌륭한 의원이다. 《의림사전(醫林史傳)》ㆍ《외전(外傳)》ㆍ《습유(拾遺)》를 찬술하였다.
[주-D001] 장상군(長桑君)의 가르침을 얻어서 :
《사기(史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편작은 객사(客舍)에서 관리인으로 일을 하다가 빈객(賓客)인 장상군(長桑君)을 잘 보살폈다. 이에 신의(神醫)인 장상군으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주-D002] 시궐(尸厥) :
궐증(厥證) 가운데 갑자기 정신을 잃으면서 죽은 것처럼 인사불성인 상태가 되는 증상이다.
[주-D003] 오금희(五禽戱) :
화타가 다섯 가지 동물 즉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새의 움직임을 본떠 만든 건강 체조이다.
[주-D004] 유아〔蛾〕 :
유아(乳蛾). 목구멍이 벌겋게 붓고 아픈 증상으로 편도선염에 해당한다.
[주-D005] 대풍(大風) :
흔히 문둥병이라고 말하는 여풍(癘風)이다. 한의학에서는 대풍(大風)을 골절(骨節)이 무겁고 수염과 눈썹이 빠지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주-D006] 비용본초(備用本草)와 경사증류(經史症類) :
이 책의 원래 제목은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이며, 송(宋)나라의 대표적인 본초서이다. 31권으로 구성된 《경사증류비급본초》는 송나라 휘종(徽宗) 대관(大觀) 2년(1108)에 당신미가 《가우보주본초(嘉祐補注本草)》와 《도경본초(圖經本草)》를 토대로 편찬하였다.
[주-D007] 오운육기(五運六氣) :
오운(五運)과 육기(六氣)라는 개념으로 질병의 발생을 설명하는 한의학 이론이다. 오운(五運)은 목(木)ㆍ화(火)ㆍ토(土)ㆍ금(金)ㆍ수(水)의 다섯 가지 요소이고, 육기(六氣)는 풍(風)ㆍ한(寒)ㆍ서(暑)ㆍ습(濕)ㆍ조(燥)ㆍ화(火)의 여섯 가지 요소이다. 오운은 십간(十干,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에 배정되고 육기는 십이지(十二支,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에 배정된다. 옛날의 1년은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즉 간지(干支)로 표현되므로, 갑자년(甲子年)ㆍ을축년(乙丑年) 등의 간지에 들어있는 오운과 육기의 특성에 따라 그해의 기후 변화와 질병 발생의 상관관계가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주-D008] 황극경세(皇極經世) :
천지만물의 법칙을 설명하는 상수학(象數學) 이론이다. 상수학이란 고도의 추상적 개념을 특정한 숫자로 표상하면서, 그 개념이나 숫자 사이의 상호 관계를 통해 사물의 존재 양태와 운동원리를 설명하려는 논리나 경향이다. 이 이론은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소옹(邵雍)이 더욱 발전시켰다.
[주-D009] 측천무후 때〔天時〕 :
천시(天時)는 하늘의 재앙을 말하는데, 이 글에서는 당(唐)나라를 없애고 주(周)나라를 세운 측천무후 시기를 의미한다. 장문중은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상약봉어특진(尙藥奉御特進)이 되었다.
[주-D010] 특진(特進) 소양사(蘇良嗣) :
소양사(606~690)는 당(唐)나라의 명재상으로 690년에 특진(特進)으로 봉해졌다. 특진(特進)은 정2품의 문관이 받는 품계이다.
[주-D011] 특히 …… 가라앉힌다 :
본문은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 129 방기(方技)에 나오는 표현이다.
[주-D012] 후당(後唐)〔僞唐〕 :
중국에서는 907년 당(唐)나라의 멸망에서 960년 송(宋)나라가 성립할 때까지 다섯 개의 왕조와 열 개의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이른바 5대10국시대이다. 5대는 후량(後梁, 907~923), 후당(後唐, 923~936), 후진(後晉, 936~946), 후한(後漢, 947~950), 후주(後周, 951~960)이다. 이 가운데 후당(後唐)은 이존욱이 낙양(洛陽)에서 건국한 국가로,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여 국호를 당(唐)이고 하였다. 역사학에서는 앞선 당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당(後唐)이라 부르고 있다. 본문에서는 후당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가짜 당나라 곧 위당(僞唐)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주-D013] 식성본초(食性本草) :
10권으로 된 책으로 10세기 중엽(대략 937~957)에 편찬되었다. 음식의 종류를 구분하고 음식을 통한 치료법〔食治〕을 제시하였다.
[주-D014] 철경록(輟耕錄) :
도종의(陶宗儀 1329~1410)의 저작이다. 도종의는 원(元)나라 말에서 명(明)나라 초기의 역사가이다. 그는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불렸으며 서법(書法)을 공부하여 소전(小篆)에 특히 능했다. 《서사회요(書史會要)》,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설부(說郛)》, 《남촌시집(南村詩集)》 등의 저서가 있다.
[주-D015] 침술〔鍼石〕 :
고대에는 돌을 날카롭게 다듬어서 침(鍼)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폄석(砭石)이라고 부른다.
[주-D016] 휘종(徽宗)〔道君〕 :
휘종(徽宗)은 송(宋)나라 8대 황제로,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라고 자칭하였다. 도교에 심취했기 때문에 ‘도군(道君)’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주-D017] 열조(烈祖) :
십국(十国)의 하나인 남당(南唐)을 건국한 이변(李昪)의 묘호(廟號)이다.
[주-D018] 대소방맥(大小方脈) :
대방맥(大方脈)과 소방맥(小方脈)의 합친말로, 한의학의 분과를 표현한다. 대방맥은 성인(成人)의 질병 특히 내과(內科) 영역을 지칭하며, 소방맥은 유과(幼科) 즉 소아과에 해당한다. 진문중이 활동한 송(宋)나라의 경우에는 의학이 대방맥ㆍ소방맥을 포함하여 9개의 분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D019] 어느 …… 죽었다 :
《휘진여화(揮塵餘話)》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태수(太守)인 전등(田登)은 어머니 병환이 심각해지자 송도방을 청했다. 하지만 송도방은 왕진을 가지 않았다. 전등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의 어머니가 죽는다면 송도방을 죽이겠다.”라고 하고,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서 말하기를, “3일 내에 어머니가 낫지 않는다면 나는 마땅히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도방이 말하기를, “잠깐 진맥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잠시 뒤 송도방이 말하기를 “다행히 살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 단제(丹劑)를 처방하니 드디어 나았다. 전등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잠깐 그대를 욕보였으니 어찌 앞서의 부끄러운 일을 씻지 않으리오?”라고 하고, 기악(妓樂)을 베풀고 크게 사례하여 송도방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10일 후 전등 어머니의 질병이 다시 나타나서, 송도방을 불렀지만 송도방의 온 가족이 도망간 후였다. 전등의 어머니는 결국 죽었다. 그 질병은 이미 고황(膏肓)에 들어있어서 살 수 없었지만, 송도방이 양약(良藥)으로 환자의 죽음을 임시로 늦춘 것이었다.
[주-D020] 황제내경태소(黃帝內經太素) :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교체기에 양상선(楊上善)이 편찬한 《황제내경태소》이다. 이 책은 소문(素問)과 영추(靈樞) 즉 침경(鍼經)의 내용을 교정하고 주석한 것으로,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초기 전본(傳本)이어서 가치가 있다. 원래는 30권이며, 현재는 23권이 남아 있다.
[주-D021] 아버지를 …… 있었다 :
승려 지연이 이른바 태소맥(太素脈)에 능통했음을 서술한 것이다. 태소맥은 맥박의 변화를 통해 사람들의 길흉(吉凶), 화복(禍福), 귀천(貴賤), 수요(壽夭)를 미리 알 수 있다는 진맥법이다.
[주-D022] 평위산(平胃散) :
비(脾)와 위(胃)가 조화롭지 못하여 식욕이 없거나 통증이 있을 때 사용하는 처방이다. 창출(蒼朮)ㆍ후박(厚朴)ㆍ진피(陳皮) 등으로 구성된다.
[주-D023] 부자이중환(附子理中丸) :
비(脾)와 위(胃)가 허한(虛寒)하여 구토하고 설사하거나 복통이 심할 때 사용하는 처방이다. 부자(附子)ㆍ인삼(人蔘)ㆍ백출(白朮) 등으로 구성된다.
[주-D024] 한 …… 넘어졌다 :
《소씨문견후록(邵氏聞見後錄)》 29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동네에 부인 두 명이 있었는데〔里婦二〕”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본문의 구금 환자 이야기와 달리다가 넘어진 환자 이야기를 연이어 소개하고 있다.
[주-D025] 성제총록(聖濟總錄)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
송나라 태종은 975년에 즉위하여 996년에 사망하였다. 왕회은(王懷隱) 등이 100권으로 편찬한 《성혜방》은 태종의 재위기간인 992년에 간행되었다. 하지만 《성제총록》은 송 휘종(徽宗) 대인 정화(政和) 연간(1111~1117)에 간행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태종이 《성제총록》까지 편찬을 명하였다고 설명한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주-D026] 흑석단(黑錫丹) :
신(腎)이 기(氣)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슴에 담(痰)이 차는 등의 증상에 사용하는 처방이다. 이 처방은 흑석(黑錫)과 유황(硫黃) 등으로 구성되므로, 본문에서는 유황의 과다 섭취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고 진단한 것이다. 흑석은 납〔鉛〕이다.
[주-D027] 금액단(金液丹) :
유황을 빻았다가 불에 가열하여 만든 환약(丸藥)이다.
[주-D028] 결맥(結脈) :
28맥(脈) 가운데 하나이다. 결맥은 맥이 느린 동시에 간헐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주-D029] 수(隋)나라 사람 :
원문에는 왕도가 ‘수인(隋人)’ 곧 수나라 사람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상은 수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태어난 당(唐)나라 사람이다.
[주-D030] 요〔元〕 :
원문은 ‘원(元)’이지만 ‘요(遼)’의 오식이다. 직로고는 요나라 태조에게 붙들렸으며, 본문에 등장하는 순흠황후는 요나라 태조의 정비(正妃)이다.
[주-D031] 요광효(姚廣孝) :
명(明)나라 초기의 승려이자 정치가이다.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 정난지역(靖難之役)의 주모자였다. 소사(少師)로 추증되었으므로, 본문에서는 ‘소사 요광효’라고 표현하였다.
[주-D032] 갈 가구(葛可久) :
갈건손(葛乾孫). 갈건손의 자(字)는 가구(可久)이며, 갈응뢰(葛應雷)의 아들이다. 갈건손과 갈응뢰 모두 이 책에 나온다.
[주-D033] 미맥(微脈) :
28맥(脈) 가운데 하나이다. 미맥은 맥이 아주 가늘고 미약하여 곧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주-D034] 신보환(神保丸) :
가슴, 배, 옆구리 등의 통증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목향(木香)ㆍ호초(胡椒) 등으로 구성된다.
[주-D035] 신궁환(神芎丸) :
일체의 열증(熱證)과 담열(痰熱) 등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대황(大黃)ㆍ황금(黃芩) 등으로 구성된다.
[주-D036] 고독(蠱毒) :
한의학에서 고(蠱)라는 독충으로 인해 생긴다고 설명되는 다양한 증상이다. 몸속에 들어오면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일련의 생명체를 고(蠱)라고 표현한 것인데 기생충, 뱀, 두꺼비, 도마뱀 등에 해당한다.
[주-D037] 채병(瘵病) :
노채병(勞瘵病)의 줄임말이다. 결핵(結核)과 비슷한 전염성 질병으로, 장(臟) 속의 벌레로 인해 생긴다고 한다.
[주-D038] 소합향환(蘇合香丸) :
중풍(中風)으로 기절하거나 인사불성이 되는 등의 증상을 치료한다. 백출(白朮)ㆍ청목향(靑木香)ㆍ서각(犀角) 등으로 구성된다.
[주-D039] 육맥(六脈) :
삼음(三陰)과 삼양(三陽)의 여섯 가지 경맥이다. 삼음은 궐음(厥陰), 소음(少陰), 태음(太陰)이고 삼양은 소양(少陽), 양명(陽明), 태양(太陽)이다.
[주-D040] 진장맥(眞臟脈) :
오장(五臟)의 진기(眞氣)가 손상되어 나타나는 맥상(脈象)이다. 진장맥은 위급한 상태에서 나타나므로 환자를 살릴 수 없다고 한다.
[주-D041] 실맥(實脈) :
28맥(脈) 가운데 하나이다. 실맥은 맥이 장대하고 힘찬 것으로, 맥을 짚기 위해 누른 손가락 때문에 답답한 느낌이 든다.
[주-D042] 백호탕(白虎湯) :
온열병(溫熱病)으로 고열에 시달리거나 두통이 나는 등의 증상을 치료한다. 지모(知母)ㆍ석고(石膏)ㆍ감초(甘草) 등으로 구성된다.
[주-D043] 어혈〔菀陳〕이 제거된다 :
울진(菀陳)은 몸속에 쌓여 있는 어혈을 말한다. 《황제내경영추(黃帝內經靈樞)》 〈소침해편(小針解篇)〉에 “어혈은 제거해야 하니, 나쁜 피를 빼내야 한다.〔菀陳則除之, 出惡血也.〕”라고 하였다.
[주-D044] 주 문양공(周文襄公) :
주침(周忱). 1381~1453년. 주침은 명(明)나라의 관리로서, 시호가 문양공(文襄公)이다. 《영락대전(永樂大典)》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선덕(宣德) 5년(1430)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이 되어 강남을 순무(巡撫)하던 시기의 이야기다. 이때 주침은 22년 동안 활동하면서, 미납된 세금을 정리하고 세법을 개정하면서 강남의 과도한 부역(賦役)을 줄였다. 소주지부(蘇州知府) 황종(況鍾)과 함께 자세히 계산하여 소주 한 부(府)에서만 부세를 277만 석에서 72만여 석으로 줄였다고 한다.
[주-D045] 노신의(顱顖醫) :
《노신경(顱顖經)》과 관련된 의원 즉 소아과 전문의를 가리킨다. 《노신경》은 중국 고대의 소아과 전문의서이다.
[주-D046] 영양후(寧陽侯) :
진무(陳懋). 1379~1463년, 진무는 명(明)나라의 장군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서 정난지역(靖難之役)에 참가하여 영락제(永樂帝)의 즉위를 도왔다. 그 공으로 진무는 영양후(寧陽侯)에 봉해졌다.
[주-D047] 초창선생(草窓先生) :
초창선생(草窓先生)은 유부(劉溥)가 스스로 지은 자신의 호이다.
[주-D048] 곡신(谷神) :
곡신은 고대 도교(道敎)의 용어로, 영원하고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원래는 곡(谷)과 신(神)이 구별되다가 후대에는 하나의 단어로 병칭되었다. 곡(谷)과 신(神)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곡(谷)은 가운데가 텅 비어있는 것처럼 형체도 없고 거스르는 것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고, 신(神)은 한없이 무궁해서 헤아릴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주-D049] 당 형천(唐荊川) :
당순지(唐順之). 1507~1560년. 당순지는 명(明)나라의 양명학자로서, 호(號)가 형천(荊川)이다. 한림원(翰林院)의 편수(編修)로서 당순지는 역대실록(歷代實錄)의 교정을 담당했으며, 교육과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왕신중(王愼中), 귀유광(歸有光)과 함께 명나라 고문파(古文派)로 꼽히는 문학가이기도 하다.
[주-D050] 팔정산(八正散) :
사열(邪熱)이나 가슴이 답답하고 배뇨가 곤란한 등의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차전자(車前子)ㆍ구맥(瞿麥)ㆍ편축(萹蓄) 등으로 구성된다.
[주-D051] 고전〔墳典丘索〕 :
분전구색(墳典丘索)은 삼분(三墳), 오전(五典), 구구(九丘), 팔색(八索)을 줄인 말로, 중국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 이래로 오래된 고전(古典)을 의미한다.
[주-D052] 유락(乳酪) :
우유(牛乳)처럼 소나 양 등에서 짜낸 유즙(乳汁)을 말한다.
[주-D053] 황반(黃㻞) :
‘㻞’의 발음은 미상이다. ‘빈’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반절법에 따르면 ‘번’으로 발음할 수도 있다.
[주-D054] 월국공(越國公) :
왕화(汪華). 왕위의 조상인 왕화(汪華)는 수(隋)나라의 명장(名將)이었는데 당(唐)나라로 귀순하여 월국공(越國公)에 봉해졌다.
[주-D055] 의림사전(醫林史傳) …… 찬술하였다 :
정이가 쓴 책의 분량은 《의림사전(醫林史傳)》 4권, 《외전(外傳)》 6권, 《습유(拾遺)》 1권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경록 (역) / 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