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도술〔仙禪道術〕
선선도술〔仙禪道術〕/역대 의학 인물
의림촬요(醫林撮要)
장상군(長桑君 장상과(長桑過),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성(姓)은 장상(長桑)이고 이름은 과(過)이며, 편작(扁鵲)의 스승이다. 금방(禁方)을 전수하였다.
봉강(鳳綱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한양(漢陽) 사람이다. 항상 온갖 풀과 꽃을 채취하여 물에 적신 후, 1월부터 9월말까지 항아리에 담고 진흙으로 항아리 입구를 봉하였다. 또 이 항아리를 100일 동안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이것을 고약처럼 고아서 환(丸)을 만들었다. 갑자기 쓰러져서 죽은 것처럼 된 자가 있으면, 이 약을 환자 입 안에 넣고 물과 함께 삼키게 하면 모두 살아났다.
현속(玄俗 중국 전한(前漢) 시기)
서한(西漢 전한(前漢))의 하간(河間) 사람이다. 파두(巴豆)를 먹으면서, 약(藥)을 팔았는데, 모두 7환(丸)에 1전(錢) 가격으로 팔았으며, 모든 병을 치료하였다. 가병(瘕病)에 걸린 하간왕(河間王)이 약을 사서 복용하니, 뱀〔蛇〕 10여마리를 배설하였다. 복용한 약의 의미를 물어보니, 현속이 말하기를, “왕(王)의 가병은 6세(世) 조상의 액운이 자손에게 전해진 것으로, 왕께서 초래한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항상 어린 사슴과 어미 기린을 방생하였으므로, 이러한 어진 마음씨가 하늘을 감동시켜서 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간왕가(河間王家)의 늙은 사인(舍人)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 대에도 현속을 만났는데, 현속이 몸은 있지만 그림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현속을 불러서 햇빛 아래에서 보았는데, 실제로 그림자가 없었다. 왕이 자기 딸과 혼인시키려고 하였으나, 현속은 밤에 도망갔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를 상산(常山) 아래에서 보았다.
동봉(董奉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자(字)는 군이(君異)이고 오(吳)나라의 후관(候官) 사람이다. 여산(廬山)에 살았는데, 도술(道術)을 행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질병을 치료하였다. 병이 나은 사람에게는 살구나무〔杏〕 다섯 그루를 심도록 하였으며, 질병이 가벼웠던 사람에게는 한 그루를 심도록 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 살구나무가 숲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 숲을 대선행림(臺仙杏林)이라고 불렀다. 살구가 익으면 곡식으로 바꾸어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행령자(幸靈者 중국 서진(西晋) 시기)
서진(西晉) 예장(豫章)의 건창(建昌) 사람이다. 부모와 고을 사람들은 처음에 그를 바보라고 여겼지만, 나중에 보니 신령한 재주〔靈術〕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구제하면서도 보수를 바라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부인을 두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대가로 재물을 받고, 아내를 얻고, 수레와 말, 노비를 갖추게 되자, 그의 의술은 점차 쇠퇴하였다.
갈홍(葛洪 중국 동진(東晋) 시기, 281~341)
자(字)는 치천(稚川)이고 호(號)는 포박자(抱朴子)이며, 단양(丹陽)의 구용(句容) 사람이다. 젊어 가난한 시절에는 땔나무를 직접 베어서 종이와 붓을 샀고, 책을 베껴 암송하여 익혔다. 유학(儒學)으로 유명해졌는데 천성이 욕심이 없고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찾아오는 사람을 물리치고 함부로 교류하지 않으면서, 오직 책을 찾고 의리(義理)를 추구했으며 천리길을 머다하지 않고 찾아가서 반드시 얻고자 하였다. 마침내 전적(典籍)의 연구와 깊고 넓은 학문은 강좌(江左 양자강 동쪽)에서 최고였다. 진(晉)나라에서 벼슬하여 구루령(句漏令)이 되었는데 정치를 잘하였다. 나중에는 나부산(羅浮山)에서 은거하면서, 신선도인법(神仙導引法)을 더욱 좋아하였다. 《금궤약방(金匱藥方)》ㆍ《주후구졸방(肘後救卒方)》ㆍ《비급방(備急方)》을 저술하였다.
단도개(單道開 중국 동진(東晋) 시기)
동진(東晉)의 돈황(敦煌) 사람이다. 선학(禪學)을 갖추고 있었으며, 눈병〔目疾〕 치료에 자못 효험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마명용수(馬明龍樹)라고 찬탄하였다.
도홍경(陶弘景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송(宋)ㆍ양(梁)나라 시기, 456~536)
자(字)는 통명(通明)이고, 단양(丹陽)의 말릉(秣陵) 사람이다. 10세에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구하게 되자 밤낮으로 연구하여 곧 양생(養生)에 뜻을 두게 되었다. 커서는 재상의 녹봉을 사양하고 신무문(神武門)에 관을 걸어두고〔掛冠 벼슬을 사직함〕 모산(茅山) 속에서 은둔하였다.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안부 서신이 끊이지 않아서 그를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렀다. 나이 80세가 넘어서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본초효험방(本草效驗方)》에 주석을 달고 《주후백일방(肘後百一方)》을 저술하였다.
육법화(陸法和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양(梁)나라 시기)
양(梁)나라 때에 자사(刺史)를 그만두고, 강릉(江陵)의 백리주(百里洲)에 은둔하였다. 도술(道術)을 믿었으며, 약을 채취하여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이전(李筌 중국 당(唐)나라 시기)
호(號)는 소실산(少室山)이고 이달관(李達觀)의 아들이며, 당(唐)나라 사람이다. 그는 숭산(嵩山)의 호구암(虎口巖) 석벽(石壁)에서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黃帝素問〕과 《음부경(陰符經)》을 얻었는데, 그 책 표지에 이르기를, “위(魏)나라 도사(道士)인 구겸지(寇謙之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북위(北魏)의 도사(道士))가 이 책을 명산(名山)에 전한다.”라고 하였다. 이전이 여산(驪山)에 이르렀을 때 노파가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마상(馬湘 중국 당(唐)나라 시기, ?~856)
자(字)는 자연(自然)이고, 당(唐)나라 항주(抗州)의 염관현(塩官縣)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현(縣)의 이속(吏屬)이었는데 마상은 유별나게 경사(經史 유학(儒學)과 역사학)를 좋아하고 글공부〔文學〕에 집중했으며 시(詩)를 잘 지었다. 의술에 신기한 술법이 있어서 질병을 치료할 때 대나무 지팡이〔竹杖〕로 환자를 두드렸는데, 그가 지팡이를 두드리자마자 곧바로 나았다.
매약옹(賣藥翁 ‘약을 파는 늙은이’라는 뜻임, 중국 당(唐)나라 시기)
당(唐)나라 사람인데, 정확한 성과 이름은 모른다. 어떤 사람이 아잇적부터 매약옹을 보았는데, 늙었을 때 다시 매약옹을 보아도 그 얼굴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항상 호리병 하나를 들고 다니면서 약을 팔았는데, 사람들이 증상을 이야기하면서 치료를 원하면, 돈을 받거나 못 받거나 간에 모두 약을 주었다. 간혹 질병이 없는 데도 장난삼아 약을 구하는 경우에는, 약을 구하더라도 반드시 쓸모가 없었다. 일찍이 사람들을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돈이 있으면서도 약을 사서 먹지 않는다면, 모두 무덤을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약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의미임).”라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 웃을 뿐이었다. 나중에 장안(長安)에서 약을 팔았는데, 호리병을 뒤집어도 이미 호리병은 비어있고 환약 하나만 들어있었다. 꺼내보니 환약이 아주 크고 밝게 빛났는데, 손바닥에 올려 놓고 있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 자신이 먹고 하늘로 날아올라 떠나갔다.
일화자(日華子 중국 당(唐)나라 시기)
송(宋) 나라 개보(開寶) 연간(968~976)의 의술에 밝은 사람〔明人〕인데, 성씨는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일화자라고 부를 뿐이다. 《제가본초(諸家本草)》를 찬술하였다.
왕회은(王懷隱 중국 송(宋)나라 시기, 10세기)
송주(宋州)의 휴양(睢陽)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사(道士)가 되었지만, 의술에 밝아서 한림의관(翰林醫官)이 되었다. 송(宋)나라 태종(太宗) 대에 오월(吳越)에서 그 아들 유준(惟濬)을 입조(入朝 조정에 들여보냄)시켰는데 그 아들이 질병에 걸렸다. 공(公 왕회은)에게 명을 내려서 보살피게 하니 나을 수 있었다. 진승(陳承), 배종원(裵宗元), 진사문(陳師文)과 함께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을 공동 저술하였다.
허손(許遜 중국 서진(西晉)ㆍ동진(東晋) 시기, 239~374)
자(字)는 경지(敬之)이다. 정양령(旌陽令)이 되었는데 군(郡)에 큰 전염병이 돌았다. 이에 허손은 전수받은 신효한 처방으로 사람들을 구제 치료하였다. 오랫동안 고치지 못한 질병도 역시 치료하지 못한 경우가 없었다.
시잠(施岑 중국 동진(東晋) 시기, ?~374)
자(字)는 대옥(大玉)이고 패군(沛郡) 사람이다. 정양(旌陽 바로 위에서 나온 정양령(旌陽令) 허손(許遜))의 제자로서 치료술이 뛰어났다.
살수견(薩守堅 중국 원(元)나라 시기)
촉(蜀)의 서하(西河)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의학을 배웠는데 약을 잘못 써서 사람을 죽이게 되자 결국 의학을 포기하였다. 허정(虛靜) 장천사(張天師)를 비롯하여 건창(建昌) 왕공신(王拱宸), 복주(福州) 임영소(林靈素) 세 사람이 그에게 도술(道術)〔法〕을 지도하였는데, 그가 배운 것으로는 주조술(呪棗術)이 있었고 귀신같이 질병을 치료하니, 그를 진인(眞人)이라고 불렀다.
이형(李詗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맹언(孟言)이고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전당(錢塘) 사람이다. 호(號)는 저산생(樗散生)이고 시(詩)를 잘 지었으며 금릉(金陵)에서 약을 팔았는데, 저자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도를 알고 있다고 평하였다.
한무(韓? 중국 명(明)나라 시기, 16세기)
호(號)는 비하도인(飛霞道人)이고 국조(國朝 명(明)나라) 촉(蜀)의 노주(瀘州) 사람이다. 본래 무장(武將) 집안의 아들이다. 홍치(弘治) 연간(1488~1505)과 성화(成化) 연간(1465~1487)에, 젊은 나이로 제생(諸生 교육기관〔學官〕에 입학한 학생)이 되었지만,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아미산(娥眉山) 등으로 가서 의학자들을 방문하였다. 승암(升菴) 양 태사(楊太史)는 한무에 대해 “진실로 은둔하면서 도(道)를 전수받은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의통(醫通)》 2권을 썼는데, 특별히 토저(土苴)를 다루었다.
[주-D001] 하간왕(河間王) :
유덕(劉德). ?~기원전 129년. 유덕은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셋째 아들로 하간왕에 봉해졌다. 학문을 좋아하여 민간의 고택 등에서 고문(古文)으로 된 경서(經書)들을 수집함으로써 유학의 발전에 공헌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D002] 대선행림(臺仙杏林) :
원문은 ‘대(臺)’이지만, 동봉의 고사를 다룬 다른 기록에서는 ‘동(董)’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동선행림(董仙杏林)은 ‘신선(神仙) 동봉이 머무는 행림’이라는 뜻이 된다. 본문에 나오는 동봉의 고사에 유래하여, 후대에는 한의학을 흔히 ‘행림(杏林)’이라고 상징하게 되었다.
[주-D003] 마명용수(馬明龍樹) :
인도의 마명(馬明) 보살과 용수(龍樹) 보살로 의술에 밝았다. 동양의 오래된 안과 전문서인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이 후대에 용수(龍樹)의 이름을 빌려서 서명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용수는 안과 의술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주-D004] 이전이 …… 전해주었다 :
이전(李筌)이 쓴 《황제음부경소(黃帝陰符經疏)》의 서문(序文)에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 신선지도(神仙之道)를 좋아하는 이전은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면서 방술(方術)을 공부하였는데, 숭산(嵩山)의 호구암(虎口巖)의 석벽(石壁)에서 《음부경(陰符經)》을 얻게 되었다. 주칠(朱漆)된 비단 축(軸)에 글을 쓴 것이었는데, 겉에는 “위(魏)나라 진군(眞君) 2년(441) 7월 7일에 상청도사(上清道士) 구겸지(寇謙之)가 명산(名山)에 보관하여 동호인(同好人)에게 전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음부경》은 이미 파손이 심한 상태여서 금세 재로 변할 정도였다. 이전이 대강 옮겨 적으면서 입으로 외웠지만, 《음부경》의 의미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전은 진(秦)으로 들어가서 여산(驪山) 아래에 이르러 어느 노파를 만났다. 봉두난발에 다 해진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이 노파가 혼잣말로 하는 이야기가 《음부경》의 내용이어서, 이전이 깜짝 놀라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는 이야기다.
[주-D005] 일화자(日華子) :
본문에서는 일화자(日華子)가 송(宋) 나라의 사람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화자는 6세기 당(唐) 나라의 본초학자(本草學者)로 알려져 있다. 그의 원래 성은 대(大)이고 이름은 명(明)이지만, ‘일화자’라는 호(號)로 유명하다. 그는 《대명본초(大明本草)》 즉 《일화자제가본초(日華子諸家本草)》를 지었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지만 후대의 본초서들에 영향을 주었다
[주-D006] 송(宋)나라 태종(太宗) …… 있었다 :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서문(序文)과 《송사(宋史)》 〈열전(列傳)〉 220 방기(方技)에는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송(宋)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 오월왕(吳越王)이 아들 전유준(錢惟濬)을 입조시켰는데, 그가 병이 났다. 칙명을 받든 왕회은은 그를 치료하여 완쾌시켰다.
[주-D007] 허정(虛靜) 장천사(張天師)를 …… 불렀다 :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歷世眞仙體道通鑑續編)》 권4에 나오는 이야기다. 즉 치료하다가 약을 잘못 써서 사람을 죽인 살수견은 의학을 포기하였다. 그는 도교의 30대(代) 천사(天師)와 임영소와 왕공신의 도법(道法)이 고명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셨다. 살수견은 세 스승에게서 주조술(呪棗術)과 선질술(扇疾術)과 뇌법(雷法)을 각각 배웠다. 그는 주조술로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선질술로는 부채를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고, 뇌법으로는 간악한 사람들을 응징하였다. 이러한 살수견의 활동으로 도법(道法)이 크게 흥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그 후 명(明)나라 성조(成祖)는 살수견을 숭은진군(崇恩眞君)으로 봉하였다. 도교에서는 살수견을 비롯하여 장도릉(張道陵), 갈현(葛玄), 허손(許遜)을 사대천사(四大天師)라고 부른다.
[주-D008] 이형(李詗) :
이형(李詗)은 이조(李調)라고도 하는데, 일설에는 중국 송(宋)나라 시기의 사람이라고도 한다.
[주-D009] 승암(升菴) 양 태사(楊太史) :
양신(楊愼), 1488~1559년. 양신은 명(明)나라의 관리이다. 호(號)가 승암(升菴)이고 시호(諡號)는 문헌공(文憲公)이며, 문집으로는 《태사승암문집(太史升菴文集)》이 전한다.
[주-D010] 의통(醫通) 2권 :
이 책은 한무가 1522년에 편찬한 《한씨의통(韓氏醫通)》이다.
[주-D011] 특별히 토저(土苴)를 다루었다 :
토저(土苴)가 무슨 의미로 쓰였는지 애매하다. 토저(土苴)는 보잘것없는 것, 비천함 정도의 뜻이다. 병안을 전면적으로 개량한 한무가 기존 이론을 보잘것없다고 폄하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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