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스크랩 동의학

조선 의원의 일본 사행과 의학필담집

지운이 2019. 3. 21. 19:17

조선 의원의 일본 사행과 의학필담집의 출판 양상*#

  /허경진**

 

1. 머리말

2.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의 연구 현황과 출판

연구의 필요성

3.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 서지사항

4.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의 출판 양상

5. 의학 관련 필담집의 범주

6. 전문적인 의학필담의 편집과 특성

7. 맺음말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 구임(KRF-2008-322-A00073).

# 이 논문은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에서 2009년 9월 29일에 개최한 2009년도 심포지엄 「의학필담과 동아시아 의학교류」에서 발표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토론을 맡아주신 차웅석 교수(경희대)님에게 감사드린다.

** 연세대학교 국문과

주 소 :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문과 (120-749) 전 화 : 02-2123-2267 / 팩스 02-392-0314 이메일 : hur@yonsei.ac.kr

의사학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2010년 6월 Korean J Med Hist 19 ː137156

 

 

1. 머리말

1607년 여우길(呂祐吉)을 정사로 한 정미사행(丁未使行)을 시작으로 1811년 김이교(金履喬)를 정사로 한 신미사행(辛未使行)까지 약 200년간 12차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오가는 동안 조선과 일본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역관이 통역했지만, 개인적인 관심사에 따라 만나는 자리에까지 통역이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그런 자리에서는 필담(筆談)으로 의사가 전달되었다.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정판본(整板本)의 대량 출판이 시작되었다. 문학서, 역사서, 불교서를 출판하다가 수신서, 실용서를 거쳐 오락서가 출판되면서 서적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중국과 외교관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유일한 외부문화의 통로는 통신사였으므로, 상업출판자들은 당연히 통신사와 출판을 연계시켰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행렬로부터 출판하여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는 도시 곳곳에서 시인, 유학자, 의원 등의 필담을 시도하였다. 필담자 본인이 출판을 시도하기도 하였

으며, 출판업자가 필담을 수집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통신사가 지나가지 않는 지방의 독자들은 필담 창화집을 구입해 조선의 문화를 향유하였다.

 

필자는 현재 국내외 필담창수집 180여 종의 소장처를 조사하여 복사 정리하고 번역작업을 진행중인데1), 이 가운데 의학과 관련된 필담창수집은 40여종에 이른다. 필담창수집 가운데 상당한 분량이 의학과 관련됨 셈이다. 이 자료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도표로 만들고, 그 출판 양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조선통신사의 의학 관련 필담 ․ 창수집의 간행 정보(板元,刊

를 조사하여 일본에서의 상업출판 현황을 분석하고 이러한 상업출판이 ) , 記

가능했던 배경과 의미를 모색하고자 집필되었다. 이 논문의 기본 틀은 필자가 필담창화집의 일본 출판에 관해 소개한 이전의 논문(허경진·박혜민, 2010)과 같다.

 

2.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의 연구 현황과 출판 연구의 필요성

 

조선통신사 필담에 관해서는 일본 학자들이 일찍부터 연구 조사하였다. 미키 사카에(三木榮)가 조선의학사를 연구하는 차원에서 조선과 일본 의원(醫員)들 사이의 문답을 기록한 필담집에 관해 소개한(三木榮, 1966) 이후, 요시다 타다시(吉田忠)에 의해 보충되었다(吉田忠, 1988). 그 이후로도 의학 필담에 관한 단편적인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필담집 전반에 관한 연구는 없었다.

 

1) 한국연구재단 2008년도 기초연구과제지원사업, 과제번호 KRF-2008-322-A00073 「조선후기통신사 필담창수집의 수집, 번역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

139

허경진 : 조선 의원의 일본 사행과 의학필담집의 출판 양상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37-156, 2010년 6월 l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중국과 일본 연구자들과 공동조사를 통해 일본내한국 관련 의학자료를 상당수 소개했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이 통신사 필담집이다(안상우 외, 2003). 이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필담창수집을 자료로 한 의학분야의 연구가 계속되었는데, 김호는 2008년도 조선통신사학회 춘계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박희준의 「17세기 兩東唱和後錄과 한일의학문화교류」(2005), 오준호의 「18세기 한일 鍼灸學의 교류」(2006), 차웅석의 「18세기 조선통신사를 통한 한일의학문화교류」(2006), 함정식의 「18세기 조선통신사 醫官과 儒醫의 역할」(2007), 서근우의 「조선통신사 의학 문답 기록에 나타난 醫案 연구」(2007)를 차례로 소개하면서, 조선통신사 문답록의 전체적인 소개와 내

용별 분석은 차웅석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고 평하였다(김호, 2008: 38).

 

이외에 차웅석이 「桑韓醫談과 韓日醫學文化交流」를 발표하고(차웅석, 2004), 서근우가 「<韓客治驗>에 기재된 의안 연구」를 발표했다(서근우· 오준호·서지연·김태은·홍세영·윤성익·차웅석·김남일, 2006). 연세대학교 필담창수집 번역연구팀에서는 김형태가 대화 방식 및 내용적 특성을 중심으로 「<桑韓醫談>과 <桑韓醫問答> 비교 연구」를 발표하고, 桑韓醫談 과 兩東唱和後錄 , 桑韓醫問答 을 중심으로 「18세기 전반기 통신사 의학필담의 전개 및 내용적 특성」(김형태, 2009a)을 발표하였다. 학위논문으로는 함정식이 「<桑韓唱和壎篪集>의 의사학적연구」를 발표하였다(함정식, 2009).

 

위의 연구 조사들은 주로 의원(醫員)들의 문답(問答)에 관심이 있었지, 의원들 사이의 한시 수창(酬唱)에 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문답과 수창을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문답하는 자리에서 수창이 이루어지기도 하며, 수창하던 자리에서 문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12차에 걸쳐 조선과 일본 의원들 사이에 주고받은 필담과 수창집을 모두 정리하여 자료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도표를 통해 필담이나 창수의 현장과 필담자, 출판지, 출판년도를 정리해 놓으면 백여 년에 걸친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의 출판 양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이 언제부터 상업적으로 출판되었는지, 필담과 창수 이후 어느 만큼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 출판되었는지, 속집이나 후집, 재판이 나왔는지, 간행본과 필사본이 함께 유통되었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3.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 서지사항

 

12차에 걸친 조선통신사의 필담 창수집 가운데 의학에 관련된 책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상우, 차웅석, 김호의 연구에서 나름대로 목록을 정리하여 소개했지만, 이 목록은 필자가 수집한 180종 가운데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 40종을 출판과 관련하여 정리했다는 데에 특색이 있다.

 

에도시대 출판자와 출판물을 정리한 야지마 겐료(矢島玄亮)의 徳川時代出版者出版物集覧 2) 에는 당시 혼야(本屋)의 주소도 실려 있어 이를 참조했으며, 우리가 수집한 필담창수집이 그 목록에 실려 있는지 여부도 비교하여 밝혔다.

번호는 연세대 필담창수집 번역팀에서 작업순서로 정한 일련번호이다. 일련번호가 없는 자료는 번역계획에 없었지만 국내외 도서관에서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를 복사하는 과정에 추가로 확인하여 확보한 자료이다.

 

2) 矢島玄亮, 徳川時代出版者出版物集覧 , 万葉堂書店, 1976은 약 15여개 문고의 서적목록과 일본 약 7여개 지역 도서관 서적목록, 개인서적 목록, 교토대․게이오대․도후쿠대 등 대학 소장 문헌목록을 자료로 하여 에도시대 출판자와 출판물을 정리한 책이다.

 

번호 書名出版地 出版者刊․ 寫 出版年수록

여부 저자 편집자 ․ (참여자) 수창 ․ 필담장소

4차 朝鮮人筆談未詳未詳× 野間三竹

白士立 京都

7차 桑韓筆語唱和集

차7005

和韓唱酬集

(東里筆語)

柳震沢

鄭斗俊

차8019

鷄林唱和集4 京都京師書坊(松栢堂/

奎文舘

瀬尾源兵衛

刊1711년

(正徳1)

○ 竹田定直

奇斗文

藍島

차8032

桑韓醫談京都皇都書肆

万屋喜兵衛

刊1713년

(正徳3)

× 北尾春圃大垣

8차 兩東唱和後錄大阪浪速書林 村上清刊1712년 × 奇斗文/ 梯氏, 京都

 

번호 書名出版地 出版者刊․ 寫 出版年수록여부

저자 편집자 ․ (참여자) 수창 ․ 필담 장소

038 三郞․植田伊兵衛(正徳2) 村上溪南,

周南, 杏仙

西本願寺

9차 韓客贈答集

9차 藍島鼓吹小野士厚/權道藍島

9차055 桑韓唱酬集1권 大阪-河内屋宇兵衛

-嶝口太兵衛

刊1720년 ×

9차056 桑韓唱酬集2권 大阪〃刊1720년 ×

9차057 桑韓唱酬集3권 大阪〃刊1720년 ×

9차058 桑韓唱和塤篪集1권 京都奎文舘刊1719년 × 白興銓?

9차060 桑韓唱和塤篪集3권 京都〃刊1719년 ×

9차061 桑韓唱和塤篪集4권 京都〃刊1719년 ×

9차065 桑韓唱和塤篪集8권 京都〃刊1719년 ×

9차066 桑韓唱和塤篪集9권 京都〃刊1719년 ×

9차068 桑韓唱和塤篪集11권 京都〃刊1719년 ×

10차077 對麗筆語江戸書房

出雲寺和泉掾

刊1720년 × 管道伯先生江戸

淺草

本願寺

10차081 桑韓醫問答江戸東武書肆 須(寸)

原茂兵衛

刊1720년 × 趙崇壽/

河村春恒

浅草 本願寺

10차082 桑韓鏘鏗錄1권 京都(刊)圓屋淸兵衛

(藏)広文堂

刊1748년 × 趙崇壽

百田安宅 

大阪

10차083 桑韓鏘鏗錄2권 京都〃刊1748년 × 〃〃

10차084 桑韓鏘鏗錄3권 京都〃刊1748년 × 〃〃

10차086 善隣風雅1권 京都奎文館1748년 佐藤養浩尾張

性高院

10차091 兩東筆語1권 寫? × 趙崇壽 丹羽貞機江戸

10차092 兩東筆語2권 寫× 〃〃

10차093 兩東筆語3권 寫× 〃〃

10차105 朝鮮筆談(元丈) 寫× 趙徳祚,金徳崙

野呂元丈・

野呂元順

浅草 本願寺

10차106 朝鮮筆談1권(河村春

恒)

寫× 河村春恒浅草 本願寺

10차107 朝鮮筆談1권(河村春

恒)

寫× 河村春恒

10차109 韓客筆譚寫× 良醫

橋元勲  

江戸

本願寺

10차116 和韓唱和附錄大阪(刊)称觥堂(渋川与

) 市

酔墨斎

刊1748년 × 田中常悦大坂

本願寺

142

HUR Kyung Jin : Japanese Travels of Joseon Medicine

l 醫史學

 

4.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의 출판 양상

 

위의 도표를 보면 4차부터 의학관련 필담집이 정리되었다. 초기에는 두 나라 지식인들이 만나서 필담을 나눌 만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이뤄지지 않았을 뿐더러, 조선 측에서 의원이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나라 의원이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 도표에서 다음의 몇 가지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1) 필담 창수의 장소

통신사가 한양에서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쓰시마였는데, 의학 관련 필담이나 창수가 쓰시마에서 이루진 적은 없다. 상대할 만한 의원이 쓰시마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지빙례(易地聘禮)로 쓰시마에서 국서 전달이 이뤄진 12차 통신사행에는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번호 書名出版

出版者刊․

出版年수록

여부

저자 편집자 ․

(참여자)

수창 ․ 필담

장소

10차 韓客治驗? 樋口道與

藏板

刊1749년 樋口淳叟大阪

11차126 鷄壇嚶鳴刊× 北山彰

南玉

(제술관)

大阪

本願寺

11차127 鷄壇嚶鳴寫×

11차138 桑韓筆語江戶西村源六刊1764년 ○ 山田正珍

良醫(9회)

東都

11차142 兩東鬪語乾× 李佐國

松本興長

淺草

本願寺

11차143 兩東鬪語坤× 李佐國

橫田準大

淺草

本願寺

11차146 倭韓醫談刊× 坂上善之

良醫(6회)

淺草

本願寺

11차147 倭韓醫談寫× 坂上善之

李佐國

淺草

本願寺

11차158 和韓醫談× 山口忠居

良醫李佐國

尾張

性高院

 

확인한 자료만 계산해보면 교토(京都, 京師), 나니와(浪華, 大阪), 에도(江戶, 東京) 등에서 필담 창수가 많이 이뤄졌다. 에도(江戶, 東京)는 사행단이 한 달쯤 머물며 국서를 전달하고 외교적인 절차를 수행한 곳이라 당연히 일본 의원들이 조선 의원들을 찾아올 기회가 많았으며, 교토(京都, 京師)와 나니와(浪華, 大阪) 경우에는 대도시여서 의원들이 많아 필담할 기회가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출판사가 많은 지역이어서, 일본 의원이 출판을 목적으로 조선 의원을 찾아간 경우도 있었다. 8차 사행에서 양의(良醫) 기두문(奇斗文)과 다케다사다나오(竹田定直)가 외딴섬 아이노시마(藍島)에서 만난 것이나 9차 사행에서 양의 권도(權道)가 오노 시코(小野士厚)를 아이노시마(藍島)에서 만난 것은

특별한 경우인데, 풍랑 때문에 아이노시마(藍島)에 정박해서 순풍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노시마(藍島)는 정기적인 기착지이긴 하지만 11차 경우에는 한 달이나 머물러 필담 창화가 더욱 활발했는데, 출판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11차 사행에서 일본 의원 야마구치 타다오키(山口忠居)가 양의 이좌국(李佐國)을 오와리(尾張)의 쇼코인(性高院)으로 찾아온 것도 특별한 경우인데, 오와리(尾張, 현재 名古屋)은 교토(京都, 京師), 나니와(浪華, 大阪), 에도(江戶, 東京) 다음으로 출판이 활발했던 곳이다.

 

단일 건물로 가장 많이 필담 창수가 이뤄진 곳은 에도의 아사쿠사(淺草) 혼간지(本願寺)인데, 국서를 전달하고 여러 행사를 치르는 동안 비교적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아사쿠사(淺草) 혼간지(本願寺)로 찾아온 일본 의원들은 에도 출신만이 아니라, 여러 지방에서 모여들었다. 의원직은 세습이어서, 일본 의원들은 부자가 함께 찾아온 경우도 많았다.

 

2) 출판된 지역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은 교토(京都), 에도(江戶), 오사카(大阪) 순으로 출판되었다. 이 순서는 필자가 박혜민과 함께 조사 발표한 「조선통신사 필담 ․ 창수집의 일본 출판 - 1차 사행(1607년)~8차 사행(1711년)을 중심으로」의 순서

와도 일치한다. 일본의 상업출판 중심이 교토(京都)에서 에도(江戶)로 넘어가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에도시대 때 사용된 혼야(本屋)의 명칭은 다양하여 서사(書肆),서림(書林),서점(書店),서방(書房),서루(書樓), 서당(書堂), 서포(書舖), 서고(書賈), 서상(書商), 서방(書坊) 등으로도 불렸다. 예로 들어 8차 사행의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 은 게이시쇼보(京師書坊)의 쇼하쿠도(松栢堂)와 게이분칸(奎文舘)에 의해, 8차 사행의 상한의담(桑韓醫談) 은 고토쇼시(皇都書肆)의 요로즈야 키헤에(万屋喜兵衛)에 의해, 역시 8차 사행의 양동창화후록(兩東唱和後錄)은 나니와쇼린(浪速書林) 무라카미 세이자부로(村上淸三郞) ․ 우에다 이헤에(植田伊兵衛)에 의해, 10차 사행의 대려필어(對麗筆語) 는 쇼보(書房) 이즈모

지이즈미노죠(出雲寺和泉緣)에 의해 간행되었다.

 

혼야(本屋)는 서적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수요층이 두터운 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다.3) 에도시대 출판자 ․ 출판물을 정리한 야지마 겐료(矢島玄亮)의 徳川時代出版者出版物集覧 에는 당시

혼야(本屋)의 주소도 실려 있는데, 본고의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 목록의 혼야(本屋) 중 자세한 주소를 알 수 있는 것은 2종이다. 상한의담(桑韓醫談) 의한모토(板元)는 요로즈야 키헤에(万屋喜兵エ)로 교토 고지도오리(小路通)에, 양동창화후록(兩東唱和後錄) 의 한모토(板元)는 무라카미 세이자부로(村上清三朗) ․우에다 이헤에(植田伊兵衛)인데, 우에다 이헤에(植田伊兵衛)의 상세한 주소는 알 수 없고 무라카미 세이자부로(村上清三朗)가 오사카 고라이바시(高麗橋)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중 교토의 경우, 京都書肆変遷史―出版文化の源流에 에도시대 혼야(本屋)지도가 실려 있다(京都書肆変遷史編纂委員会, 1976:

488).

 

3) 필담창수한 지역과 출판한 지역의 관계

대부분 필담 창수가 이뤄진 지방에서 출판도 이뤄졌다. 그 지역 인사들이 관련된 데다, 시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통신사 일행이 그 지역을 지나갈 때에 독자들의 관심도 아주 높았으므로, 에도에서 국서를 전달하고 교토(京都)로 돌아올 때쯤엔 이미 필담창수집이 간행되었다. 그랬기에 출판년도가 대부분 통신사행이 이뤄진 해이다.

 

3) 특히 本屋는 薬屋, 白粉屋, 香具屋, 絹布屋등과 함께 모여 있었다. 당시 서적은 약, 화장품, 향수, 비단 등과 같이 趣味的・装飾的인 상품로 취급되고 있었고 이러한 상품을 판매하는 동업자들끼리 뭉쳐 있는 것이 영업에 좋았다고 한다. (長友千代治의 책, 26쪽 참조)

 

아이노시마(藍島)는 인구가 적은 섬이었기에, 그곳에서 출판이 이뤄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8차 사행의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 4권은 교토(京都) 교시쇼보(京師書房)에서 간행되었다. 오와리(尾張)에도 출판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오와리(尾張) 쇼코인(性高院)에서 필담이 이뤄진 선린풍아(善隣風雅)는 교토(京都) 게이분칸(奎文館)에서 간행되었다.

 

오사카(大阪)에서 필담이 이뤄진 책들은 초기에 오사카에서 주로 간행되었지만, 후대로 내려오며 상당수 교토에서 간행되었다. 드물지만 양동창화후록(兩東唱和後錄) 같이 교토에서 필담한 책이 오사카에서 간행된 경우도 있다.

고라이바시(高麗橋)에 위치하고 있었던 혼야(本屋) 무라카미 세이자부로(村上清三朗)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4) 유통 상황

1682년의 화한창수집(和韓唱酬集) 부터 의학필담이 보이지만, 의학 관련 필담이 본격적으로 상업 출판된 것은 1713년에 간행된 8차 사행의 상한의담(桑韓醫談) 부터이다.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 이 2년 전인 1711년에 간행되었지만, 본격적인 의학 필담은 아니다. 상한의담(桑韓醫談)은 학습서로 편집하기 위해 일본 의원들이 본격적인 질문을 시도한 책이다. 필담을 가장 많이 시도한 일본 의원은 가와무라 슌코(河村春恒)인데, 10차 사행 때에 상한의문답(桑韓醫問答)과 조선필담(朝鮮筆談)을 편집하였다.

제목에 ‘의(醫)’자가 들어 있는 경우에는 독자를 분명히 상정하고 출판한 책이다. 필담창수집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제목을 다양하게 붙였는데, 4차에 ‘조선(朝鮮)’만 붙였다가, 7차엔 ‘상한(桑韓)’을 붙여 일본과 조선을 함께 칭하였으며, 10차에 와선 ‘화한(和韓)’, ‘왜한(倭韓)’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선린(善隣)’, ‘한객(韓客)’ 등의 수식어를 쓰거나, 필어(筆語), 필담(筆談), 의담(醫談), 창화(唱和) 등의 용어를 바꿔 쓰며 40여 종의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이 간행되었다.

 

필자가 위에서 확인한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들을 야지마 겐료(矢島玄亮)의 徳川時代出版者出版物集覧에 실린 목록과 비교해본 결과, 대부분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의학 관련 필담 창수집들이 출판계의 주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대나 후대에 많이 유통되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야지마 겐료(矢島玄亮)의 연구가 철저하지 못한 것도 이유겠지만, 의학 관련 필담창수집이 현재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5. 의학 관련 필담집의 범주

두 나라의 의원이 만나 의학에 관해 필담을 나눈 기록은 당연히 의학 관련 필담집의 범주에 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의학 관련 필담은 이루어졌다. 1764년 나니와(浪華, 大阪) 덴쿄쿠쓰(天橋窟)에서 출판된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를4) 예로 들어본다.

 

4) 필자는 이 필담집을 번역하여 2009년에 지만지 고전선집 405번으로 간행하였다(新山退甫,

허경진 역, 韓客人相筆話 , 지만지, 2009). 인용문은 이 책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다.

 

11차 통신사 일행이 나니와에 도착하자 나니와의 관상가 니야마 다이호(新山退甫)가 조선인의 골격과 인상이 일본인과 다른 점에 흥미를 느끼고 제자들과 함께 찾아와 관상을 보며 필담을 나눈 뒤에, 이 필담을 정리하고 초상을 덧붙여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 를 출판하였다. 이들의 필담은 1764년 1월부터 4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이 자리에 일본 의원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조선 의원은 양의(良醫) 이좌국(李佐國)과 남두민(南斗旻)이 참석했으며, 니야마 다이호의 제자 마토(馬東)가 조선통신사 일행의 초상을 그렸다. 관상은 골격과 피부, 혈색을 주로 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질병이나 건강 등의 의학적 견해를 주고받았으며, 체질적으로 병골(病骨)이라는표현도 많이 나온다.

 

사람의 목숨을 치료하는 의원도 자신의 건강과 수명은 결국 관상가에게 질문했는데, 니야마 다이호(新山退甫)는 이좌국의 얼굴에 병색이 있으니 장수하기 힘들다고 진단하면서, 잘 수양하여 수명을 늘리라고 권하였다. 이 책에 실린 다른 인물들의 초상화만 비교해보아도 이좌국이 병골인 것은 분명하다.통신사 일행은 에도에서 국서를 전달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나니와에 들렸는데, 4월 어느날 니야마 다이호(新山退甫)가 다시 객관으로 찾아와 이좌국을 만났다. 일본 관상가들은 특히 양의 이좌국의 관상에 흥미를 가져 여러 차례 만났는데, 이날은 여러 명이 종합적인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모암이 말했다.

“애써 오셔서 찾아주시니 고맙고 고맙습니다. 당신이 도안의 스승이라니 반드시 상을 잘 보시겠군요. 저는 도안과 매우 친합니다. 당신이 그의 스승이라니 매우 반갑습니다.”

다이호가 말했다.

“다행히 다시 만나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또 말했다.

“저는 지금 귀국의 약롱(藥籠) 제도를 빌려 보길 원합니다.”

모암이 말했다.

“당신도 의원입니까?”

다이호가 말했다.

“저는 본래 의약을 좋아하고 유독 의약에 관한 서책들을 흠모해 왔습니다.”

모암이 말했다.

“날이 저물어 볼 수가 없으니 조용한 날을 기다려봅시다.”

다음 날 다시 가 약롱을 한 번 보길 청하자, 모암이 말했다.

“어제도 오셨고 오늘도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약롱은 오늘 새벽에 배편에 보냈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이호가 말했다.

“제가 늦게 온 것이니 어찌 한스러워하겠습니까.”

모암이 말했다.

“함께 온 두세 명은 누구입니까?”

다이호가 대답했다.

“모두 저의 문인입니다.”

모암이 말했다.

“그 두세 사람이 나의 골상과 기색을 살펴 장래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으면 합니다.”

문인 히로모토(廣元)와 六羽, 시게아키(成亮)가 각각 상을 보고 말했다.

“천정(天停)이 높고 트였으며 눈썹과 눈이 트이고 수려합니다. 학당이 밝고 빛나며 부위가 바르고 곧습니다. 성정을 잡음이 단정하고 학예가 남보다 뛰어나며 초운이 일찍 발달할 상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다만 인당에 흠이 있고 양쪽 눈썹이 소라5)처럼 되었으며 금갑이 양쪽 다 박약하고 혈색은 푸르고 어두운 기운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고독하고 우환이 있는 상입니다. 아마도 형제의 연이 없을 것이며 부모를 일찍 여의었을 것입니다. 자손을 얻기 어렵고 신변에는 재액과 질병이 많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5) 혹은 달팽이. 관상에서 눈썹 끝이 달팽이 모양같이 말려 있으며 눈썹이 살이 보일 정도로 성기게 나 있는 것은 성격이 강직하고 지혜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재주를 지녔으며 권위와 복록이 많은 상이라고 한다.

모암이 말했다.

“저는 과연 몸에 병이 있고 매우 고독합니다. 이미 부모를 여의었고 또 형제가 없습니다. 오직 다행히 일찍 등과했을 뿐입니다. 두세 분의 관상풀이는 진실로 밝은 견해입니다.”.

 

李慕菴

慕菴曰, “勞來相訪, 多荷多荷, 君是東菴之師, 想必善相矣. 僕與東菴親切, 君爲其師,

欣喜欣喜.” 退曰, “幸得再會, 何喜如之.” 又曰, “願今僕借覽貴邦藥籠之制度.” 慕菴曰,

“君亦爲醫乎否?” 退曰, “僕素好醫藥, 獨愛玉函.” 慕菴曰, “日暮不得見, 以待從容之

日,” 次日往復, 請覽藥籠一過. 慕菴曰, “昨訪今枉荷荷, 藥籠今曉而送於舟, 無可奈何.” 退曰, “僕來得晏, 亦胡恨之.” 慕菴問曰, “所伴來二三子, 何人乎?” 退答曰, “皆僕之門

人也.” 慕菴曰, “願二三察吾骨法氣色, 而詳論將來之事.” 門人廣元·六羽·成亮, 各相

之曰, “天停高闊, 眉目疎秀, 學堂明潤, 部位平直, 主秉性端正, 學藝過人, 爲初運早發

之相, 可賀可賀, 但印堂有缺破, 雙眉生旋螺, 金甲兩薄弱, 血色帶靑暗, 此孤獨憂患之相

也, 恐兄弟無緣, 父母早剋, 兒孫難養, 軀多災疾, 如何?” 慕菴曰, “僕果有身病, 而大孤

獨也, 旣剋父母, 又欠兄弟, 惟幸早歲登科耳, 二三子之鑑, 誠爲明見.”

 

니야마 다이호는 이때 이틀이나 잇달아 이좌국을 찾아왔다. 제자들에게 그의 관상을 보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이좌국이 조선에서 가지고 온 약롱(藥籠)을 빌려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 의원들이 인삼이나 약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지만, 관상가까지도 큰 관심을 가졌다. 첫날 조성빈은 하야시 도안에게 소합향원(蘇合香元)으로 복채를 치렀는데, 스승 니야마 다이호는 약롱 보기를 원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의 약롱 보기를 원하는 이야기는 통신사 사행록에도 자주 나오는데, 조선 의원들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다가 새벽 일찍이 배편으로 부쳤다며 거절하였다.

이좌국과의 필담 바로 뒤에 의원 남두민(南斗旻)과의 관상 필담이 이어진다.

니야마 다이호의 관상 필담이 끝난 뒤부터 제자 유구치 다메미쓰(湯口爲光)의 관상 필담이 이어지는데, 서기 김인겸(金仁謙)은 그에게 자신의 눈병에 관해 질문하였다.

 

서기 퇴석 다메미쓰가 상을 보고 말했다.

“골법이 모두 못하고 기색 역시 못하고 눈의 신기는 더욱 못합니다. 그러나 단지 이 손바닥의 사마귀가 기이하니 부귀해지고 학예가 남보다 뛰어날 상이지만, 병에 걸리고 후손이 끊어지는 두 가지 근심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퇴석이 말했다.

“요즘 눈병이 생겼으니 언제 낫겠습니까?”

다메미쓰가 말했다.

“언제 나을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퇴석이 말했다.

“마의도자(麻衣道者)께서 어찌 모르는 것이 있으십니까?” 다메미쓰가 말했다.

“제 학술이 미숙해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퇴석이 말했다.

“제 손바닥 안의 점은 어떻습니까?”

다메미쓰가 말했다.

“이 큰 사마귀는 매우 묘하니, 천만인 중에도 보기 드문 것입니다.”

 

書記退石

爲光相之曰, “骨法皆不如氣色亦不如, 眼神尤不如, 而只奇此掌痣, 主富貴學藝過人,

而難免病厄絶嗣之二患也.” 退石曰, “方有眼疾, 何時可瘳?” 爲光曰, “吾未知, 其何時

瘳.” 退石曰, “麻衣道者, 有何不知之乎?” 爲光曰, “僕術未熟, 故難斷之.” 退石曰, “吾

掌中黑子, 何如?” 爲光曰, “此大痣最爲妙, 千萬人中見之也稀矣.”

 

일행 가운데 의원이 두 사람이나 있었지만 일본 관상가에게 자신의 병세를 질문한 것을 보면, 의원도 눈병은 제대로 못 고친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양의 이좌국이 일본 의원들과 필담을 나눈 기록은 화한의화(和韓醫話)나 왜한의담(倭韓醫談)에 실려 있지만,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 같은 필담집도 상학(相學)을 다룬 의학 관련 필담집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6. 전문적인 의학필담의 편집과 특성

초기에는 뛰어난 의원이 가지 않아, 의학 필담이 없었다. 양의(良醫)는 7차 사행(1682) 때에 정두준(鄭斗俊)이 처음 초청받았는데,6) 의학필담은 다른 필담창수집과 달리 인원이 제한되었다. 시나 주고받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일본의원들이 조선 의원을 만날 때에는 자기네들보다 앞서가는 조선 의학에 관해 질문하고, 자신들의 의문점을 풀어보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인원이 제한되었는데, 1대 1로 만나 길게 이야기를 나누는 경향이 많았다. 

 

6) 萬機要覽 통신사 員額에 “良醫1명, 醫員2명”이라 했는데, ‘良醫’ 항목에 “倭人의 청이있어서 뽑아 보냈다”고 하였다. 증정교린지 제5권 ‘通信使行’에도 ‘良醫’ 항목에 “왜인이 요청하면 의술에 정통한 자를 가려서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通文館志 제6권 ‘良醫’ 항목에는 “왜인에게서 요청이 있으면 의술에 정통한 자를 뽑아 보낸다(倭人有請則術業精通者擇送)”라고 하였다. 良醫가 임시직이지만, 일반 의원보다 뛰어난 의원을 선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만남에 긴 시간을 가지기도 했으며, 여러 차례 만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양의(良醫) 정두준(鄭斗俊)과 일본 문사 야나가와 타쿠(柳震沢)의 필담을 정리한 화한창수집(和韓唱酬集) 의 「동리필어(東里筆語)」를 의학필담 첫머리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본초(本草)라는 주제로 필담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시문과 의학필담이 처음 분리되어 의학관련 내용만 편집한 책이 1713년 고토 쇼시(皇都書肆) 요로즈야 키헤에(万屋喜兵衛)에서 45장 분량의 목판본으로 출판된 기타오 슌포(北尾春圃, 1658-1741)의 상한의담(桑韓醫談) 이다.7) 7차사행 때에 간행된 책은 상한필어창화집(桑韓筆語唱和集) 이라는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필담과 창화가 섞여 있다. 8차사행 때에 나온 책들도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 이나 양동창화후록(兩東唱和後錄) 은 창화(唱和) 중심이다. 이 두 책이 모두 조선 양의(良醫) 기두문(奇斗文)을 만나 창화한 내용이지만, 의학 내용이 중심을 이루지는 않았다. 기타오 슌포(北尾春圃)도 시를 지을 줄 알았기에,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 에 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잘 짓는 제술관이나 서기를 만나기보다, 양의(良醫) 만나기를 원했다. 1711년에 8차사행이 오가키(大垣)에 도착하자 그는 줄곧 조선 의원들을 따라다니며 필담을 시도하였다. 의학필담을 집필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던 것

이다.8)

 

7) 필자는 이 책을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서 찾아내 복사하였다.

8) 필담 상대자인 조선 의원 奇斗文에 대한 소개만 보더라도 兩東唱和後錄 에서는 “良醫前直

長”이라고 간략하게 기록한 데 비해서, 桑韓醫談 에서는 “호가 嘗百軒이고, 벼슬은 朝散大

夫典涓司直長”이라고 소개하였다. 필담 상대자인 奇斗文에 관해 자세하게 조사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는 신묘통신사의 귀국 길인 1711년 음력 12월 1일 밤과 2일, 3일에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오가키(大垣)의 젠쇼지(全昌寺)에서 기두문과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상한의담(桑韓醫談) 은 모두 그 내용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은 기타오 슌포(北尾春圃)가 아들 5명 중 의술을 가르치고자 했던 첫째 슌치쿠(春竹), 둘째 슌린(春倫), 셋째 도우센(道仙)과 나눈 의학 관련 문답이다(김형태, 2009a: 4).

사행단이 에도(江戶)로 가는 길은 일정이 바빴으므로 자세

하게 필담을 나눌 여유가 없었지만,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비교적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심정적인 여유도 있었으므로 조선 의원들이 시간을 내주기 쉬웠다. 그는 둘째 아들 기타오 슌린(北尾春倫)에게 필담을 정리하게 하고, 서문과 본론, 발문, 부록의 정연한 형태로 편집하였으며, 본문 좌우에 한문훈독(漢文訓讀)까지 표기해 상업출판할 목적을 분명히 했다. 철저하게 독자를 의식하고 편집한 것이다.

 

필담창화집에서 의학관련 필담만 분리해 편집 출판한 편집방식은 세 가지 의도가 있다. 첫째, 조선에서 몇십 년 만에 건너온 조선 의원들을 만나 한가롭게 시나 주고받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의학에 관한 논의만 주고받는 전문가의 모습을 보였다. 둘째, 부록에서 세 아들과 의학에 관한 문답을 주고받는 형식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세 아들도 가업을 이을 자격이 있음을 보였다. 조선 의원의 권위를 힘입어 세 아들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의원으로 소개한 것이다. 셋째, 둘째 아들에게 상한의담(桑韓醫談) 의 서문을 쓰게 해,

그의 실력이 조선 의원들에게 부끄럽지 않음을 과시하였다. 둘째 아들 기타오 슌린(北尾春倫)은 과연 1719년 9차사행 때에 일본 의원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신유한(申維翰, 1681~?)이 그의 다섯 아들과 창수했다는 기록이 해유록(海遊錄)에 보인다. 기타오 슌린(北尾春倫)은 1763년 사행 때에 아들 기타오 모테츠(北尾孟哲)를 이끌고 필담 창화에 참여해, 3대에 걸쳐 필담창수에 관여한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성과가 물론 여러 대에 걸친 이들의 가업(家業)에 힘입은 것이지만, 기타오 슌포(北尾春圃)가 필담창수에서 의학관련의 필담만 전문적으로 분리시켜 상한의담(桑韓醫談) 을 편집 출판한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본 의학계 전반에 걸친 이들 가문의 영향력은 차치하고라도, 필담창수집에 관련해서만은 이들 가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것이다.

 

기타오 슌포(北尾春圃)가 이 책을 상업적으로 판매하려고 편집한 의도는 당시 일본 의원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인삼(人蔘)에 관한 논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2회부터 7회 문답까지 인삼(人蔘)과 사삼(沙蔘), 만삼(蔓蔘) 등의 구별법과 약성(藥性)을 다루었는데, 10면과 12면에 약물도(藥物圖)를 수록하였다. 그는 기두문(奇斗文)을 만나러 가기 전에 질문 순서, 다시 말하면 상한의담(桑韓醫談) 의 목차를 구상했으며, 의학교재답게 구색을 맞추어 질문하고, 필담 내용을 편집한 다음, 그림까지 덧붙여 독자들에게 내어놓았다. 2회문답에서는 “이때 중국 사삼을 그에게 보여줘 두문이 씹어 맛볼 수 있었다(是時以唐沙參示之, 斗文能嚼, 而味之.)”는 구절까지 편집해, 시각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미각적인 효과까지도 노렸다. 창화집(唱和集)을 편집 출판하는 의원들과는 의도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기타오 슌포(北尾春圃)는 막부의 의원이 아니라, 오가키(大垣) 시중에서 대대로 개업했던 일반 의원이었다. 개업의 기타오 슌포(北尾春圃)가 전문적인 필담집 상한의담(桑韓醫談) 을 출판하자, 막부 의원들이 이 책을 구입해 보고 자극받았다. 아직 의학 교재가 활발하게 출판되지 못했던 일본 의학계에서는 이 필담집을 한동안 의술 교재로 인정하였다. 1748년 간행된 상한의문답(桑韓醫問答) 에서 1711년 기두문(奇斗文)과 기타오 슌포(北尾春圃)의 만남을 언급하면서 필담을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7. 맺음말

 

조선 역관이 외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통로였던 것처럼, 일본에서는 의원들이 중국과 조선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유관(儒官)들의 지위가 낮은데다, 의원들처럼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의 대표적인 유서(類書)로 인정받는 서물유찬(庶物類纂) 에는 조선 제술관 이현(李礥)의 서문이 실려 있다. 1711년에 간행된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에 일본 의원 이노 쟈쿠스이(稻生若水)가 조선 제술관 이현(李

礥)에게 서물유찬(庶物類纂)의 서문을 부탁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지금도 서물유찬(庶物類纂) 에 그 서문이 실려 있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이 서문이 조선 의원의 글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필자 이름을 삼한동곽(三韓東郭)이라고 썼기 때문인데, 삼한(三韓)은 물론 일본 문인들이 조선을 가리킬 때에 많이 쓰던 지명이자 국명이며, 조선을 표기할 때에 사용하던 수식어이다.

 

제자 니와 쇼하쿠(丹羽正伯, 1691~1756)가 이어받아 1738년에야 완성한 이 책에는 전체 3,590종의 동식물이 소개되어 있다. 따라서 이노 쟈쿠스이(稻生若水)의 필담은 당시 그의 관심사인 박물학적 지식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정독한 그는 본초학에 관해 이미 방대한 규모의 지식을 체계화한 상태였지만, 조선 학자의 권위에 힘입기 위해 서문을 부탁하였다. 비록 양의나 의원이 아닌 제술관의 서문이었지만, 의학 관련 필담

의 연장선 상에서 서물유찬(庶物類纂)의 서문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양국 문사의 교류는 주로 시문창화가 중심이었다. 필담창화집의 제목에는 “창화(唱和)”, “창수(唱酬)” 혹은 “수창(酬唱)”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고 수록된 내용도 창화시(唱和詩)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필담은 정중한 인사

말이나 간단한 문답에 불과한 경우가 많아, 시문창화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현상은 1719년의 9차 사행까지 계속되는데, 1711년의 8차 사행에서 기두문(奇斗文)과 기타오 슌포(北尾春圃)의 필담을 편찬한 상한의담(桑韓

醫談) 에서 본격적인 의학 필담은 시작되었다. 7차 사행에서 처음 초청된 양의(良醫) 정두준(鄭斗俊)이 본격적인 의학 필담을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양의(良醫)가 계속 초청되면서 의학 필담의 수준이 높아지고 세분화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자료>

萬機要覽 .

庶物類纂 .

增正交隣志 .

通文館志 .

新山退甫, 허경진 역, 韓客人相筆話 (지만지 고전선집 405번), 지만지, 2009.

투고일 2010. 5. 16. 심사일 2010. 5. 17. 게재확정일 2010. 6. 6.

 

<연구논저>

김호, 「朝鮮後記通信使와 韓日醫學交流」, 朝鮮通信使硏究 6, 2008.

김형태, 「18세기 전반기 통신사 의학필담의 전개 및 내용적 특성 - 兩東唱和後錄 , 桑韓醫談

, 桑韓鏘鏗錄 下, 桑韓醫問答 을 중심으로」, 조선통신사연구 8, 2009a.

김형태, 「<桑韓醫談>과 <桑韓醫問答> 비교 연구 - 대화 방식 및 내용적 특성을 중심으로」, 열상고전연구 28, 2009b.

김형태, 「의학필담 형식과 내용의 상관성 및 변천에 대한 연구 - ‘~ 록(錄)’, ‘~ 의담(醫談)’, ‘~ 필어(筆語)’를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 37, 2009c.

서근우·오준호·서지연·김태은·홍세영·윤성익·차웅석·김남일, 「<韓客治驗>에 기재된 의안 연구」, 大韓韓醫學原典學會志 19-4, 2006.

안상우 외, 동아시아 傳統醫學圈所在韓國本醫學文獻共同調査硏究 , 한국한의학연구원,2003.

차웅석, 「桑韓醫談과 韓日醫學文化交流」, 韓國醫史學會志 17-2, 2004.

함정식, 「<桑韓唱和塤篪集>의 의사학적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허경진·박혜민, 「조선통신사 필담창화집의 일본 출판」, 한국어문학연구 54, 2010.

京都書肆変遷史編纂委員会, 京都書肆変遷史―出版文化の源流 , 京都府書店商業組合, 1976.

吉田忠, 「朝鮮通信使との医事問答」, 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 24집, 東北大學日本文化硏究所, 1988.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 思文閣出版, 1966.

矢島玄亮, 徳川時代出版者出版物集覧 , 万葉堂書店,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