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곡 양봉근(春谷楊奉根)의 생애
보건운동가로서 춘곡 양봉근(春谷楊奉根 1897-1982)의 생애
신영전*‧윤효정**
* 한양의대 예방의학교실(교신저자)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1 서론
춘곡 양봉근(春谷楊奉根 1897-1982)은 개항 일제시대 해방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의사(醫師)로서민족해방운동가1)이자 보건운동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다일제시대 양봉근은 3ㆍ1운동과 신간회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민족해방운동의 일익(一翼)으로 보건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중후반경 만주로 활동지를 옮긴 양봉근은 해방직후에는 임시정부 동북지부에서 정치부장으로 재만 조선인들의 귀국을 돕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에 남아 연변지역 조선족들을 위한 병원이자 교육기관인 연변병원 및 연변의과대학의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생애와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1930년 초의 보건운동에 대해서도 거의 소개된 바 없다. 이러한 연구의 빈약은 일차적으로 보건의료사 부문의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한다. 또한 양봉근과 같이 일제식민지시기에 진보사상에 대한 친화성을 가지고 활동하고 더욱이 만주 등지로 이주해 그 곳에서 생을 마친 이들에 대한 연구는 관심과 자료의 부족 등의 이유로 제한적인 연구만이 이루어져왔다
이 논문은 춘곡 양봉근의 생애와 활동을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데 일차적 목적을 두면서 1930년대 전반 보건운동기에 나타난 그의 보건운동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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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에 우리 사회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해야 했는데 하나는 정치적 독립이며 또 하나는 봉건잔재를 없애고 민주적인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사회혁명이었다(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00 p 13-15) 여기서 ‘민족해방운동’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노력했던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모두 일컫는 말이다
2) ‘춘곡(春谷)’은 양봉근의 호이며 ‘수표학인(水標學人)’은 그가 개원한 「경성협화의원」과 「보건운동사」가 위치했던 곳이 수표정 42번지였기 때문에 붙여진 필명으로 보건운동 의 권두언의 필명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양봉근의 필명이 분명해 보인다 ‘북풍학인(北風學人)’을 그의 필명으로 보는 이유는 첫째 1931년 11월호 삼천리 에 ‘수표학인’의 이름으로 실린 「만국여성의 결합현상」과 같은 해 12월호에 ‘북풍학인’이라는 이름으로 실린 「중국 부인운동」이 내용과 문체상 동일인의 것으로 보이며 둘째 1933년 4월호 삼천리 에 역시 ‘북풍학인’의 이름으로 실린 「쏘비엣트의 보건시설관」역시 그 내용과 문체상 양봉근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셋째 양봉근의 정치적 지향과 지인들의 상당수가 ‘북풍계’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북풍학인’을 양봉근의 필명인 가능성이 높다고 간주하고 인용하였다
3) 양창걸(楊暢杰)은 양봉근이 회녕시절 양아들로 삼은 양치오(楊治伍)의 장남으로 양봉근이 연길시로 이사하면서 연길로 데려와 함께 양봉근이 사망할 때까지 함께 생활을 한 양손자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거주하고 있다
4) 차남은 철근(哲根) 삼남은 제근(濟根)이다
5) 구포항을 중심으로 한 활발한 외국과의 교류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 지방은행인 ‘구포은행’이 설립되기도 하고 최초로 권투도장 등이 세워지기도 하였다(북구신문 2003년 7월 10일)
6) 백이성 개화기 구포와 화명의 민족학교 북구신문 1999년 3월 5일
7) 양득우 면담기 2004년 10월 10일
우선 그의생애와 활동을 통해 민족문제 인식의 계기 진보사상의 수용과정 등을 추적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양봉근의 정치지향과 1930년대 전반기 보건운동의 성격과 의미를 살펴보았다 또한 양봉근의 보건운동과 19세기말 유럽에서 시작된 사회의학(社會醫學)과의 친화성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양봉근의 생애와 보건운동이 가지는 보건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 연구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당시 신문의 관련 기사와 삼천리 농민 별건곤 비판 전선 보건운동 등 대중잡지에 실린 양봉근(필명으로 춘곡(春谷) 춘곡생(春谷生) 수표학인(水標學人) 북풍학인(北風學人) 사용)의 저술을 주된 자료로 활용했다 2) 특히 1932년에 발간된 보건운동은 양봉근이 편집 겸 발행인이자 주간을 맡은 잡지로 그의 보건운동관을 살펴보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한편 후손들인 차남 양득우(楊得宇)와 양손자 양창걸(楊暢杰)3)의 증언과 소장품을 추가적인 자료로 활용하였다
2 생애와 활동
1) 어린시절
양봉근은 1897년 5월 19일 동래구 화명리(華明里)에서 중화(中和) 양씨가(楊氏家)에서 양문택(楊汶澤)과 윤시의(尹時儀)의 삼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4)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구포(龜浦)지역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포구로서 일찍이 상업이 번창하고 교역이 성했던 곳으로 근대문물을 일찍 받아들였고5) 그 중에서도 그의 고향 화명리는 양반촌으로 한학 등 교육열이 높은 곳이었다 6) 아버지 양문택은 15-20마지기의 농지를 갖고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살았으나 손자들에게 서예 연습을 엄하게 시키는 등 교육열이 높았다 한다 7) 양봉근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데 최초로 공식적인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912년 16세가 되던 해에 후에 구포만세운동을 함께 주도한 임봉래(林鳳來)의 후임으로 구포 사립화명학교 교사로 취임하였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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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백이성 개화기 구포와 화명의 민족학교 북구신문 1999년 3월 5일
9) 그의 차남 양득우에 따르면 서울에서 ‘경’자 들어가는 중학교를 다녔다고 하고 양손자인 양창걸은 부산에서 다닌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10) 손자 양창걸의 말에 따르면 양봉근의 경성의전시절 섹스피어 연극공연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학생들끼리 돈을 걷어 일본순사를 매수한 후 무사히 연극 공연을 진행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한다(양창걸 면담기 2005년 3월 23일)
11) 장규식 YMCA학생운동과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한국근현대사연구 2002 20 131-135
12)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0 1993 p 233
13) 김호일 191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고찰 우인 김용덕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태광문화사 1988 p 502
14) 국가보훈처 경성지방법원 3 1 독립선언 관계자 심문조서 국가보훈처자료집 1919
화명학교는 1908년에 설립된 민족학교로 맹자(孟子)와 산학통편(算學通編) 초등대수학(初等代數學) 고등소학이과(高等小學理科) 등을 교과용 도서로 사용했다 8) 어디에서 중학교를 다녔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9) 이후 22세가 되던 1918년 양봉근은 경성의전에 입학한다
2) 경성의학전문학교 시절(1918-1922)
경성의전 입학 후 양봉근은 연극공연 등의 동아리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활달한 학생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10) 정확한 년도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920년을 전후하여 양봉근은 경남 양산출신의 김엄전(金儼全)과 결혼하여 두 아들 대우(大宇) 득우(得宇)를 둔다
그의 경성의전 시절은 3 1운동 등 독립에 대한 열기가 분출하던 시기였으며 특별히 그의 동문들 중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이러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김형기(金炯璣) 한위건(韓偉健) 나창헌(羅昌憲) 등이 그 대표적인 이들이다 신문기사 등 다양한 기록 속에서 나타나는 양봉근의 경성의전 학생시절 주요 사건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1) 3 1만세운동
양봉근이 경성의전 본과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은 제1차대전의 종결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등 국제질서의 지각변동이 예상되는 해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서울지역의 학생층은 ‘조선독립’의 전망을 가지고 1월부터 회합을 거듭하면서 독자적인 대중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후 민족대표측의 제안에 따라 학생대표들은 3월 1일 시위에 합류하고 그 대신 학생대표들이 주도하는 제2의 시위운동을 3월 5일에 감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11)
당시 경성의전 학생들은 3 1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양봉근과 같은 구포출신이면서 당시 재경유학생 회장을 맡고 있었던 김형기(金炯璣)와 양봉근과 동급생이었던한위건(韓偉健)은 학생대표로 3 1운동을 주도했으며 12) 3월 1일과 3월 5일의 시위로 구속된 경성의전 학생은 31명으로 당시 참여 학교 중 최고 수치를 기록했고13) 독립선언서 및 청원서 관련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문을 받은 361명 중 경성의전 학생이 38명이나 되었다14)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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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임봉래 하숙방과 불당과 구포장날 신동아 1965 3 1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3 1운동사(하) 1983 p 191
16) 교남(嶠南)은 영남(嶺南)을 말하며 양봉근 역시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 국사편찬위원회 경성의전 3 1운동 관련자 신문조서 대한민국독립운동사자료집 16 1993 p 166
18) 국가보훈처 대한민국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p 236
19) 나창헌은 경성의전생으로 3 1운동 때 피체되었다가 1919년 8월에 보석으로 출옥한 직후 「대동단」에 가입하여 조직 확대와 동단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에도 관계했으며 「대동단」발각 후에는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대동단(上海大同團)」의 활동을 주도했다(국가보훈처 2001)
20) 정남용은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 승려 출신으로 1919년 4월 최익환을 통해 전협을 소개받고 「대동단」에 입단하였고 1919년 5월 23일 「대동단」검거 직후 조직재건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 일조각 2003 p 94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1989 p 117-120)
21) 판사가 편지를 들어 보이며 “이 편지는 어째서 피고의 손에 있었는가?”라고 묻자 정남용은 “그것은 양봉근(楊奉根)이 내게 보낸 편지인데 김우관(金愚觀)이라고 한 것은 나의 변명(變名)이다 그리고 양봉근은 그 편지에 적힌 곳에 사는데 의학전문학교 학생이다”라고 대답한다 “그 사람은 대동단원인가?”라고 다시 판사가 묻자 정남용은 “그렇지는 않고 아는 사이이다”라고 대답하였다(정남용신문조서 제4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1988)
양봉근이 3월 1일의 시위와 3월 5일의 시위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경성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고향 구포로 내려와 화명학교에서 친분을 맺은 임봉래(당시 구포면사무소 서기)를 찾아가 서울과 평양의 3 1운동 소식을 상세히 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구포면에서도 거사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임봉래 집에서 윤경(尹徑) 류기호(柳基護)를 만나 거사를 도모하게 된다
양봉근이 서울로 돌아 온 후 임봉래 등은 구포장날인 음력 2월 28일(양력 3월 29일) 정오 장꾼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15) 당시 김형기의 심문기록에 따르면 경상남도출신 재경학회모임인 교남학생친목회(嶠南學生親睦會)16)가 있었고 김해출신 경성연합의전(세브란스) 학생인 배동석(裵東奭)이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17) 그가 경상남도의 민족대표를 추진하기 위하여 마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18)는 기록 등으로 볼 때 구포 출신인 양봉근 역시 김형기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향인 구포지역의 시위운동을 독려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과의 직․간접적 접촉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이하 대동단)」은 1919년 3 1운동 직후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였다 대동단은 대동신문 을 간행하기도 했고 구한국의 왕족 의친왕 강(堈)을 국외로 탈출하게 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추대함으로써 외교적 효과를 얻으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 의친왕의 망명을 주도했던 대동단원은 전협 나창헌 19) 정남용(鄭南用)20)이었는데 이중 정남용의 총독부 검찰신문조서에 양봉근의 이름이 등장한다 정남용이 양봉근과 「대동단」의 관계를 부인하고 있고21) 양봉근이 대동단원으로 활동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어 그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대동단」의 개인별 단원 모집 방식을 고려해 볼 때22) 양봉근이 「대동단」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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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동단」은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거나 현재 민족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인물들을 개인적으로 포섭하는 방식으로 단원을 충원하였는데 정남용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쓸 만한 인물들을 사람들에게 들을 때마다 수첩에 적어두었다고 한다(이현주 앞의 책 p 95)
23) 박철하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연구 숭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논문 2003 p 101
24) 이현주 앞의 책 p 45
25) 신좌섭 서홍관 쿠보(久保武)망언사건 미발행 논문
26) 동아일보 1921년 6월 5일
27) 동아일보 1921년 6월 8일
28) 동아일보 1921년 6월 8-9일 조선일보 1921년 6월 5일 하지만 논조는 쿠보교수의 개인적인 자질을 비판하거나 “양 민족의 공존공영을 해치는 행동이다”는 것이 주류였다(신좌섭 서홍관 앞의 논문 p 3에서 재인용)
더욱이 「대동단」에는 1919년 시점에서 그리고 훗날 양봉근과 인연을 맺게 되는 이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나창헌은 양봉근과 경성의전 동급생이었으며 전협은 양봉근이 조선학생대회에 참여하던 당시 조선학생대회를 이끌어 간 인물이었다 23) 또한 해방 직후 양봉근이 관여하였던 「동북한국민회연합회」의 회장이었던 신숙(申肅) 역시 「대동단」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24)
(3) 경성의전 동맹휴학주도
1921년 5월 이른바 ‘쿠보(久保武)망언사건’으로 경성의전의 조선인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감행하였고 당시 본과4학년이었던 양봉근은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단순히 학내문제를 넘어 조선사회 전체에 물의를 일으킨 ‘쿠보망언 사건’은 신좌섭·서홍관의 연구25)에서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그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1년 5월 26일 경성의전 해부학강의실에서 두개골 한 개가 분실되는데 당시 대한의원과 경성의전 해부학교수를 지내면서 조선인에 대한 체질인류학적·인종론적 연구에 몰두한 대표적 인물인 쿠보는 조선인 본과학생들에게 두개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조선 사람은 원래 해부학 상으로 야만에 가까울 뿐 아니라 너희의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전영 너희들 중에 가져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쿠보의 망언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조선인 학생들은 6월 4일 동맹휴학을 결의하게 되었다 26)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학교 측은 본과 조선인 학생 194명 중 9명에게 퇴학을 185명에게 무기정학을 명하게 되는데 당시 퇴학처분을 받은 사람은 본과4학년 양봉근 이필근(李弼根) 본과 3학년 이약유(李洛瑜) 장세구(張世九) 신진우(申鎭雨) 전진극(全鎭極) 본과2학년 김정상(金鼎相) 백승진(白承鎭) 본과1학년 박경진(朴敬鎭)이었다 27) 당시 경성의전 동맹휴학은 한 달여 간 지속되면서 주요 일간지에 보도되었고 조선 내에서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등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동아일보 를 비롯한 여러 신문의 사설들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특히 쿠보 교수의 발언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28)
당시 양봉근이 친척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래를 생각하여 자기를 희생한다함은 생물학자의 생물적 본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적 치욕으로 말하면 어찌 사소한 쿠보박사 일언으로만 말하겠습니까만은 저는 오직 와신상담할 뿐이라 배우고 힘씀이 그것을 설욕하는 유일한 방책이라 생각하여 주의하고 있습니다”29)라고 그의 심정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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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양봉근 친척 형에게 보낸 편지(차남 양득우 소장) 1921년 6월 17일
30) 신좌섭 서홍관 앞의 논문 p2-3
31) 양봉근 앞의 편지
32) 홍석률 일제하 청년학생운동 강만길 엮음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 315
33) 동아일보 1921년 4월 18일
34) 동아일보 1921년 8월 5-7일 9일 12-13일 동아일보 1921년 9월 19일
35) 동아일보 1921년 8월 10-11일 19일
36) 동아일보 1921년 8월 2일 9일
37) 1921년 10월14일자 동아일보 에 따르면 경성의전학생 24명과 평양여고보생 23명이 수학여행으로 일본
을 다녀왔다는 기사가 있으며 손자 양창걸의 말에 따르면 일본수학여행 당시 일본 국회의사당을 방문하였는데 거기에서 “국회의원들끼리 막 서로 싸우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 이러한 경력 때문에 후에 일본첩자로 몰려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양창걸 면담기 2004년 11월 5일)
사건이 날로 비화되자 의전교우회는 6월 11일 인사동 계명구락부에 모형 교섭위원 6명을 선정하고 중재에 나섰으며 학부형회는 같은달 16일 운니동 교동공립보통학교에 모여 교섭위원 4인을 선정하고 역시 교섭에 나섰다 여론의 도움을 받아 이 사건은 결국 6월 24일 “퇴학을 가입학으로 정학을 복교로 해제한다”는 학교 측의 타협안을 놓고 논의 끝에 가부 거수결을 거쳐 27일부터 등교할 것을 결정하였다 3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봉근은 “사건의 골자인 쿠보박사의 항척(抗斥) 문제는 지금은 오히려 제2의 문제가 되고 퇴학과 정학자의 복교문자가 주위를 점하게 됨이 안타깝다”31)고 술회하였다
이 사건은 제1차대전 이후 일본 근대화의 일환으로 조선에서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인종주의의 수용과 적용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며 양봉근에게 있어서는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던 계기이자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던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었다
(4) 조선학생대회 순회강연단 활동
쿠보사건으로 곤혹을 치른 1921년 여름 양봉근은 조선학생대회 순회강연단에 연사로 참가하였다 1920년 5월에 조직된 조선학생대회는 지·덕·체 삼육을 도모하는 계몽적 단체로각종 학술강연회·하기 순회강연회 등을 주된 활동으로 하였다 32) 1921년 4월 16일 조선학생대회는 제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선거를 진행하였는데 쿠보사건으로 함께 퇴학처분을 받았던 이필근이 부회장으로 장세구가덕육부장으로 선출되었다 33) 양봉근은 이들과의 인연으로 조선학생대회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함께 퇴학처분을 받은 김정상 박경진 역시 이 활동에 참여하여 강연을 하였다 34)35) 당시 양봉근의 강연제목은 ‘지방적(地方的) 노력’ ‘조선인의 조로성(早老性)’ ‘우리의 죄악(罪惡)’ 등으로 36) 그의 관심사와 주장이 단순히 보건의료부문에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일본 수학여행과 졸업 후 정신과 조교생활
졸업을 앞둔 1921년 10월 양봉근은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일본 수학여행의 구체적인 경험들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일본 국회의사당을 견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37)1922년 졸업 후 양봉근은 총독부병원 정신병 연구실에서 조수직을 하게 된다 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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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당대중국조선족인물록 1999 p 436
39) 손자 양창걸에 따르면 양봉근이 총독부 정신병 연구실에서 조수직을 할 때 쿠보교수가 정신병으로 입원하였다는 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쿠보박사의 發狂」제목 하에 “휴가겸 여행을 준비하던 쿠보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세가 악화일로에 있다고 한다”는 기독신문 (1922년 5월24일)의 보도내용과 일치한다
40) 양봉근 정신병이 늘어감은 문명의 영향(가)-(아) 동아일보 1930년 12일 6일-19일
41)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앞의 책 p 436
42) 동아일보 1927년 3월 25일
43) 동아일보 1929년 11월 24일
44) 이현주 앞의 책 p 251 또한 당시 「대종교중앙청년회」는 전조선청년당대회의 주최단체 중 하나였다
45) 전조선청년당대회 주최문 동아일보 1923년 1월 30일
46) 김명구 한말 일제강점기 민족운동론과 민족주의 사상 부산대 박사논문 2002 p 133-137
그가 왜 정신과를 전공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인문사회과학적 성격이 강한 정신과를 선택하게 된 동기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훗날 그는 그의 전공과 관련하여 동아일보에 정신병과 관련한 연재물을 싣기도 하고 40) 연변병원에서 정신병관련 연구논문을 쓰기도 하고 정신병원 의사로도 활동하게 된다 41)
3) 진보 사상의 수용기(1922-1924)
양봉근의 일생에 있어 1922-1924년 사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의 사상적 색채와 논리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양봉근은 기존과는 달리 ‘농촌문제대관(1927)’ 42) ‘노동운동의 사적고찰(1929)’43) 등 민중층의 현실 민중운동과 관련된 주제의 강연을 진행한다 강연의 제목만을 가지고 추단하기는 어려우나 이러한 관심사의 전환은 진보사상과의 접촉이 일정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1922-1924년 사이 양봉근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사상적 전환을 가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에 양봉근은 「대종교중앙청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3월 24일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대종교중앙청년회」대표회원으로 참가했다는 사실만이 확인된다44) 당시 대종교는 종교단체이자 다양한 노선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는 민족해방운동 조직이었으며 양봉근의 대종교활동은 「교남학우회」를 설립하고 대종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고향사람인 안희제(安熙濟)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특별히 전조선청년당대회의 참가는 양봉근이 당시 사회주의 등 진보 사상을 수용하고 사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대회는 20여 개 청년단체들의 연합주최로 1923년 1월부터 준비되었는데 이들은 민족주의 진영의 문화운동 구체적으로는 같은 시기 본격화된 물산장려운동을 “민중을 떠난 운동”이라 비판하면서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45) 1920년대 초반 조선사회에서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문화운동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진영의 운동론으로 자본주의 근대 문명을 지향하면서 자본가·지주의 인도주의적 각성과 배려를 통해 노농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46) 그러나 사회주의 등 진보사상을 수용한 청년층 내에서는 문화운동을 비판하면서 노농층의 의식적 자각과 조직적 단결에 기초한 해결방식을 추구하는 집단이 점차 성장해 갔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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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유시현 1920년대 전반기 조선의 사회주의 사상 수용과 발전 간행위원회 엮음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하) 창작과 비평사 1990 p 786-787
48) 류시현 ‘문화정치’ 하 국내 민족해방운동의 진전 강만길 외 앞의 책 p 91
49) 양봉근이 「신간회」울산지회장을 맡고 있던 시기 「신간회」울산지회의 회합장소가 「울산의원」이었던 것으로 보아 의원명은 「울산의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0) 백이성 3 1운동의 주역 동산 김형기 선생 낙동강사람들 1997 9 29-36
51) 울산고등강습회의 후신으로 울산지역 최고학부였다(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울산광역시사 2002 p 643)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동아일보 1926년 1월 18일) 독지가 조임준(曹任俊)이 오백원을 내놓아 운영난을 해결하였다(동아일보 1926년 9월 6일) 「해영학원」은 조선어강습회 등을 개최하는
등 민족교육에 힘쓴다(동아일보 1926년 8월 13일)
52) 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 649 조선일보 1925년 11월 6일
53) 동아일보 1927년 3월 25일 동아일보 1929년 11월 24일
54) 1920년대 천민계급 특히 백정들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운동으로 1923년 5월 진주 「형평사(衡平社)」 조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백정의 지위향상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1928년 제6회 대회를 계기로 민족운동 계급운동으로서의 형평운동으로 발전 특수계층의 인원운동차원을 벗어났다 한때 40만 명의 회원을 가진 전국적 결사체였다(한국근대사사 1990 p 180)
그 결과 이들은 전조선청년당대회로 결집되었고 비록 일제에 의해 대회 도중 해산되었지만 당시 성장하던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48) 양봉근이 「대종교중앙청년회」에 입회한 시기나 「대종교중앙청년회」내에서의 활동 등은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으나 1923년 그가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를 전후한 시점 사회주의 등의 진보사상을 접촉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4) 울산활동기와 「신간회」참여(1925-1931)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양봉근은 늦어도 1925년경에는 울산으로 이주하여 1930년초반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울산의원」4 9)을 개원하고 울산지역 민족운동에 참가했다 아마도 울산이 고향인 구포와 가깝고 경성의전 동문이자 같은 고향사람인 김형기가 3·1운동 주동이유로 옥살이를 한 후 우여곡절 끝에 의사자격을 취득하고 울산을 거쳐 기장에서 병원을 개원하였는데 50) 김형기와의 개인적 친분관계가 그의 이주와 관련이 있었던 듯하다
울산에서 양봉근은 교육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울산청년회」가 맡아 운영하고 있던 「해영학원(海英學院)」을 맡아 이사로서 강사를 겸임하여 운영한다 51) 또한 1925년 11월 6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1925년 10월 24일 울산 「해영학원」의 주도 하에 사립학교 연합대운동회를 기회로 12개소 사학의 교원 및 경영자들이 모여 교육민중화의 실현을 촉진하기 위하여 「울산사학회」를 발기하였다 이들은 교수법의 통일 교원강습회 개최 아동보건 순회강연 개최 등을 결의하였다. 임원간사는 박병호 양봉근 손정수 이규장 김병한 양대응 등이다”52)고 보도하고 있다
「울산사학회」참가와 더불어 양봉근은 ‘농촌문제대관(1927)’ ‘노동 운동의 사적고찰(1929)’ 등의 주제로 대중강연 활동을 전개했다 53) 울산시기 양봉근과 함께 강연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볼 때 이 시기 양봉근은 진보적인 농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54)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울산농보」의 창간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표 1>
년월일 활동 비고
1925 (추정) 울산 「해영학원(海英學院)」이사1
1925 10 24 「울산사학회」발기2
1927 3 21 농촌문제강연3
- 농촌문제대관(양봉근)
- 조선농촌의 금석관(今昔觀)(박병호)
- 농작개량에 취하야(박성진)
- 울산농보 발행취지(이규정)
울산농보 발행
11 23 「신간회」울산지회 설립위원장4
1928 3 17 「신간회」울산지회 위원장 선출5
1928 9 1 울산여자강연6
- 여자의 불평과 남자의 각성(정칠성)
- 일반가정위생(양봉근)
울산여자청년회 주최
11 23 노동문제연설회 강연7
-노동문제와 천도교(김문성)
-노동문제의 사적고찰(양봉근)
-노동의 근본의(박병호)
울산노동조합주최
(출처) 1 동아일보 1926년 9월 6일 2 조선일보 1925년 11월 6일 3 동아일보 1927년 3월
25일 4 동아일보 1927년 11월 27일 5 동아일보 1928년 3월 25일 6 동아일보 1928년 9월
5일 7 동아일보 1929년 11월 24일
표 1 양봉근의 울산에서의 활동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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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동아일보 1927년 11월 27일 동아일보 1927년 12월 16일
56) 동아일보 1928년 3월 25일
57) 동아일보 1928년 7월 7일 1929년 1월 2일 1929년 2월 22일 1929년 4월 26일 조선일보 1929년 9월 4일
58) 동아일보 1930년 11월 11일
양봉근은 1927년 ‘민족단일당’이라는 표어 아래 「신간회」가 출범하자 울산지역의 활동가들을 규합하여 동년 12월 13일 설립대회를 계획하지만 하루 전인 12일 경찰의 금지명령으로 실패한다 55) 그러나 결국 1928년 3월 17일 울산지회 설립에 성공하였으며 양봉근은 울산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56) 이후 양봉근은 1930년 3월까지 울산 지회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 울산지회의 활동은 1) 교육문제의 해결과 노동야학진흥책 2) 청년운동의 통일촉진과 여성운동의 촉성방안 3) 지회의 하부 단위인 반의 조직과 활성화로 요약된다 57)
이후 양봉근은 1930년 3월 19일 울산지회의 임원개선 당시 지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온 양봉근은 1930년 11월 개최된 「신간회」전체대회대행중앙집행위원회에서 본부의 검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58) 1930년 11월 새롭게 출범한 「신간회」본부는 강화된 탄압 속에서 당시 세계대공황을 계기로 폭발된 민중운동의 요구를 포괄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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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애숙 세계대공황기 사회주의진영의 전술전환과 신간회 해소문제 역사와 현실 1994 11 53-61 「신간회」해소론은 「신간회」의 자기해체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새로운 형태의 협동전선을 추구한 것으로 민족협동전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소론자들의 협동전선론은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지도의 관철을 전제로 한 점에서 협동전선의 폭을 축소시켰으며 그 실현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특정 계급의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민족 내의 광범위한 민중층을 포괄한 민족협동전선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양봉근의 논리와는 차별점을 지닌다 하겠다.
60) 조선일보 1931년 1월 12일
61) 동아일보 1931년 5월 18일
62) 유한동 사설검사국 대참사록 대한교육협회는 무엇을 하는가 별건곤 1931 45 21-23
63) ‘민중보건운동’이란 말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사용되어지다 사라지는 용어 중의 하나로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당시 ‘대중운동’으로 대변되는 사회운동의 맥락과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64) 창립된 보건운동사 기관지발간과 보건 사상철저보급 동아일보 1931년 12월 17일
또 이해 말부터 제기된 급진적 사회주의 진영의 「신간회」해소론을 극복해야 했다 「신간회」해소론은 코민테른의 「12월테제」에 기반한 것으로 당시 해소론자들은 이 테제에 근거해서 민족협동전선체로서의 「신간회」의 발전 가능성을 부인하고 「신간회」에 포괄된 노동자와 농민을 각각의 조합에 편성하여 계급적 역량의 강화를 주장했다 59) 이에 「신간회」본부측은 해소는 역량의 분산을 초래할 뿐이라는 판단 아래 반일적인 제계급 제계층의 협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신간회」해소론에 대응했다
양봉근 역시 해소반대의 입장에서 해소를 막고자 하였으며 1931년 1월 「신간회」본부가 “해소분규의 진정을 위해” 특별위원들을 선출해 각 도를 순방하게 했을 때 양봉근은 충청남북도로 파견되었다 60) 그러나 해소를 막으려는 본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1931년 5월 15-16일 제2회 전체대회에서 「신간회」해소안은 가결되고 만다 61)
5) 민중보건운동기(1931-1932)
양봉근은 「신간회」중앙검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던 1930년 11월 시점 서울로 올라왔고 이 시기에서 1931년 사이 수표정 42번지에 「경성협화의원(京城協和醫院)」을 개원했다 협화의원은 「조선교육협회」건물의 한 부분을 쓰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62) 그리고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1931년부터 1932년 사이 「보건운동사(保健運動社)」를 설립하고 보건운동(保健運動) 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매우 활발한 민중보건운동63)을 전개해 나갔다
(1) 「보건운동사(保健運動社)」의 설립 및 운영
1931년 12월 15일 양봉근은 수표정 42번지에 임시 사무소를 두는 「보건운동사」를 설립한다 이와 관련하여 1931년 12월 17일자 동아일보 는 「보건운동사」설립에 관한 내용과창립대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64)
“조선민중의 보건운동을 기함에는 팔할 대중을 가진 농장에서 또는 공장과 가두에서 혹은 학교에서 먼저 보건위생의 사상 선전과 적극적으로 건강증진의 민중적 운동을 조사연구하고 이것을 발표함으로써 실천케 하자는 의의있는 보건운동사의 창립대회는 지난 십오일(일) 오후 7시 반 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양봉근씨 사회와 이인규씨 취지 설명으로 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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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보건운동 제2호(1932년 3월)에는 제3호에서 청춘보건문제를 특집으로 다룰 것을 예고하고 있으나 발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66) 보건운동 제2호(1932년 3월) 말미에 「보건총서예약모집」이라는 광고가 실렸는데 발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1932년 5월에 우선 제1집 유아양육법 과 제2집 부인병의 예방급요법 을 출판할 예정이었다
67) 춘곡 민족과 계급관계의 구명-나의 BAC적 멧가지- 삼천리 1932 4-3 13-17
68) 공장노동자에 대한 무료건강진료 순회진료 보건운동사 지부 설치는 실제 시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공장노동자에 대한 무료건강진료 계획은 1932년 2월 25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순회진료는 1931년 12월 1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보건운동사 지부 설치는 보건운동 1932년 3월호에 ‘지부모집 광고’에
출석한 인사는 사십 명에 달하여 성회를 이루었으며 임시의장으로 김탁원씨를 선출하여 경과보고와 규칙통과가 있었고 내빈 중에서 안재홍 강매 서정희씨외 축사가 있었다 당야(當夜)에 선거된 간부와 사안의 중요한 부문은 다음과 같다
[사안] 보건운동에 관한 잡지 도서 간행과 강연회 영화회 전람회 강습회 임시개최와 순회진료 학술연구 실제조사 지회설립 등
서무재정부 양봉근(장) 김남성(金南醒) 유인원(柳寅元) 박한복(朴漢福)
조사연구부 이선근(李先根)(장) 이용설(李容卨 ) 김탁원(金鐸遠) 이길용(李吉用)
선전부 이인규(李仁奎)(장) 안석주(安碩柱) 이홍직(李鴻稙) 이원용(李源容) 함춘원(咸泰元) 이찬영(李讚永)
체육부 서상천(徐相天)(장) 김규면(金圭冕) 장권(張權)
의료부 김동익(金東益)(장) 김정득(金丁得) 고문용(高文龍) 기용숙(奇龍淑) 유상규(劉相奎)”
「보건운동사」가 편찬한 잡지 보건운동 창간호에 실린 「보건운동사사칙」에는 「보건운동사」의 설립목적을 “조선민중에게 보건위생사상의 보급 및 대중적 실천의 철저를 기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네 가지 사업을 시행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표 2> 실제로 신문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보건운동사」의 활동내용들은 <표 3>과 같다
<표2>와 <표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보건운동사」가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강연회와 잡지 및 도서 발간을 통한 보건위생사상의 보급이었다 강연회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폐결핵과 신경질환의 예방과 치료법 부인과 소아의 특질과 질병 등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 질병을 연령과 성별에 따른 특질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이는 보건운동 이나 보건도서의 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보건운동 제2호에서는 유아와 부인 보건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으며 제3호65)에서는 청춘보건을 특집기사로 다루고자 했다 또한 1932년 5월에 발간 예정이었던 보건도서66) 역시 유아양육법 부인병의 예방급요법 으로 이러한 구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보건운동사」는 무산아동과 공장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무료건강진단과 도시세민층을 대상으로 한 시민객담검사를 시행하는 한편 농민층을 대상으로 한 순회진료와 보건운동사 지부설치를 계획하기도 했다 이는 “전민족 내에서 절대다수인 농민 노동자 도시세민층의 생존과 영”67)을 중시한 양봉근의 의지를 반영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68)
사항 구체내용
조사연구에 관한 사항 민중보건위생에 관한 학술연구
민중의 일반적 건강상태와 특수질병조사
민중보건에 적의한 체육도의 조사연구
체육에 관한 사항 민중체육장설치장려
체육의 민중화
선전에 관한 사항 기관잡지 보건운동 의 간행 및 보건에 관한 도서발간
강연회 강습회 영사회 전람회개최
의료에 관한 사항 순회진료
표 2 「보건운동사사칙」에 나타난 사업서 그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69) 양봉근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 삼천 1932 4-3 20-21
70) 1932년 10월 사회령중앙실비진료원 의사 유석창에 의해 “널리 의료계의 새 소식을 알리고 동포의 보건 향상에 이바지하기 위하여”를 목표로 창간되었으며 주간 타블로이드판으로 1937년까지 지속 간행되었다고 하나(전종휘 한국현대의학 의료문화연표 인제연구장학재단 1994 p 57) 현재까지 원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34년에 2호부터 4차례의 발간 기록이 나와 있어[제2호(3월17일자 기사) 제3호(4월24일자) 제4호(6월15일자) 호수불명(8월18일자)] 창간년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71) 동아일보 1932년 3월 31일
72) 초기에는 잡지명을 민중보건운동 으로 하려고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에 실린 이여성(李如星)의 「민중보건운동의 실제적 방략토구」에 따르면 「보건운동사」의 기관지인 민중보건운동 지를 이 운동선전과 이 운동단체간의 연로통신기관지로 할 것을 권하고 있다
73) 발간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나 3월호에 공지되어있는 4월호 안은 다음과 같다
청춘기의 생리작용/청춘기의 심리작용/청춘기와 부부생황/청춘기와 독신생활/성발육과 청춘기/청춘기와 범죄/청춘기와 스포츠/자살은 왜 청춘기에 많은가/정신쇠약과 청춘/학생기에 많은 생식성 신경쇠약/여직공의 특유질병/청춘의 회고기
(2) 보건운동 의 발간
양봉근의 말처럼 1931년과 1932년은 보건 체육분야에 다양한 조직들이 생겨나는 “조선민중보건운동기의 선전기”였다. 69)또한 이 시기에 보건운동 을 비롯하여 보건시보 70)보건공론 71)등 다양한 보건관련 잡지도 발간되었다 보건운동 72)은 1932년 2월 1일 보건운동사에 의해 창간호가 발행되었고 편집겸 발행인은 양봉근이었다 한 부당 가격은 20전이었으며 잡지에 반 년분 1원 10전 1년분 2원 20전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월 발행할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동년 3월호(제2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73)
양봉근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창간사에는 보건운동 잡지의 발간목적이 “조선민중의 참다운 행복을 도래하는 다양한 민중운동” 중 한 영역으로써 보건운동이 필요하며 “목적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승리를 손꼽는 현명한 장수가 평소에 병마(兵馬)를 살찌우듯” 민중의 건강을 보호 증진시킬 필요를 강조하고 있다
일시 「보건운동사」의 활동 출처
1931 12 15 「보건운동사」창립 동아일보
1931년 12월 15일
1931 12 19 19일 오후 8시 「보건운동사」에서 각부 부장회의가 열어 2가지 중요한 사항 논의
1 1932년 1월 중에 시민 전반에 걸친 객담 기생충 검사의 구체적 실시방법 계획
2 1932년 1월 하순에 각 계급별 수준에 맞춘 보건문제에 관한 강좌를 개최와 조선체육연구회의 사업을 도와줄 것을 계획 동아일보1931년 12월 21일
1932 1 30 부인소아문제강좌(제1회 강좌) 개최
장소 및 일시 경성보육강당 1월 30일 오후 7시
강좌내용 및 일반사항
1 연제와 강사
(가) 부인의 체질과 질병 대학병원부인과 윤태권 씨
(나) 소아영양문제의 중대성 대학병원소아과 이선근 씨
2 입장자격 일반가정부인 직업부인 여학생급 기타 여성에 한함
3 입장무료
동아일보 1932년 1월 28일
1932 2 1 잡지 보건운동 창간 동아일보
1932년 1월 31일
1932 2 20~2 21 제1회 시민무료검담 개최(시민보건 위해 검담실시)
장소 및 일시 동아 조선 중앙 매신 등 네 신문사 앞
검담 방법 조선문 내의 네 신문사 앞에 검담긔를 배치하야 시민들로 하여금 그 그릇과 검담권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아츰 식전의 가래(담)을 배터 넣은 후 오전 10시까지 원래의 장소에 가져와서 그릇번호에 넣어두면 보건운동사의 김동익과 10여명의 조수가 즉시 검분 이와 같은 방법으로 3월 6일(일요일)까지 행할 것임
동아일보 1932년 2월 20일
1932 2 23
검담결과발표 28명의 담 중에서 페디스토마균(토질균) 보균자 2명 폐결핵 보균자 1명 동아일보
1932년 2월 23일
1932 2 25 3월부터 무산아동에게 무료건강진단 실시예정을 발표
신청기일 3월 10일 까지
신청주소 수표정 42 보건운동사
동아일보 1932년 2월 25일
1932 2 28 제2회 의학강좌 [제1회 의학강좌] 개최
장소 및 일시 조선교육협회강당 2월 28일 오후 7시
강좌내용 인생의 질병전선(성대의학부 김성진) 폐결핵의 예방급치료법 (성대의학부 김동익)
동아일보1932년 2월 26일
1932 3 6 제2회 시민무료검담 개최(시민보건 위해 검담실시)
동아일보1932년 2월 20일
1932 3 19 제3회 시민무료검담 개최 동아일보
1932년 3월 19일
1932 3 22제3회 검담결과 발표 중앙일보
1932년 3월 22일
1932 4 16 고성 시내 외 학원 강습소 야학교 등 40여 강습학원생 5천여 명 무료로 건강진단
(4 23 4 30 5 7 5 14 5 21 5 28 6 5에도 실시계획)
동아일보 1932년 4월 16일
1932 4 30
1932 4 10 동아일보에 보건운동사 주최 체육강연과 실연회
장소 및 일시 천도교기념관 4월 16일 오후 8시
1932 4 12 중앙일보에 체육강연과 실연회의 장소와 시일 변경
장소 및 일시 중앙청년회관 4월 30일 강연과목은 그대로
동아일보1932년 4월 10일
1932 4 30 제3회 보건강좌(체육강연과 실연회) 보건운동사 주최
장소 및 일시 중앙청년회관 4월 30일
연사 및 연제 보건운동의 정신(이OO) 중국무술에 대하야(이병학) 체력향상의 실천방법(서상천)
실연항목 보건체조 체육OO 덤블링 중국무술 OO 역도 OO용운동법(중앙체육연구소원 일동)
중앙일보 1932년 4월 12일
1932 6 16 보건운동사 주최로 보건강연회
장소 및 일시 중앙기독청년회관 6월 16일 오후 8시
연사 및 연제 혈액과 혈형에 대하야(세전교수 최동) 신경위생에 대하야(유일준)
동아일보 1932년 6월 8일
1932 7 15
中央基靑會友部와 함께 하기 보건대학강좌 주최
제1강좌 현대인의 신경질(김택환) 폐결핵은 어떠케 퇴치할까(윤치영박사)
1932 7 16 中央基靑會友部와 함께 하기 보건대학강좌 주최
제2강좌 하기전염병의 예방과 처치법(김동익) 가공할 기생충의 해O(민병기)
동아일보 1932년 7월 15일
1932 7 18 中央基靑會友部와 함께 하기 보건대학강좌 주최
제3강좌 소아불량증의 가정간호법(이선근) 임산부의 섭생법(신필호)
1932 7 19 中央基靑會友部와 함께 하기 보건대학강좌 주최
가정외과 응급 처치법(박창훈 박사) 혈형으로 성격을 구별하는 법(정석태 박사)
표 3 일간지 잡지에 나타난 「보건운동사」의 활동
ᆢ
74) 1938년 5월 15일에 창간한 보건잡지(주관 임경호 편집 및 발행자 안복록)로 의약관련내용에 국한한 내용으로 되어있고 노골적으로 일제의 위생 정책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75) 비슷한 시기에 발간된 보건시보 보건공론 등과의 비교도 필요하나 현재까지 이들 잡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76) 思想에 關한 情報(1) 문서제목 [朝鮮癩病患者救濟硏究會] 集會取締狀況報告(通報) 문서번호 京鍾警高秘제12839호 발송일자 1931년 10월 20일 발송자 京城鍾路警察署長 수신자 京城地方法院檢事正
77) 양득우 면담기 2004년 10월 10일
78) “서울 시내의 의사 중 여러분이 만주경기가 좋다고 만주로 갔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본 즉 시원치 못하여 도로 오는 이도 있다 그리고 서울에 있던 이가 낙향하는 이도 많다 협화의원장이요 신간회 검사위원장으로 있던 양봉근씨도 함북 회녕으로 가서 개업하였다”(刀圭界의 寵才 삼천리 1933 5-10 111)
이러한 글 속에 보건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열악한 민중들의 건강수준을 향상시키고 위생사상을 보급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건운동 의 창간호에는 「각계 인사의 보건관」이 실렸는데 여기에 글을 쓴 인사들은 당시 조선사회의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계열 중요 인사를 총망라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고자들의 구성은 「신간회」해소 이후에도 계속 민족협동전선을 주장해 온 양봉근의의지를 반영한다 즉 1930년대 전반기 민족운동 진영의 적대적 분화 속에서도 양봉근은 보건운동 이라는 잡지를 통해 민족협동전선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보건운동 의 내용을 살펴보면 보건운동의 영역을 단순히 보건의료부문에 국한하지 않고 교육 체육분야 등 매우 폭넓게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보건운동 에는 각계인사의 보건관 체조 유아 영양법에서 성교육 피임법연구 에로 생리학 아편중독 마작 의료의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주제를 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러시아 영국 중국 프랑스 등 세계 다른 나라들의 의료제도를 소개하는 등 그 관심의 영역이 국내에만 머물러있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표 4>)
보건운동 보다 6년 후 발간된 보건잡지인 보건조선(保健朝鮮) 74)의 발행형식 참여자 게재내용들과 비교해보면 일제식민지라는 현실 속에서 보건운동 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독립 지향적이며 민중 지향적이고 다양한 사회영역에 대한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75)
(3) 나병환자구제연구회
한편 양봉근은 「보건운동사」를 설립하기 전인 1931년 9월 24일 한용운 윤치호 신흥우등과 「나병환자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는 등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76)
6) 만주활동기
「보건운동사」를 설립하고 보건운동 잡지를 발간하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던 양봉근은 돌연 서울을 떠나 함경북도 회녕으로 간다 차남 양득우는 이러한 갑작스런 이주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못 견디어서”라고 말하고 있으나 77) 구체적인 이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삼천리 는 짤막한 말로 그의 낙향 소식을 전할 뿐이다 78) 이후 양봉근은 고무산을 거쳐 장춘으로 이주한다
그가 왜 장춘으로 이주했는지 역시 알 수 없으나 양봉근이 서울을 떠난 1933년은 농업공황 이후 만주로의 조선인 대량이주가 이루어진 시기79)이자 민족해방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시기였다
창간호 3월호(유아 부인호)
제목 저자 제목 저자
창간사 양봉근(추정) 시험관내의 현상과 사회적 현상 권두언수표학인(水標學人)
아등의 보건관 양봉근(楊奉根) 안전지대로서의 의학 특히의사제군에게 부하린(夫河隣)
조선민중보건상태의 통계적 관찰 이인규(李仁圭) 보건체육에 대하여 이병학(李丙學)
보건운동과 우생운동을 일으키자 이인규(李仁圭)
피임과 넌센스[1] 쾌감이란 무엇일까
김순형(金淳亨) 폐결핵예방과 허약아동구제책 윤치형(尹治衡)
민중체조단조직의 제창 김세용(金世鎔) 체육경기와 심장 이종륜(李鍾綸)
민중운동과 조선 이광수(李光洙) 쾌감이란 무엇인가 속 김순형(金淳亨)
각계인사의 보건관 체육보편화이 급무 김보영(金保榮)
- 양춘의 신복음 남궁훈(南宮薰) 기초상식 몃 가지 수성학인
- 보건운동을 축함 한용운(韓龍雲) 부인의 체질과 질병 윤태권(尹泰權)
- 맛당히 잇서야 될 일 유진태(兪鎭泰) 질의란
- 보건운동을 민중화하라 안재홍(安在鴻) 처녀시대에 알아둘 월경상식 [짜]쓰매
- 지식의 발로를 축함 윤치호(尹致昊) 임부의 섭생법 차성학인(車城學人)
- 경제적 요건이 선결문제 이종린(李鍾麟) 여자체육의 필요와 아동발육 김동철(金東轍)
- 보건운동에 대한 기대 배성룡(裵成龍) 유아의 영양법 이선근(李先根)
- 보건운동행 김약수(金若水) 유아 이유법에 대하야 이성봉(李聖鳳)
성교육과 가정 김정득(金丁得) 어머님들께 듸리는 감사와 불평 옥희이 공개[짱]춘우(春雨)
유아보건의 필요를 논함 이선근(李先根) 아동기보건에 대한 사견 L S K
전염병에 대한 가정상식 특히 장질부사(염병)에 대하야김동익(金東益) 어머니가 만드러주는 어린애병 함태원
근작업과 피로 이갑수(李甲洙) 의술의 사회학 이인규(李仁圭)
각국보건운동의 상황 폐결핵에 대한 가정상식[1] 김동익(金東益)
- 적로의 보건운동 서기관
에르네스트
에스박호
피임과 넌센스[2]
- 영국보건상태 도-마스 부영사 무산아동건강진단실시
- 중국의 보건설비 이 부영사 왼갓 병신전람회 이런 사람도 미인성인이 될 수 있다 김성진(金晟鎭)
- 불국의 보건에 대하여 사왕 보건운동상으로 본 회충과 기해독 민병기(閔丙祺)
건강의 영역 춘곡생(양봉근) 아편중독이란 엇던 것인가 함석구(咸錫玖)
결혼전선에 실행조건 차성학인(車城學人)
절망적 병약에서 갱생한 나의 경험 이정래(李晶來)
치병요결 이종륜(李鍾綸) 마작을 하면 이런 병이 생기다 독고일(獨孤一)
성학뉴스 보건강좌경과
피임법연구 구난도(具蘭都) 엉터리 부부행진곡 월탄생(月灘生)
에로위생학 KS생 만주각지의 피난동포 순회진료기 최충선(崔忠善)
주부지식 일상생활의 생리적 설명 女醫HY
조선체육계의 과거와 장래 김동철(金東轍)
분만예정일과 남녀감식법 돈목생(豚木生)
여자와 스케-팅 한강생(漢江生)
보건운동사사칙
(알림) 보건운동사 제1회강좌개최
(부인위생 육아문제)
표 4 보건운동 창간호와 3월호의 목차와 기고자
79) 강만길 엮음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역사비평사 2000 p 149-150
80) 지수걸 1930년대 초반기 사회주의자들의 민족개량주의 운동 비판 8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현 단
계와 전망 역사비평사 1988 p 278
81) 이준식 총론 세계 대공황기 민족해방운동 연구의 의의와 과제 역사와 현실 1994 11 17 지승준
1930년대 사회주의 진영의 ‘전향’과 대동민우회 중앙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6 p 13
82)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 항일운동문서 중 不逞鮮人暗號및 容疑人名簿의 件 1923년 11월 19일
83) 동아일보 1929년 1월 18일
84) 사업가로 양봉근이 「신간회」울산지회를 만들었을 때 간사역할을 하였다(동아일보 1928년 3월 25일)
85) 양득우 면담기 2004년 10월 10일
민족주의 진영의 ‘당면이익획득운동’은 이 시기 사실상 총독부 측의 ‘생활개선운동’으로 흡수되어 버렸고 80) 1932년 3월 만주국 건립을 계기로 민중운동의 침체 속에 일제의 탄압과 회유는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전향으로 몰아갔다 81)
양봉근이 서울을 떠나 결국 장춘에 정착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만주동포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것만큼은 확인할 수 있다 1931년 일제의 만보산사건과 만주침략을 계기로 만주지역에서는 중국인과의 사이에서 ‘재난동포’가 발생하였는데 당시 만주지역의 재난동포문제는 사회적으로 여론화되어 1931년 10월 「만주조난동포문제협의회」가 창립되기도 하였다 보건운 에도 1932년 3월호에 「만주각지의 피난동포 순회진료기」를 실어 만주지역의 동포들의 상태를 보도하는 등 만주지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쿠보 망언사건’ 당시 같이 퇴학처분을 받고 조선학생대회 순회강연을 같이 했던 이필근도 길림성 통료(通遼)지역에서 의원을 열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82) 장세구도 남만주 무순(撫順)지역에서 조선인청년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어83) 당시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유로 만주로 이주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장춘에서 양봉근은 「박애의원(博愛醫院)」을 운영한다 이 시절 양봉근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방학 때마다 장춘의 아버지 집을 방문했던 아들 양득우의 증언에 따르면 울산부터 「신간회」등 활동을 같이했던 이규정(李圭正)84)이 국내에서 사업을 실패한 후 가족과 함께 양봉근이 있는 만주로 갔으며 양봉근의 주선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청년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였다85)는 것으로 보아 양봉근은 의원을 경영하면서 당시 장춘지역의 조선인 농민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직후 만주 전역은 무정부상태에 빠졌는데 만주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은 중국인과 진주한 러시아군으로부터 폭행 약탈 강간 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시정부 동북대표부 자료에서 기술하고 있는 당시 만주상황은 다음과 같다
“과거 위만시대 일제의 강압정책에 동북원주민과 아 교포 양민족간 압력이 생겨 전 동북지역 경향을 막론하고 대거 무지층분자들은 차기를 승하야 약탈과 심지어 살상까지 당하고 부득이 수 십년간 개간하였든 이곳 동북을 이산케되어 각 주요 정거장은 피난민으로 물드리고 하얼빈(哈爾濱) 목단강(牧丹江) 도문(圖們) 왕청(汪淸) 길림(吉林) 장춘봉천(奉天) 통화(通化) 만포진(滿浦鎭) 안동(安東) 등 각 도시에는 차등 피난민이 격증되여 각당지 한국교민회에서는 불면불휴로 구체에 노력하였으나 기 만전을 기함은 심난한 상태이며 기간 이사 병사 등등 기 참상은 실로 목불인견이다(귀국방법은 수 천명씩 단체를 작성하야 각대도시 교민회에서 소(련)군 철도사령부와 연락하야 화차를 수 십만원씩에 매수하여 실행 하엿음) ”86)
ᆢ
86) 동북대표부경과보고 중 광복후 4월14일까지의 한국교포실정 백범기념사업회 소장자료 1946년 6월 15일
87) 대한민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 장춘설치에 관한 제1차 회의 백범기념사업회 소장자료 1945년 10월 20일
88) 해방 직후 만주지역에는 한인들의 자치기구로 「동북한국민회연합회」(회장 신숙)가 장춘에서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은 소련군의 지지를 받는 「해방동맹」이나 「임시정부 동북대표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독자적인 한인자치기구였다(정병준 1945-48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국 내 조직과 활동 사학연구
1998 55․56 873-896)
89) 1946년 1월23일 동북대표부와 민회연합회가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상호협력을 다짐했는데 양봉근은 여기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동북대표부 민회연합회 연석회의록 백범기념사업회 소장자료 1946년 1월 23일)
90) 「동북한국민회연합회」에서 신숙과 함께 대표로 있던 고문룡은 「보건운동사」를 함께 운영했었던 경성의전 동문이며 같은 시기에 남한에 있던 동문이자 동향인 김형기 역시 “해방직후 미군정청 고문단에 관여해 귀환동포 후원위원장을 맡아 귀환동포 구호에 재산과 시간을 모두 바친 것”(백이성 앞의 글 p29-36)으로 보아 이들 간의 지속적인 유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1) 신숙 강제 신숙의 생애와 독립투쟁-나의 일생- 국학자료원 1963 p 165-166
92) 1945년 8월15일 일본패망 당시 차남 양득우는 방학을 맞이하여 장춘에 머물고 있었는데 2차 귀국단에 포함되어 숙부와 함께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 차남 양득우는 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했으나 양봉근은 “내가 지금 가면 남은 이 조선동포는 어떻게 하나 마지막 편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했고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양득우 면담기 2004년 10월 10일)
93) 그가 북한으로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손자 양창걸은 “먼저 평양에 가있던 의사친구가 오지 말라고 해서”라고 말한다(양창걸 면담기 2005년 3월 25일)
양봉근은 1945년 10월 20일 「임시정부 동북대표부」의 정치부장으로 임명되었고 87) 신숙 고문룡 등이 운영하고 있던 「동북한국민회연합회」8 8)와 함께 조선족들을 학교 건물로 모우고 조선족 만주군들로 하여금 불침번을 서게 했으며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조선인들을 위해 러시아군과 협의하여 경호와 열차를 빌려 조선인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였다 89)90)
이후 「동북한국민회연합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신숙과 고문룡은 1946년 12월 미군정 출장소로부터 마지막으로 연내에 귀국하는 난민수송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을 통해 귀국하지만91) 양봉근은 만주에 남는다 왜 양봉근이 신숙 고문룡과 함께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92)93)
1946년 4월 팔로군이 장춘을 점령한 후 팔로군은 과거 중국국민당 혹은 우경적 색채를 가진 자를 체포하고 구금하기 시작하고 양봉근은 쫒기는 신세가 된다 당시 동북대표부의 자료에는 그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팔로비(八路匪) 장춘 침입 후 (조선의용군을 포함함) 자칭 조선공산당원은 아 대표부의 파멸을 기도함은 물론 과거 중국국민당 혹 우경적 생채를 가진 자는 통칭 반동분자 혹은 팟쇼분자라고 칭하야 체포 감금하는 등 사로 시내 다소 식자분자는 실로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며 아 대표부에 대하야서는 소위 장춘지구인민해방대동맹원 중 자칭 조선공산당원이라고 하는 악질분자들이 중국 팔로군에 밀고하야 云동북대표부는 「김구매국적의」 임시부 계통으로서 국민당과 긴밀한 연락하 인민자치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악질분자라고 하야4월23일 라금용(羅金湧) 방정호(方定鎬) 양봉근 권영조(權永祚) 신원균(申元均) 4동지를 대동하고 도주하였는데 동지의 생사는 상금 막연하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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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동북대표부 경과보고 백범사업회소장자료 1946년 6월 15일
95) 연변 중서의병원 원장 류병일도 회고에서 “광복을 맞자 양윤은 신숙(申肅)을 회장으로 하는 「대한조선인동북농민회」의 선전부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조직과 이 글이 사달이 되어 양윤은 옥살이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다(림원춘 태양에는 흑점이 없다 연변인민출판사 2003 p
93) 여기서 「대한조선인동북농민회」과 「동북한국민회연합회」와 동일한 조직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96) 양창걸 면담기 2005년 3월 25일
97) 연변조선족자치주위생국 위생지 1990 p 157
98) 양창걸 면담기 2005년 3월 25일
99) 박복례는 양봉근의 부인 박희(朴熙)의 여동생이다
류정일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후 중국에 잔류한 양봉근은 1946년 9월 길림군구 정치부 위생소 소장직을 맡게 된다 중국에 남게 된 양봉근은 신숙의 「동북한국민회연합회」참여했던 사실 때문에 옥살이를 하고 이 시기에 길동군구를 따라다니면서 많은 전사들의 병을 봐주고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95) 이 시기에 양봉근의 의사로서 사명감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수술 도중에 이를 중단하고 장교아내의 왕진을 오라는 명령을 거절한 채 환자의 수술을 계속 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힌 적이 있다고 하며 또 한 가지는 나병약을 구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와 당시 서울 연구소의 친구에게서 나병약을 구한 후 다시 길림성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군 장교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그가 되돌아와 놀랐다고 한다 96)
이 시기를 전후에 한 가지 흥미로운 사건은 해방직후 양봉근이 김구(金九) 등 인사들을 만났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그 시기와 횟수 그리고 만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1990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국에서 발간한 위생지 에 실린 양봉근의 이력 중에는 그가 「임시정부 동북대표부」정치부장을 역임했고 동년 11월 한국으로 가서 김구 등의 인사를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97) 이 경우 양봉근이 한국에 온 것은 1945년 11월 또는 1946년 11월이 된다
그러나 손자 양창걸의 증언에 따르면 (길동군구-저자) 군의관시절 나병약을 구하러 서울로내려갔을 때 김구를 만났으며 김구가 “어디에서 일하냐?”고 물었고 양봉근이 “중국에 있다”고 하니 김구가 “어디 있든지 잘 살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98) 이 증언을 기준으로 할 경우 양봉근이 김구를 만난 시기는 1946년 11월이나 그 이후 11월이 된다 또한 1979년 9월11일 양봉근은 중앙일보 앞으로 유진오(兪鎭午)박사와 그의 부인 박복례(朴福禮)99)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 내용 중에는 1948년 마지막으로 유진오의 집에서 그를 만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00) 이경우 양봉근이 두 차례 이상 남한으로 내려왔거나 약을 구하기 위해 월남하였던 시기가1948년 11월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확한 년도와 방문목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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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중앙일보 1979년 10월 10일
101) 손자 양창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름 윤(尹)은 그의 어머니의 성(姓)을 딴 것이라고 한다(양창걸 면담기 2004년 11월 4일)
102)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앞의 책 p 436
103) 림원춘 앞의 책 p 94-95
104) 손자 양창걸에 따르면 1948년 양봉근이 남한에 내려갔을 때 김구를 만났던 일 그리고 일본에 간 적이 있었던 일 등이 그를 남한 간첩과 일본간첩으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양창걸 면담기 2004년 11월 4일) 특별히 해방직후 김구 등 인사를 만난 것은 1990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국에서 발간한 위생지 (1990년)에 그 사실이 실려 있다
105) 1982년 4월 6일 양손자인 양창걸씨가 양득우씨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양봉근선생의 죽음을 적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3월 29일 아침 9시 35분에 세상을 뜨시었습니다 26일부터 갑자기 열이 나고 숨이 차던 것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으셨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시어 병원에서 사망하시었습니다 ”
7) 연변시절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양봉근은 이름을 양윤(楊尹)101)으로 바꾸는데 대략 그 시점은 중국국적을 가지고 살게 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연변시절 양봉근은 연길시 인민의원에서 의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중앙민족사무위원회」주임으로 있던 문정일의 도움을 받아 1948년 10월 연변의과전문학교 부속의원 원장으로 있다가1949년 4월 연변대학이 만들어지자 연변대학 의학부부속병원 원장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양봉근은 연변의학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 된다 102) 동년 11월 연변대학 의학부 위생학 강사로 부임하고 1953년 5월에는 위생과 과장 1955년 6월 「연변위생방역소」의사가 된다 하지만 1957년 5%의 우파를 색출해 내라는 반우파 투쟁 시기에 우파분자로 몰렸는데 당시 연변정신병원 제1임당지부 서기 사업을 하고 있던 류병일의 도움으로 우파로 지명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으나 우경으로 몰려 당지부 서기자리에서 연변정신병원의 행정과장으로 좌천된다 103)
이후 양봉근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 이하 정협)」위원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정협위원자격으로 북경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1962년에는 방역과 주임직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66년 문화혁명기에 양봉근은 다시 한번 지식분자이자 과거 경력이 문제가 되어 1년 8개월간 연금되어 생활하게 된다 중국에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은 그가 남한 출신이라는 것이었으며 때로는 남한 간첩 또는 일본 간첩으로 의심받았다 또한 이러한 경력 때문에 공산당원이 될 수도 없었다 104) 그러나 이후 양봉근은복직되고 1975년 이직할 때에는 월급과 연구이 보장되는 대접을 받았으며 1982년 3월29일 향년 87세에 별세105)했을 때에도 지방신문에 그의 서거소식이 실리고 그를 위한 성대한 추도식이 1982년 3월 30일 오후 연변 정신병원 구락부에서 치러졌다
당대중국조선족인물록 연변대학의학원원사 및 연변의학원인물람 에는 그가 연변의학원과 연변대학의학부부속병원의 창시자 중 한 명이며 다양한 보건사업과 진료 그리고 교육활동을 펼쳤으며 「망상사례 150례 임상분석」과 「유전문제진전」을 학회에 발표하는 등의 연구 활동을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106)
106)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앞의 책 p 436
107)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지식산업사 2001 p 41
108) 강민길 외 앞의 책 p 81
109) 양봉근은 친구인 윤필균(동래고등보통학교졸업 일본와세다 유학 북경대학 3 1운동 및 사상운동가담옥고)의 동생 윤신봉을 배성룡에게 소개하여 1931년 결혼에 중매역할을 했다(김기승 한국근현대사회사상연구 신서원 1994 p 45)
110) 양봉근은 ‘북풍학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북풍회」회원들은 대체로 경남 출신이었고 그 중심 활동지 역시 경남으로 경남이 고향이었던 양봉근과 다양한 형태의 인적관계를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양봉근의 이후 활동과정을 살펴보면 「북풍회」회원들과 활동공간을 일정하게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1927년 11월23일 「신간회」울산지회 발기시점에서 건립준비위원 12인 중 조형진 박문한 강철은 울산지역의 북풍계 사상단체인 「자오회」 「성우회」의 회원(박철하 앞의 논문 p 303)이었으며 본부 검사위원장 시절 함께 본부 활동을 했던 김병로 노백용 박문희 변희용 서정희 등은 과거 「북풍회」출신 인사들이었다(이균영 신간회 연구 역사비평사 1993 p 395)
3 양봉근의 정치지향과 보건운동관
1) 양봉근의 정치지향
양봉근이 국내에서 가장 왕성한 보건운동을 전개한 시기는 1931년부터 1932년 중반까지이다 이 시기를 중심으로 그가 가졌던 건강관 보건운동관과 보건운동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그의 정치지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제한된 자료만을 가지고 양봉근이 가졌던 정치지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의 활동과 교류관계를 가졌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양봉근의 학창시절과 보건운동기는 일제 식민 통치기였으며 이러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고자 민족주의 대동사상 사회개조와 세계개조론 그리고 아니키즘을 비롯한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저항담론들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107) 특별히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108) 청년층 신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양봉근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 1운동과 경성의전 동맹휴학 등을 경험하면서 민족해방을 향한 강한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나갔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사회주의 등의 진보사상을 수용해 갔을 것이다 양봉근이 1923년 「대종교중앙청년회」대표회원으로 전조선청년당대회 참가했다는 사실은 저항 민족주의를 토대로사회주의를 수용해 가는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전반기 양봉근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사회주의 등의 진보사상을 접촉했는지는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화요회」의 대표적 이론가 배성룡109)과 「북풍회」회원들과의 개인적 친분관계110)가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저항 민족주의를 토대로 사회주의를 수용한 양봉근은 ‘농촌문제대관’(1927) ‘노동운동의 사적고찰’(1929) 등의 강연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민중운동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는 한편 사회주의 수용에 있어 비판적 태도를 강조했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신간회」해소 직후 조선일보 의 건강증진운동과 동아일보 의 위생선전 활동을 비판하고 있다 민족주의 좌파로 일컬어지는 조선일보 와 민족주의 우파로 일컬어지는 동아일보 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부르조아적’ 전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반면 양봉근의 정치지향은 ‘민중적’ 지향이 강하다 양봉근이 「신간회」해소론자들을 “우리 신진‘맑스’ 학도들이 (지나치게-인용자)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1)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는 세계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계급투쟁을 전면화 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방침 전환에 따라서 일본에서도 기존 협동전선정당이었던 노농당 해소론이 제기되었으며 조선에서도 「신간회」해소론이 제기되었다 당시 「신간회」해소론을 반대하는 이들은 대체로 「신간회」해소론이 일본의 노농당 해소론을 모방한 것이라 비판한 바 있는데 양봉근 역시 이 점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선진국’은 일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112) 양봉근 기후의 정세와 오인의 태도 삼천리 1931 3-12 7-9
113) 양봉근은 “인류가 행봉이라고 동경하는 이상적 그 사회는 계급간 민족간의 대립이 업어진 인류의 공존동영(共存同榮)적 사회”라 하여 사회주의적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춘곡 민족과 계급관계의 구명 삼천리 1932 4-3 13-17)
114) 박찬승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p 26 김기승 앞의 책 p 151 ‘진보적 민족주의’와 ‘1세대 사회주의’는 전자는 민족주의를 기준으로 후자는 사회주의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결국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115) 양봉근은 “세(世)의 소위(所謂) ‘하불식육미(何不食肉味)’격의 건겅증진운동이나 방병위생선전(防病衛生宣傳) 등을 비웃지 아니할 수 업는 것이다”라고 하여(양봉근 아등의 보건관 보건운동 1932 1 2-3)
“운동이 조선민중을 상대한 운동이요 우리의 입각지(立脚地)가 조선이란 특수정세 하에있는지라 선철(先哲)[맑스-인용자]이 말한 일편(一片) 학설과 선진국에서 보이는 일변의 교시[일본노농당 해소111)-인용자]만이 반드시 우리의 취할 전술전략이라고 일률적으로 규준할 수 없는 것이다 ”112)
이러한 그의 생각과 입장은 궁극적으로는 계급 대립의 해소라는 사회주의적 전망을 지향113)하면서도 식민지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사회주의 사상이나 전술론을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적합하게 적용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코민테른의 「12월테제」에 근거해 「신간회」해소를 주장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과 일정정도 노선을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 양봉근은 「신간회」해소 논쟁기에 해소 반대론자로 활동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에도 광범위한 농민 노동자 도시 세민층을 포괄한 민족협동전선의 재결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사회주의를 수용하면서도 민족문제를 중시하고 민족협동전선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이자 ‘1세대 사회주의자’로 평가될 수 있다 114)
또한 양봉근의 사회활동과 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농민 노동자 도시세민 무산아동 여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몽적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실제 민중층에 대한 대중강연은 그의 활동에 중심에 있었으며 특히 「보건운동사」의 활동은 상당 부분 계몽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양봉근은 보건운동 창간호에 민족주의 좌우파의 대표적 기관이었던 조선일보 와 동아일보 의 보건활동을 비판하고 있다 115) 조선일보 동아일보 「보건운동사」의 보건활동은 모두 민중계몽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했지만 양봉근은 이들의 활동을 비판하면서 「보건운동사」의 활동과 구별하고자 했다
하다 이러한 정치지향의 차이점으로 말미암아 보건운동의 방향이 달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주의 진영과 양봉근의 정치지향과 보건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 분석은 추후의 과제로 남긴다
116) 양봉근은 민중에게 위생사상을 보급시키는 것이 모든 운동에 ‘선행’되는 것임을 강조(양봉근 창간사 보건운동 1932 1 1)한 바 있으며 모든 추상적 개념을 떠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라 주장(양봉근 조선농민의 보건문제 농민 1932 3-2 35-36)했다
117) 이지원 일제하 민족문화 인식의 전개와 민족문화운동 서울대 박사논문 2003 p 282
118) 수표학인 만국 여성의 결합현상 삼천리 1931 3-11 92-93 111 이 글은 석빈지행(石濱知行)의 「부인인터네셔널 현상에서」라는 글을 번역 소개한 것 북풍학인 현하의 중국부인운동 삼천리 1931 3-12 64-65
119) 1928년 9월 요양차 울산을 내려간 정칠성은 양봉근과 함께 강연회를 열어 ‘여자의 불평과 남자의 각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데(동아일보 1928년 9월 5일) 양봉근의 「울산의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만큼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20)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1세대 사회주의자’는 이러한 규정은 기본적으로 1930년대를 중심으로 한 설명이며 해방직후 공산당 계열의 「해방동맹」에서 활동하지 않고 민족주의 계열의 「임시정부」참여한 것과 이후 중국에 잔류하여 중국 사회주의체계 하에서 보여주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정과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민중계몽운동의 목적과 민중의 주체성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양봉근의 민중계몽활동은 민족해방과 사회진보를 목적으로 그것의 가장 기초적인 운동으로 설정되었으며 이를 추진할 주체로서 민중의 자발적 각성의 촉진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116) 이는 민중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단지 구제대상으로만 여겼던 민족주의 진영의 계몽활동117)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특별하였는데 1931년 말 사회주의권의 여성 운동들을 소개한 바 있다 118) 또한 울산시절 1925년 동경의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三月會)」의 간부로 활동하고 「신간회」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槿友會)」의 간부로 활동한 정칠성(丁七星)과 함께 강연에 참가하는 등 정칠성과의 교류119)를 통해 「근우회」와도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그의 글과 활동 및 친분관계 등을 볼 때 1930년대 당시 양봉근의 정치지향은 사회주의를 수용하면서도 민족문제를 중시하고 민족협동전선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진보적 민족주의자’ ‘1세대 사회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으며 사회진보의 동력으로 민중을 주목하고 이들에 대한 계몽을 사회진보의 1차적 조건으로 인식하면서 이를 실천한 ‘민중 계몽적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0)
2) 건강관과 보건운동관 사회의학과의 친화성을 중심으로 1931년 말 보건운동사를 설립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일익으로 보건운동을 전개하였던 양봉근이 가졌던 건강관과 보건운동관의 특징을 살펴보고 19세기 후반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사회의학과의 친화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양봉근의 건강관 및 보건운동관의 특징
① 건강과 질병에 대한 총체적(holistic)121) 인식과 사회적 조건화의 강조
양봉근은 질병이 유전과 같은 개인적인 소인에서 교육 직업과 같은 사회적 요인 민족 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중층적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총체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22) 그러면서도 허약과 질병의 원인으로서 궁핍과 무지 123) 계급과 차등 124) 나아가서 자본주의와 같은 정치경제체계125)126)의 중요성과 사회적 조건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튼튼한 몸을 짓고 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요건을 구비한 사회를 짓자하는 성과 열을 보이지 않고는 보건운동의 민중적 철저를 기도할 수 없는 동시에 민중의 경청하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27) 따라서 그의 교육민중화를 위한 교육운동 농민회활동 그리고 신간회참여를 통한 민족해방의 모색 역시 그에게 있어서는 보건운동의 일환이었다
121) 보건부문에서 ‘총체적 접근방식(holistic approach)’이란 질병에 대한 다원인론적 접근방식을 말한다
122) 양봉근 정신병이 늘어감은 문명의 영향(가) 동아일보 1930년 12월 6일
123) 양봉근 조선농민의 보건문제 농민 1932 3-2 35-36
124) 특별히 건강을 설명하면서 ‘영역(領域)’개념을 적용하여 사회의 계급적 분화(불평등)가 질병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춘곡생 건강의 영역 보건운동 1932 1 42-43)
125) 양봉근 정신병이 늘어감은 문명의 영향(가) 동아일보 1930년 12월 6일
126) 양봉근 조선농민의 보건문제 농민 1932 3-2 35-36
127) 양봉근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 삼천리 1932 4-3 20-21
128) 양봉근 아등의 보건관 보건운동 1932 1 2-3
129) 춘곡생 건강의 영역 보건운동 1932 1 42-43
130) 한귀영 근대적 ‘사회사업’과 권력의 시선 김진규 정근식 엮음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2003 p 329-330
131) 양봉근 정신병이 늘어감은 문명의 영향(가) 동아일보 1930년 12월 6일
132) 양봉근 정신병이 늘어감은 문명의 영향(사)-(아) 동아일보 1930년 12월 18-19일
133) 덴마크 체조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건강이 단순히 의식주와 같은 경제적 요건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128)고 생각하여 그의 생각이 기계적 경제결정론에 머무르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봉근의 건강관은 보건운동관에도 투사되어 “누구나 씩씩하게 일하고 먹고 휴양하고 의료 받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129)
그가 전공한 정신병과 관련한 그의 글에서 도 이러한 그의 생각은 잘 드러난다 일제시대 전시기를 거쳐 정신병자는 의학적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단지 살인·방화 등과 연결되어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130) 그러나 양봉근은 정신병을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 발생하는 질병으로 바라보는 한편 131) 그 예방책도 불합리한 사회모순의 근본적 개조 속에서 찾고 있다 132)
또한 “민중이 밥을 못 먹고 영양부족에 주린 창자를 움켜지고 있고 병든 자들이 치료받을 곳이 없어 신음하는 목하의 상황에서 정말 체조(丁抹體操)133)가 배부르게 하며 보건운동이 동양(疼痒)을 소유(消癒)시킬 수 있느냐”는 비난에 대해 “민중생활의 전체성을 떠난 보건운동의 독자성이 있을 수 없고 커다란 방략을 제쳐놓고 적은 방략의 강력화를 바랄 수 없으며 ” 그렇기 때문에 “보건운동은 필연적으로 생활운동의 일익적(一翼的) 임무를 짊어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134)
또한 양봉근은 보건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언론계 교육계 체육계 의약계 사회사업가 중 진보적인 인사들의 협동노력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 「보건운동사」의 인적구성 보건운동 의 내용들이 이러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134) 양봉근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 삼천리 1932 4-3 20-21
135) 양봉근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 삼천리 1932 4-3 20-21
136) 양봉근 조선농민의 보건문제 농민 1932 3-2 35-36
137) 양봉근 아등의 보건관 보건운동 1932 1 2-3
138) 이 표현은 양봉근의 여러 글에서 사용된다(양봉근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 삼천리 1932 4-3 20-21
양봉근 조선농민의 보건문제 농민 1932 3-2 35-36 양봉근 의사로서 조선여성에게 올리고 싶은 말 전선 1933 1-1 85-86)
139) 양봉근 의사로서 조선여성에게 올리고 싶은 말 전선 1933 1-1 85-86
140) 박윤재 한말·일제초 근대적 의학체계의 형성과 식민지배 연세대학교 박사논문 2002 p 226
141) 그가 내세운 두 가지 슬로건은 “튼튼한 몸을 짓자”와 “병을 미연에 방지하자”였다(양봉근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 삼천리 1932 4-3 20-21)
② ‘몸에 대한 자기 통제력’ ‘예방의학’의 강조
양봉근의 보건운동관을 가장 집약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삼천리 에 실린 다음의 글이다 “일반 민중으로 하여 인체에 대한 생리적 상식과 병리학적 개념이 생기여 자기 몸을 튼튼하게 가지는 길을 알게 되고 병을 예방하는 곳에 발명이 생기어지는데서 민중은 스스로 적의한 영양을 욕구하는 힘이 굳세어질 것이며 체육의 민중화라든지 의약의 사회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에 보건운동은 생활운동으로 될 것이요 결코 일부의 비난하는 배부른 자들의 장난으로 되지 아니할 것이다 ”135)
이 글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관점 중의 하나는 ‘몸에 대한 자기 통제력’의 강조이다 “민중은 스스로 적의한 영양을 욕구하는 힘”을 굳세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의 보건관과 보건운동관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조선농민의 보건문제」라는 글에서도 양봉근은 “자작한 농산물로 자기영양(自己營養)을 만들게 하여야한다”136)고 강조한다 또한 ‘건강의 주체인 자기 육체’에 대한 해부학 생리학적 지식을 먼저 가질 것을 강조한다 137) 이러한 건강문제에서 몸에 대한 자기 통제력의 강조는 “씩씩한 내 몸을 짓자!”138)라는 그의 구호로 요약된다 아울러 그는 “건강을 향유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인 동시에 가장 큰 권리적 요구”라고 주장한다 139) 이러한 인식은 위생경찰을 중심으로 식민지 민중을 규제나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던 일제의 위생담론140)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또한 양봉근은 보건운동에서 ‘질병의 예방’을 강조하고 있는데 질병의 예방은 그가 보건운동의 슬로건으로 내세운 두 가지 중 하나였으며 그의 글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에 서도 여러 차례 ‘예방의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41)
142) 양봉근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 삼천리 1932 4-3 20-21
143) ‘생활혁명론’은 봉건적 인습을 타파하기 위해 과학적 지식의 보급을 통한 봉건적 가정생활을 타파하는 것으로 배성룡은 이것을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공통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김기승 앞의 책 p 181-182)
144) 이호룡 앞의 책 p 29
145) 삼천리 전체회의 조선의 정치적 장래를 비관호 낙관호 삼천리 1932 4-9 41
146) 양봉근 창간사 보건운동 1932 1 1
③ ‘생활운동’으로서의 보건운동
양봉근이 보여주고 있는 보건운동관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른바 ‘생활운동’으로서의 보건운동의 강조이다 그의 보건운동에 대한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는 「민중보건운동의 방략」에서 그는 “이에 보건운동은 필연적으로 생활운동의 일익적 임무를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 “이에 보건운동은 생활운동이 될 것이며”라고 수차례에 걸쳐 반복하여 ‘생활운동’을 강조하고 있다 양봉근은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의 선구자 지도자는 다만 사회개혁에 의한 생활환경의 정상적 복귀만을 기대할 것인가? 이제 한걸음 생활운동으로써의 보건운동에로 노력하지 아니 할 것인가?”142)라고 주장하여 “사회개혁에 의한 생활환경의 정상적 복귀만을 기대하는” 당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과 일정정도 노선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양봉근의 ‘생활운동론’의 강조는 그와 개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배성룡의 ‘생활혁명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43)
④ 민중의 주체적 역량 제고를 목적으로 한
‘건강한 몸 짓기’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한국은 일본의 준식민지가 되었으며 국가의 주권은 위태로워졌다 이 시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염원하였던 계몽 운동가들이 채택하였던 사상 중의 하나가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이른바 ‘실력양성론’이었다 144)
양봉근에게서도 이러한 당시 사회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1930년 초 당시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장래에 대한 낙관과 비관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낙관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하며 ‘진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현상에서 보는 데만 그치지 않고 한 진화과정으로 보고 있는 고로 오늘날 조선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XX와 문화적 침체가 그 진통의 고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진통의 결과는 귀동자(貴童子)를 나을 수 있다 ”145)
또한 양봉근의 보건운동 창간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최후의 승리를 손곱는 현명한 장령(將令)은 평일에 잇서서 병마를 살지워 둠을 양책으로 한다 우리의 안중에는 병에 찌들니고 빈혈에 지친 민중이 보일 뿐이다 이갓치 곤비무기력(困憊無氣力)한 민중에게 엇더케 발랄한 원기를 생기(生起)식히여 목적의 피안에 도달하게 할가? 이것이 우리의 마튼 중대한 과제이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하야 우리는 민중보건위생에 관한 과학적 연구조사와 사회적 실천에 우리의 전심력을 경주코저 하는 바이다 ”146)
이 글에서 양봉근은 민중으로 하여금 “목적의 피안(彼岸)에 도달케 하기 위해” 즉 민족해방을 위해 그 추진주체인 민중의 건강을 증진시킬 필요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민중보건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자 그 전제조건으로 제기되었음을 말해준다
147) 정석태 민족보건의 공포시대 폐병요양소의 설치 제창 삼천리 1929 2 40-42 이인규 조선민중보건상태의 통계적 관찰 보건운동 1932 1 4-6 이병학 보건체육에 대하야 보건운동 1932 2 7-8
148) 양봉근 조선농민의 보건문제 농민 1932 3-2 35-36
149) 이호룡 앞의 책 p 41
150) 이호룡 앞의 책 p 64-70
151) 양봉근 조선민중보건운동의 방략 삼천리 1932 4-3 20-21
152) 양봉근 아등의 보건관 보건운동 1932 1 2-3
실제로 1929년 대공황의 여파가 식민지 조선으로 파급되면서 기아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특히 폐결핵 신경쇠약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증가했다 147) 이에 양봉근은 “창백한 그 얼굴과 곤비(困憊)한 그 체구로써 어떻게 과중한 xx(혁명-인용자)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148)라고 반문하면서 민중의 주체적 역량 제고를 목적으로 조선민중의 ‘건강한 몸을 짓는 것’이 자주적 독립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보고 민중보건운동을 제기했던 것이다
1910년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반제국주의 사상체계가 대두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를 용인하고 미화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민족주의 대동사상 사회개조․세계개조론 그리고 아나키즘을 비롯한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149) 양봉근이 보여주고 있는 보건운동의 접근방식과 내용들은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극복노력들을 잘 보여준다 조선에서 사회개조론은 대동사상과 결합하고 다시 정신개조에 의한 사회개조론과 제도개조에 의한 사회개조로 분화된 후 후자는 사회주의운동으로 변화해 갔는데 150) 일제식민지하에서의 서
양의학교육-대동단과의 연계활동가능성-사회주의의 수용이라는 그의 생애와 사상의 궤적을 볼 때 이러한 사회사상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음을 보여준다
⑤ 유물론적 인식과 과학주의
개항이후 서양의학의 교육을 받고 또한 진보적인 사회사상을 근거로 하는 그의 건강관과 보건운동관에서는 이러한 유물론적 인식과 과학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보급시키고자 했던 보건위생사상 중의 하나는 “몸뚱이와 영(靈)은 정신을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야 영이 육체를 지배하고 육체의 허약여부를 불원하고 건실한 영이나 정신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미몽(迷夢)을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작업에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과 유물사상이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조선민중이 남보다도 육체를 천대해 온 것을 비판하고 있다 151)
보건운동 3월호 권두언에 실린 「시험관내의 현상과 사회적 현상」에서 “공통의 위협이 될만한 약물을 떨어뜨리면 박테리아들이 생존을 위해 콜로니를 형성하고 두터운 보호막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들면서 조선민족의 단결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의 사용을 통해서도 그의 유물론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한 민족의 보건문제를 해결하는데 “보
건위생에 가장 합리적인 지침이 되는 자연과학 그 가운데에서도 연일 발전하는 의학의 발달과 상식화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152)
153) 조형근 식민지체제와 의료적 규율화 김진규 정근식 엮음 앞의 책 p 180-181
154) 각계 인사들의 멘탈테스트 동광 1931 29 48
155) 양봉근 의사로서 조선여성에게 올리고 싶은 말 전선 1933 1-1 85-86
156) 양봉근 소아의 사와 어촌의 일야 삼천리 1931 3-11 32-33
157) 1955년 연변시절 어려운 살림에도 동네 노인들을 모두 불러 모아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림원춘 앞의 책 p 94)
158) 양봉근 구제점의 발견난 농민 1932 3-6 20
159) 춘곡 민족과 계급관계의 구명-나의 BAC적 멧가지 삼천리 1932 4-3 13-17
개항이후 근대적 질병론의 확산은 조선인의 민간신앙 및 그 치유체계와 한의학을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비체계적인 치료술’에 불과하다는 서구 근대의학의 우월성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들을 의료계 내외부에서 공히 생산하고 있었다 153) 이와 관련하여 동광의 「각계 인사들의 멘탈테스트」에서 한약과 양약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 양봉근은 “한약(漢藥)은 어느 정도까지 믿어도 한방의(漢方醫)는 믿지 않습니다 양약(洋藥)은 말 할 것도 없이 믿는 바입니다”154)라고 답하였고 또한 “조선여성은 위생사상에 있어 원시적 미신 투성이고 제병요양에 있어 너무도 무지를 보인다”155)
고 쓰는 등 이러한 서구 근대의학의 우월성담론에 일정정도 포섭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⑥ 민중지향적 인도주의와 여성문제에 대한 강조
양봉근의 강연 글을 포함한 보건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대상은 무산자 아동 농민 노동자 그리고 여성이었다 이러한 그의 당시 가난한 민중에 대한 애정과 아픔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한 가난한 어촌 왕진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민중의 고통을 그리고 있다
“대뿔아~ 어디로 가려느냐? 다섯이고 여섯이고 낳는 대로 다 죽고 늦게야 너 하나 붙들어서 오십이 넘은 너의 아버지가 너 하나를 금지옥엽같이 손에서 놓을 줄을 모르면서도 그 원수의 돈으로 인해 밤낮 배타기에 너 앓는 줄 모르고 지금 이 바람 부는 밤에 어디서 불결과 싸우고 있는지
대뿔아 그래 너의 아버지 얼굴도 한 번 더 보지 않고 그냥 간단 말이냐!
아~ 대뿔아 에미가 밤낮 전복 따러 다닌다고 젖배를 곯렸더니 병이 되었구나 황천도 무심하여라 ”156)
이 밖에도 길동군구 의사시절 장교의 왕진을 거절했던 일화 나병약을 구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었던 일화 그리고 연변시절 노인들 봉양일화157) 등 얼마 되지 않는 그와 관련된 일화는 인도주의적인 직업정신에 투철하였던 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는 무산자 농민들에 대해 가지는 인도주의적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도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 한 예로 1932년 농민 의 「궁민구제책이 잇는가? 없는가?」에 실린 그의 글에는 이러한 농민들의 구제가 “인도적 문제로 해결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158) 그에게 있어 농민 노동자 도시 세민층은 민족해방 더 나아가 “인류의 공존동영(共存同榮)적 사회”의 추진세력이었다 159)
160) 소현숙 일제시기 출산통제담론 연구 역사와 현실 2000 38 221-253
161) 양봉근 의사로서 조선여성에게 올리고 싶은 말 전선 1933 1-1 85-86
162) Rosen From medical police to social medicine essays on the history of health care New York Science
History Publications 1974 Mattew R Anderson Lanny Smith Victor Sidel What is Social Medicine Mothy review 2005 56(8)
163) Hesketh and X Z Wei Health in China From Mao to market reform BMJ 314(7093) 1997 p 1543-5
양봉근의 여성들에 대한 관심은 특별한 것이었는데 「보건운동사」의 제1회 강좌의 주제도 부인 소아문제였으며 무산아동에 대한 무료진료도 시행하였다 보건운동 창간호에도 여성과 관련한 보건문제들을 많이 다루고 있으며 3월호에서는 부인 소아보건의료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쓴 글의 상당수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
다 양봉근이 활발하게 활동 하던 시기는 1929년 경제공항을 기점으로 산아제한론이 제창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당시 산아제한론의 내용은 ‘경제적 빈곤의 완화를 위한 것’과 ‘자녀교육을 위한 것’ 그리고 ‘우생학적 산아제한’ ‘모성보호를 위한 산아제한’ ‘여성의 능력발휘를 위한 산아제한’등 매우 다양하였는데 160) 양봉근은 여인 이란 잡지에 “우리는 이제 임신을 자유롭게 하여 여러 가지로 구속되고 고통 받는 무산계급 특히 노동부인으로 하여금 다산지옥(多産地獄)에서 벗어나게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쓰고 있다
또한 양봉근은 “여성은 결코 약자가 아니며” “너무나 불리한 특수정세를 돌파하기 위해 조선여성들이 비상역량을 발휘하여 먼저 왜소하고 창백한 신체들을 씩씩한 체육적 단련을 받도록 하고 이것을 통해 생긴 건강한 정신과 용기에
의하여 참다운 이상향을 건설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161)
(2) 사회의학과의 친화성
사회의학(social medicine)은 19세기말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사상적 학문적 한 분파이다 독일의 비르초브(Virchow) 노이만(Neumann) 등이 제기한 사회의학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왔으나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공통된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사회 경제적 조건들이 건강 질병 그리고 치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둘째 인구 집단의 건강은 사회적 문제(a matter of social concern)이다 셋째 사회는 개인적인 방법과 사회적인 방법 모두를 동원해서 건강을 증진시켜야 한다 162)
이상과 같은 사회의학의 기본원칙은 양봉근의 건강관과 보건운동관이 보여주고 있는 특징과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사회의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비르초브는 1847년 북부 실레지아 지방에서 있었던 발진티푸스 유행에 대한 보고서에서 이러한 전염병의 창궐이 복잡하게 얽혀진 사회경제적인 요인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의약적 치료방법보다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민주주의’ 교육 자유 번영 등의 철저한 사회개혁을 제안하였는데 이러한 비르초브의
사상은 양봉근의 ‘사회운동의 일익으로서의 보건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비르초브로 대변되는 사회의학의 전통은 소련과 중국을 거쳐 20세기에는 중남미 국가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다 중국은 1950년 첫 국민보건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중국 보건관리조직을 위한 4가지 지침이 설정되었다 163) 1) 노동자 농민 군인에게 우선적으로 보건의료를 제공할 것 2) 예방적 의료를 치료적 의료보다 우선할 것 3) 전통 중국의료는 서양의학과 통합적으로 운영할 것 4) 보건운동은 대중운동과 결합할 것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중서의결합(中西醫結合)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원칙은 사회의학이 표방하는 가치와도 일치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양봉근이 전개했던 민중보건운동의 성격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164) Waitzkin Iriart et al Social medicine then and now lessons from Latin America Am J Public Health 2001
91(10) 1592-601 남미국가들은 스페인 포루투칼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지배에 시달려온 나라들이며 이들 나라들에서 사회의학은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에 맞서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양봉근의 ‘보건운동’과 역사적 맥락을 같이한다
165) Guevara On Revolutionary Medicine Obra Revolucionaria 1960 24
166) 권희영 일제침략기 한국인의 소련관 한국·러시아 양국의 이해증진을 위한 교과서 개선방안 탐색 한국 교육개발원 1992 p 1-8
20세기에 들어 사회의학은 남미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164) 사회의학의 핵심적인 인물인 체 게바라(Che Guevara)가 1960년 쿠바에서 행한 역사적인 연설에서 다름과 같이 의학의 역할과 특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질병과 싸우는 원칙은 강인한 육체를 만드는 것(the creation of a robust body)에 기초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병약한 개체를 의사들의 기술로 강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총체적 작업(the work of the whole collectivity)을 통해서 다시 말해 전체 사회의 총체성(the entire social collectivity)을 통해서 강인한 몸을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 ”165)
체 게바라가 말한 ‘강인한 육체를 만드는 것(the creation of a robust body)’은 양봉근의 핵심적인 보건운동의 슬로건이었던 ‘튼튼한 내 몸을 짓자’와 일치하고 전체 사회의 총체성에 의해 그것을 달성하여야 한다는 게바라의 주장 역시 보건운동을 사회개조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했던 양봉근의 접근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이렇든 양봉근의 보건운동관은 독일 비르초브 중국 모택동의 보건정책의 원칙 그리고 20세기 남미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의학의 핵심적인 내용들과 긴밀한 사상적 친화성을 보이고 있다
양봉근은 이러한 사회의학의 개념들을 어디에서 습득한 것일까? 양봉근은 젊은 시절 「북풍회」와 「화요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는데 특히 이들 단체들은 일본의 사회주의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조직이었다 또한 당시 일제식민지 하에서 독립을 모색하던 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소련은 이상향과도 같은 곳이었는데 166) 양봉근 역시 당시 소련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1933년 4월호 삼천리 에 양봉근은 ‘북풍학인’이라는 필명으로 「쏘비엣트의 보건시설관」이라는 글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
다
“「대중을 위한 의사다」이것은 모스코 대학의 의학부장 스타라렌 교수가 吐한 말이다 과연 쏘베트·러시아에서는 의사는 자기의 영리를 주(主)로써 제병자(諸病者)에게 기술이나 약을 파는 바는 전무(全無)인 반면에 근로대중(勤勞大衆)을 위하야 전력을 다하고 잇다 영리(營利)라면 벌서 자신이 의사도덕 특히 신사회주의(新社會主義)의 의사 도덕은 모순인 것이다 엇드한 지적 직업이라고 할지라도 의업(醫業)만큼 사회주의에 대한 준비 쉬울 직업은 업슬 것이다 그리하야 가급적 의사는 사회화하기 쉬웁다 딸아서 러시아 의사는 적지 안은만족을 갓는 것은 물론이나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창조적 국민을 위하야 사욕을 배제하는 위대한 구제자(救濟者)인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167)
167) 북풍학인 쏘비엣트의 보건시설관 삼천리 1933 5-4 38-39
이른바 “대중을 위한 의사다”로 표방되는 소련의 보건의료체계와 사상은 의사로서 민중(대중)운동을 모색하던 양봉근이 견지해온 일관된 입장이기도 하며 동시에 사회의학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가 견지했던 사회의학적 시각은 이러한 소비에트의 보건의료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에서 시작된 사회의학이 러시아로 전해지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사회주의의 전 세계로의 확산과정에서 일본과 중국의 사회주의 사상을 통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담론으로서 조선사회에 사회주의가 수용되는 과정 속에서 양봉근과 같은 민족해방운동가에 의해 사회의학이 전해졌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4 결어
보건운동가로서의 양봉근의 생애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암흑기라고 할수 있는 일제 식민시기에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자주적 민족국가 나아가 보다 나은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한 부문운동으로 다양한 보건운동들이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활동을 주도했던 진보적 보건운동가가 가졌던 건강관 보건운동관의 성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양봉근이 가졌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총체적 접근방식 몸에 대한 자기통제의 강조 생활운동으로서의 보건운동 민중 지향적 인도주의 등의 가치는 19세기말 유럽에서 시작된 사회의학과 친화성을 가지며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 검토 연구 및 실천이 필요한 개념이라 할 것이다 더욱이 조국의 근대화와 독립의 모색과정에서 민중건강을 위해 보여준 그의 헌신은 숙고할 만한 보건운동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향후 일제시기에 전개되었던 여러 보건운동가들과 다양한 보건운동들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졌던 이들의 보건운동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1930년 초 양봉근이 보여준 건강관과 보건운동관이 이후 어떻게 단절되거나 계승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