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첩경 (壽民捷徑)
수민첩경 (壽民捷徑)
壽民捷徑 / [編者未詳] 筆寫本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1900頃 1冊(60張); 21.5 x 20.0 cm
�수민첩경(壽民捷徑)�은 편자를 알 수 없 으나, 조선 후기 �산림경제(山林經濟)�권3 에서 구급(救急)의 내용인 액사(縊死)·익사 (溺死)·동사(凍死)·상한(傷寒) 등 130여 종의 돌발적인 사고를 들고 이에 대한 구급방을 다룬 것을 필사한 것이다. 아울러 말 미에는 편자가 �산림경제�이외의 의서들에서 일상에 필요한 질병의 처치법을 간략하게 초략하여 기술하였다.
�수민첩경�의 편찬자는 알 수 없으나, 그 저본이 되었던 �산림경제�의 저자 홍만선 (洪萬選, 1643-1715)은 예조 참의(禮曹參 議)를 지낸 주국(柱國)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경증(景曾)의 딸인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 은 당대의 명문(名門)인 풍산 홍씨(豐山洪 氏)로서 증조(曾祖) 이상(履祥)은 대사헌 (大司憲)을 지냈고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으며, 조부(祖父) 영(霙)은 예조 참 판(禮曹參判)을 지내고 후일 영의정에 증직 되었다. 조모(祖母)는 좌의정을 지낸 월사 (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딸이다.
아버지 주국(柱國)은 사계(沙溪) 김장생 (金長生)의 문인인 정홍명(鄭弘溟)의 문하에 서 수학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월과(月課)에 서 세 차례나 장원하여 전적(典籍)이 된 후, 지평(持平)·수찬(修撰)·응교(應校)·장령(掌令) 등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고, 1674년(肅宗 즉위년)에 는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예송(禮訟)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홍만선은 1666년(현종 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은 매우 늦어 1682년(숙종 8)에 40세의 나이로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내직(內職)으로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의금부 도사 ·공조 좌랑 ·공조 정랑 ·사옹원 첨정(司饔院僉正)·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고, 외직 (外職)으로 연원찰방(連源察訪)·함흥판관(咸興判官)·합천군수(陜川郡守)·고양군수(高陽郡守)·단양군수 (丹陽郡守)·인천도호부사 ·상주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별로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고 중앙 조정보다는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산림경제�는 이러한 생활에서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수민첩경�의 ‘경제목록 구급(經濟目錄 救急)’에 수록된 목차를 목록을 통해 대조하면, �산림경제�권3 구급편의 내용이 전부 들어가 있는데 마지막의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만이 빠졌다. 다음의 ‘경제 구급(經濟 救急)’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림경제�와 내용이 같으며, 끝에는 ‘산림경제종(山林經濟終)’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참목침법(磣目針法)이라는 침법이 부기되어 있는 점인데, 시술의 방법은 기록 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뒤에 추부(追付)로 두풍안질(頭風眼疾), 목병제증(目病諸症)을 비롯하여 18개의 질병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치료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전거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수민첩경�은 조선 후기 �산림경제�가 편찬된 이후로 20세기 전반기까지 일상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었으며, 명칭의 다양한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편으로 추부(追付)에는 인체의 부위와 약물의 이름이 일부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김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