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내경소문 (黃帝內經素問)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黃帝內經素問. 1-9 / 李希憲(朝鮮) 監校 木活字本(內醫院字)
[發行地不明] : 內醫院, 光海君 7(1615)
12卷9冊 : 四周雙邊 半郭 22.0 x 16.1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內向3葉花紋魚尾 ; 30.0 x 20.5 cm
序 : 校正黃帝內經素問序...高保衡, 林億 等
黃帝內經素問序...啓玄子, 王冰 撰
刊記 : 萬曆四十三年(1615) 二月內醫院奉敎刊行
이 책은 당(唐) 보응(寶應) 원년(762) 왕빙(王冰)이 교정 ․간행하여 전해오던 것을 송대에 와서 가우(嘉祐) 2년
(1057)에 인종의 명으로 의서 교정국을 설립하여 손조(孫兆), 고보형(高保衡), 손기(孫奇), 임억(林億) 등이 기존의 의서들을 대거 교정하면서 이루어진 책이다. 우리나라에 이 책이 도입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광해군조에 전쟁으로 없어진 기존의 의서들과 새로 편찬된 의서들을 모아 내의원에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1607), <언해태산집요 (諺解胎産集要)>(1608),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1608), <의림촬요속집(醫林撮要續集)>(1608),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1612), <동의보감(東醫寶鑑)>(1613),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1613),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1613), <방역신방(辟疫神方)>(1613) 등을 내의원자로 간행할 때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이 책이 간행되었다. 현재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외에도 동국대, 연세대, 계명대, 인수문고, 상웅문고, 산기문고, 성암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본은 12권 9책으로 첫 페이지 고보형, 임억 등이 쓴 서문 첫줄 하단의 다섯 글자[之先務, 求民]가 식별이 어려운 두 종의 장서인(藏書印)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二月 日 內醫院奉敎刊行’이라는 간기와 ‘監校官 通訓大夫行 內醫院直長臣李希憲, 通訓大夫行內醫院直長臣 尹知微’라는 감교관의 관함(官銜)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동국대 도서관에 소장된 것은 목록인 1권 1책으로 사주쌍변(23.0 x 17.5cm), 유계, 반엽 10행 18자이고 주쌍행이며, 판심은 상하내향3엽화문어미이다. 표제는 <보주석문황제내경소문총목(補註釋文黃帝內經素 問總目)>으로 기재되어 있고, 장서인(藏書印)이 ‘해원루진장(海圓樓珍藏)’이라 날인되어 있다. 인수문고(仁壽文庫) 소장본은 12권 12책으로 사주단변(22.0 x 16.0cm), 유계, 반엽 10行18字, 주쌍행이며, 판심은 내향2엽화문어미이다. 표제는 <황제소문(黃帝素問)>으로 기재되어 있고, 판심제(版心題)는 <내경(內經)>이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二月 日 內醫院奉敎刊行’이라는 간기가 있으며, ‘監校官 通訓大夫行內醫院直長 臣李希憲 / 通訓大夫行內醫院直長臣 尹知微’라는 감교관의 관함(官銜)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성암문고(誠庵文庫) 소장본은 권5와 권10이 있고, 연세대와 상웅문고(尙熊文庫) 소장본은 12권 10책이며, 계명대소장본은 12권 13책, 산기(山氣)문고 소장본은 1책만 있다.
이 책은 황제와 기백(岐伯) 등 6인의 신하의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로 황제가 질문을 하고 기백 등이 답변을 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찬 연대는 학설들이 분분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내경>이라는 간략서명으로 통하고 있는 이 책은 총 81편으로 「상고천진론(上古天眞 論)」, 「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 「생기통천론(生氣通 天論)」, 「금궤진언론(金匱眞言論)」 등으로 시작하여 「해정 미론(解精微論)」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대범주로 보면 「소문(素問)」과 「영추(靈樞)」로 구성되어 있다. 「소문」이라는 명칭은 후한의 장중경(張仲景)이 자신의 저서 <상한론(傷寒論)> 서문에서 사용하였으며, 「영추」라는 명칭은 당대(唐代) 왕빙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음양오행, 오운육기(五運六氣), 장부의 경락, 질병의 근본 원인, 진단 및 침술, 치료방법이나 예방 등을 기술하고 있다.
본 의서의 서문에 “수(隋) 양상선(楊上善)이 찬하여 <태소(太素)>라고 하였다.[隋楊上善纂而爲太素]”는 기록은 이들이 교정할 당시 양상선의 <태소>를 참고하였다는 근거가 된다. 양상선은 수․당시대의 인물로 소문과 영추를 주해하여 서명을 <태소>라 할 때는 당 초기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후 <태소>는 없어졌다가 헌종(憲宗) 1년(1835) 일본 경도(京都) 인화사(仁和 寺)에서 발견되어 광서(光緖) 중엽에 중국인 양성오(楊惺吾)에 의해 소개됨으로써 본 의서와 비교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판본학적인 가치는 물론 동양의학의 기초이론을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데 그 가치가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에서 내의원자로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인쇄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김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