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경험활유방 (古今經驗活幼方)
고금경험활유방 (古今經驗活幼方)
古今經驗活幼方 / 柳瑺(朝鮮) 著 影印本
서울 : 國立中央圖書館, 1995[原本未詳] 1冊(40張) : 10行字數不同; 25.2 x 32.9 cm
原本版事項 : 筆寫本
원본소장기관 : 日本杏雨書屋(乾3326)
조선 후기 숙종 때 내의(內醫) 유상(柳瑺)이 지은 두창(痘瘡) 치료에 관한 의학서이다.
유상(柳瑺)은 의관으로서 숙종 때의 두과전문의(痘科專 門醫)이다. 그의 이름은 상(相) 또는 상(尙)으로도 불린 다.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할아버지는 판관(判官) 유인(柳湮)이고, 아버지는 문해백(文海伯) 유경집(柳景緝)이며, 아들은 태의원 내의(太醫院內醫) 유중림(柳重臨)이다.
유상은 진사(進士)로서 시약청참관(侍藥廳參官)이 되었으며, 숙종 9년(1683)에 서울에서 두환(痘患: 천연두)이 크게 일어났을 때 왕을 치료한 공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특서(特敍)되었다. 이해 12월에 서산군수(瑞山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왕이 아직 다 낫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보낼 수 없다 하여 고양군수(高陽郡守)에 임명되었다. 숙종 25년(1699)에는 왕 세자의 두진(痘疹)을 잘 치료하였으므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실직을 받았으며, 수령을 제수받았다. 숙종 37년(1711)에는 왕자(王子)의 두환(痘患)을 치료하여 가자(加資)되었다. 또 왕비의 두진(痘疹)을 치료한 후에는 2단계를 초수하여 합천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가 삭녕군수(朔寧郡守)가 되었다. 두과(痘科) 에 대한 탁월한 기술이 있어 내의(內醫)로서 궁중과 민질(民疾) 치료에 공이 많았다. 저서(著書)로는 <고금경험활유방(古今經驗活幼方)>1권이 있다.
본서는 1권으로 40장의 복사본이다. 첫머리에는 ‘이 책은 숙종 때 유상(柳瑺)의 저술로 그 증세를 자세히 조사하였으니 참고하여 약을 잘 지으면 활유지방(活幼之方)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문이 시작되는 장2 앞면 1행에 ‘고금경험활유방’이라는 서명이 나오고, 바로 둘째 행부터 논치두약성(論治痘藥性)·환십오일내불치사증론(患十五日內不治死症論)·발열삼조내결생사문(發熱三朝內決生死門)· 발열삼조내결생사문(發熱三朝內決生死門)·보두삼조결생사문(報痘三朝決生死門)·기창삼조내결생사문(起脹 三朝內決生死門)·관농삼조결생사문(貫膿三朝決生死門)·결엽삼조내결생사문(結靨三朝內決生死門)·발열삼 조증치문(發熱三朝症治門)·보두삼조증치문(報痘三朝症治門)·기창삼조증치문(起脹三朝症治門)·관농삼조 증치문(貫膿三朝症治門)··수엽삼조증치문(收靨三朝症治門)·두후여독증치(痘後餘毒症治)·두창수미계기례 (痘瘡首尾戒忌例)·식치(食治)·예방두창약방(預防痘瘡藥房)·예해태독방(預觧胎毒方)·마진론(麻疹論) 등을 행으로 구분하여 두창의 증세를 설명하고, 이에 필요한 치료와 처방법에 대해 기록하였다.
본서는 일본 행우서옥(杏雨書屋)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을 1995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본으로 발행한 것이다. 본문은 내지 1장을 합하여 모두 40장인데, 서문과 발문은 없고, 필사자가 누구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한 쪽의 행수는 10행으로 일정한데, 자수는 동일하지 않다. 궐문(闕文)은 붓으로 그려 표시하였고, 주기는 쌍행으로 기록하였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두창치료법과 중국의서의 치료법에 구애받지 않고 경험에 의한 치료와 처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조선 후기에 발달한 임상의학의 산물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부분이 박진희(朴震禧)의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을 많이 원용하여 독창적인 면은 적다. (이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