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古醫書 해제

이양편 (二養編)

지운이 2020. 5. 9. 23:29

이양편 (二養編)

二養編 / 曺倬(朝鮮) 編 木板本
永川 : [發行處不明], 光海君12(1620)跋
上編 6卷2冊, 下編3卷1冊, 共3冊 : 四周雙邊 半郭 23.0 x 17.0 cm 有界, 10行22字 註雙行, 內向3葉花紋魚尾; 32.1 x 21.5 cm
序 : 萬曆丁巳(1617)...夏山病隱
跋 : 萬曆戊午(1618)...病隱, 庚申(1620)...曺明勖


�이양편(二陽編)�은 조선 중기 경세가(經世家)이자 문장가였던 조탁(曺倬, 1552-1621)이 욕심을 경계하고 마음과 몸을 기르기 위해[二養] 여러 경서(經書)와 의서(醫書)에서 긴요한 글들을 뽑아 엮은 양생서이다.


저자 조탁은 자(字)가 대이(大而), 호(號)는 이양당(二養堂) 혹은 치재(耻齋)이며 창녕(昌寧) 조씨(曺氏)이다. 명종 7년(1552)에 태어나 광해군 13년(1621) 별세하였다. 선조 21년(1588)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4년 후에 임진왜란(1592)이 발발하자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그는 왕의 신임을 받아 주요 요직을 거쳤는데, 선조 28년(1595)에는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선조 32년(1599)에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衛率)을 제수 받았다. 이어 별시(别試)에서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禮曹), 병조(兵曹), 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두루 거치고 예조(禮曹) 정랑(正郞),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병조(兵曹) 정랑(正郞)을 지냈다. 선조 34년(1601)에는 외직인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직강(直講), 지제교(知製敎),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교리(校理), 시강원(侍 講院) 문학필선(文學弼善) 보덕(輔德),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집의(執義), 사간원(司諫院) 사간(司 諫) 등을 역임하였고 선조 40년(1607)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가 강릉부사(江陵府使)에 부임하였다. 광해군 2년(1610)에는 우승지(右承旨)가 되었고, 4년(1612)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공조(工曹)와 형조(刑曹)의 참판(參判)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겸직하였으며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한성부(漢城府) 좌우윤(左右尹)을 지냈다. 광해군 10년(1618)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후에 사실상 물러나와 독서에 전념하다가 광해군 13년(1621)에 71세로 영면하였다. 사후에 호성선무청난공원종일등(扈聖宣武淸難功原從一等)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조탁은 학문적으로 퇴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도산급문현록(陶山及門賢錄)�권4에는 “조(曺)는 자가 대이(大而), 호가 애송당(愛松堂)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용수사에 머물면서 문하에서 수업하였음” 이라고 적혀 있다. 또 �이양편�내용 가운데에도 퇴계철학(退溪哲學)의 핵심(核心)이라고 할 수 있는 경(敬)에 대한 사상이 드러나 있다.
조탁은 이천(伊川)이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좇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吾以忘生徇欲爲深恥]”라고 한 말에 감화 받아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심경(心經)�, �소학(小學)�, �근사록(近思綠)�등에서 수양이 되는 글들을 뽑아 �자성편(自省編)�이라는 책을 만들었으나 전란 중에 이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양편�은 조탁이 강릉부사 재직 당시에 저술한 것으로 이 �자성편�의 개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양편�은 조탁이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광해군 12년(1620)에 그의 아들 명욱(明勗)에 의해 간행되었다. 조명욱(曺明勗)은 자가 여우(汝偶), 호가 율촌(栗村)으로 19세에 사마시(司馬試)로 등과한 후에 검열(檢閱) 정언(正言) 등을 거치고 남양부사(南陽府使) 영천군수(永川郡守)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는 영월군수(寧越郡守) 울산부사(蔚山府使) 등을 역임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이천부사(利川府使)로서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하다가 과로(過勞)로 사망하였다. 사후에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이양편�은 명욱이 영천군수로 있을 때에 영천에서 간행되었다.


‘이양(二養)’이라는 서명은 마음을 기르는 양심(養心)과 몸을 기르는 양생(養生)을 지칭한 것이다. 책의 구성 또한 양심(養心)에 대해 설명한 상편(上篇) 6권과 양생(養生)에 대해 정리한 하편(下篇)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편 6권은 �소학(小學)�의 편목과 �대학(大學)�의 조목에서 따온 입교(立敎), 명륜(明倫), 격치(格致), 성정(誠正), 수제(修齊), 치평(治平)으로 권명을 삼았고 의서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하편 3권은 치망(恥忘), 치순(恥徇), 무치(無恥)로 권명을 정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본 자료는 모두 9권3책으로, 첫 번째 책에는 상편의 권1에서 권3이, 두 번째 책에는 상편의 권4에서 권6이 실려 있으며, 마지막 책에는 하편 전체가 담겨 있다. 책에는 상편 서두에 저자 자신의 서문이 있으며 하편 말미에 있어야할 발문은 상편 끝에 위치해 있다. 상편과 하편에는 목록을 각각 따로 두었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내가 약관의 나이에 질병에 걸려 항상 몸을 기르고 마음을 수렴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으로 삼고 있었다. 앓는 중에 �심경(心經)�을 읽다가 이천선생께서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좇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吾以忘生徇欲爲深恥]’라고 한 구절에 이르러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생 각해 보니 이 ‘망생순욕(忘生徇欲)’ 네 자가 마음과 몸을 기르는[養心養生] 약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 졌다. 욕망이라는 것은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四肢)가 하고자 하는 것으로 비록 사람에게 없을 수는 없지만, 이것이 많은데도 절제하지 않으면 마음을 잃고 본성을 멸하게 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여 이천이 말한 ‘망생순욕(忘生徇欲)’ 4글자에 깊이 감동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각 권의 내용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상편 권1 입교(立敎)와 권2 명륜(明倫)은 �소학�에서 권명을 딴 것이다. ‘입교’에서는 입군사학교지교(立君師學校之敎, 군사와 학교의 가르침을 세우는 일), 입사제수수지 교(立師弟授受之敎,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고받는 가르침을 세우는 일), 입가정훈계지교(立家庭訓誡之敎,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세우는 일)에 대해 설명하였고, ‘명륜’에서는 명부자지유친(明父子之有親), 명군신지 의(明君臣之義), 명부부지별(明夫婦之別), 명장유지서(明長幼之序), 명붕우지신(明朋友之信)으로 나누어 오륜(五倫)을 하나하나 밝혔다. 이들 내용은 �중용(中庸)�, �대학(大學)�, �맹자(孟子)�, �주례(周禮)�, �논어(論語)�등에서 주로 인용 된 것들이다.

 


권3 격치(格致)는 �대학�의 “사물이 구명된 뒤에 앎이 투철해진다[物格而后知至]”라는 조문을 주제로 궁리(窮理), 도학(道學), 독서법(讀書法), 이리(理氣), 성(性), 심(心)에 대해 논하였다. �심경�과 �근사록�의 내용이 많이 나온다. 권4 성정(誠正) 역시 �대학�에서 “뜻이 참되게 된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된다[意誠 而后心正]”라고 한 구절에서 권명을 따온 것으로 입지(立志), 경(敬), 성(誠), 존양(存養), 성찰(省察), 양기(養氣), 기상(氣象), 변화기질(變化氣質), 징분(懲忿), 질욕(窒欲), 염개(廉介), 검약(儉約), 천선(遷善), 개과(改過), 식량(識量), 겸퇴(謙退), 도회(韜晦), 안빈(安貧), 지족(知足), 지명(知命), 독의(篤義), 처사 (處事), 대인(待人)에 대해 설명하였다.

 

권5 수제(修齊)와 권6 치평(治平)은 �대학�에서 “몸이 닦여진 뒤에 집안이 바로잡힌다[身修而后家齊]” 라고 한 구절과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화평해진다[國治而后天下平]”라고 한 구절에서 각각 권명을 뽑은 것이다. ‘수제’에서는 독행(篤行), 근언(謹言), 위의(威儀), 의복지제(衣服之制), 음식지절(飮食之節), 거가법(居家法) 등 몸가짐이나 일상예절을 다루었고, ‘치평’에는 거관(居官), 애민(愛民), 애물(愛物), 우국 (憂國), 논사(論事), 처변(處變), 논인(論人), 치도(治道), 치법(治法)에 대한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하편은 ‘망생순욕(忘生徇欲)’이라는 말을 치망(恥忘, 잊은 것을 부끄러워 함), 치순(恥徇, 따른 것을 부 끄러워함), 무치(無恥, 부끄러움을 없게 함)의 세 구(句)로 나누어 권제를 삼았다. 권1 ‘치망’에는 천지운기(天地運氣), 내경편(內景篇), 외형편(外形篇)을 두었다. 이 목차는 �동의보감(東醫寶鑑)�(1613)의 구성을 따른 것인데, 다만 천(天)과 인(人)을 대대하기 위하여 ‘천’에 해당하는 천지운기의 내용을 전면에 내세우고 ‘인’에 해당하는 내경편과 외형편의 내용을 뒤에 두었다는 차이가 있다. 목차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동의보감�을 조술(祖述)하였는데,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저자의 의견을 덧붙여 놓기도 하였다. 한편, 저자는 욕망의 근원을 이(耳), 목(目), 구(口), 비(鼻), 사지(四肢)로 보았는데, 권2 ‘치순’은 이 들 각각의 욕망을 경계하는 계이욕(戒耳慾), 계목욕(戒目慾), 계구욕(戒口慾), 계비욕(戒鼻慾), 계사지욕 (戒四肢慾)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권3 ‘무치’에서 저자는 경서(經書)와 문집(文集)에 나오는 양생격언 (養生格言)을 채록하고 섭생총론(攝養總論)으로 양생의 기본 원칙을 밝힌 뒤에 치병(治病)과 잡병유인(雜 病有因)을 통해 질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놓았다.
조탁의 �이양편�은 유교 가치관 내에서 도학(道學)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양생사상이 어떤 모습으로 합리화되고 실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조탁은 발문에서 사람들이 천지의 이치만을 궁구하고 인체의 사정은 알려고 하지 않으나 양생은 성현들의 학문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모두 양생에 힘썼고 그 방법으로 천지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 욕망을 막았을 따름이라고 하여 양생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선유(先儒)와 성현(聖賢)에서 연유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주자학을 기틀로 하고 있던 조선사회에서 신선을 연상시키는 양생사상은 환영받기 보다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조탁의 말은 이러한 유학적 사상관 안에서 양생을 포용하기 위한 논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양편�에서 잘 드러나듯이 조선의 유학자들은 양생사상을 신선이 되거나 불로불사로 장수하기 위한 방법보다는 건전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여 하늘이 부여한 성(性)을 지켜나가는 수양의 한 방편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환단법이나 호흡법 등의 방법은 배제된 채 몸의 이치를 설명한 의학(醫學)과 마음을 다스리고 덕성을 함양하는 심학(心學)에 그 관심이 집중되었다.


책의 간행기에는 조명욱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있을 때에 영천(永川)에서 이 책을 판각(板刻)하게 된 내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가군(家君)께서 �이양편�을 엮으신지 오래다. 하루는 상편의 서문과 하편의 발문을 자제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을 보면 이 책을 지은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늙고 병든 가운데 스스로 깨우친 요결들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에는 부족할지 모르나 너희들이 각자 한 벌 씩 베껴 읽는다면 마음과 몸을 기르는 데에 반드시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아버지의 뜻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물러나와 여러 벌을 베껴 썼지만 모든 조카와 자손들에게 다 필사해 주지 못하여 걱정되었다. 마침 영천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영천군에 각수(刻手)들이 있었다. 공무를 보는 틈틈이 판각작업 한 것이 이제 완성되었다. 우리 집안의 모든 자손들이 모두 인쇄된 것을 보고 허물 않고 잊지 않는 자료로 삼아 준다면 다행이겠다.”


간행기의 설명처럼 �이양편�은 영천군에서 목판으로 판각되어 인출되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충남대학교, 국립중앙도서관,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오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