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조선의 동의학

조선시대 질병과 치료, 그리고 의사⑥

지운이 2020. 1. 14. 12:05

조선시대 질병과 치료, 그리고 의사⑥

  김 성 수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2) 상업의사의 등장


조선후기 의약의 상업화와 함께 상업적으로 활동하는 의사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기 관료제 운영에 속한 의사들과 유의들이 의료계에서 대부분을 차지하였다면, 조선 후기는 그에 더해서 상업적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원인은 상업적 사회관계가 확대된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의 과거제 운영상에서 나타나는 문제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대대로 관직을 지내거나 유력한 가문이 아니면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 점차로 어려워지면서, 이에 낙담한 사람들이 종종 매약(賣藥)에 종사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1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유학자임에도 전업 의사로 나가는 경우가 상당 수 나타났는데, 집안 형편에 따른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형태로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신대우(申大羽, 1735~1809)가 기록을 남긴 소태원(蘇泰元)이라는 의원이 대표적이다. 소태원은 7대조와 6대조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을 정도로 현달한 가문이었지만, 고조인 영복(永福)이 희릉참봉(禧陵參奉)을 지낸 이후 집안이 출사를 하지 않았다. 그 영향으로 가세가 기울었는지, 소태원 역시 어려서부터 의학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조카뻘인 수열(洙悅)을 후사로 삼으면서, 의학을 가르쳤다.



소태원(蘇泰元)은 어려서부터 의학을 직업으로 삼았는데, 그의 처방이 매우 기묘하였다. 일찍이 수열(洙悅)에게 말하기를 “의술이 비록 작은 도(道)이지만, 그것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지극(至極)하다. 신명(神明)의 일에도 참여할 수 있으며 민생(民生)을 구제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네게 의학을 전수하는데, (의학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자애로운 것과 그 뜻이 같다. 그러니 사람을 귀천(貴賤)으로 나누지 않도록 조심하고, 네가 의술을 베푸는 데에 나태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였다. 그런 까닭에 비록 천한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부탁을 하면 가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반드시 병의 증상을 살피고 처방을 고찰하는데 마음을 다하였다. 이에 병자 중에 그를 만나 치료를 받고서 특별한 효과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2

 

소태원의 경우에는 자신이 의학을 전업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은 자식에게도 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는 의원에 대한 사대부들의 인식이 여전히 비판적이었고, 조선후기 개혁적인 학자로 이름이 높은 정약용(丁若鏞) 역시도 자신의 아들이 의원을 하는 것에 대해 질책 하였던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로 가면서 다양하게 학습한 상업적 의사, 이른바 업의(業醫)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임상경험을 통해 명성을 높여가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스승에게 배우기도 하고, 유명한 의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학지식을 연마해가고 있었다. 여하간 의사들의 경우에도 상업적 관계의 확대 속에서 치열한 경쟁이 형성되었고, 다양한 현상을 낳고 있었다. 새로운 치료법의 발견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 외에도 과격한 치료로 인한 의료사고 등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정종로(鄭宗魯:1738~1816)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의 의사들의 일에 이르게 되면 (옛날의 의사들처럼) 그렇지 않아, 옛 처방은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세울 뿐만 아니라, 침구(鍼灸)도 분수에 넘치고 탕액(湯液)도 준열(峻烈)한 정도를 지나쳐서 잠시 병의 상태가 좋아지기를 힘쓸 뿐, 근본의 계책은 돌아보지 않는다. (효과를 보면) 점차로 스스로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도 효과가 빠름을 좋아하여, 편작(扁鵲)과 창공(倉公)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한다.3



정종로는 의사들이 효과가 불분명한 처방을 사용하고, 침구와 탕액이 정도를 넘어서 과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사례로써 특정 의사들인 곽선원(郭善源)과 임정(任禎)같은 부류가 그와 같은 인물이라고 비판하였는데, 현재 기록에서 이들에 대하여 확인할 수 없다. 대신 그가 자세하게 언급한 이생(李生)과 황생(黃生)의 사례를 통해서 그 실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생(李生)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하루는 바람처럼 나타나서, 스스로 의술에 능하다고 말하였다. 처음부터 질병의 경중(輕重)은 묻지도 않고 침을 놓는데, 의경(醫經)에서 1~2푼이라고 했으면 번번이 6~7푼을 놓았으며, 3~4푼이라고 한 것은 번번이 8~9푼이 넘었다. 뜸을 하는 것도 의경에서 7~14장이라고 한 것을 번번이 42~49장을 넘겼으며, 21~28장이면 56~63장을 넘겼다. 그가 침을 놓고 뜸을 하는 혈(穴)의 자리가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적취(積聚)가 흩어지고, 울체된 기운이 흐르게 되어서는 장님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맥락(脈絡)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미묘하여 비록 효과가 있는 듯하지만,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생에게서 침을 맞고 뜸을 받은 사람들이 잇달아 죽으면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 또 황생(黃生)이라는 자가 있어서, 스스로 처사(處士)라고 칭하였는데, 그의 의술이 이생과 비슷하였다. 그가 경솔하게 침을 놓고, 뜸을 하는 것이 이생보다 심하였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가는 정도가 이생보다도 심하였다. …옛날의 의사들이 병을 치료할 때에는 반드시 진원(眞元)의 기운을 보양하고서 바깥의 사기(邪氣)를 공격하였다. 빠른 효과에 급급해하지 않고, 병자로 하여금 병이 저절로 나가고 기운이 온전해져서 그 원래의 수명을 마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의사들이 병을 치료하는 것은 원기(元氣)의 허실(虛實)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공격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생각하여, 눈앞의 즐거움만을 구하고 장래의 근심을 고려하지 않는다. 병자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원기가 이미 사그라져 죽음이 멀지 않으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는가?4

 

떠돌이 의사로 보이는 이생과 황생이 과도하게 침을 놓고 뜸을 하였던 것은 결국 앞서 언급된 의사들 사이에서의 경쟁이 치열해짐으로 인하여 보다 분명한 효과를 보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던 사정이 있었다.


이처럼 상업적 의학 시장의 급격한 성장에 따른 의사의 이익추구 경향과 맞물려, 일반인들은 의사들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는 의원들 간의 개별적인 문제이기도 했지만, 근대국가에서 의사자격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철저하게 감독하는 것과 같은 국가적 대안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그와 같은 현상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업적 의사의 등장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등 의학적인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의학 또는 의사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다. 신분제 사회로 운영되던 조선 사회에서 의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관료로 등용된 의사들은 대체로 중인 신분에, 그렇지 않은 의사들의 경우는 일반 양인에 처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전문적 지식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 새롭게 고찰하는 인물도 등장하고 있었다.



조광일이라는 의원은 천술(賤術)이라는 홍양호의 의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답변을 내놓고 있었다.

조광일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장부(丈夫)가 재상(宰相)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의사(醫師)가 될 것입니다. 재상은 치도(治道)로써 백성을 구제하고, 의사는 의술로써 사람을 살립니다. 처지가 곤궁(困窮)하고 현달(顯達)한데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그 공로는 같습니다. 그러나 재상은 때를 만나야만 도(道)를 행할 수 있으니, (때를 만나는 데에) 행운과 불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는 대신에 그 책임을 맡게 되니, 하나라도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하게 되면, 허물과 죄가 따르게 됩니다. 의사는 그렇지 않아서, 자신의 의술로 자신의 뜻을 실행하면 되니 얻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혹 치료하지 못한다고 (환자를) 버리고 가버려도 나를 탓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런 까닭에 의술을 편안히 여기며, 내가 의술을 행할 때에는 이익을 바라지 않으며, 내 뜻대로 행할 뿐이지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습니다.”5



유학자가 재상이 된다면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위까지도 높아진다는 점은 분명히 의사가 갖는 사회적 지위와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상이 되기 위해서는 등용되어 관료가 되고,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야만 가능한 일이다. 즉 자신과 어울리는 때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재상이 되는 것은 능동적이기 보다는 피동적인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하여 의사는 자신의 의술을 베푸는 데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훨씬 능동적인 존재가 된다.


적어도 전문적인 지식인으로써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의 의미를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의술을 자기의 능동적인 발현이라고 하는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조광일은 의학과 의사로써의 자기 정체성을 획득해 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신분제로 인적 구성을 강력히 통제하려고 하였던 조선사회가 차츰 변화해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끝-

 


주)

1. 『靑泉集』 卷6, 雜著, 「題宜閒錄」, “我朝三百年來 文武之士 繇科第而進者 非世祿華閥 百不能一致崇顯 所以悲歌落拓之徒 往往隱於賣藥”

2. 『宛丘遺集』 卷5, 墓文一, 「蘇君墓銘」, “君少業醫 其方甚奇 嘗語子洙悅曰醫之術雖小道 其造極也 可以參神明 可以濟民生 吾今授女以學 然孝於親而慈於子 其情則同 愼毋以人貴賤 勤慢女所操之術 故雖下賤儓隷 有請君未嘗不往 往必察九候審方劑 必盡其心 病之得君而治者 無不有異效焉”

3. 『立齋遺稿』 卷16, 說, 「醫說」, “至於今世之醫則不然 背棄古方 刱立新奇 鍼焫踰越分數 湯液過加峻利 務爲一時之快 而不顧本根之計 沾沾然自以爲喜 而人且悅其近效 以爲扁倉復起”

4. 『立齋遺稿』 卷16, 說, 「醫說」, “有李生者 不詳族里 而一日飄然而至 自言能醫 初不問病之輕重 鍼人經一二分者 輒過六七分 三四分者 輒過八九分 焫人經一二七壯者 輒過六七七壯 三四七壯者 輒過八九七壯 其下穴之當否 未知其果何如 而積者潰聚者散 滯者行淹者流 盲者視跛者行 遠近人士 莫不神且異之 或曰 人之脈絡 關係甚微 雖似有近效 後必有悔 旣而受鍼焫於李生者 相繼死 無復存者 又有黃生者 自稱處士 而其術似李生 其輕慢鍼焫 尤不及李生之愼 而人奔趍之 過李生焉…古之醫師之治病也 必養其眞元 攻其外邪 不急近功 而使病者病去而氣完 以終其天年 今之醫師之治病也 不計元氣之虛實 惟以攻伐爲能 只求目前之快 不圖將來之憂 病者雖得一時之效 其元氣已索然而死亡無日 豈不可愼也哉”

5. 『耳溪集』 卷18, 傳, 「針隱趙生光一傳」, “生笑曰 丈夫不爲宰相 寧爲醫 宰相以道濟民 醫以術活人 窮達則懸 功等耳 然宰相得其時行其道 有幸不幸焉 食人食而任其責 一有不獲則咎罰隨之 醫則不然 以其術行其志 無不獲焉 不可治則舍而去之 不吾尤焉 吾故樂居是術焉 吾爲是術 非要其利 行吾志而已 故不擇貴賤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