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조선의 동의학

조선시대 질병과 치료, 그리고 의사④

지운이 2020. 1. 13. 10:08

조선시대 질병과 치료, 그리고 의사④

 김 성 수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2) 국립 병원과 약계


양생법을 통해 질병을 미연에 방비하더라도 이미 질병에 걸렸을 때에는 결국 병원이나 의사를 찾아서 치료를 받는 것이 조선에서도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마련한 의료기구를 먼저 들 수 있다. 조선의 건국 이후에 여러 차례의 제도 정비를 통해 성종대에 이르게 되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의해서 중앙에서는 삼의사(三醫司) 체제로 완비되었다. 그것은 왕실의 구료를 담당하였던 내의원(內醫院), 종친과 조관(朝官)에 대한 의료를 맡았던 전의감(典醫監), 대민의료를 수행하였던 혜민서(惠民署)였다.1 이외에도 지방의료에 대한 요구 증대에 따라 계수관에 의원이 설치되고 의생(醫生)이 배치되어 지방에서도 국가의료기구가 일부 운영되고 있었다.2



이와 같은 의료기구의 정비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이 대민의료를 담당한 혜민서의 상설화였다. 특히 혜민서는 대민의료를 담당할 뿐 아니라, 향약재의 전매를 통하여 국가에서 의료를 중앙통제 하고자 했던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하였던 정도전(鄭道傳)에 의해서 이미 구상된 것이었다.


나라에서는, 약재가 본토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어서 만약 질병을 얻게 되면 효성스럽고 인자한 자손들이 약재를 구하러 이리저리 헤매다가 약은 얻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져서 마침내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것을 생각하여, 이에 혜민전약국을 설치하고, 관에서 약가로서 오승포(五升布) 6천 필을 지급하여 이것으로써 약물을 갖추게 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질병이 생긴 자는 몇 말의 곡식이 나 몇 필의 베를 가지고 혜민전약국에 가서 필요한 약을 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원본의 이식(利息)을 도모하여 10분의 1의 이자를 받아서 항구적으로 약을 비치해 두어서 빈민들로 하여금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게 하고 요절하는 액운을 면하게 하였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이렇듯 컸다.3



이렇게 정도전에 의해 구상되었던 혜민서의 전매제로 대표되는 대민 의약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몇 가지 기본방침을 정하고 있었다. 안정적으로 약재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향약재를 관리하고 부세(賦稅) 운영으로써 국가에서 약재를 확보하고, 마련된 약재가 일반 민에게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약재의 가격을 안정화시키는 것이었다.


의료기구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약재의 확보였다. 약재가 있어야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약재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의료효과가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 조선초기부터 향약정책을 추진하여, 세종은 중국의 약재와 국내에서 자생하는 약재가 동일한 것인지 비교․검토하고, 국내에서 자급이 가능한 약재를 지역별로 공납하도록 하였다.


중국에서 수입되는 약재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약가의 상승요인이 되었으므로, 국내에서 자생하는 향약의 적극적인 사용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향약의서 이외에 중국에서 수입된 의서들의 경우, 의서에 소개된 본초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향약의 약성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따라서 향약과 당약(唐藥)간의 비교 검토와 함께 약재들을 지속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하거나 국내에서 육종하는 정책이 요구되었다.4



이들 약재에 대한 검토와 함께 향약 생산의 국내적 기반을 조사하고, 이를 부세제운영이라는 틀에서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것 역시 필요하였다. 세종 7년에서 시작되어 14년에 완료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편찬에서 약재의 수급을 위한 기초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조사된 특산물 가운데 약재로 사용되는 것들은 군(郡)․현(縣)단위로 토의(土宜), 토공(土貢), 약재(藥材)로 다시 구분되었으며, 이를 통합하여 도(道) 단위에서 약재(藥材)와 종약재(種藥材)로 세분하여 총괄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약재는 공납제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한편 약가(藥價) 문제는 조선 초부터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으로 높은 약가를 다시 조정하라는 조처가 몇 차례에 걸쳐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정부에서는 약가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약가가 너무 높게 책정될 경우, 그로 인하여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조치는 자주 취하여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원이었던 까닭에 약가의 변동이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공납제로 운영되었던 향약재 확보 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둠으로써 약재 가격의 상승 요인이 많은 부분에서 상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방 의료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은 의원에 소속된 (醫生)들이었다. 이들은 각 지방관을 중심으로 의약을 갖추고서 민간에 판매하고 있었다. 16세기 기록인 『묵재일기』에는 구급약을 제조하여 민간에 팔고 있는 의생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5 아마도 의생이 속한 의원의 운영재원은 약가를 통해 마련되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한다면 약값의 마련이 어려운 일반민에게는 많은 혜택이 돌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의생의 경우 의학만을 전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방관에서 부과된 다른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교육이 부실하였고, 결국에는 치료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들 의생에게 전적으로 기대하기 보다는, 지역의 유학자들 가운데 의학에 조예가 있는 이른바 유의(儒醫)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하거나 아니면 혜민서가 있는 한양으로 가야했다.



『묵재일기』에 등장하는 최정(崔淨)은 아버지 최사철(崔思哲)이 중풍(中風)으로 반신불수(半身不遂)하며 언어불통(言語不通)한 상황에 처하자, 당시 성주에서 유의로 활동하던 이문건에게 자문하였고, 이문건이 알려준 소속명탕(小續命湯)을 사용하여 증세가 호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치료를 받고자 굳이 상경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지방에서는 토산의 약재를 제외하고는 약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지방에서는 사족들을 중심으로 약계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17세기 초반 상주지역에서 성람(成灠), 조익(趙翼), 정경세(鄭經世) 등은 존애원(存愛院)을 운영하고 있었으며,6 그와 비슷한 사례로 홍우원은 약계를 운영하는 지인에게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7 이와 같은 약계를 운영하는 방식은 대체로 사족을 중심으로 공동으로 자금을 내어 당재(唐材)를 마련하는 한편 향재(鄕材)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특히 홍우원이 서문을 지어준 약계의 경우, 그 구성원이 50인에 해당할 정도로 규모가 크기도 하였다.8 이처럼 약계가 운영될 수 있는 소지는 향약을 이용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방납의 운영을 통해서 많은 약재상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9 이처럼 약계의 활성화는 일부 지방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이었다. 대표적으로 강릉의 경우는 1603년에 결성되어 1842년까지 운영될 정도로 지속성이 강하기도 하였다.10 지역적 유대 속에서 사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상기 약계와는 다른 형태의 약계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바로 상업적 의학의 발전과 연결된다.

 


주)

1. 孫弘烈, 『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 1988, 88~116쪽.

2. 金聖洙, 「16세기 鄕村醫療 實態와 士族의 대응」 『韓國史硏究』 113, 2001 참조.

3. 『三峰集』 卷13, 朝鮮經國典 上, 賦典, 「惠民典藥局」, “國家以爲藥材非本土之所產 如有疾病 其孝子慈孫 傍求奔走 藥未之得而病已深 有不及救治之患 於是置惠民典藥局 官給藥價五升布六千疋 修備藥物 凡有疾病者 持斗米疋布至 則隨所求而得之 又營子利 十取其一 期至無窮 俾貧民免疾痛之苦 而濟夭札之厄 其好生之德大矣”.

4. 『世宗實錄』 卷19, 世宗 5年(1423) 3月 22日(癸卯); 『世宗實錄』 卷48, 世宗 12年(1430) 4月 21日(庚寅)

5. 『黙齋日記』 1552년 6월 18일, “州之醫生以官令熟劑救急藥 賣于民間 以爲式云 昨因李遇之求買木香元一丸 今日送米一升二合”

6. 『蒼石集』 卷13, 序, 存愛院記. 存愛院의 운영에 대해서는 김성수, 2005, 「16~17세기 養生書 편찬과 그 배경」 『韓國思想史學』 24

7. 『南坡集』 卷10, 雜著, 藥契序, “兪君之才 慶君元老嘗於坐中 請余藥契序 余辭不能 其後慶君又走書要之 余乃曰 此仁人之意也 余不得不言”

8. 『南坡集』 卷10, 雜著, 藥契序, “今二君懷醫國之術 有救人之志 遂與同志五十人 共爲藥契 出穀物多少 貿百藥貴賤 預爲蓄貯 使人有疾病 各自取給 待用無闕”

9. 이미 16세기 중엽 『黙齋日記』에서는 전문 약재상이 나타나고 있다. 김성수, 2001, 「16세기 鄕村醫療 實態와 士族의 대응」 『韓國史硏究』 113 참조.

10. 李揆大, 1988, 「朝鮮時代 藥局稧의 一考察」 『又仁金龍德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