柯琴の〃以方名証〃説が吉益東洞の〃方証相対〃説へ与えた影響
柯琴의 〃以方名証〃説이 吉益東洞의 〃方証相対〃説에 미친 영향
상해 중의약대학 교수 兪 雪如
개 요
중국 청나라 초기의 의학자 柯琴은 "仲景의 六経이 傷寒뿐만 아니라 백병에 적용 할 수있다"(1)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경의 「상한론」의 六経의 증을 방에 맞추어 분류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그 증을를 사용하여 편명을 부여하고(以方名証), 나아가 六経의 여러 이론을 모아 「傷寒론」에 주석을 달았다. 또한 柯琴은 方、喩의 저작이 각광을 받던 시대에 중경의 六経이 여섯 개의 부로 분류, 즉 〃六経地面〃説을 들고(2), 증에 따라 약을 선택할 것을 제창하여, 후학들을 크게 계발함과 동시에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한편, 柯琴에 뒤늦게 일본 한방의 뛰어난 의사 吉益東洞도 〃方証相対〃説을 제창하고,(3) 「상한론」 「금궤요략」의 처방을 『類聚方』 한 권으로 정리하여 일본의 한의학 고방파의 기초를 마련했다. 지금도 여전히 일본 동양의학의 주류를 이루고있다.
이전 필자는 吉益東洞의 학술 사상이 柯琴 등 중국 청나라 초기의 의학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4). 따라서 본론에서는 柯琴 및 吉益東洞의 생애, 저작권 사상의 간단한 소개를 통해 柯琴의 학설이 吉益東洞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미쳤는지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1. 柯琴의 생애, 저작과 사상
柯琴(1622~1735)은(5) 명말청초(강희 원년)에 태어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관리등용 시험을 위한 학문을 버렸다. 유생의 가문이었기 때문에 주자의 이학 및 문필에 뛰어났고, 고대 의학서 주석에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저작으로는 「내경」의 교정 (1666년 쓰여졌는데, 소실됨) 『傷寒論注』四巻(一六六九年)、『傷寒論翼』二巻, 『傷寒附翼』二巻(一六七四年)이 있다. 현존하는 이 3종을 「傷寒来蘇집」이라 한다.
"柯琴, 字는 韻伯, 浙江慈渓人으로, 박학다문 , 能詩古文辞, 棄挙子業、矢志医学. 家貧遊呉, 棲息于虞山、不以医自鳴、当世亦鮮知者로, "内経合璧"多所교정을 저술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清史稿』
중경의 원저는 왕叔和을 거쳐 개편되어 중경의 책이 아니었다. 중경의 문장은 소실된 곳이 많아 叔和의 문에는 억지가 많다고 柯琴은 생각했다. 그래서 「상한론」에 주석을 할 때 원저를 再訂하는 학파 및 옹호하는 학파, 양파의 싸움에 반대하고 태양경을 一綱三鼎으로 하는 학설의 한계도 넘어, 원저에 나오는 "桂枝証" "柴胡証" 등의 단어에 근거하여 증을 편명하였다.
"故将仲景書校正而注疏之、分篇匯論、挈其大綱、詳其細目、証因類聚、方随附之 …………"
즉 柯琴의 사상의 특징은, 백병의 치료에 대해 六経을 여섯가지 부로 구분하고 傷寒 및 雑病을 합병시켜 傷寒(협의의 태양병의 傷寒)과 중풍을 구분하지 않는데 있다. 또한 증을 단서로 하여 맥진의 기준을 정하고 증에 따라 약물을 선택하는 식으로, 구별하고 명확히 할 때 그 증에 중점을 두라고 제창하고 있다. 또한 許叔微의 桂枝・麻黄・大青竜三綱鼎立説이나 三百九十七法説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姜春華는 "柯琴은 특히 뛰어난 인물이며, 六経으로 백병을 통일하여 불멸의 이론을 세웠다. 증에 따라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호소 후학들에게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2, 吉益 東洞의 생애, 저작권 사상
吉益東洞(一七〇二・一七七三), 이름은 為則, 자는 公言, 통칭 周助라 한다. 安芸国(広島) 출신이다. 처음엔 東庵라고 했고, 나중에 東洞(교토 東洞院에 거주하였다)으로 개명했다. 中神琴渓가 "東洞 선생님은 천하 제일의 매우 뛰어난 의사이다"고 말했다. 吉益東洞의 본성은 畠山이다. 대대로 刀傷 및 산부인과 전문의사이며, 선조는 遣唐使에 수행하여 당나라에 건너가 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吉益東洞은 고금의 의학서를 구석 구석 읽고 『病源』 및 『千金方』을 비롯하여 이후 劉、張、李、朱의 学説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名古屋玄医와 後藤艮山의 영향을 받아 백가의 의학서를 널리 읽고 당시의 의사가 단지 温補을 실시하고, 음양오행에 빠져 병인을 논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만 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1783년 吉益東洞 가족은 상경하여 동향의 儒医 堀正超에게 가서 거기서 吉益東洞는 고医道의 연구에 몰두했다. 나무 인형을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단 하나의 노와 냄비, 톱밥 속에서 「상한론」의 연구에 열중하였다.
1746년 吉益東洞은 전당포에서 갔을 때 우연히 전당포 주인의 어머니에 대한 처방을 보고 한마디 "석고를 빼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때 처방을 했던 山脇東洋은 당시 조정의 유명한 典医였다. 전당포 주인에 의해 전해진 東洞의 말을 듣고, 山脇東洋은 감복했다. 이 때문에 山脇東洋의 추천하에 吉益東洞은 이름을 올렸다. 또한 자신의 실력에 따라 대세를 물리치고 손수 조사 실증하는 것을 견지하고, 음양 오행, 脈象, 본초, 병인을 부정하고, 중경의 고방만을 사용하여, 일본 한방의 〃方証相対〃라는 특색을 쌓았다.
吉益東洞의 저작은 매우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方極』(一七五五年)、『類聚方』(一七六二年)、『建殊録』(一七六三年、門下生에 의한 54개 治験例가 기재되어 있음)、『医事或問』(一七六九年)등이 있다. 『薬徴』은 1771년에 출판되었다. 기타 『東洞선생유고』는 1789년 그의 아들과 제자에 의해 수집 輯成되었다. 『医方分量考』는 아쉽게도 미출판으로 끝났다. 『方選』『丸散方』은 일상의 조제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집에 놓아두고 간행되지 않았다. 『医断』은 吉益東洞이 문인 鶴元逸을 위해 서문을 써 준 것이다. 이 밖에 많은 東洞 선생의 구술록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일본의 의학자 三上章瑞는 "徐霊胎는 『傷寒論類方』(乾隆二四年)을, 吉益東洞은 『医断』(宝歴九年)을 같은 시기에 이루어 고대의 위업을 부활시켰다. 때 맞춤의 운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다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사고로 책을 완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三上章瑞는 이 시점에서 徐霊胎의 『傷寒論類方』과 吉益東洞의 『医断』의 날짜가 일치(『類聚方』은 『医断』 조금 뒤에 발행)한다는데 이미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吉益東洞이 柯琴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은 희소했다.
吉益東洞은 『類聚方』 自序 첫 구절에서 "의술을 배우는데는 방이 가장 중요하다 ............ 장씨의 책은 이 점에서 읽기 어렵고, 방과 증이 여러 편에 산재해 있어 헷갈린다. 그래서 같은 방을 포함한 원문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방 이름 아래에 넣어 소견을 제시했으므로 "유취방 '라고 이름하였다"고 말했다. 또한 『方極』의 자서에서는 "중경의 방에는 법칙이 있고, 방과 증은 상대관계에 있다. 병인을 논하고 있지 않다. 방을 정하고 독 속에서 독을 바로 잡으니, 이를 極이라 한다"라고 한다. 또한 『家約』에서, "만병은 모두 독에 기인하고 있음을 깨닫고 실제로 시도 조사하여 명의의 술법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파하였다"라며 "만병 모두 독에 의해 발생하지만, 많은 약물도 모두 독물이므로 독에 의해 독을 공격하여 독이 제거되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吉益東洞는 서른 살에, 〃만병 一毒〃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십 세에 『類聚方』을 저술했다. 金元李朱의 학설이 일본 한방 후세방파에서 찬양받던 시대에 伊藤仁斎의 영향을 받아 『呂氏春秋』를 읽고 〃邪毒〃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병一毒〃의 사고로 귀결했다. 「상한론」을 숙독하여, "중경은 증에 따르고 병인에 구애하지 않는다"것을 깨닫고 증을 방에 맞게 분류하고 정리하여 『類聚方』을 저술했다. 그 중의 173개 방이 『方極』, 즉 상용되는 탕제의 배합 방법을 노래 조로 구성한 ‘常用湯頭口訣'에 해당하는 것이다. 吉益東洞은 柯琴보다 더 대담하게 왕叔和가 둘로 나눈 중경의 「상한론」과 「금궤요략」을 맞춰 하나로 하고, 중경의 같은 종류의 처방을 모았다. 1762년에 완성된 『類聚方』에는 221수가 수록되어 있고, 그 가운데 『金匱方』이 122수, 『傷寒論』 방이 63수, 양 서 공통 처방이 36수이다. 실제 상용하는 방은 다음의 19류로 나누고 있다.
"桂枝湯類、茯苓剤、麻黄湯類、葛根湯類、柴胡湯類、白虎湯類、大黄与大黄硝石剤、甘草剤、附子烏頭剤、梔子湯剤、陥胸剤、括ロウ薤白剤、瓜蒂剤、半夏剤、黄ゴン黄連剤、防己剤、雑方(橘皮、枳実)、腸癰方、巴豆与礬石剤. "
이 외에도 아직 임상에서 효과의 유무 미확인 처방이 18수(金匱), 보충한 처방 11수(傷寒 4수, 금궤 5수. 양 서 공동 2수)가 있다. 이것들을 吉益東洞은『類聚方』에 포함하지 않았지만, 榕堂尾台에 의해 『類聚方広義』에 포함되었다.
결국 吉益東洞의 사상의 특징은 우선 중경의 학설에 대한 이해는 柯琴과 완전히 같고, 왕叔和가 정리한 것은 중경의 원저를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六経의 초석이 되는 길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당시의 중의학에 대해 부정과 비판의 태도를 가지고, 음양, 오행, 脈象 병인 등은 모두 공론으로 의미가 없다고 보고, 扁鵲의 疾医 및 중경의 방증만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한 임상 특징은 스스로 효과의 유무를 보고 고찰하고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치료를 진행하고 있으며, 증상을 분명히 밝힌 후에, 증에 따라 흉과 복을 진찰하며 병인과 맥에 구애하지 않는다. 또한 약물에 대해서는 기미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고, 효능만을 중시한다. 『医断』은 이를 총괄하여 "맥보다 증거를, 증거보다 복을 먼저 진찰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덧붙여서 吉益東洞은 왕叔和가 양분해 버린 중경의 원저를 하나로 모아, 증을 맞추어 분류하여 실증을 중시하여 그 독자의 일파를 세워 당당히 복고를 주장했다. 吉益東洞이 일본 한방 최고의 의사라고 말해지는 까닭이다.
3. 柯琴의 학설이 吉益東洞에 미친 영향과 경로
명말청초 중국의 유학자가 〃復明反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 갔다. 저명한 주자학자 朱舜水(浙江省 출신)는 수십 번 일본에 가서 원군 출병을 요구하였고, 일본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戴曼公(6)은 1653년 일본에 일본에 와서 교토에 살다가 宇治 黄蘖寺에서 일생을 마쳤다. 隠元은 1634년 長崎로 건너갔다. 1675년 항주 출신 陳明徳도 長崎로 건너가 1718년에는 幕府徴支那医가 된다. 또한 1717년 항주 陸文載, 1719년 소주 呉載南(유월에 没), 1721년 朱来章, 1721년 6월 汀州( <일본의학사>에 따르면 通州의 오류. 이하 통주라 한다)의 周岐来(7) (8) (9) (周南、字는 岐来. 명성은 일본에도 알려져 초대, 체류하며 의약 지식을 전파하고, 『其慎集』『日本平君舒序』를 저술하였다. 1727년 귀국(12) (13)), 1726년 趙淞陽가 일본에 온다. 당시 장군 이에야스家康가 쇄국 정책을 실시 일본인의 출국을 금지했지만, 나가사키만 중국인과 네덜란드의 입국이 허가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많은 유학자 고승 상인이 일본을 방문했다(4). 일본에 들어오는 배는 많았지만 寧波와 南京에서 오는 선박만 책의 수입이 허용되어, 매번 일흔 상자나 되는 책이 실려있었다. 예를 들어, 李時珍의『本草綱目』이 중국에서 출판 된 3년 후 林羅山이 長崎에서 구입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증정, 이에야스의 자리 옆에 놓였다고 한다. 또한 이에야스는 한 권의 『本草綱目』을 末子에게 보냈고, 末子가 다스리는 尾張藩의 藩医浅井家 一族은 즉시 본초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당시의 일중 간의 이러한 서적과 의학의 교류의 길은, 柯琴의 사상이 吉益東洞에 영향을 미치는데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柯琴의 『傷寒来蘇集』이 일본에 전해지고 반대로 일본에서 간행된 『傷寒来蘇集』이 중국에 전해지게 되는데, 이러한 일중 교류에 관한 자료에서 1701년과 1755년에 간행된 『傷寒来蘇集』에 吉益東洞이 영향을 받아 方証相対説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찰해 볼 수 있다.
또한, 1717년에 일본을 방문한 중국의 유학자에는 의사가 많았던 점과, 통주(周岐来의 고향 崇明県은 통주에 속한다. 현재 상하이시에 해당하고 양자강 출구에 가까운 섬)와 虞山 두 지역(현재의 常熟)의 거리가 가까운 점(장강을 사이에 끼고 약 이십 킬로미터)에서 보면, 그 영향의 가능성을 더욱 크게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7). 그러나 불행히도 전시 소실 등에 의해 그 상세 내용을 현재 조사할 수 없다.
또한 중국의학사의 주에 따르면 柯琴이 태어난 해(1662년)에 대해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柯琴이 1669년에 책을 발행한 것은 인정되며 책도 현존한다. 중국 현존의 책에 따르면 1706년에 이미 『傷寒来蘇集』이 발행되었고 당시 발행된 책이 흑룡강 중의학연구원에 현존하고있다. 가장 많이 유포된 버전은 1755년 간행된 『傷寒来蘇集』 昆山綏福堂馬氏刻本이다. 이 밖에 1821년(日本 文政四年) 京都須原尾平左衛門刻本『来蘇集』이, 난징, 북경대학과 중국 중의연구원에 현재 보관되어 있다.(11)
그런데 吉益東洞의 〃方証相対〃説에 대한 연원에 대해 朱邦賢(14)은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있다. "〃方剤弁証〃의 사고방식은 長沙 馬王堆에서 출토된 『五十二病方』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맹아를 볼 수 있다. 당대에는 손사막 〃以方類証〃이라는 사고를 제창했다. 명청 이후 이를 제창한 제1인자는 柯琴이고, 다음이 徐大椿일 것이다." 또한 송대에는 程磐基(15)에 따르면, "송나라의 의학자 劉元賓著 『傷寒括要』에서 湯方弁証이라는 사고를 모체로 한 〃以方名証〃설이, 〃方証相対〃설의 연원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흩어져 조선의 『医方類聚』에서 밖에 그 주요 내용을 볼 수 없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출병 때 조선의 『医方類聚』등의 책을 일본에 가져갔다.
이상으로부터, 柯琴이 『傷寒来蘇集』에서 말했던 〃以方名証〃설은 吉益東洞의 학술 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柯琴과 吉益東洞은 중경의 원저에 대한 생각이 똑 같다. 게다가 吉益東洞의 『類聚方』이라는 책 이름의 의미와 柯琴이 자서에서 서술하고 있는 "其大綱、詳其細目、証因類聚、方随附之…………"라 한 것은, 같은 유의 증을 방에 맞춰 정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医方類聚』 등의 책을 일본에 가져갔다는 사실과 조선의 『医方類聚』에 〃以方名証〃설의 내용을 볼 수 있다는 程磐基의 론, 나아가서는 일본을 방문한 통주의 周岐来 등의 일을 맞추어 생각하면 중국의학자의 이론이 吉益東洞의 『類聚方』(方証相対説)성립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을 미친 경로로 책 전래의 길이 열려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고, 특히 명말청초 일중 간 해상무역이 그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1)姜春華『歴代中医学家評析』228・235頁、上海科学技術出版社、一九八九年九月
(2)柯琴『傷寒来蘇集』上海科学技術出版社、一九九五年三月
(3)医学会『東洞全集』日本(株)思文閣 大正七年一月五日
(4)兪雪如「江浙医文化対日本漢医学的影響」浙江中医雑誌、一九九五(五)、二三五・二三六頁
(5)傳維康主編『中国医学史』上海中医学院出版社一九九〇年一月
(6)兪雪如「医林状元キョウ延賢与日本漢方医学」上海中医薬雑誌、一九九一(一〇)、三二頁
(7)清朱衣點修、黄国彜纂『中国地方志集成』上海府県志輯、上海書店、巴蜀書店、江蘇古籍社出版、一六八一年刻本、中国の孤本。
(8)中野操『増補日本医事大年表』思文閣
(9)蘇振申編『中日関係史事表』華岡出版公司
(10)兪雪如「中日高僧交往与日本的漢方医学」『中華医薬文化論叢』鷺江出版社、一九九六年
(11)薛清録『全国中医薬書連合目録』中医古籍出版社、一九九一年一月、中国中医薬研究院図書館編
(12)李雲主編 『中国人名辞典』国際文化出版公司、一九八八年五月
(13)何時希『中国歴代医家伝録』人民衛生出版、一九九一年一月
(14)朱邦賢「方剤弁証与方証規範化之我見」上海中医薬雑誌、一九九七(一一)、二頁、一九七七(一二)、一四頁
(15)程磐基『傷寒論』湯方弁証源流与思考、上海中医薬大学学報一九九九(四)一一頁
[후 기]
1988년 필자는 藤平健선생과 寺澤捷年교수의 이야기에서, 『傷寒論』의 六経病位説이 중의학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吉益東洞의 『類聚方』을 비롯한 일본의학사 연구에 착수, 林羅山이 『本草綱目』을 구입한 것 등, 일중 교류의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귀국 후, 필자의 고향 明州(寧波) 및 浙江省의 의료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에 대해 고찰을 시작했다. 柯琴의 고향 절강 慈谿도 현재의 닝보이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 본 논문의 요지가 보다 구체화되어 갔다. 또한 본 논문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꼭 지적 주셔서 앞으로의 연구 교류로 연결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일본어로 번역함에있어 奥平(玉野井)純子女史께서 협조해 주신데에 감사를 표한다.
(의사 : 〒200032 중국 상해시 하늘鑰이촌 열한 6 호 서른 두 개의)
(통역 : 〒263- · 0043 지바시이나 게구小仲台오 - 구 - 한 - 스물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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