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동의학 학습방 : 장중경과 상한론

吉益東洞과 <傷寒論> 연구..

지운이 2021. 7. 13. 17:39

古方派的代表人物吉益東洞

https://blog.naver.com/theosiva/50026970646

 / 廖育群,中国科学院自然科学史研究所所长(《大韩经络诊断学杂志》, 2005年 第2期, P. 158-180)

 

*《상한론(傷寒論)》을 학습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일본 고방파의 종주로 불리는 吉益東洞이라는 인물이다. 吉益東洞의 의학사상은 그 시작도 끝도 모두 <상한잡병론>이라 할 만큼 장준경의 재해석으로 전개된다. '만병일독설'(“萬病唯一毒,衆藥皆毒物,以毒攻毒,毒去體佳”)로 요약되는 그의 의학사상은 중세 일본의 의학에 혁명적이라 부를 만큼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찬반의 논란도 많지만, 특히 주목할 대목은 의학을 대하는 그의 안목이다. .. (각설하고) 이하 그의 의학사상에 대해 개괄적이면서도 심도깊게 정리해 주고 있는 중국학자, 廖育群이 기고한 글을 번역해 둔다. 번역에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아쉬운 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吉益東洞(1702~1773)
*吉益東洞宅蹟、京都市中京区(위키디피아)

 

길익동동(吉益東洞, 元祿 15년~安永 2년, 1702~1773)은 자는 공언(公言), 통칭은 주조(周助)라 불린다. 그가 평생 분투 추구했던 목표는 한마디로 개괄하자면, 2천여 년의 역사를 부흥하는 것이었다. 즉 상한론 저자 장중경의 사후 끊어져서 시행되지 못했던 “疾醫”의 도를 부흥하여 의학을 正道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吉益東洞은 학(學)과 술(術) 모두에서 남다른 선명한 특색을 보여 고방파(古方派)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藝備醫學會 회장이자 의학박사인 吳秀三은 고방파의 여러 명인을 평가하며, “이들 제가 가운데 발군이자 핵심인, 대종주(岱宗者)가 바로 동동선생이다”라고 평했다.

 

1. 신고의 역정

 

길익동동은 安藝廣島 출생으로 본성은 畠山이다. 아시카가(足利家)의 '관령(管領)'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畠山政長가 그의 선조이다. 政長의 남동생은 대대로 金瘡、産科를 업으로 삼았다. 그 4대손인 의익(義益)이 자신의 성을 바꾸고, 그 아들은 義자를 吉로 고쳤으며, 집안에 전해오던 方을 정리하여 《환골초(換骨草)》를 지었다. 이것이 길익(吉益)씨로 언급되는 이른바 '길익류금창산과(吉益流金瘡産科)'의 유래이다. 동동의 할아버지로 《환골초》의 저자인 길익조수(吉益助秀)의 조수로 같은 연배인 羽山政光도 훗날 벼슬길이 험악해 의학을 업으로 삼았다.

 

동동은 어린 시절 선조의 이름을 듣고, 다시 그 위세를 떨치고자 병서를 읽고 말타기와 검술 연마했으며, 할아버지의 의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이가 좀 들어서는 태평시대에는 무술로 가업을 부흥시키기는 쉽지 않아, '좋은 재상이 아니면 좋은 의사가 되라'는 옛사람의 말에 따라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이 열아홉에 먼저 조부의 문인을 따라 '길익류금창산과(吉益流金瘡産科)'를 배웠다. 하루는 갑자기 “임신은 부인에게 정상의 상태요, 金瘡은 외상이다. 병이 없으면 약도 없고, 병이 있으면 증에 따라 치료한다. 어찌 과를 나눠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가전방 가운데서 효험이 있는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리고는 내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추운 밤에는 난로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졸음을 쫓고, 더운 여름에는 모기와 벌레에 물려 졸음을 쫓으며, '소문' '영추' 등 제가의 의서를 탐독하였다. 서른 살에 깨운친 바, “萬病唯一毒,衆藥皆毒物,以毒攻毒,毒去體佳”라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만병일독(萬病一毒)의 설이다. 또 그는 당시 의사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중국 송명의학을 극력 반대하여 자주 말했다고 한다. “非醫天下醫,救疾之功也不多焉;非出京師,授教之業也不弘焉”라고

 

서른일곱 살의 동동은 대중의 병을 치료하고 자신의 주장을 고취시키기 위해 부모와 여동생을 데리고 元文 3년 교토로 와서 '고의도(古醫道)'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다. 이때 자신이 가업을 부흥시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의업에 은둔했던 동동은 본성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동족의 길익(吉益)이라는 성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포부는 원대했지만 현실은 참혹하다. 의업이 번창하지 않아 제자가 거의 입문하지 않았고, 약간의 저축금도 도둑맞아 겨우 '궁(貧)'자를 면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게에서 인형을 만들어 그릇을 굽고 돈 몇 푼을 벌아 끼니를 때우는 풍경이 3년이나 됐다. 森立之《遊巷醫話》에 따르면, 이때 동동의 집안 형편은 “빈궁하여 화로 하나 솥 하나 뿐이었다. 도처에 인형 톱밥이 널려 있고, 다만 그 옆에 상한론 1권이 있어 수시로 읽었다”고 전한다.

 

동동의 벗인 邨尾씨는 위진 사방의 좌창후(佐倉后)에게서 벼슬하여 공적인 일로 입경하여 옛 친구를 순방하였다. 조락한 모습을 보고 동동을 좌창후(佐倉后)에게 추천했다. 좌창후는 그를 시의(侍醫)로 초빙하여 邨尾大喜가 이를 동동에 알렸다. 그런데 동동의 반응은 놀랍다. “친구는 날 아는 자요, 그 사람은 친구는 알지만 나를 아는 자는 아니다. 나는 비록 가난하고 노친이 있지만, 어찌 나의 뜻을 굽혀 조상을 모욕하겠는가? 가난도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고 궁한 것도 운명이다. 지금 영술이 행해지지 않지만 하늘이 이 도를 버리지 않았으니 내가 굶어 죽겠느냐?”라 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

 

延享 원년, 동동의 나이 사십삼 세에 가난은 더욱 심해졌다. 주머니가 텅텅 비어 정말로 “하룻밤을 넘길 양식도 없었다”. 이에 7일간 금식하고, 少名彥廟를 찾아가 "참으로 불민하게도 옛 의술에 뜻을 품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해도 개의치 않고 밀고 왔습니다. 지금 가난으로 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저의 도가 잘못되었다고 천벌을 내리신 것입니까? 옳은 건 알면서 옳지 않은 것은 모르시네요! 만약 배가 고파 굶어 죽게 한다면 다시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의신이서여. 청컨대 이 도가 진리가 아니라면 저의 목숨을 거두오 가소서. 만약 미루어 행동한다면 반드시 만인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죽여서 뭇사람을 구하는 것이 제가 진정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인이 동동의 거처를 지나다가 그 빈궁함을 보고 금은을 선물했다. 동동은 나중에 두 배로 갚을 능력이 없다며 사양했다. 그 분이 말하길, “선생에게 돈을 드리는 것은 선생이 아니라 천하의 만민을 위하는 것이니 갚을 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동동은 이 말을 듣고 감사히 받았다. 그의 지조가 고결하고 청렴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형을 만들어 연명하는 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명성을 떨칠 기회가 갑자기 찾아왔다.

 

어느 날 동동이 여느 때처럼 자신이 만든 인형을 가지고 가게에 배달을 갔다가, 주인 노파가 상한병을 앓고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진료하고 치료해 보겠노라고 했다. 병상에 앉아 자세히 진찰할 때 이미 제실의 전의인 山脇東洋에게 진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처방을 보고는 “當去掉石膏用之”(마땅히 석고를 빼야 한다)라 말했다. 잠시 후, 東洋 선생이 병가를 찾아 진찰 후 잠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인장이 동동이 한 말을 고했다. 동양 선생은 "나도 지금 석고를 쓸지 뺄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 말을 한 사람을 당장 만나러 가야겠다"고 하며, 병가를 나와 허름한 골목 사이로 동동을 찾아 갔다. 이후 노파가 완쾌되어 동양을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하자, 동양 선생은 “그때 동동(東洞)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면, 오진에 빠져 나도 몰랐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공이니 사례금도 당연히 그가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친분은 점점 두터워졌고, 동동의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동양이 받들어서이다”라고들 한다.

 

延享 4년 동동(東洞)이 46세에, 그의 의업이 상당히 발전하였고, 제자도 많아졌으며, 松原維嶽、香川修庵、山脇東洋 등의 유명 의사와 교류가 깊어졌고, 《상한론(傷寒論)》을 함께 읽으며 古醫方을 함께 연구하였다. 松原이 연장자로 강독을 주도했는데, 동동은 매번 그와 논쟁을 벌였다.

 

寶曆 원년(1751년), 동동(東洞) 50세 때,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要略)》에 실린 장중경(張仲景)의 약방(藥方)을 분류하여 《유취방(類集方)》을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로부터 고의방의 뜻을 분명히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73개의 약방(藥方)을 골라 논증치효(論證治孝)를 덧붙여 《方極》을 썼다. 이것은 곧 그 문호의 “方鑒”으로, 그 목적이 장중경의 약방 밖에서는 취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을 천명하는데 있었다. 명화(明和) 연간에는 당시 사용하던 약의 실제 효용을 추론하고 약의 효능을 따져 《藥征》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문답체로 자신의 집안의 이론을 《醫事或問》로 엮었다. 한편 제자인 학원일(鶴元日)은 관영원년(寬永元年, 1748)에 《의단(醫斷)》을, 寶曆 2년(1752)에 《건수록(建數錄)》을 지었다. 전자는 동동의 학설을 기술하고, 후자는 동동의 치료검안이라고 한다. 이 책들이 전해지면서 동동의 학설이 널리 알려졌다. 한때 지체 높은신 분도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거나 문하에 운집해 떠들썩했다. 물론 그 학설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寶曆 12년(1762) 교토(京都) 동산(東洞)에 문인들을 초대하여 잔을 들며 말하길, “내가 올해 61세일세.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장자 겨우 13세), 제자 중에는 아직 그 道에 이른 자가 없다. 만일 학당을 크게 열고 제자를 가르친다면 그 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여 지금부터 장사를 하려고 하니 이런 연유이다”

그로부터 동동은 절의축식하며 약재 장사를 하였고, 수년 후 모은 돈으로 의학강습소를 차리고 원대한 포부를 가진 가난한 학생들을 수용하여 그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동동은 말년에 교토 서문 외각에 땅을 사 집을 지어 빨리 이 일을 성사시키고자 하였다. 명화(明和) 6년(1769년)에 "늙어서 그 뜻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 속히 공을 세우려 무리하다 계획을 망쳐 큰 재산을 잃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상 답답하고 즐겁지 않았다. 이에 집안일은 장남 유에게 맡긴다"고 말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각지를 유람하며 상경하지 못하는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게 되었고 후에는 여러 제후들이 초빙함에도 모두 고사하고 그만두었다.

 

安永 2년, 동동 72세, 9월에 갑자기 눈이 아찔하고 혀가 굳고 말을 하지 못하다 죽었다.

 

2. 復古의 깃발 아래 의학 혁신

 

文祿 2년(15)93) 藤原惺窩.. 난징의 배에 실려 온 程朱의 설을 처음 보게 되고, 漢魏의 주소에 따라 경을 해석하던 학풍이 바뀌기 시작했다. 송유(宋儒)의 학설은 결국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지배적인 관학이 됐다. 그러나 이때 '고학선생(古學先生)'이라 불리던 이토 히토시(伊藤仁齋, 1627~1705)가 나와 體用理氣 등은 모두 불로(佛老)에 떠도는 이야기로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아들 이토 도야(伊藤東雅)와 제자 하천민(和天民, 1679~1718)이 뒤를 이어 간사이(關西)를 크게 떨쳤다. 아울러 洛閩學、駁仁齋를 봉하였으나 결국 송유(宋儒)의 설을 버리고, 古文辭를 익히며 경전을 연구하고, 성인지학(聖人之學)을 부흥시킨 物徂徠(1666~1728), 제자인 太齋春臺(1680~1747), 服部南郭(1683~1759), 安藤東野(1683~1787), 山縣周南(1687—1752), 平野金華(1688—1733) 등이 함께 복고지학의 기치를 내걸고, 德川시대에 크게 영향력을 발휘한 일대 학파를 이루었다. 18세기 전반은 복고학파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였다.

 

의학 분야에서 상업 무역을 위주로 한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식의 전파가 궁중에서 민간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에 당시대 대표적인 중국의 최신 의학인 “宋明醫學”이 일본 의료계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로 다시 복고풍이 흥기하며 일본 의료계에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을 연구 신봉하는 이른바 “古方派”가 출현하게 되고, 이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수용 사용되던 송명의학의 의가는 “後世派”라 불리게 되었다.

 

고방파의 발흥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중국 의학계가 <상한론>을 중시하고 연구한데 연유한다. 예를 들어 그 설을 처음 주창했던 나고야 겐의(名古屋玄醫, 1628~1696)는 유학의 복고풍이 불기 전에 이미 청나라 喻昌의 《傷寒尚论篇》을 읽고 고대 의경을 연구하는데 분발하여, 당시 의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이주(李朱)의 설을 버리고 중경(中景)을 직접 스승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後藤幹山(1659~1733)은 나고야설의 영향으로 음양, 장부 모두 후세의 것으로 보고(?) 임상치료와 밀접한 방서 연구에 힘쓰고, 의학이론을 간략화하여, “만병이 一气之滞留에 있으니 思过半이다”라 하였다. 그 학설은 제자인 香川修庵(1683~1755), 山崎東洋(1705-1762)을 통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고방파가 일어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유학 분야의 복고풍(福古風)의 영향도 있었다. 예를 들어 後藤艮山은 경의(經義) 면에서 伊藤仁齋를 흠모하여 제자 香川修庵를 그 문하에 두고 공부하게 하였고, 修庵은 '유의일본(儒醫一本)'의 설을 주창하였다. 고의방을 중시하는 한편의 유의 并河天民(1679-1718)과 그의 제자 松原維岳(1689-1765)도 바로 인재(仁齋)의 문하생이다. 인재지학은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의경의 고의를 밝히도록 하는데 힘쓰게 하였다. 길익동동은 宗徂徠의 설(說)인 주남(周南)을 스승으로 삼아 그 길을 파고 들었다. 그는 "유의는 비록 다르지만 그 복고는 하나이다", “时哉命哉复古之秋也”라고 말했다. 또한 "古文辞를 배우지 않는 자는 (傷寒、金匱)를 읽을 수 없다"고 했다. 유학의 복고풍과 고방파의 발흥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 유학과 의학 사이에 이와 같은 공통성과 대비성이 있었기 때문에, 동동은 상한론의 방약 사용을 자기에 앞서 주창했던 山脇東洋을 伊藤仁齋에 비교하고 자신은 그 뒤의 物徂徠에 비유하였다. “내 의방은 지금의 儒流에 비유되니 東洋 伊藤仁齋이니, 먼저 대중이 그 단을 깨우칠 것이다. 내 업은 감히 양위하지 못하니 物徂徠이라”

 

 

그러나 고방파가 내세우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치는 어디에 있는가. 길익동동은 《医事或问》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부터 의사는 疾医、阴阳医、仙家医의 세가지가 있었다. 《周礼》에서 말하는 疾医는 병독의 소재를 올바로 보아 해당 처방으로 병독을 제거하니 치유가 오래되면 병도 고통스럽다. 편작과 중경이 그러하다. 阴阳医는 병의 소재를 보지 않고 오직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으로 병을 보니 모두 억견으로 명백한 치료는 아니다. 汉의 太倉公이 그러하다. 仙家医는 기를 연마하고 혹 연단을 복용하며 기공을 습득케 하니 행하는 자가 적고 해도 적다. 葛洪、陶弘景、孙思邈 등이 그러하다. .. 편작 중경의 도가 끊어지고 그 후 疾医를 논한 책 한권도 사람 하나도 들을 수 없었다. 그 근원은 한나라 태창공(太倉公)이다.”

 

개괄하자면, 東洞은 중국 전통의학의 발전과정을 서로 성격이 다른 세가지 유파로 나눠서 시간의 선후로 볼 때 3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최초의 “疾醫”가 출현한 것이다. 《周禮·天官塚宰》에는 당시의 궁정의사를 食醫、疾醫、瘍醫、獸醫 네 종류로 기술하고 있다. 그가 관장하는 치료 범위와 후대의 의학 분과 차원에서 볼 때, 疾醫란 대체로 내과 의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동동의 눈에 비친 “疾醫”의 특징은, 별다른 이론적 학설 없이 질병의 소재(病毒의 소재)에 따라 약을 처방하여, “병독을 제거함으로써 질병의 고통을 치유한다”는 데 있다. 선진시대 명의인 편작과 동한시대 장중경 모두 이런 유의 의가에 속한다.

 

둘째, 한 대에 나타난 “陰陽醫”이다. 동동은, 西漢의 太倉公 淳于意가 대표적인 의가이며, 黃帝內經》、《神農本草經》、《難經》등 그 시대 주된 저작을 구성하여, 음양오행 상생상극으로 병을 논하는 것으로 실제와 동떨어진 억견이며, 질병의 소재에 제대로 대응한 '명백한 치료'는 아니다.

 

셋째, 진당(晋唐) 시대에 등장한 '선가의(仙家醫)가 있다. 이런 의사의 특징은 연기를 통과하고 단약을 복용하여, 천지조화(天地造化·장생불사)에 참여하여 드러나려 하나, 의학의 본궤도는 아니다.

 

이 세 의학의 유파에 대해 논하자면, "선가의"는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위해도 적다. 세상에 널리 행해졌던 "음양의"는 완전히 공염불이어서 근본적으로 병을 치료할 수 없다. 가장 보물 같이 소중한 “疾醫”의 도는, '음양의'의 발흥으로 절멸되어 버렸다! 동동은 이 틀에서 모든 고대 자료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汉书·艺文志》의 '방기략(方技略)' 뒤의 감탄성 글귀인 “有病不治常得中医”에 대해, 역시 "한나라 때는 이미 질의가 절멸하고 음양의행(陰陽醫行) 뿐이었다는 속담이 있다. 음양의는 치료에 무익하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는 중국에서 동한의 장중경 이후 '질의'의 길은 사라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은 물론 일본 모두에서 “醫陽陰”가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들 의사들은 대부분 음양오행의 허황된 설에 사로잡혀 있다. 이 논설에 의거해 병인을 알려 할 뿐, 병후를 관찰 진찰하지 않는다. 임상 치료는 오직 원기의 손상을 우려하여 온보의 약만 많이 쓰고 질병을 공격하는 약물은 감히 쓰지 못한다. 그 결과 천하의사는 병을 고칠 수도 없고, 의도전수의 업을 키울 수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 '질의'의 치유법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復古”를 부르짓는다. 그 핵심적 주장은 “疾醫之道”, 즉 동한 장중경의 고방(古方), 고법(古法)으로 송 이후의 의학이론과 처방(方藥)을 대신하려는 것으로 “革新”이라 할만하다. 즉 현 상황에 대한 비판과 변혁을 말하는 것으로, 옛것을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고(眞古)'인 것은 아니다. 이런 ‘복고’의 기치 아래 전개된 의학 ‘혁신’은 유럽 르네상스의 형식과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동동은 복고(復古)에 대해 말하길, ‘진고(眞古)’로 가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즉 중경지학(仲景之學)으로 송명의학을 대체한다는 것은 고대 장중경(張仲景)이 사용했던 의학이론과 치료 기술의 문제인지 아닌지에 대해, 기장문현차공서(奇長門縣次公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의업을 함에 있어 의도는 다기하다. 张仲景과 孙思邈、王焘 등이 있는가 하면, 刘完素、张元素、李杲、朱震亨도 있다. 그 자손에 副墨洛诵 등 다 헤아릴 수 없다. 처음에 刘张李朱의 술이 나왔으나 병을 고치지 못하였다. 다시 王焘、孙思邈이 나왔다. 장중경이 되려 하였으나 아직 아니었다. 깨달았다고 한 副墨之子 洛诵之孙 등등 뒤얽혀 屋上架屋,塞井为臼에 불과할 뿐, 중경을 말하지만 진정한 중경은 아니었다. 因退审察,自凿其塞者,去其架者,而始豁然见其法度备具焉。于是乎,知古今治异。乃信学于古训有获,遂好古矣(심사에서 물러난 자는 궁지에 몰리고, 그 가자는 그 법도는 확연히 갖추어져 있다.그래서 고금을 알고 그것을 다스린다.옛 교훈으로 배운 것을 믿으니 옛것을 잘한 것이다)."

 

동동의 의업 초기에는 당시 다른 의사와 마찬가지로 후대파들이 계승한 금원사대가, 이른바 “劉、張、李、朱之術”을 배우고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치료 효과가 미흡해 당나라 王燾、孫思邈,또 漢代 張仲景으로 거슬러 올라갔지만 후대에 알려진 중경지학은 진정한 중경이 아니었다.

그런데 “真仲景”이란 무엇인가. 길익동만의 관심사는 아니다. 이 문제를 알기 위해 《傷寒論》의 역사부터 간단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장사태수(長沙太守)를 역임했던 장중경은, 종족 태반이 외감병(外感病, 장티푸스)으로 죽자 고훈(古訓)을 구하고 여러 처방을 널리 채집하여 《傷寒雜病論》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서진 태의령(西晋太醫令) 왕숙화(王淑和)는 이 중 傷寒의 내용만을 취하여 《상한론(傷寒論)》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송대에 이르기까지 의가들에 의해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 당나라 의가 王燾의 『외대비요(外臺秘要)』에 제가의 상한 관련 논설을 인용할 때 이 책에 관한 언급은 없었고, 다만 치료 방약을 나열할 때 상한론의 일부 처방을 채용하였다. 그래서 송대(宋代)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에서 이 책을 교간하면서 한(漢)부터 송(宋)까지 8백 년 동안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고 한탄하였다. 그러나 송대부터 이 책을 주석하는 의사들이 많아졌고, 삼음삼양이 외감병을 여섯 단계로 나누는 방식도 변증논치의 체계로 격상되어 육경변증(六經變症)이라 불려졌고, 장중경(張仲景)은 의성(醫聖)으로 추앙받았다. 지금까지도 중의학계에서는 이 책을 역사상 최초의 이·법·방·약(理、法、方、藥)을 모두 갖춘 경전이라고 공인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 의가들은 이 책을 주석과 연관하여 고증하는 것과 연구하는 데 줄곧 두 가지 문제에 시달렸다. 하나는 어떤 글자가 장중경 원문에 속하고, 어떤 글자가 왕숙과 같은 후세의 정리자들이 삽입한 것일가? 둘째는 이 책의 수많은 조문들이 원래 편찬된 순서는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다. 한마디로 '진중경(眞仲景)'은?

 

상한론의 원형을 논하는 것은 사학연구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주석 연구는 물론 일본의 고방파에서도 그들의 상한론 원형, 즉 “真仲景” 연구는 모두 역사학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聖賢史觀”성현사관'에 이끌려 잃어버린, 후대의 허무맹랑함에 파묻힌 옛 지혜를 찾는 데 심취해 있다. 사실 근대사회에 와서 “進化史觀”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그랬고, 그 차이는 그저 받드는 고대 성현이 달랐다는 데 있을 뿐이다. 예컨대 후세파들은 중국의 최신 의학 수준을 대표하는 송명의학을 익혔지만, 황제, 신농 등 고대 성현의 지혜와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한 대 이후 오랫동안 장중경의 상한론에 대한 정리·주석을 진화사관의 입장에서 본다면 쉽게 '변조'(篡改)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과감한 취사재편, 나아가 새로운 내용의 삽입을 통해 외감병을 전문적으로 다룬 독립서로 상한론이 만들어졌고, 그래서 육경변증이 성립되어 윤곽이 뚜렷한 변증론치(變症論治) 체계로 자리잡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상한잡병론은 외감병과 잡병을 함께 치료하는 방서로 영원히 남겨졌을지도 모른다. 이론적 발전 측면에서도, 임상치료 지도 측면에서도 변조된 상한론은 모든 의가들이 존숭하는 원본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정도다.

 

중국의 상한론 연구자는 물론, 일본 고방파의 대표격인 길익동동 역시, “真仲景”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제로는 새로운 사료나 방증 자료에 의해 그 진위를 판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본질상 어느 후인이 그려낸 “真仲景”圖像으로 ‘이상의학’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평판 기준에 따라 이 책을 새롭게 정리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동동이 가슴 속에 그려낸 “真仲景”圖像의 방법은 분명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고, 일본 한방의학에서 나온 “據症遣藥”의 새로운 경향을 띤다.

 

한편, 그 제자는 동동의 검안을 정리하여 만든 《建殊錄》의 범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생님의 술은 오로지 長沙만을 서술하며, 自立方은 아니다. 약을 한가지 증감하더라도 반드시 중경(中景)을 따랐다". 또 "실험자가 있으면 송원의 제가라도 가리지 않았다. 비록 속세에 전해진 것이라도 배척할 필요는 없다. 그 실효를 중시하니 굳이 이름에 구애받을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비록 중경방(中景方)이라 하더라고 치험(治檢)으로 그 효험을 보지 못했다면 역시 망령되이 수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스스로도 "세속에서 이른바 명방(名方)이란게 탁월한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의사도 전하고, 의사가 아닌 사람도 전한다. 그 출처를 불문하고 일시 사용되어 효과를 거두면 명방이라 전해진다. 책에 기재된 것이라고 다 훌륭한 것은 아니며, 세간에 전해져 온 것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다. 널리 구하고 물어 그 술을 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연히 그를 따르는 앙모자는 그 학(學·복고)과 술(術·실증)을 전면적으로 요해한 후, 그에게 “言行不一”이라 비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동동은 공자를 예로 들면서, “나라에 유익한 일은 공자도 선왕의 법이 아니라 나는 대중을 따른다. 대체로 법을 지키거나 책에 얽매이는 자는 그 술을 제대로 취할 수 없다"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3. “毒”을 핵심으로 하는 질병관, 치료법

 

길익동동은 '음양의(陰陽醫)'로 불리는 중·일 양쪽의 의학이론과 치료체계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병인학 측면에서 '만병일독(萬病一毒)'의 설을 제시하였다. “모든 약이 독(毒)이고 독이 곧 기능을 발휘하며”, “약의 독(毒)으로 병의 독(毒)을 공격하여 그렇게 질병이 제거된다”는 후속설을 통해, 병의 원인, 병리, 치료를 연계해 본 학파의 이론체계를 구축했다. 일반적으로 ‘만병일독’(萬病一毒)의 병인학설에 대해서는 後藤幹山의 '만병이 一氣의 체류에서 생긴다'이라는 견해와 일종의 계승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연원은 '여씨춘추'에 나오는 질병의 근원에 관한 논설이다. “<여씨춘추>盡數、達鬱 二篇에, 하늘을 우러러 두드리며 탄식하길, 아 성인의 말씀에 믿음과 증좌가 있네! 이것이 바로 병을 고치는 대본(大本)의 양방이니, 만병은 오직 一毒의 樞機이다.”(嗟聖人之言,信而有征!是治病之大本良方、萬病唯一毒之樞機也)

 

'독'의 근원이나 형성 원인에 대해서 그는 "무릇 사람이 살아감에 형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음식이다. 음식에 절도를 지키고 과식하지 않으면 병이 없고 몸이 건강하다. 절도를 잃고 과식하면 병이 생기고 허약해 진다. 또 그 음식이 이변으로 잘 통하지 못하면 체내에 조박이 남아 더러운 것이 된다. 명하길 鬱毒이라 하며 이는 곧 병이다. 고로 疾醫는 만병은 오직 一毒 때문이며 이 독을 제거한다. 그 독을 汗吐下로 없앤다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욕망동이 ‘독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림 3 동동이 쓴 “萬病唯一毒”

 

동동은 실증을 강조하며 논리에 반대했는데, 자신이 말한 만병일독(萬病一毒)이 이치를 말하는 것이며 궁극의 이치로 요약하며,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고 했다. 또 '疾醫'의 특징은 '그 까닭을 논하지 않는' 문제인데, '만병일독(萬病一毒)'을 설명하면서 음식 불통, 이변불통, 어적 등이 독이 된다는 식으로 '그 까닭'을 해석한다.

 

동동의 만병일독(萬病一毒)의 병인학설은 사실 중국의 金元四大家가 각각 제시한 하나의 최종 원인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4四大家의 “攻邪派” 張子和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동시대에 유사한 것으로 惠美三白이 주장한 '二毒說' - 즉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부모가 남겨준 독은 '胎毒', 후천적으로 먹는 것은 '食毒'이 있다. 또 가슴 속의 ‘宿毒’과 장간에 있는 ‘水毒’이란 말이 있다. 혜미삼백의 이독설은 동동의 만병일독설과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제자가 많고 널리 명성이 크며 전국 각지에서 병객이 운집하였다.” 동동의 그에 대한 평가는, “천하의 양공으로 매우 훌륭하다”였다.

 

그러나 중국 金元四大家는 병인과 관련하여 “火熱為害”、“脾胃虛損”、“邪氣入侵”、“陰血不足”을 제시하였고, 일본의 의가는 “一氣留滯”、“萬病一毒” 혹은 “二毒”을 제시했는데, 이들 궁극의 진리를 찾으려는 이론학설은 의가의 기본사고 모델, 질병관, 치료원칙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구체적인 치료 기술에서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正像 龜井南冥은 《我昔詩集》에서 기록하길, 이론적인 ‘’과 실제 치료의 ‘為’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즉 "吉村은 두루 스승과 함게 하며 길익동동을 따라 古醫方을 이어받았다. 그 설과 술에 모순이 있다고 의심하여 많은 이들이 따져 물었다. 東洞은 분명히 변론하지 못하거나, 옳지 않은 말을 하거나, 냉소적으로 침묵하고, 질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70여 일 동안 머물면서 온갖 미혹이 심하여 여러 번 제비를 시중들며 여유롭게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 후세를 창조하는 일가가 되어, 영재를 얼마나 가르치려 하니 당연 속이는 바는 없다. 칠 수 있는지 끝까지 물어 가로챘다. 지금 하는 말이 하는 바가 아니며, 하는 바가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학(學)과 술(術)을 결합해 실제 치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길익동동은 《고서의언(古書醫言)》권4에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읽었는데 병의 대본이 일독이라는 것을 얻었지만 그 치료법은 얻지 못했다. 부지런히 밤늦도록 계속하여 <상한론>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이어 "<상한론>은 “바로 3대 질병을 치료하는 만병일독(萬病一毒)의 법이다. … 이 방은 여씨춘추에 말하는 바의 만병일독(萬病一毒)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독이 있는 곳을 살피니 그 방을 쓰면 어찌 병이 낫지 않겠는가!"

 

'독이 있는 곳'이란 질병의 임상표현이다. 동동은 '병(病)은 크게 표로 나타난다'는 『史記·편작전』의 뜻을 환자의 임상 증상으로 보고, "월인지위방(越人之爲方)은 切脈望色聽聲寫形에 구애되지 않고, 병의 소재를 언급한다"는 것은, 편작을 비롯한 고대 '질의'가 진찰과 치료에 종사할 경우 모두 임상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하고, 진맥법, 음양의 이론 등에 의거하지 않았다. 동동이 부흥하려 했던 “疾醫之道”의 관건은 據症施藥,不問其因이다. 동동과 그 제자들의 저작의 곳곳에서 이러한 관점에 대한 반복적인 논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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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洞遺稿·復木龙介书》:“如吾医术,随证而调剂,不论其因。试其事,而攘浮说。”

《建殊錄》凡例:“诸治唯从见证,不取因(病因)脉(脉状)。”

《医断》:“先证而不先脉,先腹而不先证也。”

《藥征》:“夫秦張之治疾也,從其症而不取因矣。因者想像也。以冥冥決事,秦張所不取也。”

《醫事古言》:“病應見於大表者,隨見症施治方之謂也。後世先病因,後其症候,可謂失古醫法矣。”

《古事醫言》卷二:“病應見於大表,是古今治法之規則也。非見於大表,則何以傳人?如陰陽醫,則不見於大表。理以推其因,理者無有定軌。故見一病人,而師弟相反目。無規矩準繩也。扁鵲不然,以見於大表定治法,故師弟無異。有規矩準繩也。”

 

그런데 길익동동은 범을 새워 가며 어떻게든 연구하여, 마침내 <상한론>에서 “三代疾醫治萬病一毒之法”을 찾아냈을까? 《藥徵》은 바로 이런 독특한 '復古' 작업의 결과이다.

 

4. 《藥徵》의 復古 作業

 

길익동동은 <상한론>의 기본적인 看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선 이 책은 비록 장중경이 쓴 책이지만 장중경이 ‘전한 사람’일 뿐, 선진편작과 같은 “疾醫”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둘째, 서진 왕숙화가 정리한 것으로 그 때문에 오류를 일으켜 진위를 가리기 어렵다. 셋째, 후대에 《素》、《灵》、《难经》의 뜻으로 풀이한 것이 소홀하여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후에 그 책을 읽는 자들이 이로 인해 오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먼저 양사는 질의의 도를 배우고 고금의 의도의 변란에 통달한 연후에 그 책에 임하여 상세히 궁구하여 그 옳고 그름을 보아, 그 중경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하 동동이 어떻게 <상한론>을 통해 고대 질의의 길을 찾았는지 살펴보자.

 

 

<藥征>은 총 3권으로 主治、旁治、考徵、互考、辨誤、品考의 순서로 <상한잡병론>에 나오는 53종의 약물을 각각 논설했다. 동동은 이 책의 '자서(自書)'에서 6개 항목으로 그 논거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主治——“以量之多少,知其所主治也”。

旁治——“視病所在,知其所旁治也”。

考徵——“參互而考之,以知其徵”;又說:“次舉其考之徵,以實其所主治也”。

互考——“次之以方之無徵者,參互而考之”。

辨誤——“次之以古今誤其藥功者,引古訓而辨之”(此項不是每藥均有)

品考——“次舉其品物,以辨真偽”。

 

책 제목은 차치하고 그 구조나 내용 면에서 보면, 《藥徵》은 약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다룬 '본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약물학' 저서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약제서로 쓰여진 것이다', '약재의 성능을 전일화한 것으로 복잡하지 않다. 적당히 쓰이면 그 효능이 뚜렷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이 설명하고자 하는 문제와 그 속에 담긴 깊은 견해는 결코 '본초(本草)'라는 단어에 합당한 표현은 아니다. 사실 상고의 입장에서 길익동동이 책에서 밝힌 바는 <상한론>의 약물과 병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世遠、人泯、經毀”라는 현세에서, 고대 성현인 편작과 장중경, <주례>에 나오는 이른바 ‘질의’의 약 사용의 진의를 소급하여 들여다보고, 후세 본초 속의 허세를 취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버리고, 각종 약물의 ‘주치’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하였다.

 

吳秀三이 지은 “吉益東洞先生傳”에 따르자면, 이 책은 길익동동이 명화(明和) 8년(1771)에 쓴 것으로 이때 동동은 이미 칠순의 고희(古喜)가 되었다. 남애본(南本)으로 불리는 《藥徵》의 전본의, 吉益猷(南涯)이 명화(明和) 8년에 쓴 '부기(附記)'가 있는데, “가옹이 지으신 《藥徵》은, 대개 7차례 고친 것이다. 오랫동안 익히며 묵묵히 약재의 공효를 알아내며 점진적으로 정리해 갔다"고 적고 있다. 저자의 다른 저서에 비해 동동 본인을 연구하는 차원에서도, 후대에 미칠 영향 면에서도 《藥徵》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연구방법 면에서, 동동이 시종일관 지칭한 바대로, ‘실험’적 방법을 통해, 고대의방과 그 약의 주치, 효능을 파악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 연구 경로는 <상한잡병론>에 나오는 약의 방제로 귀납하여 나아가 이들 방제의 적용증에서 공통성을 찾는 데 있었다. 그 결과 <상한잡병론>의 각 방제 구성에서 어떤 약이 동일한지를 밝혀냈는데, 이 약의 적용 대상에는 어떤 종류의 병이 상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동은 이렇게 '귀납'과 '통계'의 의미를 지닌 방법을 통해, 그 ‘까닭’의 본의의 설명이 없는 역사 자료를 처리함으로써 적어도 자기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원초적 본의(本意)에 관한 '까닭'의 해석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설명에 따라 고대 동양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연구방식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동동의 고대 성현에 대한 약의 본래 의미에 대한 해석은 한마디로, “有是証(症)則用是藥”이다. 오늘날 일본 학자의 《藥徵》을 읽고 남긴 감탄은 이러하다. “아 정말 대단하다.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같다.” 각종 약의 주치와 환자의 병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처방이 나올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동동 등으로 대표되는 “古方派”가 남긴 약물 처방의 법칙은, 중국 송명의학 체계에 의거한 “後世派”에 비해 日本人輕理論에 더 잘 부합하고, 실질적인 성격의 특성을 보이기 때문에, 일본 한방의학가의 접수와 응용에 매우 용이하게 작용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한방의학은 <한방론>의 원방을 애용하고, 가감 변화 없는 역사 근원 및 민족성 근원이 되었다. 20세기 일본은 중의약의 유효성분 연구에 대해 실제로는 그것은 길익동동의 “藥皆毒,毒即能”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같은 원류로 다른 갈래의 산물이라고 본다. 이외에도 후세 영향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일본 고방파는 <상한론>의 고거성(考據性) 연구 및 정신 추숭에서도, 모두 근대 중국 중의학 생성과정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거듭 말하지만 《藥徵》의 저자가 밝히고 싶은 문제는 ‘약의 주치’일 뿐으로, 의자들에게 이에 따라 병을 치료하면 그 재능이 북소리 울리듯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연구방법은 고대방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사고경로를 제공해 준다.

 

처방전이란 보통 어떤 질병에 대한 다양한 약으로 이루어진 치료처방을 말한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중의학 저서의 상당 부분은 처방서이고, 기록된 방제는 수천 수만에 달한다. 처방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실용적 가치와 그에 입각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지만, 사학자나 이론 연구자들에게는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이 처방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나의 방제를 구축하는데 근거가 되는 이론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 방제의 발전 역사와 관련된 팀 측의 이론이 조금은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전통의학의 방제, 복수약물로 어떤 질병을 치료하는 고정처방이 구성된 것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최초의 목록학 저서인 《漢書·藝文志》에 따르면, 西漢시대 《五藏六府十二痺方》등 10여 종의 방서가 있으며, 총 270여 권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방서들은 모두 오래전에 산실되어 후세 사람들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동한말에는 장사태수 장중경의 저서인 상한잡병론이 나왔고, 서진태의령 왕숙화의 정리, 송대 교정의서국의 교감 등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송대 이래의 의사들에게는 오늘날의 황제내경이나 송 이전 의가들의 저작에서 <상한잡병론>이나 동시대의 처방들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방약의 체계가 없기 때문에 왕숙화을 거쳐 정리된 <상한론>을 '방서의 조상'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근대에 와서 <상한잡병론> 이전 고의서 발굴을 거쳐왔는데, 특히 1973년 호남 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백서인 《五十二病方》에 기록된 처방이 가장 많다. 이들 원초적 처방들은 귀중한 사학적 연구의 가치도 있지만 실용을 중시하는 임상의와 연구방제의 ‘체계 구축’을 중시하는 당대 학자들로서는 이른바 “理、法、方、藥”을 구비한 <상한론>으로 시선이 여전히 집중케 만든다.

 

組方理論 - 어떻게 이런 약물로 하나의 약을 만들어 어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의 이론으로, 송 이전의 방서에는 거의 설명이 없었다. 의학이론 저작에서는 후인들이 집어 넣은 걸로 보이는 현재판 황제내경의 '지진요대론(至眞要大論)'에 방제의 구성원리, 즉 '군신좌사(君臣佐使)'의 설이 언급된다 :

君一臣二,製之小也;君一臣三佐五,製之中也;君一臣三佐九,製之大也

여기에는 군(君), 신(臣), 좌(佐)만 있을 뿐 사(使)는 없다. 달리 '사(使)'라는 말이 한구절 나오면 또 어떻게 '좌(佐)'를 말하지 않았다.

주병은 임금을, 좌군은 신을, 응신을 使라고 한다.

이외 “君”、“臣”에 대해 보다 긴 글도 있다 :

기의 다소, 병의 성쇠, 치료의 완급, 처방의 대소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 기백이 왈, 기의 고하, 병의 원근, 증의 안팎, 치료의 경중이 적정히 이루어져야 한다. 개략적으로, 君一臣二,奇之製也;君二臣四,偶之製也;君二臣三,奇之製也;君二臣六,偶之製也라. 고로 이르길 近者奇之,遠者偶之;汗者不以奇,下者不以偶;補上治上製以緩,補下治下製以急라. 急則氣味厚,緩則氣味薄,“適其至所”라 일컬었다. 病所遠而中道氣味의 자는 食而過之하여,그 制度를 넘지 못한다. 그런고로 平氣之道에 近而奇偶이면 製小其服也, 遠而奇偶이면 製大其服也라. 大則數少,小則數多,多則九之,少則二之이니라. 奇之不去則偶之하니 이를 重方이라 한다. 偶之不去,則反佐以取之한다. 이른바 寒熱溫涼 反從其病也라.

 

요컨대, 후대 사람들은 이런 글들을 근거로 군신좌사(君臣佐使)라는 말을 집대성하여 組方理論이라 불렀다. "지금의 조제방식으로 따지면 손색이 없을 뿐더러 어떤 처방도 이 정도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찬사가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관건은 군신좌사(君臣佐使)의 組方理論을 다룬 '지진요대론(至眞要大論)'의 작성 연대가 언제였든 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방제(方制)에 대한 '한의약의 구성법칙'인지, 아니면 사상누각(空上樓閣)일까요? 예를 들어 세 번째 인용문에서 '하자부이우(下者不以偶)'라고 했는데, '상한잡병론'의 峻下之劑 “大承氣湯”이 바로 偶數의 약물 조성이며, '기지불거즉우지(奇之不去則偶之)'라고 하였으니, 奇偶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또 이들 3단 인용문 중 단 한 곳만이 “使”의 정의인 “應臣之謂使”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使藥의 역할이 君藥이 병소(病所)로 이어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라는 통설과는 달리 실제로는 “引經藥”의 사용은 金元시대에나 나타났던 일임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군신좌사설 자체나 “大、中、小” 및 “奇、偶”로 제조하는 君藥、臣藥、佐藥의 숫자는 모두 인간사회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대 학자들은 이것이 상한잡병론의 제방제가 만들어질 때 근거로 삼았던 법칙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麻黃湯의 조성

君—麻黃(發汗解表)

臣—桂枝(助麻黃發汗解表)

佐—杏仁(助麻黃平喘)

使—甘草(協和諸藥)

 

調胃承氣湯의 조성

大黃 君—清熱攻里

使—自入腸胃

芒硝 臣—咸寒軟堅潤燥

甘草 佐—緩和硝黃峻瀉,有調胃,潤燥作用。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방제에 몇 가지 약이 있든 간에 군(君)·신(臣)·좌(佐)·사(使)의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고, 반대로 이 네 가지에도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약이 있다.

 

사실 객관적인 사실을 중요시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논설에 대해 대부분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지만, 이들이 방제학 이론의 발전 역사를 논할 때 오늘날 황제내경의 군신좌사설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송대 이후에나 제대로 된 방제 이론과 실용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郭天玲、朱華德이 편한 《現代中醫藥應用與研究大系·第三卷 方劑》에는 이렇게 설명한다.

 

방제학에 관한 연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는 현대 의가들도 언급하고 있다. 어떤 이는 金代成無己首開方論이 효시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쓴 《《傷寒明理藥方論》은 송대 이전에 의방의 임상응용을 중시하면서 의방의 이론적 검토를 경시하던 경향을 반전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이는 명대 張景岳이 방제를 효능에 따라 분류하여 많은 방제를 여러 가지 치료법 하에 통할함으로써 치료법이 방약학 연구의 중요한 내용이 되어 방약의 부속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학과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방제학은 명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장경악의 '의방팔진(醫方八陣)'을 대표로 본다. 徐寶圻 등은, 北齊徐之才의 有十劑之說이 이후 치법별로 분류하게 되었는데, 정작 처방 자체의 특성에 입각해 효능별로 분류해 외부 틀을 만들고 방의 해석 등 방제의 이론 중심이 된 것이 바로 청나라 汪昂의 《醫方集解》인데, 이 책은 방제학 체계의 완전한 구조를 갖춘 방제학 전문 학과가 만들어지는 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방론'이나 '방제학'이 있는 시대라고 해서 모든 신방제가 일정한 이론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는 반드시 先有方,後有論이 있었다. 길익동동이 <상한론>의 약물 연구에 대해 “고대의 방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생각할 수 있는 길의 원인 소재를 열어줬다”. 동동의 귀납적 연구의 결과, 처방전에 어떤 약이 사용되었는가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증상이 있기 때문이다. ‘감초’를 예로 들어 두 가지 설명 중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지 살펴보자.

 

먼저 동동은 <상한론>에서 사용돤 감초의 방제를 귀납에서는, 감초의 효능을 '주치의 다급함, 고로 급박, 급통, 구급을 다스린다. 그리고 궐냉, 번조, 충역 등을 치료하는데 함께 쓴다." 그런 다음 감초가 방약에서 “解毒”、“調和諸藥”이라는 후대의 견해를 설득력 있는 논리로써 반박한다.

이른바 ‘독’이란 약물의 “能”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그 독을 해독하면 무슨 공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調和諸藥”이라고 한다면 방제에 모두 써야 한다. 그런데 “長沙方에는 감초가 없는 것이 반이다.” 즉 쓰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러한 논리적인 공박은 그 자체로 설득력이 강하다는 점 외에도 현대 약리연구의 결과를 차용하여 방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柯雪帆 편집의 《現代中醫藥應用與研究大系·第四卷 傷寒及金匱》에 나오는 작약감초탕에 대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방은 작약, 감초가 배합되어 酸甘化陰,柔肝舒筋,和營通絡,緩急止痛의 작용이 있으며, 원래 상한병 오한의 긴급, 신전불능의 증에 쓰는 것이다. 근대에는 여러 가지 통증에 많이 사용된다 ..

작약에 들어있는 작약세노사이드에는 解痙작용이 있으며, 평활근에 직접 작용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진정, 진통, 항驚厥작용도 있으며, 중추신경계별로 일정한 억제 작용이 관찰된다. 작약의 解痙작용은 혈관 평활근에도 나타나며, 외주혈관을 확장시키는 작용이 있다. .. 따라서 혈압도 가볍게 떨어지며, 이는 광범위한 중추억제작용과 맞물려 중추흥분이 뚜렷한 음허양항의 고혈압 환자에게도 좋은 효과가 있다.(관상동맥 확장, 혈소판 집합 억제, 항균, 항염증, 간기능 개선 작용도 있다)

 

감초의 주요 성분은 甘草甜素、甘草次酸, 각종 플라보노이드 및 감초 글리코틴 등으로 부신피질 시료, 양귀비 알칼리 시료의 진경작용, 비대항성 베타수용체 시료 작용과 진통, 항궤양, 진해, 해독 등의 작용을 한다.

본방은 골격근통증의 주성분은 작약사포닌, 감초사포닌, 작약배질케톤으로 그 작용원리는 각기 다르다. 이 처방은 교감신경의 흥분으로 인한 회장의 수축을 억제하는데, 이 중 작약은 시냅스 전 억제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감초는 시냅스 후 억제 작용이 있다.

 

“근대에는 여러 가지 통증에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藥徵》에서 감초가 “급박을 치료하므로 이급 급통, 구급 등을 치료한다‘고 보는 인식은 서로 잘 맞아떨어진다. 저자는 우선 전통 중의학자의 입장에서 작약, 감초 두 가지의 배합으로 “酸甘化陰,柔肝舒筋,和營通絡”의 작용으로 완급지통의 효능이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중 작약을 신맛이 더 강한 오매로 바꾸면 주치의 근본적 변화가 불가피하니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유효 성분과 그 약리 작용에 대한 연구는 감초가 어떻게 급박 제통을 치료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시너지 작용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두 약물의 약리 작용이 다르고 신경의 시냅스 전과 시냅스 후에 각각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길익동동의 생각을 따르든, 유효성분 및 그 약리작용에 따른 연구든, 어떤 약물의 기능을 전통적인 성미이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공통점은 둘 다 실증적 입장에 서 있다. 그래서 일본의학사 연구자가 동동을 고방파 최고의 대표자로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채용한 실증적 과학 태도와 연구방법 때문이다. 양자의 차이점은 고대 길익동동이 채용한 것이 논리사변, 귀납의 방법을 썼다면, 현대 학자들은 어떤 생약이 어떤 성분을 통해 어떻게 작용하는지 현대 과학기술을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현대에 와서 말하는 중의방제학은 제형에 관한 논설 외에 하나의 제약을 구성하는 약물의 배합 문제를 다룬다는 組方理論을 다룬다. 그래서 군신좌사설 외에도 초기 약물학 저서인 《神農本草經·敘錄》에서 약물 배합에 대해 제기했던 “七情和合”說도 중요한 방제학 이론으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七情和合”이란 약물이 “單行”((단독 사용) 외에, “相須、相使、相畏、相惡、相反、相殺”의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이 중 '相須、相使'는 두 약의 시너지, 배합관계를 말한다. 역사에는 이런 배합약만을 다룬 《藥對》라는 책이 있다. <상한잡병론>에 나오는 두 가지 약물이 일부 처방제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후대에 이를 “藥對”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앞서 柯雪帆主編《現代中醫藥應用與研究大系·第四卷 傷寒及金匱》을 인용한 바와 같이 “仲景藥對選要”라는 제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작약과 감초를 예로 들면서 이 책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1. 배합의 의의

작약에는 신맛이 약간 있고, 감초는 甘平이며, 두 약에는 酸甘化陰의 작용이 있다. 산감화음의 작용은 여러 가지이다. 하나는 진액, 혈액의 화생이다. 둘째는 平肝緩急,抑制 肝氣橫逆、陽動太過로 음의 기능이다. 급박한 통증, 근육 경련을 치료하는 것도 음의 기능이다. 따라서 酸甘化陰은 平肝、柔肝、緩急、止痛의 작용을 갖는다. 세 번재는 和營止汗이다. 영기와 위기는 상대적인 것으로 음에 속하여 內守의 작용을 한다. 영음의 내수 기능을 회복하면 땀을 멎게 할 수 있는으니, 이 또한 산간화음에 해당한다. 넷째는 柔肝健脾이다. 작약은 柔肝,阻止 肝氣犯脾의 작용,甘草는 和中健脾의 작용으로,芍藥 甘草를 배합하면 調補脾陰의 基本藥物이 된다. 무릇 이 四者 모두 酸甘化陰이라 정리할 수 있다.

 

2、仲景方例(略)

 

3. 후세의 논술과 응용

成無己《註解傷寒論》에서는, 작약·감초를 주석하여, “酸甘相合,用補陰血”이라 했다.

張元素在《醫學啟源》에는, “若惡寒腹痛,加肉桂一分,白芍藥二分,炙甘草一分半,此仲景神品藥也”

《丹溪心法》에는, “凡痢疾腹痛,必以白芍藥、甘草為君”

《藥品化義》에서는, 芍藥 “同炙甘草,為酸甘相合,調補脾陰神妙良法”

《中藥研究文獻摘要》에는, 芍藥苷 및 甘草의 유효성분이 시너지 작용을 하여 감초가 진정하고 신경말초 억제에 효과가 있으며 작약은 통증에 대해 중추에서의 진정 작용을 한다. 양자를 함께 쓰면 효과가 더욱 좋다.

 

'배합의 의의'에서 “五味”이라는 말이 극치로 역할한다. 그런데 '작약감초탕'을 논할 때 이미 언급했듯이, 이 이론은 제대로 검증된 것일까? 산감화음. 감초를 쓰지 않고 다른 감미약이나 설탕을 사용한다면, 작약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산미약이나 식초를 사용한다면, 과연 이런 치료 효과가 가능할까? 작약과 감초를 반드시 써야 한다면, 그 속의 어떤 특정한 물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옛날 사람들은 어떤 물질인지 알 수 없었겠지만, 근대 과학은 알 수 있다.

 

둘째, 저자는 중경방례(中景方例)를 말할 뿐 중경론은 아니다. 그래서 장중경이 작약과 감초를 '대약'으로 썼던 것일까, 아니면 후대에 밝혀진 것일까? 알수 없다.

“後世論述”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듯이 하나는 무이론적 해석, 즉 승인과 강조일 뿐 이론적 해설을 할 때는 오미설에 근거할 뿐이다. 송대 成無己의《註解傷寒論》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도이다. 실질적인 해석은 유효 성분 및 약리 작용에 대한 현대적 연구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 한의학은 고대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적 연구의 결과를 기꺼이 사용하지만, 고대의 지식이 어떻게 그러한 지식을 얻었는지 알아내기에는 충분치 않다. 작약과 감초가 각각 신경 말단과 중심에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진통 기능을 달성하기 위해 협력하는 미묘한 협력 등이 있다. 그러한 지식이 생성되는 진정한 과정을 설명할 정확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것이 경험의 축적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현대 한의학은 현대과학에 근거한 문제를 실제 치료에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한의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酸甘化陰、柔肝、緩急 등과 같은 이론과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性味、陰陽、臟腑、虛實 등과 같은 한의학의 개념이 독립적이고 완전한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이러한 약물과 이론을 유연하게 사용하여 환자를 다룰 수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매우 흔한 약인 "감초"가 여러 번 등장한다. 독자들이 이 전형적인 예를 통해 길익동동의 작업 방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藥徵》의 감초에 대한 설명을 아래에 인용해 둔다.

 

甘草:主治急迫也。故治裏急、急痛、攣急。而旁治厥冷、煩躁、衝逆之等。諸般急迫之毒也。

 

考 徵

芍藥甘草湯証曰:腳攣急。

甘草乾姜湯証曰:厥、咽中乾、煩躁。

甘草瀉心湯証曰:心煩不得安。

生薑甘草湯証曰:咽燥而渴。

桂枝人參湯証曰:利下不止。

以上五方,甘草皆四兩。

 

芍藥甘草附子湯証不具也(說在互考中)。

甘麥大棗湯証曰:藏躁,喜悲傷欲哭。

以上二方,甘草皆三兩。

 

甘草湯証曰:咽痛者。

桔梗湯証不具也(說在互考中)。

桂枝甘草湯証曰:叉手自冒心。

桂枝甘草龍骨牡蠣湯証曰:煩躁。

四逆湯証曰:四肢拘急、厥逆。

甘草粉蜜湯証曰:令人吐涎,心痛發作有時,毒藥不止。

以上六方,甘草皆二兩。

右八方甘草二兩、三兩,而亦四兩之例。

 

苓桂甘棗湯証曰:臍下悸。

苓桂五味甘草湯証曰:氣從小腹上衝胸咽。

小建中湯証曰:裏急。

半夏瀉心湯証曰:心下痞。

小柴胡湯証曰:心煩;又云:胸中煩。

小青龍湯証曰:咳逆倚息。

黃連湯証曰:腹中痛。

人參湯証曰:逆搶心。

旋覆花代赭石湯証曰:心下痞鞕,噫氣不除。

烏頭湯証曰:疼痛不可屈伸;又云:拘急不得轉側。

以上十方,甘草皆三兩。

 

排膿湯証闕(說在桔梗部)。

調胃承氣湯証曰:不吐不下,心煩。

桃核承氣湯証曰:其人如狂;又云:少復(腹)急結。

桂枝加桂湯証曰:奔豚氣從少腹上衝心。

桂枝去芍藥加蜀漆龍骨牡蠣湯証曰:驚狂起臥不安。

以上五方,甘草皆二兩

 

차례로 이 제방을 살펴보면, 물론 급박이다. 기타 曰痛、曰厥、曰煩、曰悸、曰咳、曰上逆、曰驚狂、曰悲傷、曰痞鞕、曰利下 등 모두 감초가 주치하는 것으로 급박한 것들이다. 중경 역시 감초를 쓰는데 급박이 심한 자는 쓰고 심하지 않은 자는 적게 썼다. 이러한 관점에서 감초의 치료는 급박을 치료하는 것이 분명하다. 옛말에 병자가 괴로움이 급하면 빨리 단 것을 먹으면 완화된다고 했다. 감초를 가리키는가? 중경이 쓴 감초 처방은 아주 많은데, 사용한 자는 이전의 증에 불과하다. 따라서 열거하지 않는다. 무릇 징험이 많고 증거가 분명한 자는 그 징험을 열거하지 않으며 모두 내린다.

 

互 考

甘草湯証曰:인후통이 있는 사람은 감초탕을 사용할 수 있고 차도가 없으면 桔梗湯을 함께 쓴다. 급박하고 고통스러운 자는 감초로 치료한다. 농이 있으면 桔梗으로 치료한다. 오늘 급박과 통증이 있으면 감초탕을 쓰고, 차도가 없고 이미 농이 있다면 길경탕을 쓴다. 이렇게 진행한 즉, 감초의 주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芍藥甘草附子湯은 그 증거이 갖취져 있지 못하다. 為則按:其章曰,발한병이 잦아들지 않으면 오히려 오한이다. 이 오한은 부자로 다스린다. 작약과 감초는 주치증이 없다. 고로 이 장의 뜻으로 작약감초탕으로 연급을 다스리고 이 오한을 따르면 이 증거가 비로소 갖춰진다.

 

為則按:調胃承氣湯、桃核承氣湯에는 모두 감초가 들어 가고, 大小承氣湯、厚朴三物湯에는 감초가 들어가지 않는다. 調胃承氣湯証曰:토하지 못하고 내리지 못하는 심번에는, 또 왈 : 울울번민은 모두 그 독이 급박에 이른 것이다. 桃核承氣湯証曰:혹 미친 듯하거나 혹 소복 급결이면 이 모두 급박이니 감초를 쓴다. 大小承氣湯、厚朴三物湯、大黃黃連瀉心湯은 그 결독을 풀 뿐이므로 감초가 들어가지 않는다. 학자들은 자세히 설명해 준다.

 

辨 誤

陶弘景曰: 이 약초는 모든 약의 주인이니다. 손사막이 말하길 : 백약의 독을 풀어준다. 甄權曰:감초는 약 중에서 왕이고, 72가지 金石毒을 치료하고, 1,200가지 목초의 독을 해독하고, 모든 약을 조화시켜 준다. 아아! 이러한데도 감초의 진가를 모르는 세상이 슬프지 않는가? 세 사람의 설에 따르면 모든 해독에는 오직 이 약초 하나면 족하다. 오늘날에는 그러하지 못하고 그 설이 틀렸다고까지 말한다. 무릇 모든 약의 본래 효능을 알고자 한다면 長沙方을 이용하여 그 유무다소를 찾아보고 더해서 그 증거에 맞춰보면 그 본래의 효능을 알 수 있게 된다. 長沙方에는 감초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절반이니, 모든 약의 주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옛 속담에 이르길 : 독약으로 질병과 싸운다 했다. 藥皆毒,毒即能. 그런 약을 해독한다면 그 효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학자들은 알 것이다. 무릇 도홍경 손사막 등은 의가의 준걸이자 뛰어난 의사로, 후대의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런데 감초를 모든 약의 주인으로 백약의 독을 해독한다 하니, 무슨 징후를 얻은 것일까? 長沙方 가운데서 생각해 보면, 半夏瀉心湯에 甘草三兩,그리고 甘草瀉心湯에 一兩을 더해, 당장 4량이 들어가고 오약에 떠 쓰게 된다. 도홍경은 대충 보고는 해독약이라 했다. 아아! 인간의 잘못도 각기 다르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잘못됨을 보자면, 중경의 치료를 믿고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도와 손은 중경의 약을 잘못 알아 감초를 더불어 쓰지 않은 까닭에 이 잘못을 바로잡는다. 왜일까? 도와 손은 준걸인데. 준걸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런 잘못을 하게 된 것일까? 이런 점에서 보면, 도와 손은 실은 감초의 본래 효능을 알지 못했다. 후대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東垣李氏曰:생으로 쓰니 위비를 보하기에 부족하고 大瀉心火가 된다. 뜸을 뜨면 삼초 원기를 보하여 표의 한을 흩어준다. 이는 중경이 말한 것이 아니다. 五藏의 설은 전국 시대 이후의 일이다. 오늘 질의가 되고 싶다면 5장을 말해서는 안된다. 전국시대 이후로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品 考

감초: 華產 상품. 국내산은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일부에서만 쓴다.

《藥徵》에 이어 동동의 제자 村井杶又가 《藥征續編》을 편찬했다. 길익에 의거해 하고자 하는 바를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村井은 “후손들을 도와, 동동옹을 독실히 신뢰케 하고자 하였다. 고질병, 불구를 치료하여 사방에 명성을 떨치고자 한다” 《藥徵續編》에서 고증하고 있는 약물은 모두 88종인데, 그 연구 방법과 서술 예는 모두 스승을 모방한 것이었다. 첫 번째 약인 “赤石脂”를 예로 들면, <상한잡병론>에서 사용된 적석지의 세 가지 처방의 공통된 특징으로 귀납된다. 즉 그 주치로 : “水毒下利와 便膿血을 겸치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互考”부분에서 “烏頭赤石脂丸”의 여러 종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互考:烏頭赤石脂丸은 그 증이 다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심통이 배부로 또 배통이 심으로 나타나는 자를 치료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처방이 어떻게 심배의 통증을 치료하는 것일가? 후대에 잘못 기록된 《金匱要略》“心痛病”篇에는, 세상의 의사들 모두 그것이 심통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처방은 육경(六經)병의 특정 증후군에 대한 부분에서 심통배통을 치료한다고 했다. 지금 그 전후 부분 및 병증방법에서는 厥陰病蚘厥, 心痛徹背、背痛徹心, 下利惡寒 모두를 주치한다. 마찬가지로 甘草粉蜜湯、大建中湯 등은 烏梅丸 전후에 있다. 《外台秘要》 第七“心背徹痛方”에는, 중경 <상한론> 心痛徹背、背痛徹心에,烏頭赤石脂丸으로 주치한다고 했다. 小注에 이르길 : 제15권에 나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傷寒論》厥陰病篇의 처방인데, 반드시 전후의 증이 있다하니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즉 蜀椒는 蚘厥을 치료하고,幹薑은 하리복통을 치료하며, 烏頭、附子는 하지궐역을 치료하고, 赤石脂는 오직 하리를 치료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처방은 오직 심배철통만 치료하는가? 烏梅가 蚘(회충?)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蚘厥心痛徹背、背痛徹心이라면 이 처방에 烏梅가 없을 수 없다. 그런 즉, 烏頭는 烏梅를 잘못 표시한 것인가? 무릇 중경의 처방에 烏頭附子가 함께 사용된 것이 없다는 것은, 烏頭는 烏梅의 잘못일 것이다.

 

이들 “互考”에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

1. 이 조문의 내용은 원래 ‘육경병’의 논설에 있는 것으로, 후인들이 《金匱要略》“心痛病”

아래 편재하여 잘못 대응시켰다.

2. 그 이유는 처방의 약물 성분을 분석한 결과, 해당 처방은 단지 "심통"의 치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蛔蟲病으로 인한 "심배통"을 치료하는 것으로 보았다.

3. 이에 근거하여 한걸음 더 나가자면, 蛔蟲病으로 인한 심통이므로 이 병의 주치에는 烏梅가 있고, 장중경의 모든 처방에는 烏頭、附子를 함께 사용한 예가 없다. 그러므로 처방에 나오는 烏頭는 바로 烏梅의 잘못이다.

 

설명해야 할 것 : 烏頭、附子는 같은 식물의 塊根의 다른 부분이다. 儘管村井은 이러한 관점에서 두 약물을 동시에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분석하지 않았지만, 이 점 역시 그의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정리하자면, 《藥徵》은 길익동동의 저작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명한 걸작인 淺田宗伯《古方藥議》에 의거하자면, 이것이 바로 《藥徵》에 개발해 낸 것이라고 한다. 물론 동동의 학술적 주장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대부분은 이 책의 가치를 충분히 긍정함과 동시에 편향된 측면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예를 들어, 篠島宗恕《醫聖堂雜話初編》에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초학자는 길익동동의 《藥徵》을 익혀야 한다. 중경의 方意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은 빨리 이해하기 어렵다. 동동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이 《藥徵》뿐이다. 그러나 지식에 편향이 많이 보인다. 마땅히 취사선택해야 하며 무조건 믿어서는 안된다." 더불어 동동의 의학설에 찬동하지 않는 고증학파의 태두인 多紀桂山도 《時還讀我書》에서, "동동의《藥徵》은 식견이 있는 만큼 유용한 책이다"라고 평가한다. 그의 문인 平野重誠(1790-1867)는 그의 저작 《一夕醫話》에서, 동동을 칭찬하며, 제 처방의 귀납 연구로 약물의 효능을 개괄한데 주목하여 이를 ‘최대의 발명’이자 동시에 허다한 비판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5. 《醫斷》이 야기한 논쟁과 풍파

 

길익동동의 문인 鶴元逸은 延享四年(1747)에 동동의 의설을 《醫斷》으로 편집하였는데, 출판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나중에 같은 문하의 中西惟忠이 그의 뒤를 이어 “攻補”、“虛實”이라는 두 편을 넣어, 1759년에 출판되고 1809년에 재발행되었다. 《醫斷》의 출판은 먼저 畑黃山(1721-1804)著《斥醫斷》을 통해 동동의 의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또 동동의 문인인 田中榮信 寶歷十三年(1763)著《辯斥醫斷》에서 힐문하기도 하였다. 그 외 堀江道元著《辯醫斷》(1790)、佚名者著《医事客难》等이 《醫斷》의 논점에 반대의견을 보였다. 그리고 木幡伯英的《斥醫斷評說》(1804)、矢田部常德的《击蒙编》、佚名者之《续医事客难》等은 동동을 지지하는 저작이다. 동시에 동동 스스로도 <의단>이 유발한 여러 논의에 대응하여, 明和六年(1769)刊行《醫事或問》에서, 자신의 주장을 진일보시켜 세간의 오해를 없애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후대에 "의학적 논쟁"이라고 불리는 폭풍을 일으킨 이 작품은 무엇을 말했는가? 책은 “司命”으로 시작하여 死生、元氣、脈候、腹候、臟腑、經絡、引經報使、針灸、榮衛、陰陽、五行、運氣、理、醫意、痼疾、素難、本草、修治、相畏相反、毒藥、藥能、藥產、人蓡、古方、名方、仲景書、傷寒六經、病因、治法、禁宜、量數、產蓐、初誕、痘疹、攻補、虛實 등 모두 37개의 소제목이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司命:扁鵲이 말한 “司命”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후인을 배격하고, 의가의 직능은 곧 “掌疾”임을 지적한다. 즉 병을 치료할 뿐, 死生은 그 명에 따른다는 관점

死生: 과거로부터 마땅히 “死生者,命也”이라 했다.

"오직 질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것만이 命이 아니다. 毒藥으로 치료할 뿐이다. 死生을 다루 것은 의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질병인 자는 마땅히 치료해야 한다."

"고대인의 처방을 가지고 지금의 병에 맞취, 중경의 법칙에 따르드라도 죽는 자는 운명이다. 귀신에게 묻더라도 부끄럽지 않다."

"세상의 의사는 그 생사를 예정하곤 하며 내 손에 죽어 간다고 하여, 그 명성에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그는 죽을 것이다. 다만 나의 의술을 다해 혹 살기를 바라며 고래의 도를 행할 것이다"

元氣:“원기의 설은 성인이 말하지 않았고, 육경(六經)도 없다. 漢儒로부터 만들어져 당(唐) 송(宋)으로 내려와 크게 성행, 의학의 중요한 표현이 되었다."

 

並進一步分析:원기는 곧 선천지기이니 어찌 성쇠가 있는가? 어떻게 보할 수 있는가? 늙어 흥망성쇠의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天地之道,萬物之常也。非人力之所能挽回矣”(천지의 도(道)요 만물의 불변(不可)이다. 인력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장한 사람이 쇠약한 사람이 되었다면, 반드시 ‘억제하는 바’가 있으니 그 억제하는 바를 제거하여 저절로 정상 상태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脈候:사람의 얼굴에서 맥을 따르면 각각 서로 다른 출발이 있으므로 그 평시의 맥상을 알아서, 어떻게 ‘병맥’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평소 맥박을 알 수 있는 것은 12가지 중 1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맥박이 '질병'인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동동선생은 항상 이렇게 가르쳤다. “先證而不先脈,先腹而不先證也” ·· “五動 혹은 五十動이라 한다. 오장의 기는 망동이 심하다. 浮、沉、遲、數、滑、濇 등을 분별할 뿐이다. 세 손가락으로 눌러 이른바 스물일곱 맥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腹候: “腹者有生之本,故百病根於此焉。是以診病必候其腹。外證次之。”

臟腑: “要皆非治疾之用矣。”

經絡: “無用乎治矣,是以不取也。”

引經報使:본초설의 頭頭가 바로 도이고, 가이 의거할 만하니, “만일 이와 같다면 누가 정곡을 잃은 것인가? 그러니 이것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하며 경강부회할 뿐이다.”

針灸:침과 뜸의 병용은 효과가 없지 않다. "다만 그 뿌리를 뽑는 것은 곤란하다. 痼毒이라면 뜸을 뜨면 동하고 동한 뒤 공격하면 치료가 쉬워진다. 고로 침뜸 역시 하나의 도구가 되며,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經絡分數에 구속될 필요는 없다. 독이 있는 곳에 뜸을 뜨고 자침하면 된다."

榮衛: “亦理而已,非疾醫之用也。不可從矣。”

陰陽: “陰陽者,天地之氣也,無取於醫矣” 朱丹溪 陽有餘,張景岳 陰有餘之說 “穿鑿甚矣”

五行: “《素問》、《難經》欲由是以總天下之重理,窮人身之百病。··· “今執其說,施之匙術,則致謬千里。”

運氣: “要是陰陽家之言,奚取於疾病醫乎?”

理:“理本非可惡者也,惡其鑿焉耳” ···· “故吾黨論其已然者,不論未然者,又不論其所以然者. 蓋事理相依不離者也. 故事為而得之,理默而識之”

醫意: “醫意之說一出,而世之狡兒以為口實” ···· “蓋醫之為道,自有一定法,何鑿推妄行之為,其如是也”

痼疾: 難治無他,“方不得法也。” ···· “彼已不能治,則雖千百人中起一人,不亦善乎?” 此處有自相矛盾處—前面說痼疾難治只是因為方不得法,換言之,只要方得其法,就沒有治不好的病了. 但後面又說,千百人中起一人也是好的. 豈不矛盾?

素難: 《素問》、《靈樞》“其中間有古語可法者” 《難經》“其言理最勝,故害道亦多. 考之《扁鵲傳》,亦唯偽作而已”

本草: 本草의 기본평가는 “妄說甚多,不足以徵也”이다. 다만 폐기하진 못하니, “宜擇合於仲景法者用之” 其他長生、補氣、美顏色之說,都是後世服食家說攙入本經.

修治: “後世修治之法甚煩” ··· “去酷烈之本味、偏性之毒氣,以為鈍弱可狎之物,何能除毒治病哉? 蓋毒即能,能即毒。製以益毒則可也,殺毒則不可也。”

相畏相反: “甚無謂也. 古人製方,全不拘於此”

毒藥:“藥者,草木偏性者也。偏性之氣皆有毒。以此毒除彼毒耳。”(引古書“毒藥”之說) “後世自道家之說混於疾醫,以藥為補氣養生之物,不知其為逐邪驅病之設也。

藥能:“諸家本草所說藥能,率多謬妄。故先生壹皆考信於仲景氏云。參觀其方,功用可推也。今舉本草所載,不合仲景者一二:如人蓡治心下痞鞕,而彼以為補氣;石膏已渴,而彼以為解熱;附子逐水,而彼以為溫寒。其相齟齬者大抵為爾。先生別撰《藥徵》以詳之,故不贅於此。”

藥產:“其土之所生,性之所稟,不可不詳也。”

人蓡: 中國、韓國進口者皆非古——味道應苦,而現在多浸以甘草水故甘。其他則是批評亂用,及認為人蓡補虛之謬。

古方:“方者莫古於仲景。而仲景為傳方之人,非作方之人也。”

先知方用,然後可知藥能;不知藥能,則方用亦不可知也。

“況方意不可解者,甚多矣。”

千金、外台,可取者幾方而已。

名方: “載書籍者未必佳;傳俗間者,未必不佳。宜博求普問,以輔其術矣”

仲景書: 王叔和之加工,後人之加工。註釋多牽強。

傷寒六經: “《傷寒》論六經,非謂病在六經也,假以為紀也。”

病因: “非謂無之也。言知之,皆相像也。” “故先生以見証為本。” 這就是仲景之法,例如:“傷寒大煩渴,中熱大煩渴,皆白虎湯主之。是雖異其因,而方則同矣。可見仲景從証不拘因也。”

治法: “治有四,汗吐下和是也。”用藥→瞑眩→毒去,是仲景法也。

禁宜: 古無此說,不必。

量數: 古代所用“甚密也。” 今不可審。現今用量甚少,且二煎,何用?

產蓐: 習俗中有益者從之,有害者當除之。產後不睡、參芪補養、妊娠腹帶,皆不可取。

初誕: 務去胎毒,不宜早乳。不可補。

痘疹: “治法以除毒排膿為主。如補瀉二法,不知者之所立耳。”

攻補: “醫之於術也,攻而已,無有補矣。”“攻病以毒藥”;“養精以榖肉果菜”。

虛實: 據《內經》“邪氣盛則實,精氣奪則虛”立論,言有病即是“實”。又言:“藥者偏性之毒物耳,是以雖能拔邪氣而不能補精氣也。”

 

위의 37개 소제목을 통해 주어진 핵심관점을 소개함으로써, 길익동동의 실제 중의학 기초이론의 핵심 개념과 그 상관이론, 예컨대 臟腑、經絡、陰陽、五行,以及脈診方法、本草著作、醫學經典 등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비판과 동시에 司命、死生、元氣、毒藥、藥能、治法、初誕、痘疹 등의 장절을 통해서 동동류가 제창한 바를 볼 수 있다. 사생은 명이 있으며, 의자의 직능은 독약을 써서 그 병사를 제거하는 것이다. 즉 임산부, 신생아, 두진을 앓는 어린이도 확고하게 몸에서 독소를 제거해야 하며 “補法”은 전혀 없다.

 

그런 극단적인 말에 《斥醫斷》의 “緒言”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괄하고 있다. “《醫斷》을 읽고서 책을 버려 버리고 탄식이 나왔다. 큰 탄식이 나오는게 3이요, 눈물이 나는 것이 2라. 그는 진실을 어기고 도를 손상한 자로 크게 잘못된 바이다”

 

탄식이 나는게 3, 눈물이 나는게 2라는 것은..

1. 무릇 醫란 비록 小道이나, 그에 精理妙用이 있어 성인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고금의 의학에서 비록 지혜와 재능이 있는 사람(辭源亦無,僅有迥)이지만, 논변취사하고 모두 경전과 절충하며 종국에는 그 궤도를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의 생명이 가장 중요한데 어찌 신중하지 않으랴! 그리고 그 책은 또한 의경을 단호히 거부하고, 음양을 버리고, 고금의 불변의 길을 바꾸어 이단에 이르렀다. 아~ 이런 말을 하니 훗날 그 폐단이 걷잡을 수 없어 탄식함이 그 하나이다!

2. 중경은 비록 명민하지만, 그럼에도 《素問》、《陰陽大論》을 믿고 질의했다. 책에는 비록 중경에서 그 처방을 취했다고 나와 있지만,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거짓 주장을 하였다. 인삼은 무보이고 心下痞鞕을 치료하며, 부자는 非溫으로,逐水氣라 했다. 그런데 왜 중경은 인삼을 포기하고 枳實을 쓰고, 부자 대신에 甘遂를 썼을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탄식 2라.

3. 무릇 정사에서는 왕과 신하의 차이가 있고, 관리에도 循酷之異이며, 의도 역시 그러하다. 이 책은 아주 마음대로 논술하고, 특히 증거가 무시되고 표본도 찾지 못하고 병인을 조사하지도 않으며 공격은 있으나 補는 없다. 譬猶李斯、商鞅之術郅都杜周之治. 이리하니 패하지 않을 자는 거의 없다. 이것이 큰 탄식 3이라.

4. 사생이 명이라 하나, 의업의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원래 치료의 방법은 회생이고, 적절히 치료되지 않으면 빨리 죽게 됨을 알 수 있다. 길익이 사생의 의료에는 관여치 않는다 하니, 이 말의 폐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바람 앞의 꽃처럼 보도록 만든다. 아! 사람들의 질병이 더욱 만연할 것이다. 콧물을 흐르게 하는 4라..

5. 가장 슬픈 일은, 갓 태어난 아기는 그 천부적인 것을 분별하지도 못하는데 모든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고금의 경법은 논외로 하더라도 억단으로 옳다 하니 의문을 가질 바 적지 않다. 두진의 치료에 이르면 더욱 참혹하니 참을 수가 없다. 눈물을 흘리는 5라.

그러므로 “반박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에《斥醫斷》을 쓰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양측의 논거 방식을 보면 그것도 고대 문헌과 현자의 말을 광범위하게 인용한 데 기반을 두는 식으로, 결국은 자신의 관점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매우 흥미로운 또 다른 점은, 平安醫士 法眼 武川幸順이 쓴 “題斥醫斷後”에서 고방파 사상의 근원이 유교 의학에 그 죄의 뿌리가 있다고 본다. 그의 관점에서 유의의 문제는 지상의 담론이 많고 실제 경험이 부족한데 있다. <서경>의 “藥不瞑眩,厥疾弗瘳”라는 말을 보고는, 동동류의 유의들이 독약으로 질병을 공격하여, 환자에게 ‘명현’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치료’의 치료가 되는 상책으로 본 것이다.

 

그는 《醫斷》의 저자 鶴元逸為에 대해, “백면의 의생으로 공부는 했으나 실행해 본적이 없다. 약은 팔지 않고, 하루 종일 앉아 책만 붙들고 살았다!”고 비웃었다. 용감스레 병을 공격하는 치료방법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유생들에 연결짓는 이러한 평가는 실제로 우리가 "유교 의학"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비교할 만한 예로, 학문적 소양 측면에서 중국의 '金元四大家'는 유교의학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만, 그들의 의학적 주장은 완전히 다르다. 李杲는 胃氣가 사람의 원기이며 다양한 질병이 대부분 비장과 위의 손상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아, 치료는 “補土(脾胃)”를 위주로 하며, 이를 두고 “醫中王道”라 칭했다. 朱丹溪는 질병은 음양의 불균형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체는 “陽常有餘,陰恆不足”이라고 보아, 滋補陰血을 통해 음양의 균형을 달성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유가의 학문적 특징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학적 소양을 잘 갖추고 책 제목을 《儒門事親》이라고 명명한 張子和는 '질병'은 인신에 고유의 것이 아니라고 보아,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므로 汗、吐、下의 3가지 방법을 통해 인체에 붙은 질병을 제거해야 하는데, 어떻게 “補法”이 가능하겠는가?

 

또 다른 예를 들면, 袁嘉裕(栎山)는 동동의 毒藥攻疾、瞑眩疾去、死生有命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설하고 있다.

"... 당시 동동옹은 养荣滋补의 해를 우려해 그 폐해를 바로잡고자 한, 가이 탁견이었다. 옹은 인간으로써 참혹함을 견디며 몸의 허실은 분별하지 않고 사기의 剧易를 불문하고 마구 공격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烦躁狼狈하여 죽을 것 같으면 담담하게 말한다 : 药弗瞑眩,厥疾弗瘳. 죽기에 이르면 말할 것이다 : 사생은 명이고 의사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万病唯一毒이니 그 독을 사하하여 죽음을 되돌리려는 것 모두 운명이다. 약독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오늘 죽임을 당하고 불행히도 독약에 죽은 사람들은 의사를 탓하지 않고 하늘로 돌아간다. 이건 사실 옹의 영리한 묘책이다. 참으로 탄식하는 바는 옹이 만든 인형이다.

 

세상에서 서투르게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황당한 이야기를 기꺼이 듣고 사람의 생명을 멸시하며 구휼을 알지 못한다. 또 맹독약을 지어 무지하고 몽매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의자는 질병을 치료하고 현자는 나라를 다스린다고 들었다라고. 옛날 郑子产이 그의 아들 大叔을 가르치며 이르길, 너는 절대 猛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 동동선생이 의료에서 猛案峻毒을 쓴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혹은 이르길, 그 죽음에 보익하건 공격하건 죽음은 다 한가지이다. 생을 좋아하는 덕은 민심 속에 들어가니 어찌해야 할이거나? 옛 속담에 이르길, 불치의 병은 자주 중의가 만나는 일이다. 금세에 또한 工医가 없는 걸 보자면 역시 치료할 수 없어 천명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논쟁 전반에 걸쳐 비평가들의 주장하는 바는 고문의 본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不明醫理、偏激;生性殘忍,沒有醫生的慈愛之心이다. 반동동파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 증거를 제시하며 동동의 의설이 정확하다고 제시한 村井椿壽(號琴山,1733-1815)이 있다. 椿壽는 장중경 사후 2000년이 되었는데, 동동선생이 처음으로 의도의 요점을 밝혔다고 지적헸다. 그의 저서 《醫道二千年眼目編》에서 열정적인 필치로 쉼 없이 동동을 지켰다.

 

또한, 태도에서는 동동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그 이론은 조용히 절충 타협한 경우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後醫斷》의 “脈候” 부문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볼 수 있다 :

맥이란 바로 인체의 활력으로 사람마다 맥이 일정한데, 몸이 아프면 맥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따라 증후가 나타난다. 더우면 뜨고 추우면 가라앉으니 음양을 분별할 수 있다. 중하면 긴하고 경하면 이완되니 이로써 상한 중풍을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변하고 또 변하면 弦이 되고 澀이 되며,數이 되고 遲가 되어 허실이 정해지고 사생을 판별할 수 있다. 맥이 보이는 상은 시시각각 변하니 증후를 확인할 수 없더라도 이렇게 모아지니 그 핵심을 구할 수 있는 바 어찌 묘리가 아니리오? 하물며 3번의 진찰을 병행하니 그 증후법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혹 맥으로 증을 논하거나 증을 훼손하고 맥을 논하는 것은 하나는 들고 하나는 버린 셈이다. 하물며 五動 또는 五十動으로 오장의 氣를 증후하는 것은 의도에 따라 진행하여 방자히 말하니 병을 기만하는 것으로, 어찌 치료의 방법을 안다 하랴. 의자가 그 한열을 변별하게 되면 그 처방이 바르게 정해진다. 그 허실을 살필 수 있으면 사생을 바르게 구분된다. 비록 맥이 증후를 보인다 하니, 맥의 쓰임이 그러한 것이다.

 

전술한 《醫斷·脈候》의 기본 관점과 비추어 보자면, 《後醫斷》의 저자가 시도한 절충성 개조는 다음 몇가지로 나타난다 :

1. 《醫斷》은 맥은 사람 얼굴과 마찬가지로 서로 달라, 의사가 각 개인의 평시 정상맥상을 알지 못하는 한 그 펄스는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여 사람마다 다르다. 은유적으로 의사는 모든 사람의 정상적인 맥박 상태를 알 수 없으므로 당연히 “病脈”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맥진의 역할을 부정한다. 《後醫斷》의 저자는 이른바 “常”이 특정인의 평소 맥박 상태가 아니라 일반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논리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病脈”의 존재와 인지 가능성은 인정했다.

2. 《醫斷》은 비록 맥상의 가장 명백한 변화 중 일부만 인정하고 있지만 음양, 한열, 허실을 판별하는 데서만 그 가치를 인정한다.

3. 《醫斷》과 마찬가지로 “五動或五十動,候五臟之氣”의 주장을 부정한다.

4. “三診”(脈、證、腹)에 대해서는 하나는 들고 하나는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열을 판별하고 허실을 살펴 처벙을 정하고 사생을 결정함에 있어 ‘오직 맥만이 증후를 판별할 수 있음’을 특별히 강조한다.

 

6. 동동의 저서, 가족과 제자

 

그의 아들 吉益辰은 1785년에 아버지의 저서를 공개했다. “거의 천권에 이른다. 방제술의 인사들이 왕왕 보고는 이것은 진정한 古疾醫의 도이다”라고 했다. 다음 11가지 책이 있다:

 

1、《方極》一卷(寶曆五年著述,1764刊行)

2、《類聚方》一卷(著述於1762,刊於1769)此書從《傷寒論》《金匱要略》選方220個,分類編排。未親試之方置於卷末。村井琴山謂:“中華歷代數千百之醫人,觀仲景無過於此。

3、《醫事或問》二卷(1769著,1825刊) 共設37問,以說明其主張。

4、《藥征》三卷(1771年著述,逝後十二年之1785刊行)

5、《古書醫言》四卷(1813初刻,1864刊行) 此書從《周易》、《書經》至《內經》、《傷寒論》抄出有關醫藥之事,逐一評說。另有名曰《醫事古言》之書一冊,刊於1805。所舉古言少於《古書醫言》。

6、《東洞先生遺稿》三卷

7、《醫方分量考》一卷

8、《方選》一卷

9、《丸散方》一卷

(上二種,東洞我爲平日調劑編,藏於家,而不公之。但入門者,得謄寫耳)

10、《醫斷》一卷

11、《建殊錄》一卷 此書為門人嚴恭敬於寶曆十三年輯東洞驗案54例而成。後有“附錄”一卷,系長門儒官鶴台先生以未治癒的病例請教東洞,以及東洞的分析。

(上二種,門人所著,而東洞鑒定之)

 

另外,屬筆錄東洞口授、或述其遺教者,有:

12、《補正輯光傷寒論》二卷

13、《輯光傷寒論》一卷

14、《刪定十二律方》一卷

15、《家塾丸散方》一卷

16、《腹診論》並圖三卷

17、《東洞先生痘瘡新論》一卷

18、《東洞先生答問書》一卷

19、《東洞先生配劑錄》二卷

20、《東洞先生應問錄》一卷

21、《東洞翁遺草》一卷

 

 

동동은 처와 두 명의 첩과 결혼해 아홉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3명은 출생 후 사망하고 3명은 요절하였으며, 2명이 의사가 되었다. 그의 옷을 물려받은 것은 그의 처 高木氏의 소생인 吉益猷이다.

 

吉益猷(1752-1813)는 字 修夫,初号 谦斋,后号 南涯,통상 周助(어릴 적엔 大助)로 불렸다. 그의 저작인 《方规》에서는, 중경의 의료 처방의 도를 활용하였다고 하며, 나중에 동동의 '만병일독설'은 공허하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우려하여, 인체에 기(氣), 혈(血), 수(水)의 3물이 있어 독이 이것들을 타고 비로서 증을 이룬다는 설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상한론>을 해석, 《伤寒论精义》를 이루었다. 후에 또 지은 《医范》에서, 기혈수의 변별을 분명히 하면 만병일독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궤적을 따라 그는 또 《气血水药征》에서, 하나의 새로운 완전한 체계를 형성했다. 제자가 3000명이 넘고 유명 인사들도 많다. (기혈수의 이론은 并河天民에 의해 처음 창안되었으며, 南涯가 이를 통해 <상한론>을 해석하였다.)

 

中川修亭《医方新古辨》의 설명에 따르면, 南涯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일을 열심히 해서 아버지의 도를 넓여 갔다." 그러나 《方极》은 사용하지 않고, 《药征》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으며, 《类聚方》의 “为则按”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는 '창업'에 속하여 “全备”를 기대하긴 어렵다. 오류를 바로잡고 결함을 보완하는 것이 "아버지의 길"이다.

 

이 섹션의 제목에 '가족'을 포함한 것은, 동동이 어머니와 아들을 위해 병을 치료한 기록이 읽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동동의 어머니가 가래와 흉통을 앓는다. 일흔세 살인데 중병이다. 동동이 말했다. 죽음, 운명은 어찌할 수 없다. 이런 걱정을 하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운명에 맡길 수 있겠는가?" 어떻게 했나 보세요. 모두가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다. 동동이 이르기를, 병세는 급하니, 죽음이 순식간에 닥칠 수 있다. 약이 더는 어려우니 잔인한 독을 단번에 섬멸할 수 없다. 곧 南吕丸을 만들어 진행해 나갈 것이다. 순간적으로 명현증이 나고, 열 번을 토하고, 맥이 가늘어 죽은 사람처럼 하룻밤낮이 흘렀다. 다음날 시원하게 잠에서 깨어나 평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여 건장함으로 병 없이 천수를 다했다."

 

동동이 어머니를 치료하면서 그가 부르짖은 '질의의 길'을 확고히 관철시켰음을 알 수 있다. 명현이 나타날 때 여전히 무서운 약을 써서 병든 정세를 만회했다. 토사가 멈추지 않고 숨이 가쁘고 죽을 것 같은 “瞑眩” 단계를 거친 다음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는 않았다.

 

“아들 千之助가 네 살 때 痘를 앓았는데 증상이 급해 紫圆을 복용하였다. 비록 그 효험이 크게 나타나기도 했지만, 결국은 치료에 이르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 수년 동안 여동생이 네 살에 痘를 앓았는데, 매우 심하게 빽빽하고 색은 자흑색에다 깨물고 헐떡거림이 심해 매우 괴로워했다. 동동(東洞) 또한 紫圓을 복용케 하였는데 이에 대해 모 친족이 이렇게 전한다. 嚮者 또는 험담이 있었는데, 동동의 처방도 내외를 막론하고 반드시 내려야 한다. 이건 자식을 죽이려고 한 것이지요. 지금도 내려야 하는데, 금하지 않는다면 자비로운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다? 동동은 말하길, 方證은 相對적이고 그 독이 성하여 죽는 것은 그의 운명이다. 어찌 명예를 훼손하여 얼버무릴 수 있겠는다? 계속 복용해 주면, 모든 증이 사라지고 완전히 치유될 것이다.”

 

동동은 '祭兒禪文'에서 기술한 건 바로 4살의 사랑하는 자녀가 치료되지 못하여 죽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 "再周 시에, 안색이 초췌하고 눈은 깊숙하여 모두가 이르길, 무른 사람은 고금이 다르니 젖먹일 수 없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내가 말하길, 독이 다했다면 어찌 복용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 죽음이 痘疹의 음위(陰威) 때문인지, 동동의 攻下 때문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제문의 말미에는 "네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나의 불민함을 밝힐 수 있겠는가?"라고 적혀 있다. 그 슬픈 비명 속에서도 동동은 자신의 치료에 대해 반성을 한다. 마찬가지로 그 후에도 동동이 딸의 痘疹을 변함없이 치료해왔다는 기록에서도 이른바 “疾醫之道”에 대한 그의 집념과 경건함을 확인할 수 있다.

 

동동의 제자양성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中川修亭의 한담에 등장하는 細野轉翁의 일례가 나온다.

 

어느 날 修亭이 선생님을 방문했을 때, 吉益南涯가 외출하려던 차에 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인을 만났다. 두 사람의 대화 중에 修亭은 이 남자가 비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노인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여전히 그를 뒤따랐고, 길 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노인은 修亭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

 

"저는 기후의 한 마을 의사입니다. 젊었을 때 의사가 되고 싶어 어느 의사의 문하생으로 살았어요. 그러나 집에서 단도를 훔쳤다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의사 지망생으로 교토를 찾아다니며 의가의 문앞에서 제자가 되려하는 바램을 이야기해 보았지요. 그러나 아무리 부탁해도 도둑을 제자로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동동 선생의 문 앞에 찾아가 스승을 모시고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문압에 있던 몇 제자가 가로막고 말했지요. ‘안에 계신 선생은 일본 제일의 선생님이라, 그대 같은 촌부가 쓴 글을 읽지도 않을텐데 어찌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동동선생이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오히려 나를 직접 보고는 이야기를 나눈 뒤, 말씀하시길, ‘그대는 할 수 있을거요, 잘 받아들이면 제자가 될 수 있을거요. 독서는 일절 할 필요 없이 매일 내 곁을 따라다니며 내가 하는대로만 하면 된다네’라고 말씀하셨어요."

 

동동은 이렇게 말한 후에 바로 제자로 삼아, 왕진할 때도 그를 데리고 가르침을 주었다. 몇 년 후 동동씨가 고향으로 돌아가 개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여, 그만두고 기후로 돌아가 시골의사가 되었다. 동동이 죽은 후 그는 吉益南涯에 와서 문안 인사를 하곤 하였다.

나중에 中川修亭은 제자들을 보내서 인사를 하게 했는데, 細野轉翁이 개업한 오노무라(大野村)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의(神醫)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이 많은 저작이 문인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문하생의 상태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저작은 일본의 한방의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고대 의학문헌에서도 동동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고 분연히 떠난 제자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예컨대 龜井南冥의 《我昔詩集》속에서 예를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에 아버지의 명으로 문하에 들어갔다. 5, 6일 동안 머물며 그의 설이 편백되다고 알아 배우지 않고 계속 따져 물었다. 동동은 남은 세월 동안 별일 없이 의논도 하려 하지 않았다. 미운 마음에 후회하며 결국 물러났다. 그 후 10여 년 동안은 동상에 의해 문하를 알현하였습니다. 간혹 뵙기도 하였습니다. 칠십 세에 귀밑머리가 희고 눈이 꼿꼿했지만 기세가 좀 꺾였습니다."

 

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동의 “所說非所爲,所爲非所說”의 제자인 요시무라(吉村)는 두루뭉술한 편이었고, 결국 스승이 그 '학'과 '술'의 모순에 대해 그를 설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고 보아, '오래 속고 싶지 않아 사임을 청했다. 결국 떠났다'고 했다.

 

7. 동동의 역사적 평가에 대한 평가

 

藝備醫學會 회장, 의학박사 吳秀三은 시골의 고대 명의인 길익동동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

藝備 二州에서 예로부터 유명한 족속들이 많이 나왔다. 가장 유명한 3가지 경우가 있다. 毛利씨는 무략으로 山陰山陽 13주를 거느렸고, 賴씨는 文章史學으로 1세의 영웅이라 불렸고 오늘날까지도 쇠퇴하지 않고 있다. 의학적으로 유명한 길익씨의 업적은 이 둘에 비견되거나 그를 능가하였다. 慶元은 항복하고, 李朱의 학문이 크게 행해지는데, 구차하여 그 폐단을 알지 못했다. 나고야(名護屋), 고토(後藤), 가가와(香川), 야마와키(山和)의 무리들이 모여들어 고의학(古學)을 오로지 주창했다. 동동의 아들이 대를 이어 탁월하게 거목이 되었다. 뒤에 '고방자(古方者)'로 불리며 이렇게 종사가 되었다. 그 학주 秦張은 후대 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만병일독을 치료의 근본으로 삼았다. 당시 의사는 그 말을 처음 듣고 의아해 하다가 모두 승복했다. 아들 南涯는 그 설을 더욱 확충하여 氣血水學을 주장하였고, 제자들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길익씨의 업적은 더욱 풍부하였다. 예로부터 명의가 많았지만, 명성과 업적이 동동자처럼 훌륭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동동에 대한 다른 명사들의 칭찬도 열거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築前儒學의 龜井南冥은 東洞子에 대해 “剛明膽略不在鼂(晁)錯、周亞夫下”라 평가했다. 山下玄门《医事丛谈》에서는 “东洞翁实为和汉古今之豪识”라고 칭한 것 등등. 또한 조정에서 길익동동에 대해 추증한 일은 의사로서 대단한 영광으로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이런 찬사들을 종합해 볼 때 고금의 구분을 조금 해보면 찬사자들의 신분과 입장,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고대의 찬사는 주로 복고를 주장하며 지지했던 진영에서 비롯되었는다. 예컨대 데, 山下玄門은 古醫方을 평하길, "중화의 여러 명가들이 비록 수백이지만, 長沙의 과거를 되살린 것은 우리 나라의 업적"이라고 말했다. 또 이 시대에는 길익동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동동에 대한 찬사는 반드시 이 전통 기법을 사용하는 한의사들에게서 오는 것은 아니며, 주로 일본의 '일본학' 연구자들에게서 나온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로 다음과 같은 사회적 요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1. 민족 자존과 학술 우상을 만들 필요성

 

예를 들어, 吉益東洞과 동향으로 藝備醫學會會長인、醫學博士 吳秀三은 학회가 편집한 《東洞全集》에서 책에 대한 안내 및 동동 전기를 쓴 장문의 “吉益東洞先生”에서 명확히 명시하였다 : “吉益東洞의 명성은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나라 의료계에서 존재하고 울려 퍼집니다. 그의 명성은 우리 나라 의학의 명성입니다. 우리 나라 한방의학의 명성은 곧 고방파의 명성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에서 특히 고방파가 극찬받는 이유는, 오직 <상한론>만을 기본특징으로 하는 학파로 다른 의학파와 마찬가지로 중의학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데, 다만 <황제내경>으로 대표되는 음양오행, 장부경락의 중의학이론 및 <상한론> 이외의 학설과 치료방법에는 뚜렷하게 반대하였다. 따라서 많은 일본의 의학서에서는 고방파를 진정한 "일본의학"으로 높이 평가한다. 고방파 가운데서 길익동동에 대한 비판이 가장 강렬하고 부정도 가장 철저하다.

 

비교가 가능한 사례로는 복진, 즉 환자의 복부를 만져서 질병을 진단하는 방법에 대한 극찬이 높다. 이러한 진단법은 한방의학에서 맥박을 진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한방의학의 독자적인 발명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2. 근대 이후 서양의학의 일본에 대한 영향. 한방의학을 연구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사실 무의식적으로 현대과학의 실증적 성격을 내면세계의 평가기준으로 삼는 가치지향성을 갖고 있다. 吉益東洞을 대표로 하는 고방파는 강력한 철학적 중의학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상한론>의 6경 변증체계조차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질병이 있으면 약을 쓴다"고만 강조했다. 즉, <상한론>의 본질과 처방구성은 모두 임상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것이 "150년 전 서양의학이 붐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 이미 실험과 실험에 매진하고 모든 헛된 주장을 버렸다. 그것은 정말 통찰력이 있었다"라고 고방파를 칭송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컴퓨터가 임상적으로 보이는 증상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설정한 절차에 따라 약을 처방해 주는 식으로 중의학 진료에 활용되자 길익동동 《藥征》을 다시 읽는 사람들은 컴퓨터의 작동 원리와 같다고 감탄한다.

 

이러한 두 가지의 마음과 필요에 기초하여 당연히 의식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칭찬의 말을 택할 뿐, 비판의 말을 생략하고, 전인들이 칭찬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앞에서 거론된 龜井南冥의《我昔詩集》에서 동동을 찬양하길, “영웅사이다. 그 膽略剛明으로 晁錯周亞夫 아래에 있지 않을"라 때에 “智略”이란 표현의 구체 사례로, “일시에 명사(名士)로 부상, 성원을 받아 그 명성이 자자하여 사방을 놀라게 하였지요. 한때는 흡연히 동경했는데, 그 말이 익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 동동이 “造勢”의 인물이라 설명하는 것은 바로 크게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고, 그 추종자들은 그 학문이 옳은지 그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 의학사에서 매우 개성 있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길익동동의 생애와 학문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아마도 그것은 “與眾不同”(유별남)으로 통하기도 하지만, 시대적 공동성을 있지 않는 곳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면:

 

1. 한의학 분야에는 실제로 고대인을 존경하는 태도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차이점은 존경받는 학문적 우상이 다를 데 있다.

2. 후대 사람들이 고방파를 평가할 때 “真古”와 “擬古”의 구분하는데, 동동은 “主上古之醫法,且用之”의 진고에 속한다. 艮山、一閑齋、東洋 등과 같은 경우는 ‘그 뜻은 옛것에 바탕을 두되 널리 중방을 채집하여 더불어 함께 쓰는’ 의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는 모두 복고의 기치 아래 스스로 취사선택을 함으로써 새로운 의학이론과 치료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3. 일종의 종국적 진리인 듯 했던 病因學說, 물론 금원사대가 각각이 스스로 제시한 병인 주장, 더욱이 일본 고방파가 제시한 “一氣留滯”、“萬病一毒” 등등은, 모두 실제 치료에서 완전히 부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학적 소양이 높은 중·일 의가들은 이런 이론 구축에 열중하는 공통성을 차례로 드러냈다. 전통의학이 치료경험이 풍부하고, 이른바 '완전한 이론체계'를 갖춘 지식체계를 형성된 것은 이처럼 치료기술도 알고 이론도 추구하는 엘리트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과학이 객관적 현상의 공통성을 귀납하고 그 본질을 해석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또 끊임없이 실증을 통해 이론의 발전 과정을 검증하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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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중국의 원문은 아래..

 

古方派的代表人物吉益東洞

圖1吉益東洞像

吉益東洞(元祿十五年~安永二年,1702—1773)名爲則,字公言,通稱周助。其一生所爲之奮鬥與追求的目標可以概括爲一句話:復興具有兩千餘年之歷史,但自《傷寒論》之作者張仲景死後即絕而不行的“疾醫”之道,使醫學回歸正道!在“學”與“術”兩方面,吉益東洞均表現出與衆不同的鮮明特色,故可謂古方派中最具影響的代表人物。藝備醫學會會長、醫學博士吳秀三在評價古方派諸多名人時謂:“於是等諸家間而拔其群、萃其精、爲其岱宗者,即東洞先生也。”


一、歷盡艱辛的成名之路
生於安藝廣島的吉益東洞,本姓畠山。以身爲足利家“管領”而聞名的畠山政長乃其先祖。政長的弟弟名義就,世代以金瘡、産科爲業。其四代孫義益改用自己的名爲姓,其子又將義字改爲吉;並整理家傳之方著成《換骨抄》,此即吉益姓氏以及所謂“吉益流金瘡産科”的由來。而東洞的爺爺、與《換骨抄》作者吉益助秀同輩的畠山政光後來也因仕途險惡而以醫爲業。
東洞幼時,因聞祖上乃一代名族,故欲重振其雄風。遂習兵書、馳馬弄劍,對於祖父相襲的醫業毫無興趣。年稍長,思太平時節欲以武術復興家業實屬不易,始效古人“不爲良相則爲良醫”之說,決心學醫。時年十九歲,先隨祖父的門人習吉益流金瘡産科之術。一日忽謂:“懷孕者,婦人之常也;金瘡者,外傷也。無病則無藥而可,有病則隨證治之,何分科哉?”乃從家傳之方中採擇二三有奇效者,而置其他於不顧,專心於內科之研究。“寒夜避爐,以慎其眠;蚊蟄攻身,以戒其睡”,遍閱《素問》、《靈樞》以降百家之書,至三十歲時又大有所悟:“萬病唯一毒,衆藥皆毒物,以毒攻毒,毒去體佳。”此即有名的“萬病一毒”之說。又因他極力反對當時醫家普遍習用的中國宋明醫學,所以常說:“非醫天下醫,救疾之功也不多焉;非出京師,授教之業也不弘焉。”

圖2东洞制做的偶人
為了治療眾醫之病和弘揚自己的主張,三十七歲的東洞於元文三年攜父母和妹妹來到京都,以“古醫道”爲旗號開業行醫。當此之時,恥於自己不能復興家業而隱於醫的東洞,認為不應玷污本姓,始改用同族的吉益之姓。
雖志向遠大,但現實卻是殘酷的。醫業不興旺,幾乎沒有弟子入門,僅有的一點積蓄亦被盜,所剩唯有一個“窮”字。不得已只能在店中學著做人偶、燒缽皿,賣幾個錢糊口度日,如此景象長達三年。(圖2)據森立之《遊巷醫話》記載,此時東洞的家境是“貧居陋巷,但有一爐一鍋。滿堂儘是造偶人之木屑堆積,唯座右《傷寒論》一部時時披閱。”
東洞之友邨尾氏,仕于威震四方的佐倉侯,因公事入京而順訪故友。見其潦倒之狀,故薦東洞于佐倉侯。佐倉侯乃允招其爲侍醫,邨尾大喜,告知東洞。孰料東洞卻謂:“始以子爲知我者,今識子非知我者。吾雖貧而老親在,豈降吾志污辱祖先乎?貧者士之常也,窮達者命也。假令術不行,天未喪斯道也,吾果餓死耶?窮則必有達,行道樂道,貧困何憂?”辭而不仕。
延享元年,東洞四十三歲,貧益甚。囊中空空一貧如洗,真正是“家無隔夜糧”。於是齋戒禁食七日,詣少名彥廟告曰:“爲則不敏,過志古醫道。不顧衆懼,推而行之。今也貧窮,命在旦夕。我道非而天罰以貧與?爲則知其是,而未知其非也!假令饑且死不敢更轍矣。大明神吾邦醫祖也,請垂照鑒:道非其道,速斷吾命!若推而行,則必害萬人。誅一夫而救衆,固吾之所願也。”
一日,某經商的友人過東洞寓所,見其貧而贈以金銀。東洞以日後無加倍報答之能力而謝絕之。其友謂:“余贈金於先生,非爲先生,而是爲天下萬民,不必念償還之事。”東洞始拜受。由是可見其志操高潔之一斑。在繼續靠制做偶人糊口的生活中,使其聲名大振的機遇卻突然降臨——
一日,東洞照例將自己制做的偶人送到銷售的店鋪去,適逢店主人老母患傷寒病篤,乃自薦爲其診治。臨病榻細細診看之際,得知已經帝室典醫山脇東洋診治,故索其處方觀之,謂:“當去掉石膏用之。”稍後,東洋先生來到病家,診察之後正當稍事思考時,店主人告之東洞之語。東洋先生乃額手稱歎曰:“我近日亦正在究心思量是否當去石膏,即聞其語,則今日去之。”離開病家,東洋先生即前往陋巷之中拜訪東洞。其後,店主人因老母痊愈而重謝東洋,然東洋先生卻謂:“彼時若無東洞之言,陷於誤治而不自知。全治乃彼之功也,謝金自當他受。”從此二人之交漸厚,東洞之名亦漸爲人知。正所謂:“先生名所以益顯者,東洋揚之也。”
延享四年,東洞四十六歲時,醫業已相當發達,弟子也逐漸增多,與松原維嶽、香川修庵、山脇東洋等知名醫家的交往也漸深,乃集這些共尚古醫方的同道一起研讀《傷寒論》。以松原年長而爲講主,而東洞則每每與之爭論。
寶曆元年(1751),東洞五十歲時,選《傷寒論》及《金匱要略》中所載張仲景的藥方,加以分類,編成《類聚方》公諸於世。世人由此始明古醫方的方意。然後又從中擇出173個藥方,附上論證治效,是爲《方極》。此乃其門的“方鑒”,目的在於闡明:在張仲景的藥方之外,無可取之方也。明和年間,又就當時所用藥物,推其實際功用、究其藥物之能,做成一書名《藥征》。複以問答體將自家的學問寫成《醫事或問》。另外,其弟子鶴元逸於寬永元年(1748)著《醫斷》,嚴恭敬於寶曆二年(1752)著《建殊錄》。前者述東洞的學說,後者爲東洞的治療驗案。正是因爲這些著作的流傳,東洞的學說才廣爲世人所知。一時間公卿縉紳、遠近之人或求診,或問道,雲集門下好不熱鬧。但反對其學說者亦大有人在。
寶曆十二年(1762),東洞邀門人故舊宴於京都東山,舉杯而言:“吾今年六十一也,胤子幼弱(長子猷,年13),弟子中尚無達於其道者。若大開家塾教授生徒,當有傑出之人生於其中。然資財不足,自今志於貨殖,以果此事。”從此東洞節衣縮食並經營藥材生意,數年後以所積之錢財開設一大私塾作爲醫學講習所,收留那些有遠大志向的貧窮學生,以助成其願。
東洞晚年在京都西門外購地建屋,爲速成此事以至折戟商場。明和六年(1769),以“其年既老,恐志願之不達,欲速其功,反失計劃,大亡貲財,於是百事皆壞,鞅鞅不樂。家事悉任長子猷。”並欲遊歷各地,以救患病不能來京師者。此後,多有各路諸侯聘請之事,皆辭而不就。
安永二年,東洞年七十二。九月卒然目眩、舌強不語而亡。
二、復古大旗下的醫學革新
自藤原惺窩于文祿二年(1593)初窺南京船載來的程朱之說,以往根據漢魏註疏解釋經義的學風便開始發生變化。宋儒的學說,最終成了德川時代佔據統治地位的官學。然而恰當此時,又有世稱“古學先生”的伊藤仁齋(1627—1705)出,以為體用理氣等皆爲佛老之浮辭,非聖人之教;其子伊藤東涯、弟子並河天民(1679—1718)繼之,大振其學於關西。同時,初奉洛閩學、駁仁齋,但終盡棄宋儒之說,以修古文辭爲階梯,研究經典,銳意復興聖人之學的物徂徠(1666—1728),也與弟子太宰春台(1680—1747)、服部南郭(1683—1759)、安藤東野(1683—1719)、山縣周南(1687—1752)、平野金華(1688—1733)等共同樹立起所謂復古之學的大旗,成為德川時代極具影響的一大學派。18世紀上半葉,乃是復古學派最為昌盛的時期。
在醫學領域中,當以商貿爲主要通道的文化交流開始活躍時,知識的傳播便隨之出現了從宮廷向民間的轉移。這時,代表著中國當時最新醫學水準的“宋明醫學”首先爲日本醫界普遍習用。此後,隨著復古之風的興起,日本醫界才出現了研究與信奉漢代張仲景《傷寒雜病論》的所謂“古方派”,並將前此即已形成的接受與使用宋明醫學的醫家稱之爲“後世派”。
追溯古方派的興起,當時中國醫界對於《傷寒論》的重視與研究可謂原因之一。例如始倡其說的名古屋玄医(1628—1696),在儒學復古之風興起之前,已然因為读清代喻昌的《傷寒尚论篇》而发愤研究古代医经,從而主張摒棄當時醫家所普遍習用的李朱之说,直接以仲景为师。其后,後藤艮山(1659-1733)又是在名古屋之说的影響下,认为陰陽、臟腑皆屬不足取的后世之说,而致力於研究與臨床治療密切相關的方书;並將醫學理論簡化為:“能识百病生于一气之滞留,则思过半矣。”其學說通過弟子香川修庵(1683-1755)、山脇東洋(1705-1762)而大扬于世。
古方派興起的另一重要原因,則是儒學領域復古之風的影響。例如後藤艮山在经义方面颇仰慕伊藤仁斋,遂使弟子香川修庵入其门下學習,故修庵唱“儒医一本”之说;以古医方雄视一方的儒医并河天民(1679-1718),及其弟子松原维岳(1689-1765),也是出自仁斋的门下。仁斋之学使得这些人皆致力于阐明医经之古义。而吉益东洞则是以宗徂徠之说的周南为师,一心钻研其道。他认为:“儒医虽不同也,其复古一也”;“时哉命哉复古之秋也”。又说:“不学古文辞者,不能读(傷寒、金匱)也”。足見儒學復古之風與古方派的興起具有密切的關係。
正是由於當時日本社會中的儒學與醫學存在著這樣的共性與可比性,所以東洞才將先於自己倡導使用《傷寒論》方藥的山脇東洋比作伊藤仁齋,而將自己比作後來居上的物徂徠:“我醫方譬之今之儒流,東洋伊藤仁齋也,先衆啓其端焉;吾業不敢讓,物徂徠焉。”
然而,古方派所提倡的究竟是什麽,其道理又何在呢?吉益東洞在《医事或问》中是這樣說的:
“古昔医有三,曰疾医、曰阴阳医、曰仙家医也。《周礼》所谓疾医见定病毒所在,视其毒处方取去病毒,故尽愈诸病疾苦。扁鹊仲景所为是也。阴阳医不视病之所在,唯以阴阳五行相生相尅论病,皆臆见,故非明白之治。汉之太倉公是也。仙家医炼气,或服炼丹,为人而习功同造化之事,故行者少、害亦少。葛洪、陶弘景、孙思邈等是也。……扁鹊仲景之道绝,其后未闻一书一人论疾医之道。其根源在汉之太倉公。”
概言之,東洞是將中國傳統醫學的發展歷程分為性質不同的三個流派,從時間先後的角度看,也可以說是三個階段:
其一,是出現最早的“疾醫”。在《周禮·天官塚宰》中記述當時的宮廷醫生分為食醫、疾醫、瘍醫、獸醫四種。從其掌管的治療範圍和後代醫學分科的角度看,所謂“疾醫”,大致相當於內科醫生。但在東洞眼中,“疾醫”的特點在於:沒有那麽多的理論學說,僅僅是根據疾病之所在(病毒所在),處以方藥,從而達到“取去病毒,故尽愈诸病疾苦”的目的。先秦時代的名醫扁鵲和東漢時期的張仲景,都屬此類醫家。
其二,是漢代才出現的“陰陽醫”。東洞認為:以西漢太倉公淳于意為代表的此類醫家,以及成書於該時代的今本《黃帝內經》、《神農本草經》、《難經》等等,都是“唯以阴阳五行相生相尅论病”,純屬脫離實際的“臆見”,而不是針對疾病之所在的“明白之治”。
其三,則是晉唐時期出現的“仙家醫”。此類醫家的特點是試圖通過煉氣、服用丹藥而參與天地造化(長生不死),顯然不是醫學正軌。
就這三個醫學流派而論,“仙家醫”為數不多,所以危害亦小;大行於世的“陰陽醫”,純屬空談,根本不能治病;最為寶貴的“疾醫”之道,卻因“陰陽醫”的興起而絕滅!东洞在这个框架下处理所有古代资料。例如对于《汉书·艺文志》“方技略”后的感叹性文字“有病不治常得中医”,亦解释为“汉时既疾医绝灭,特阴阳医行而有此谚耶。阴阳医之于治无益可以知矣。”
總之,他認為中國自東漢張仲景之後,“疾醫”之道已然滅絕。所以無論是中國還是日本,大行於世的都是“陰陽醫”。這些醫家大多泥於陰陽五行之鑿空之說;只知據此論說病因,而忽視診察病侯;臨床治療唯恐損元氣而多用溫補之藥,不敢使用攻擊疾病的藥物進行治療。其結果是,天下醫師既不能療疾治病;醫道傳授之業亦無法弘揚。所以必須恢復古代“疾醫”的治病之道。對此,我們既可以稱其為“復古”——因為他們的核心主張是以“疾醫之道”,即東漢張仲景使用的古方、古法取代宋以後的醫學理論與方藥;但也可稱其為“革新”——因為這畢竟是對現狀的批判與變革,且所復之古,未必就是“真古”。這種“復古”旗幟下的醫學“革新”,與歐洲文藝復興的形式與內涵,真是十分相似。
說到所復之古,是否為“真古”的問題——即用以取代宋明醫學的“仲景之學”,是否真是古代張仲景所使用的醫學理論與治療技術的問題,東洞在《寄長門縣次公書》中談到:
“僕少事于医,而医道多歧。张仲景及孙思邈、王焘者有焉,刘完素、张元素、李杲、朱震亨者有焉。其子其孙,副墨洛诵,不可枚举也。初,僕为刘张李朱之术,而病不治;乃更为王焘、孙思邈。为张仲景而犹未也。忽觉夫副墨之子洛诵之孙,扰扰相聚,屋上架屋,塞井为臼,嚮所谓仲景非真仲景。因退审察,自凿其塞者,去其架者,而始豁然见其法度备具焉。于是乎,知古今治异。乃信学于古训有获,遂好古矣。”
從中可以看出,東洞在為醫之初,同當時其他醫家一樣,學習與使用的乃是後世派所秉承的金元四大家,即所謂“劉、張、李、朱之術”。但因對治療效果不滿意,而向上追溯到唐代王燾、孫思邈,乃至漢代張仲景之學,但卻發現後人傳誦的“仲景之學”非“真仲景”!
然而何為“真仲景”呢?其實這並非僅僅是吉益東洞一個人所關心的問題。為要了解這些問題,在此不得不先對《傷寒論》的歷史做一最簡單的介紹。
    據說曾官居長沙太守的張仲景,因宗族大半死於外感病(傷寒),於是勤求古訓、博採眾方,編撰了《傷寒雜病論》。西晉太醫令王叔和取其中專論傷寒的內容,編成《傷寒論》。但直到宋代,此書並未受到醫家的普遍重視,例如唐代醫家王燾所編《外台秘要》在引用諸家有關傷寒的論說時,並未提到此書,只是在羅列治療方藥時採用了《傷寒論》中的若干方劑。所以宋代校正醫書局校刊此書時感嘆,自漢至宋八百年間無人識此。然而從宋代開始,註釋此書的醫家卻越來越多;書中按三陰三陽將外感病分為六個階段的方式,也被上升為辨證論治的體系,謂之“六經辨症”;張仲景則被尊為“醫聖”。至今,中醫界仍公認此書是歷史上第一部理、法、方、藥俱備的經典著作。
然而歷代醫家在以註釋的方式來考據與研究此書時,一直就被兩個問題所困擾。一是究竟哪些文字屬張仲景原文,哪些是王叔和等後代整理者所竄入?其二則是該書眾多條文原來的編撰次序為何?一言以蔽之:何為“真仲景”?
如果是站在史學研究的立場上看,探討《傷寒論》的原貌,無疑是極為必要和有價值的。然而無論是中國歷代的註釋研究,還是日本的古方派,他們對於《傷寒論》原貌,即所謂“真仲景”的探究,都不是出於史學目的。而是在“聖賢史觀”的驅使下,醉心於尋找那些失落的、被後世荒謬所淹沒的古代智慧。實際上,在近代社會普遍接受“進化史觀”之前,所有的人大都如此,區別只是在於遵奉的古代聖賢不同而已。例如後世派們雖然習用的是代表著中國最新醫學水準的宋明醫學,但在他們看來,這些都是源自黃帝、神農等古代聖賢的智慧與教誨。
如果是站在進化史觀的立場上看待漢代以降千百年來後人對張仲景《傷寒論》的整理、註釋,恐怕很難簡單地說是“篡改”。因為正是由於有了這些大膽的取捨與重新編排,甚至是某些新內容的竄入,才形成了一本專門論說外感病的獨立著作《傷寒論》;才使得“六經辨證”成為一個輪廓清晰的辨症論治體系。否則,《傷寒雜病論》也許永遠只是一本兼治外感與雜病的方書。甚至可以說,無論是從理論發展的角度看,還是從指導臨床治療方面講,經過“篡改”的《傷寒論》都比那個醫家心目中無比尊崇的原本更有價值。
同時還要考慮到,無論是中國的《傷寒論》研究者,還是日本的古方派的代表人物吉益東洞,他們在尋求“真仲景”的過程中,實際上都沒有任何新的史料或其他旁證可資真偽之辨別。那麽從本質上講,任何一幅後人繪製的“真仲景”圖像,難道不都是按照自己對於“理想醫學”的理解和評判標準,對於該書所做的一次新的整理嗎?然而東洞勾畫“真仲景”圖像的作業方法,確實與一般文字考據者存在著本質的不同,從而使得日本的漢方醫學中出現了一種“據症遣藥”的新趨向。
另一方面,雖然其弟子在整理東洞驗案而成的《建殊錄》凡例中說到:“先生之術,專述長沙,不自立方。雖一藥增減,必據仲景。”但又說:“而其有實驗者,宋元諸家固無論。雖俗間所傳,不必擯棄。務在於取實效,何必拘名之爲乎?故雖爲仲景方,或征之治驗而未見其效者,亦皆斤之不妄收錄。” 他自己也說過:“世俗所謂名方者,間有奇效。故醫傳之,非醫者亦傳之。不審其所出,而一時施用有驗者,相傳以爲名方也。蓋載書籍者未必佳,傳俗間者未必不佳。宜博求普問以輔其術矣。”正因如此,所以自然導致一些仰慕者在全面瞭解其“學”(復古)與“術”(實證)之後,會指責他“言行不一”。對此,東洞搬出孔子爲例,以證其合理:“有益國家之事,孔子亦非先王之法,而謂吾從衆。一概守法或泥於書籍者,不能得術之事也。”
三、以“毒”為核心的疾病觀、治療法
吉益东洞在徹底否定被其稱為“陰陽醫”的中日兩方面之醫學理論與治療體系的同時,在病因學方面提出了“万病一毒”之说;並通過“諸藥皆毒、毒即其能”,“以藥之毒攻病之毒,故疾病得除”的後續之說,將病因、病理、治療聯繫到一起,從而構建起本學派的理論體系。就“萬病一毒”的病因學說而論,一般認為這與後藤艮山“萬病生於一氣之滯留”的觀點具有某種啟承關係。但更為直接的源頭,恐怕還是在於《吕氏春秋》中有關疾病之源的論說:“至《吕氏春秋》盡數、達鬱二篇,拍節仰天而歎曰:嗟聖人之言,信而有征!是治病之大本良方、萬病唯一毒之樞機也。”。
關於“毒”的來源或成因,他是這樣解釋的:“夫人生可入於形體內者,飲食也。而守節不過,則無病體健也;失節大過,則病生羸弱也。而又其飲食不通利於二便,則糟粕留滯於內爲穢物。命之曰鬱毒,是即病也。故疾醫爲萬病,唯一毒而去其毒。其毒以汗吐下而解去,則諸病疾苦盡治焉。”同時他又說情欲妄動也可導致“毒生”。

圖3東洞手書“萬病唯一毒”
東洞在強調實證,反對說理時,大概忽略了他自己所說“萬病一毒”就是在說理,而且是“終極之理”——沒有例外。又說“疾醫”的特點是“不論其所以然”的問題,但在說明何以“萬病一毒”時,卻以飲食失節、二便不通、淤積爲毒做出了“所以然”的解釋。
東洞“萬病一毒”的病因學說,實際上與中國的金元四大家各自提出一個終極病因十分相似。尤其是和四大家中所謂“攻邪派”張子和的觀念更是如出一轍。同時代與之類似的還 有惠美三白所主張的“二毒說”——先天存在的父母之遺毒爲“胎毒”,後天得自飲食的爲“食毒”。又有“胸間的宿毒”和“腸間的水毒”之說。惠美三白的“二毒說”雖然與東洞的“萬病一毒”說相違,但同樣“弟子衆多、遠近聞名、海內病客雲集”;東洞對他的評價是:“足下天下良工,明鑒識朗”。
然而不論是中國金元四大家在病因方面分別提出的“火熱為害”、“脾胃虛損”、“邪氣入侵”、“陰血不足”,還是日本醫家的“一氣留滯”、“萬病一毒”或“二毒”,這些終極真理式的理論學說,雖然對醫家的基本思維模式、疾病觀、治療原則等具有相當的影響,但與具體的治療之術間,畢竟還有一定距離。正像龜井南冥在《我昔詩集》中所記載的那樣——理論之“說”與實際治療之所“為”並不一致:
“吉村遍宜遊京師,從吉益東洞受古醫方。既疑其說有與術矛盾者,數就質問。東洞未明辨之,或詖辭折之,或冷笑緘默,不肯質對。居七十餘日,遍宜惑亦甚,屢侍間燕,從容問曰:先生爲天下後世創造一家言,以教育多少英才,固當無所欺誣。而今所說非所爲,所爲非所說。”
然而如何將“學”與“術”結合在一起,以解決實際治療的問題呢?吉益東洞在《古书医言》卷四中说:“嚮读於《吕氏春秋》,而雖有獲於病之大本爲一毒,然未獲其治法也。故孜孜汲汲,夜以繼日,久之始獲於《傷寒論》。”
接著他又說道:《傷寒論》“是三代疾醫治萬病一毒之法也。…… 此方與《呂氏春秋》所言同爲萬病一毒。其視毒之所在,以處其方,何病患不治哉?!”
所謂“毒之所在”,也就是疾病的臨床表現。東洞認為,《史記·扁鵲傳》所言“病應見於大表”的意思就是病人的臨床症狀;“越人之爲方也,不待切脈望色聽聲寫形,言病之所在”表明以扁鵲為首的古代“疾醫”在診病與治療時,都是根據臨床症狀處以方藥,而沒有診脈之法、陰陽之論。這就是東洞所欲復興的“疾醫之道”的關鍵所在——據症施藥,不問其因。在東洞與其弟子的著作中隨處可見對此觀點的反復論說。例如:
《東洞遺稿·復木龙介书》:“如吾医术,随证而调剂,不论其因。试其事,而攘浮说。”
《建殊錄》凡例:“诸治唯从见证,不取因(病因)脉(脉状)。”
《医断》:“先证而不先脉,先腹而不先证也。”
《藥征》:“夫秦張之治疾也,從其症而不取因矣。因者想像也。以冥冥決事,秦張所不取也。”
《醫事古言》:“病應見於大表者,隨見症施治方之謂也。後世先病因,後其症候,可謂失古醫法矣。”
《古事醫言》卷二:“病應見於大表,是古今治法之規則也。非見於大表,則何以傳人?如陰陽醫,則不見於大表。理以推其因,理者無有定軌。故見一病人,而師弟相反目。無規矩準繩也。扁鵲不然,以見於大表定治法,故師弟無異。有規矩準繩也。”
然而吉益東洞究竟是如何孜孜汲汲、夜以繼日,最終在《傷寒論》中找到了“三代疾醫治萬病一毒之法”的呢?《藥徵》就是這一獨特“復古”作業的結果。
四、《藥徵》的復古作業
吉益東洞對於《伤寒论》的基本看法是:首先,此書雖然題為張仲景撰著,但張仲景只是“傳方之人”——這些方劑的來源是先秦扁鵲等“疾醫”。其二,西晋王叔和的整理,導致讹謬错乱,難辨真偽。其三,後世“以《素》、《灵》、《难经》之意释之疏之,以致方枘圆凿,后之读其书者所以益读益误也。”所以必須“先就良师学疾医之道,能通晓古今医道之变乱,然后临其书,譬犹悬明镜以见姸媸,邪正真赝不可得而掩。而后方可以见仲景之真面目矣。”以下我們就來看看東洞是如何通過《傷寒論》來探尋古代“疾醫之道”的。
《藥徵》共3卷,依主治、旁治、考徵、互考、辨誤、品考之序,分別論說了53種《傷寒雜病論》中出現的藥物。東洞在該書“自序”中對於這六項的立說依據和內容有如下解釋:
主治——“以量之多少,知其所主治也”。
旁治——“視病所在,知其所旁治也”。
考徵——“參互而考之,以知其徵”;又說:“次舉其考之徵,以實其所主治也”。
互考——“次之以方之無徵者,參互而考之”。
辨誤——“次之以古今誤其藥功者,引古訓而辨之”(此項不是每藥均有)
品考——“次舉其品物,以辨真偽”。
無論是從書名,還是從結構與內容上看,似乎都可以說《藥徵》是一本專門講述藥物知識的“本草”著作。所以往往被作爲“藥物學”著作來加以評價,以爲“此書作爲藥劑書”,“使藥的性能專一化,而不雜多。若用之適當,則其功能顯著。”但實際上該書所欲說明的問題以及其中所蘊含的深刻見地,絕非“本草”一詞所能恰當表述。事實上,站在尚古立場上的吉益東洞,在該書中所要闡明的問題與達到的目的乃是:通過對於《傷寒雜病論》中“藥物”與“病症”之關係的分析,以求在“世遠、人泯、經毀”的今世,追溯與窺知古代聖賢——扁鵲和張仲景,所謂《周禮》中所說“疾醫”的用藥真意;從而摒棄後世本草書中的虛浮不可取之論,真正把握各種藥物的“主治”。
據吳秀三所做“吉益東洞先生傳”云,此書系吉益東洞撰於明和八年(1771),此時東洞已是七旬古稀。在稱之為“南涯本”的《藥徵》傳本上,有吉益猷(南涯)於明和八年所寫“附記”稱:“家翁之作《藥徵》也,改稿凡七矣。學之久習之熟,默而識藥之功,然後漸定矣。”與作者的其他著作相較,可以說無論是從研究東洞本人的角度講,還是從對後世的影響看,《藥徵》都具有更重要的價值。
首先,在研究方法上,儘管東洞始終自我稱道是以“實驗”的方法來了解古代醫方與藥物的主治、功能的,但實際上,其真實的研究途徑乃是將《傷寒雜病論》中出現同一種“藥”的方劑加以歸納;進而在這些方劑的適用証中尋找共性。結果發現:《傷寒雜病論》各方劑的構成中之所以有某種相同的藥物,是因為這些方劑的適用對象都有某種相應的病症。東洞就是採用這樣一種具有“歸納”與“統計”意味的方法,對更加久遠、沒有“所以然”之本意說明的歷史資料進行處理,從而得出至少是能夠自洽的、有關原始本意之“所以然”的解釋。應該說,這種研究方式在古代東方社會中是不多見的。
其二,東洞對於古代聖賢用藥本意的闡釋可以概括為一句話:“有是証(症)則用是藥”。正像當代的日本學者在研讀《藥徵》時所感嘆的那樣:“啊!真了不起,這簡直就是計算機程序。”其意是說:只要將各種藥物的主治和患者的病症輸入計算機,不就可以得出處方了嗎?正是由於以東洞等人為代表之“古方派”的遣方用藥法則,比秉承中國宋明醫學體系的“後世派”更加符合日本人輕理論、重實際的性格特徵,所以十分容易被日本的漢方醫學家所接受並加以應用。這或許就是當今日本漢方醫學仍然愛用《傷寒論》之原方,不尚加減變化的歷史根源與民族性格根源。從某種意義上講,二十世紀日本對於中藥有效成分的研究風尚,實屬與吉益東洞“藥皆毒,毒即能”觀念同源而異流的產物。此外,在對後世影響方面還應注意到,日本的古方派,尤其是對於《傷寒論》的考據性研究與精神推崇,都曾對近代的中國中醫產生過一定影響。
再三,《藥徵》作者所欲闡明的問題雖然僅僅是“藥物的主治”,並告知醫者:據此治病,才能效如桴鼓。但其研究方法似乎還為我們研究古代方劑如何產生,提供了一條思考路徑。
方劑,通常是指針對某種疾病、由多種藥物組成的治療處方。傳世的中醫著作,有相當一部分是方書,記錄的方劑成千上萬。就方劑而言,自然有其實用價值和立足於此的種種研究,但對於史學家和理論研究者來說,最令他們感興趣的,無疑是這些方劑是如何產生的?構建一個方劑所依據的理論基礎是什麽?為要討論這個問題,首先需要對方劑的發展歷史及有關組方的理論稍加介紹。
中國傳統醫學的方劑——即以複數藥物組成治療某種疾病之固定處方的方法起源於何時,無從稽考。據現存最早的目錄學著作《漢書·藝文志》的著錄可知,西漢時期有《五藏六府十二痺方》等十餘種方書,計二百七十餘卷在世。但這些方書均早已亡佚,致使後人無緣窺其螞跡蛛絲。至東漢末年,有據稱是長沙太守張仲景所著《傷寒雜病論》問世,並因西晉太醫令王叔和的整理、宋代校正醫書局的校勘而流傳。因而對於宋代以來的醫家來說,雖然能夠在今本《黃帝內經》和宋以前的醫家著作中見到一些早於《傷寒雜病論》或與之同時代的方劑,但由於在他們看來,這些方劑僅僅是方劑——沒有體系可言,所以通常都是將經王叔和整理而成的《傷寒論》奉為“方書之祖”。近代以來,通過考古發掘得到一些早於《傷寒雜病論》的古醫書,其中尤以1973年湖南馬王堆漢墓出土的帛書《五十二病方》載錄醫方最多。這些較為原始的方劑,固然有彌足珍貴的史學研究價值,但對於注重實用的臨床醫家和研究方劑之“體系構建”的當代學者來說,其目光依然聚焦在所謂“理、法、方、藥”俱備的《傷寒論》上。
組方理論——即何以要用這些藥物組成一個方劑來治療某種疾病?在宋以前的方書中基本沒有說明。醫學理論著作中,只有後人竄入今本《黃帝內經》的“至真要大論”談到方劑的構成原理,即眾所周知的“君臣佐使”之說:
    君一臣二,製之小也;君一臣三佐五,製之中也;君一臣三佐九,製之大也。
這裡只有“君”、“臣”、“佐”,未言“使”。另有一句提到“使”,但又未言何谓“佐”:
主病之謂君,佐君之謂臣,應臣之謂使。
此外還有一段比較長的文字,也提到“君”、“臣”:
氣有多少,病有盛衰,治有緩急,方有大小,願聞其約奈何?岐伯曰:氣有高下,病有遠近,証有中外,治有重輕,適其至所為故也。大要約:君一臣二,奇之製也;君二臣四,偶之製也;君二臣三,奇之製也;君二臣六,偶之製也。故曰,近者奇之,遠者偶之;汗者不以奇,下者不以偶;補上治上製以緩,補下治下製以急。急則氣味厚,緩則氣味薄,“適其至所”此之謂也。病所遠而中道氣味之者,食而過之,無越其制度也。是故平氣之道,近而奇偶,製小其服也;遠而奇偶,製大其服也。大則數少,小則數多,多則九之,少則二之。奇之不去則偶之,是謂重方。偶之不去,則反佐以取之。所謂寒熱溫涼反從其病也。
總之,後人大概就是依據這些文字歸納出“君臣佐使”之說,並稱其為組方理論。甚至讚揚說:“即以現在配製方劑的水平來衡量,它不僅毫無遜色;甚至說某些配方,還不曾達到這樣高的水平。”然而姑且不論這篇涉及“君臣佐使”組方理論的“至真要大論”的撰寫年代究竟要晚到何時,關鍵是這一理論對於客觀存在的無數方劑來說,究竟是“中醫方劑組成法則”,抑或只是空中樓閣?例如第三段引文中說“下者不以偶”,而《傷寒雜病論》中的峻下之劑“大承氣湯”正是由偶數藥物組成;又說“奇之不去則偶之”,則奇偶之分也就沒有什麽意義了。再者,上述三段引文中只有一處提到“使”的定義——“應臣之謂使”,且不說這與通常所謂“使藥的作用是引導君藥直達病所”的解釋不符,還應看到:實際上“引經藥”的使用是金元時期才出現的事情。所以可以認為,無論是“君臣佐使”說本身,還是“大、中、小”和“奇、偶”之製中的君藥、臣藥、佐藥的數目,無非都是比附人間社會的產物。然而當代學人卻認定這就是《傷寒雜病論》諸方劑制定時所依據的法則。例如:
麻黃湯的組織
           君—麻黃(發汗解表)
           臣—桂枝(助麻黃發汗解表)
           佐—杏仁(助麻黃平喘)
           使—甘草(協和諸藥)

    調胃承氣湯的組織
           大黃 君—清熱攻里
                使—自入腸胃
           芒硝 臣—咸寒軟堅潤燥
           甘草 佐—緩和硝黃峻瀉,有調胃,潤燥作用。
換言之,一個方劑中不管有幾種藥,都會被分列到君、臣、佐、使四項之下;反之,這四項也必須有對應的藥物,哪怕只有兩種或三種藥。
    實際上,較為注重客觀事實的學者對於這種論說雖然大多採取皮里春秋——不加直接否定的態度,然而他們在論說方劑學理論的發展歷史時,雖然可能會提到今本《黃帝內經》中的“君臣佐使”說,但基本上是認為要到宋代以後才有真正的方劑理論與實際應用。如郭天玲、朱華德主編的《現代中醫藥應用與研究大系·第三卷 方劑》是這樣說的:
有關方論及方劑學的研究始於何時,有何進展,現代醫家亦有所論及。有的認為金代成無己首開方論先河,他所撰《傷寒明理藥方論》對扭轉宋以前注重醫方的臨床應用而輕視醫方理論探討的傾向有著重要的影響;有的認為明代張景岳把方劑按功效進行分類,把眾多方劑統轄在多種治法之下,使治法成為方劑學研究的重要內容,從而使方劑擺脫了附屬地位,形成獨立的學科。故認為方劑學形成於明代,以張景岳的“醫方八陣”為代表。徐寶圻等認為,北齊徐之才有十劑之說,以後也有按治法分類的,但真正立足於方劑本身的特點,按功效進行分類,形成外部框架,並有方義闡釋等方劑的理論內核,則是清代汪昂的《醫方集解》,該書基本具備了方劑學體系的完整結構,是方劑學成為專門學科的奠基之作。
需要說明的是,即便是在有了“方論”或“方劑學”的時代,也不能認為所有新方劑的產生都是按照一定的理論制定的。而在此之前,必定是先有方,後有論。這也就是本文何以要說,吉益東洞對於《傷寒論》的藥物研究,“為我們研究古代方劑如何產生,提供了一條思考路徑”的原因所在。按照東洞歸納的結果,方劑中之所以使用某種藥物,必定是因為有相應的症狀存在。我們不妨以“甘草”為例,看看兩種解釋中,哪方更為合理。
首先,東洞通過歸納《傷寒論》中使用甘草的方劑,認定甘草的功能是“主治急迫,故治裏急、急痛、攣急。而旁治厥冷、煩躁、衝逆之等”;然後以極具說服力的邏輯推論,從兩方面批駁了甘草在方劑中的作用為“解毒”、“調和諸藥”的後世之見,即:
所謂“毒”,就是藥物的“能”。故曰:“若解其毒,何功之有?”
如果是為了“調和諸藥”,那就應該所有的方劑中都用。然“長沙方中無甘草者居半”——即為何有的方劑中用,有的不用?
除了這種邏輯性的辨說本身就具有極強的說服力外,還可以借用現代藥理研究的結果作為旁證。例如柯雪帆主編《現代中醫藥應用與研究大系·第四卷 傷寒及金匱》中,對芍藥甘草湯有如下論說: 
本方僅芍藥、甘草二味相配,酸甘化陰,柔肝舒筋,和營通絡,緩急止痛,原為傷寒誤汗導致腳攣急、不能伸展之証而設。近代多用於諸種疼痛……。
芍藥所含的芍藥甙有解痙作用,據分析是對平滑肌的直接作用。……又有鎮靜、鎮痛與抗驚厥作用,它對中樞神經系統的不同部位,均顯示一定的抑制作用。芍藥的解痙作用也表現在血管平滑肌上,有擴張外周血管的作用……故血壓也輕度下降,這與廣泛的中樞抑制作用相合,用於有明顯中樞興奮症狀的陰虛陽亢的高血壓患者常有良效。(還有擴張冠狀動脈、抑制血小板聚集、抗菌、抗炎、改善肝功的作用)
甘草的主要成分是甘草甜素、甘草次酸、各種黃酮及甘草糖苷等,具有腎上腺皮質樣作用、罌粟鹼樣的鎮痙作用、非對抗性β受體樣作用和鎮痛、抗潰瘍、鎮咳、解毒等作用。
本方治療骨骼肌疼痛的主要成分為芍藥皂甙、甘草皂甙及芍藥配質酮,其作用原理各不同。有研究指出,本方能抑制由於交感神經興奮引起的回腸收縮,其中芍藥為突觸前抑制,甘草為突觸後抑制作用。
“近代多用於諸種疼痛”與《藥徵》認定甘草“主治急迫,故治裏急、急痛、攣急”相吻合。儘管該書的作者首先是站在傳統中醫的立場上,以“酸甘化陰,柔肝舒筋,和營通絡”來說明何以芍藥、甘草二味相配,則具有緩急止痛的功能,但這種解釋畢竟是缺乏說服力的——如果將其中的芍藥換成酸味更強的烏梅,其主治必然要發生根本的變化。而有效成分及其藥理作用的研究,不僅說明了甘草何以能夠治療“急迫”、“諸痛”;而且對於所謂“協同作用”,也說清了所以然——即兩種藥物的藥理作用不同,分別作用於神經的“突觸前”與“突觸後”。
    有意思的是,無論是沿著吉益東洞的思路,還是根據有效成分及其藥理作用的研究,必將殊途同歸地認為與證明:以傳統的性味理論解釋某種藥物的功能,是沒有實質性意義的。其共同之處在於,兩者都是站在實證的立場上。所以當代日本的醫史研究者賦予以東洞為代表的古方派極高的評價,認為他們所採用的乃是實證的科學態度與研究方法。而兩者的不同則在於,身處古代的吉益東洞所採用的是邏輯思辨、歸納的方法;而當代學者則有可能利用現代科技手段,闡明某種生藥是通過其中的何種成分、如何實現其作用的。

現代所說的中醫方劑學,除有關劑型的論說外,主要就是討論組方理論——即構成一個方劑之藥物的配伍問題。所以除了“君臣佐使”說外,早期的藥物學著作《神農本草經·敘錄》中就藥物配伍宜忌問題所提出的“七情和合”說,也常常被作為重要的方劑學理論。所謂“七情和合”,是說藥物除“單行”(單獨使用)外,則存在著“相須、相使、相畏、相惡、相反、相殺”的關係。其中的“相須”、“相使”,都是說兩種藥物的協同、配合關係。歷史上曾有一些以《藥對》為名的著作,就是專門講述這種配合用藥的。由於《傷寒雜病論》中某兩種藥物經常出現在一些方劑中,所以後人認為此即“對藥”。如前引柯雪帆主編《現代中醫藥應用與研究大系·第四卷 傷寒及金匱》中,即以“仲景藥對選要”為題,專門討論了這一問題。我們仍以芍藥和甘草為例,看看該書是如何說的。
1、配伍意義
    芍藥微酸微寒,甘草甘平,兩藥相配有酸甘化陰之功。酸甘化陰的作用是多方面的,一是化生津液、血液。二是平肝緩急,抑制肝氣橫逆、陽動太過,這是陰的功能;治療急迫疼痛、肌肉痙攣,這也是陰的功能。因而酸甘化陰有平肝、柔肝、緩急、止痛的作用。三是和營止汗。營氣與衛氣相對而言屬於陰,性能內守。恢復營陰的內守功能,可以達到止汗目的,也屬酸甘化陰。四是柔肝健脾。芍藥柔肝,阻止肝氣犯脾,甘草能和中健脾,芍藥甘草相配是調補脾陰的基本藥物。凡此四者,皆可以酸甘化陰概括之。
2、仲景方例(略)
3、 後世論述與應用
成無己《註解傷寒論》中註釋芍藥、甘草時就指出:“酸甘相合,用補陰血。”
張元素在《醫學啟源》中說:“若惡寒腹痛,加肉桂一分,白芍藥二分,炙甘草一分半,此仲景神品藥也。”
《丹溪心法》記載:“凡痢疾腹痛,必以白芍藥、甘草為君。”
《藥品化義》中說:芍藥“同炙甘草,為酸甘相合,調補脾陰神妙良法。”
《中藥研究文獻摘要》指出,芍藥苷與甘草有效成分有協同作用,甘草能鎮靜,抑制神經末梢,而芍藥能對疼痛中樞起鎮靜作用。兩者合用,效果更好。
在“配伍意義”中,“五味”說被發揮到了極致。然而正像在討論“芍藥甘草湯”時已經提到的那樣,這個理論經得起推敲嗎?酸甘化陰,如果不用甘草,改用其他甘味藥,或是糖;不用芍藥,改用其他酸味藥,或醋,能否起到如是治療效果呢?如果必用芍藥、甘草,則必定是其中有某種特定物質。當然古人不可能知道究竟是什麽物質,而近代科學則可以知道。
其次,作者只能“仲景方例”,並無仲景論說。因而究竟是張仲景已將芍藥與甘草作為“對藥”,抑或僅僅是後人的闡發?不知。
從“後世論述”中不難看出,一是無理論性解釋——只是承認與強調“有效”;而有理論性解說時,則只能是依據“五味說”,而其來源只能追溯到宋代成無己的《註解傷寒論》。觸及實質的解釋,同樣還是有效成分及藥理作用的現代研究。
問題到此並沒有結束,現代中醫樂於用科學研究的結果來論證古人的正確,但這並不足以弄清古人是如何獲得如此知識的。類似芍藥與甘草——分別作用於神經末梢與中樞,協同配合而實現良好止痛功能的精妙配合,還有許許多多。在沒有確切的資料說明這些知識產生時之真實過程的情況下,我們只能推測是源於經驗的積累。另外,也不能要求現代的中醫在實際治療中依據現代科學來思考問題——因為如果這樣就不是中醫了。所以他們還得使用酸甘化陰、柔肝、緩急等理論與概念。因為性味、陰陽、臟腑、虛實等中醫的概念已然構成了一個獨立的完整體系。只有如此,他們才有可能靈活地運用這些藥物與理論,去處理病人。
    在以上的論說中,多次涉及到“甘草”這味極為普通的藥物。為使讀者能夠通過這個十分典型的例子,完整地了解吉益東洞的作業方式,故將《藥徵》中有關甘草的解說文字抄錄於下:
甘草:主治急迫也。故治裏急、急痛、攣急。而旁治厥冷、煩躁、衝逆之等。諸般急迫之毒也。
考 徵
芍藥甘草湯証曰:腳攣急。
甘草乾姜湯証曰:厥、咽中乾、煩躁。
甘草瀉心湯証曰:心煩不得安。
生薑甘草湯証曰:咽燥而渴。
桂枝人參湯証曰:利下不止。
  以上五方,甘草皆四兩。
芍藥甘草附子湯証不具也(說在互考中)。
甘麥大棗湯証曰:藏躁,喜悲傷欲哭。
  以上二方,甘草皆三兩。
甘草湯証曰:咽痛者。
桔梗湯証不具也(說在互考中)。
桂枝甘草湯証曰:叉手自冒心。
桂枝甘草龍骨牡蠣湯証曰:煩躁。
四逆湯証曰:四肢拘急、厥逆。
甘草粉蜜湯証曰:令人吐涎,心痛發作有時,毒藥不止。
  以上六方,甘草皆二兩。
  右八方甘草二兩、三兩,而亦四兩之例。
苓桂甘棗湯証曰:臍下悸。
苓桂五味甘草湯証曰:氣從小腹上衝胸咽。
小建中湯証曰:裏急。
半夏瀉心湯証曰:心下痞。
小柴胡湯証曰:心煩;又云:胸中煩。
小青龍湯証曰:咳逆倚息。
黃連湯証曰:腹中痛。
人參湯証曰:逆搶心。
旋覆花代赭石湯証曰:心下痞鞕,噫氣不除。
烏頭湯証曰:疼痛不可屈伸;又云:拘急不得轉側。
  以上十方,甘草皆三兩。
排膿湯証闕(說在桔梗部)。
調胃承氣湯証曰:不吐不下,心煩。
桃核承氣湯証曰:其人如狂;又云:少復(腹)急結。
桂枝加桂湯証曰:奔豚氣從少腹上衝心。
桂枝去芍藥加蜀漆龍骨牡蠣湯証曰:驚狂起臥不安。
  以上五方,甘草皆二兩。
  右歷觀此諸方,無論急迫。其他曰痛、曰厥、曰煩、曰悸、曰咳、曰上逆、曰驚狂、曰悲傷、曰痞鞕、曰利下,皆甘草所主,而有所急迫者也。仲景用甘草也,其急迫劇者,則用甘草亦多;不劇者,則用甘草亦少。由是觀之,甘草之治急迫明矣。古語曰:病者苦急,急食甘以緩之。其斯甘草之謂乎?仲景用甘草之方甚多,然其所用者,不過前証。故不枚舉焉。凡徵多而證明者,不枚舉其徵,下皆傚之。
互 考
甘草湯証曰:咽痛者可與甘草湯,不差者與桔梗湯。凡其急迫而痛者,甘草治之。其有膿者,桔梗治之。今以其急迫而痛,故與甘草湯;而其不差者,已有膿也,故與桔梗湯。據此推之,則甘草主治可得而見也。
芍藥甘草附子湯,其證不具也。為則按:其章曰,發汗病不解,反惡寒。是惡寒者附子主之。而芍藥甘草則無主証也。故此章之義,以芍藥甘草湯腳攣急者而隨此惡寒,則此證始備也。
為則按:調胃承氣湯、桃核承氣湯俱有甘草,而大小承氣湯、厚朴三物湯皆無甘草也。調胃承氣湯証曰:不吐不下心煩,又曰:鬱鬱微煩,此皆其毒急迫之所致也。桃核承氣湯証曰:或如狂,或少腹急結,是雖有結實,然狂與急結,此皆為急迫,故用甘草也。大小承氣湯、厚朴三物湯、大黃黃連瀉心湯,但解其結毒耳,故無甘草也。學者詳諸。
辨 誤
陶弘景曰:此草最為眾藥之主。孫思邈曰:解百藥之毒。甄權曰:諸藥中甘草為君,治七十二種金石毒,解一千二百般草木毒,調和眾藥有功。嗚呼!此說一出,而天下無復知甘草之本功,不亦悲哉?若從三子之說,則諸凡解毒,唯須此一味而足矣。今必不能然,則其說之非也,可以知已。夫欲知諸藥本功,則就長沙方中,推歷其有無多少,與其去加,引之於其證,則其本功可得而知也。而長沙方中無甘草者居半,不可謂眾藥之主也,亦可以見已。古語曰:攻病以毒藥。藥皆毒,毒即能。若解其毒,何功之有?不思之甚矣,學者察諸。夫陶弘景、孫思邈者,醫家之俊傑,博洽之君子也,故後世尊奉之至矣。而謂甘草眾藥之主,謂解百藥之毒,豈得無徵乎?考之長沙方中,半夏瀉心湯本甘草三兩,而甘草瀉心湯更加一兩,是足前為四兩,而誤藥後用之。陶弘景蓋卒而見之,謂為解毒藥也。嗚呼!夫人之過也,各於其黨。故觀二子之過,斯知尊信仲景之治矣。向使陶、孫知仲景誤藥後,所以用甘草與不,比改其過。何也?陶、孫誠俊傑也。俊傑何為文其過乎?由是觀之,陶、孫實不知甘草之本功也。亦後世之不幸哉。
東垣李氏曰:生用則補脾胃不足,而大瀉心火;炙之則補三焦元氣,而散表寒。是仲景所不言也。五藏浮說,戰國以降。今欲為疾醫乎,則不可言五藏也。五藏浮說,戰國以降,不可從也。
品 考
甘草:華產上品。本邦所產者,不堪用也。余家唯剉用之也。

繼《藥徵》之後,東洞的弟子村井杶又編撰了《藥征續編》。據吉益猷為該書所做之序介紹,村井“肥後人也,篤信吾先考東洞翁。治舊屙,起廢疾,名振西海。”《藥徵續編》所考訂的藥物計有88種,其研究方法與編寫體例都是仿照業師。以開篇第一種藥物“赤石脂”爲例,通過歸納《傷寒雜病論》中使用赤石脂的三個方劑的共性,而認爲其主治爲:“水毒下利,故兼治便膿血。”更加有意思的是其“互考”條下對“烏頭赤石脂丸”的種種分析。要點如下:
互考:烏頭赤石脂丸證不具,但云治心痛徹背,背痛徹心者。雖然,此方豈惟治心背徹痛乎?後世誤載之《金匱要略》“心痛病”篇內,故世醫皆以爲但治心痛之方也。杶按:此方本當在六經病內某證條下,而治心痛徹背、背痛徹心者矣。今詳前後之條及病證方法,蓋厥陰病蚘厥,心痛徹背、背痛徹心,下利惡寒者主之。當是同甘草粉蜜湯、大建中湯等在烏梅丸之前後矣。《外台秘要》第七“心背徹痛方”內曰:仲景《傷寒論》心痛徹背、背痛徹心,烏頭赤石脂丸主之。小注云:出第十五卷中。然則是本《傷寒論》厥陰病篇內方,而必有前後之證存矣。何以言之?則蜀椒治蚘厥,幹薑治下利腹痛,烏頭、附子並治四肢厥逆,赤石脂惟治下利。由此觀之,此方豈惟治心背徹痛乎?余嘗疑烏梅能治蚘,故蚘厥心痛徹背、背痛徹心,則此方不可無烏梅矣。然則烏頭是烏梅之誤矣乎?凡仲景之方,無烏頭附子並用者,則益知烏頭是烏梅之誤矣。
這段“互考”中所要說明的主要是這樣一些問題:
1、此條文字原本應在有關“六經病”的論說中,後人將其編排在《金匱要略》“心痛病”下是不對的。
2、之所以不對,是因爲通過該方劑的藥物構成分析,可知該方並非僅僅是治療“心痛”;而是應該主治蛔蟲病引發的“心痛徹背、背痛徹心”。
3、在此基礎上進一步指出:既然是主治蛔蟲證引發的心痛,就應有主治此病的烏梅;而且縱觀張仲景的所有處方,沒有同時使用烏頭、附子的例證,所以更加認爲方中烏頭當是烏梅之誤。
需要說明的是:烏頭、附子本是同一種植物塊根的不同部位。儘管村井並沒有從這一角度分析兩種藥物不必同用,但這一點也同樣可以支援他的觀點。

總之,《藥徵》可以說是吉益東洞著作中最具影響的一部。據說享名著之譽的淺田宗伯《古方藥議》,即是從《藥徵》獲得啟發而做。無論是贊成東洞學術主張者,還是反對者,大多會充分肯定此書的價值,並同時指出其偏激的一面。例如篠島宗恕《醫聖堂雜話初編》謂:“初學者宜熟覽吉益東洞子之《藥徵》。欲解仲景方意,非此書難以速明。東洞之心血,唯止於此《藥徵》。然闡說一己之識見多有偏頗。當取捨,不可一概信用。”並不贊成東洞醫說的考證學派泰斗多紀桂山在《時還讀我書》評價:“東洞之《藥徵》乃有識見、有用之書也。”其門人平野重誠(1790-1867)亦在其所著《一夕醫話》中稱讚東洞,注目於歸納眾方以知藥物效能概略,是“最大的發明”,同時也有許多批評之語。
五、《醫斷》掀起論爭風波
吉益東洞的門人鶴元逸於延享四年(1747)編集東洞醫說為《醫斷》,但未刊而身亡。其後同門者中西惟忠繼之,並在最後增加了“攻補”、“虛實”兩節自己的著述,1759年刊行,1809年再刊。《醫斷》的刊行,先是引出了畑黃山(1721-1804)著《斥醫斷》攻擊東洞之說;又由此引出東洞門人田中榮信於寶歷十三年(1763)著《辯斥醫斷》詰問之。此外還有堀江道元著《辯醫斷》(1790)、佚名者著《医事客难》等對《醫斷》論點持反对意見的著作;以及木幡伯英的《斥醫斷評說》(1804)、矢田部常德的《击蒙编》、佚名者之《续医事客难》等支持東洞觀點的著作。同時,東洞本人也針對因《醫斷》引發的種種議論,於明和六年(1769)刊行《醫事或問》,力圖進一步闡明自己的主張,一掃世人的誤解。
那麽這本引發了一場被後人稱之為“醫斷論證”風波的著作,究竟說了些什麽呢?該書自“司命”開始,繼之為死生、元氣、脈候、腹候、臟腑、經絡、引經報使、針灸、榮衛、陰陽、五行、運氣、理、醫意、痼疾、素難、本草、修治、相畏相反、毒藥、藥能、藥產、人蓡、古方、名方、仲景書、傷寒六經、病因、治法、禁宜、量數、產蓐、初誕、痘疹、攻補、虛實,共計37個小標題。其主要內容如下。
司命: 從斥後人妄解扁鵲所言“司命”之意,引出;醫家的職能是“掌疾”——只能治病,而死生自有其命(天命)的觀點。
死生: 承前,仍論“死生者,命也”。
“唯因疾病致死,非命也。毒藥所能治已。蓋死生者,醫者所不與也;疾病者,裔之所當治也。”
“執古之方,體今之病,能合仲景之規矩而死者,命也。質諸鬼神,吾無慚愧爾。”
“世醫動輒預定其死生,彼其意謂斃於吾手,則害其名矣。”
“故既眡其死,猶且盡吾術,以望其或生,古之道也。”
元氣: “元氣之說,聖人之所不言,六經莫有焉。蓋自漢儒創下,下至唐宋大盛,遂為醫之恆言。”
並進一步分析:元氣既然是先天之氣,又怎麽會虛衰呢?又怎麽能補呢?如果說雖年齡增長出現了旺衰之變化,這乃是“天地之道,萬物之常也。非人力之所能挽回矣”;如果本當強壯,卻出現了衰弱的人,那必定是“有所抑遏”,只要“除其所抑遏者,則自復其常矣。”
脈候: 從脈如人之面相,各不相同為出發,以為只有知道其平時的脈象,才能說何為“病脈”。但能知道其平時之脈者,不過十之一二,所以也就無從判斷某人的脈象是不是“病脈”。因而東洞先生總是教誨:“先證而不先脈,先腹而不先證也。”······“謂五動或五十動。候五臟之氣者,妄甚矣。如其浮、沉、遲、數、滑、濇,僅可辨知耳,三指舉按之間,焉能辨所謂二十七脈者焉?”
腹候: “腹者有生之本,故百病根於此焉。是以診病必候其腹。外證次之。”
臟腑: “要皆非治疾之用矣。”
經絡: “無用乎治矣,是以不取也。”
引經報使: 本草說的頭頭是道,似乎可以為據,然而“若其如此,誰失正鵠?然而不可以此治病,則其為牽強可以知已。”
針灸: 針灸並非無效,“唯除本斷根為難而已。如痼毒,灸之則動,動而後攻之易治。故針灸亦為一具,而不必專用。亦不拘經絡分數。毒之所在,灸之、刺之,是已。”
榮衛: “亦理而已,非疾醫之用也。不可從矣。”
陰陽: “陰陽者,天地之氣也,無取於醫矣。”朱丹溪陽有餘,張景岳陰有餘之說“穿鑿甚矣。”
五行: “《素問》、《難經》欲由是以總天下之重理,窮人身之百病。···“今執其說,施之匙術,則致謬千里。”
運氣: “要是陰陽家之言,奚取於疾病醫乎?”
理: “理本非可惡者也,惡其鑿焉耳。”····“故吾黨論其已然者,不論未然者,又不論其所以然者。蓋事理相依不離者也。故事為而得之,理默而識之。”
醫意: “醫意之說一出,而世之狡兒以為口實。”····“蓋醫之為道,自有一定法,何鑿推妄行之為,其如是也。”
痼疾: 難治無他,“方不得法也。”····“彼已不能治,則雖千百人中起一人,不亦善乎?”此處有自相矛盾處——前面說痼疾難治只是因為方不得法,換言之,只要方得其法,就沒有治不好的病了。但後面又說,千百人中起一人也是好的。豈不矛盾?
素難: 《素問》、《靈樞》“其中間有古語可法者。”《難經》“其言理最勝,故害道亦多。考之《扁鵲傳》,亦唯偽作而已。”
本草: 對於本草書的基本評價是“妄說甚多,不足以徵也。”但又不可廢,“宜擇合於仲景法者用之。”其他長生、補氣、美顏色之說,都是後世服食家說攙入本經。
修治: “後世修治之法甚煩。”····“去酷烈之本味、偏性之毒氣,以為鈍弱可狎之物,何能除毒治病哉?蓋毒即能,能即毒。製以益毒則可也,殺毒則不可也。”
相畏相反: “甚無謂也。古人製方,全不拘於此。”
毒藥: “藥者,草木偏性者也。偏性之氣皆有毒。以此毒除彼毒耳。”(引古書“毒藥”之說)“後世自道家之說混於疾醫,以藥為補氣養生之物,不知其為逐邪驅病之設也。
藥能: “諸家本草所說藥能,率多謬妄。故先生壹皆考信於仲景氏云。參觀其方,功用可推也。今舉本草所載,不合仲景者一二:如人蓡治心下痞鞕,而彼以為補氣;石膏已渴,而彼以為解熱;附子逐水,而彼以為溫寒。其相齟齬者大抵為爾。先生別撰《藥徵》以詳之,故不贅於此。”
藥產: “其土之所生,性之所稟,不可不詳也。”
人蓡: 中國、韓國進口者皆非古——味道應苦,而現在多浸以甘草水故甘。其他則是批評亂用,及認為人蓡補虛之謬。
古方: “方者莫古於仲景。而仲景為傳方之人,非作方之人也。”
先知方用,然後可知藥能;不知藥能,則方用亦不可知也。
“況方意不可解者,甚多矣。”
千金、外台,可取者幾方而已。
名方: “載書籍者未必佳;傳俗間者,未必不佳。宜博求普問,以輔其術矣。”
仲景書: 王叔和之加工,後人之加工。註釋多牽強。
傷寒六經: “《傷寒》論六經,非謂病在六經也,假以為紀也。”
病因: “非謂無之也。言知之,皆相像也。”“故先生以見証為本。”這就是仲景之法,例如:“傷寒大煩渴,中熱大煩渴,皆白虎湯主之。是雖異其因,而方則同矣。可見仲景從証不拘因也。”
治法: “治有四,汗吐下和是也。”用藥→瞑眩→毒去,是仲景法也。
禁宜: 古無此說,不必。
量數: 古代所用“甚密也。”今不可審。現今用量甚少,且二煎,何用?
產蓐: 習俗中有益者從之,有害者當除之。產後不睡、參芪補養、妊娠腹帶,皆不可取。
初誕: 務去胎毒,不宜早乳。不可補。
痘疹: “治法以除毒排膿為主。如補瀉二法,不知者之所立耳。”
攻補: “醫之於術也,攻而已,無有補矣。”“攻病以毒藥”;“養精以榖肉果菜”。
虛實: 據《內經》“邪氣盛則實,精氣奪則虛”立論,言有病即是“實”。又言:“藥者偏性之毒物耳,是以雖能拔邪氣而不能補精氣也。”

通過上述37個小標題下給出的核心觀點的提要式介紹,可以看出吉益東洞實際上是將中醫基礎理論中的核心概念和相關理論,如臟腑、經絡、陰陽、五行,以及脈診方法、本草著作、醫學經典等,都徹底否定了。在批判的同時,透過司命、死生、元氣、毒藥、藥能、治法、初誕、痘疹等章節,可以看出東洞之流所提倡的乃是:死生有命,醫者的職能只是用毒藥去除其病邪;即便是產婦、初生胎兒或患了痘疹的小兒,也都要堅定不移地除去體中的毒邪,沒有“補法”可言。
面對如此偏激之詞,《斥醫斷》在“緒言”中將自己的意見概括為:“余讀鶴氏所編吉益子《醫斷》,廢書而歎曰:可爲太息者三,可爲流涕者二;其佗背理而傷道者,難徧舉矣。”這可嘆息者三、可流涕者二,即:
1、夫醫雖小道,其精理妙用,非聖人不能肇修之也。是以古今醫流,雖有卓識俊才逈(辭源亦無,僅有迥)出於人者,然其論辨取捨,一皆折衷於經,而終不能更其轍也。人命所係,至重綦大,豈可不慎哉!而彼書也,斷然擯醫經、棄陰陽、變古今不移之道,而異其端矣。嗚呼,此言之行也,後將不勝其弊矣。可爲歎息者一也!
2、雖以仲景明敏,猶質信於《素問》、《陰陽大論》。彼書雖稱取方于仲景,然取捨任意,加以妄說。謂人參無補,而治心下痞鞕;附子非溫,而逐水氣。然則仲景何不舍人參用枳實,代附子以甘遂乎?可謂無稽之言矣。可爲歎息者二也。
3、夫政有王霸之別,吏有循酷之異,醫道亦然。彼書論術甚率易,分證尤忽略,不求標本,不究病因,有攻而無補矣。譬猶李斯、商鞅之術郅都杜周之治。如此而不敗者幾希也。可大息者三也。
4、雖死生有命,醫事所關亦大矣。原治術之得法以回生,與失宜以速死,則可以知之矣。吉益子謂死生醫所不與也,此言之弊,終令庸愚者視人死如風花。籲!民病將疇依。可爲流涕者四也。
5、其最勝悲者,初誕嬰兒不辨稟賦渥薄,一切攻擊之施。古今經法,置而不論;臆斷所是,無少顧疑。至痘疹之治,慘刻益酷,可不謂忍乎。可爲流涕者五也。
因而“不可不辨也”,於是乃作《斥醫斷》。有意思的是,縱觀雙方的論說方式,同樣都是廣徵博引古代文獻、聖賢之語為依據,最終只能是各自張揚自己的觀點。
十分有意思的另一點是在平安醫士法眼武川幸順所撰“題斥醫斷後”中,將古方派思想的根源歸罪於儒醫。在他看來,儒醫的問題在於紙上談兵而缺乏實踐經驗。因見《書經》中有“藥不瞑眩,厥疾弗瘳”之語,所以東洞之流的儒醫們便大唱毒藥攻疾,務令病人出現“瞑眩”之狀,才是配得上稱之為“治療”的治療。他譏諷《醫斷》的作者鶴元逸為:“白面醫生,學而未試。其藥不售,終日兀坐,與書爲仇!”這種將勇猛攻疾的治療方法,與溫文爾雅的儒生聯繫在一起的評價,確實可助我們從不同的角度來觀察與理解“儒醫”。可資比較的例子是,就學識素養而言,中國的“金元四大家”都可納入儒醫的範疇,但其醫學主張卻截然不同。李杲認為胃氣就是人的元氣,各種疾病大多因脾胃損傷而起,所以治療以“補土(脾胃)”為主,被稱為“醫中王道”;朱丹溪認為既然疾病是因陰陽失衡所致,而人體又是“陽常有餘,陰恆不足”,所以主張通過滋補陰血以達到陰陽平衡,這些似乎都很符合儒家學問的特點。然而同樣具有良好儒學素養,並以《儒門事親》作為自己著作名稱的張子和,卻認為“疾病”並非人身固有之物,所以治病無非就是攻去其“邪”,因而只能通過汗、吐、下三種方法除去附著在人體上的疾病,哪有“補法”可言?
又如袁嘉裕(栎山)針對東洞所倡毒藥攻疾、瞑眩疾去、死生有命等,有如下論說:
“……当此时,东洞翁忧养荣滋补之害,欲以矫其弊,可谓卓见矣。而翁为人猜忍惨刻,不辨体之虚实,不论邪之剧易,妄泻下攻击之。而其人烦躁狼狈将死,则泰然曰:药弗瞑眩,厥疾弗瘳。未几而死,则曰:死生有命,非医所与知也。盖万病唯一毒,泻下其毒而反死者,皆命也。非药毒之使然也。今天下之人,不幸为毒药毙者,不归罪于医而归天,实翁之妙计也。嗟乎甚矣哉,翁之作俑也。世之粗笨惊奇好怪者,乐闻其诞,乃芥视人命,恬不知恤。又设猛毒峻剂之穽,彼蒙昧而舁痼担痾者,且曰:吾闻医者之治疾,犹贤者之理国也。昔郑子产教子大叔曰:子为政莫如猛!吾东洞先生所以聚猛案峻毒供医事,职此之由也。或曰:然则其死补益与死攻击,其死则一也。好生之德,洽于民心,如之何可哉?古谚曰:有病不治,常得中医。观今世无工医者,亦如不治而待天命也。”
縱觀論爭之中,批評一方的立足點大致包含三個方面:未能正確理解古文本意;不明醫理、偏激;生性殘忍,沒有醫生的慈愛之心。而“對於反東洞派的這些論難,一一舉出證據,以論說東洞醫說之正確性的乃是村井椿壽(號琴山,1733-1815)。椿壽以為至張仲景逝後二千年,東洞先生始注意到醫道的要點,著《醫道二千年眼目編》,以充滿熱情的筆調,乃至喋喋不休地維護著東洞。”
    另外還能見到在態度上立於支持東洞的立場,但對其學說卻悄悄加以折衷改造者。例如《後醫斷》的“脈候”一節乃是這樣說的:
脈即一身之活機,人各有常脈,而體有所疾,則其脈不得不變也。乃隨其所變,備之一候。熱乎爲浮,寒乎爲沈,於是可辨其陰陽也。重乎爲緊,輕乎爲緩,於是可分其傷寒中風也。而後變之又變,爲弦爲澀,爲數爲遲,虛實定焉,死生判焉。脈之爲狀,千變萬化,雖如不可候乎,約之於此,無有一不得其肯綮(qing)也,不亦妙乎?況併之三診,而候法盡矣。若或厝脈論證,或損證論脈者,此舉一而廢一也。況謂五動或五十動候五臟之氣者,以意推度,言其仿佛,以欺病者,亦焉知治病之方法乎哉。醫能辨其寒熱,則處方於是乎定;能察其虛實,則死生於是乎分。唯脈可以候也,脈之用爲然矣。
比照前述《醫斷·脈候》的基本觀點,可知《後醫斷》的作者所做的折衷性改造主要表現在以下幾個方面:
1、《醫斷》以脈如人面、各不相同為喻,提出醫生既然不可能知道每個人平時的正常脈象,自然也就無從判斷何為“病脈”,從而否定診脈的作用。《後醫斷》的作者雖然沒有從邏輯上指出所謂“常”乃是一般標準,並非某一具體之人平時的脈象,但承認“病脈”的存在與可知。
2、雖與《醫斷》一樣僅承認幾種最明顯的脈象變化,但承認其在辨別陰陽、寒熱、虛實方面的價值。
3、與《醫斷》一樣,否定了以“五動或五十動,候五臟之氣”的說法。
4、認為“三診”(脈、證、腹)並重,不可舉一廢一。並特別強調辨寒熱、察虛實,以定處方、決死生,“唯脈可以候也”。
六、東洞的著作、家人及弟子
其子吉益辰於1785年披露其父的著述謂:“凡千卷。方術之士往往見之,謂是真古疾醫之道也。”所錄書目為以下11種:
1、《方極》一卷(寶曆五年著述,1764刊行)
2、《類聚方》一卷(著述於1762,刊於1769)此書從《傷寒論》《金匱要略》選方220個,分類編排。未親試之方置於卷末。村井琴山謂:“中華歷代數千百之醫人,觀仲景無過於此。
3、《醫事或問》二卷(1769著,1825刊) 共設37問,以說明其主張。
4、《藥征》三卷(1771年著述,逝後十二年之1785刊行)
5、《古書醫言》四卷(1813初刻,1864刊行) 此書從《周易》、《書經》至《內經》、《傷寒論》抄出有關醫藥之事,逐一評說。另有名曰《醫事古言》之書一冊,刊於1805。所舉古言少於《古書醫言》。
6、《東洞先生遺稿》三卷
7、《醫方分量考》一卷
8、《方選》一卷
9、《丸散方》一卷
    (上二種,東洞我爲平日調劑編,藏於家,而不公之。但入門者,得謄寫耳)
10、《醫斷》一卷
11、《建殊錄》一卷 此書為門人嚴恭敬於寶曆十三年輯東洞驗案54例而成。後有“附錄”一卷,系長門儒官鶴台先生以未治癒的病例請教東洞,以及東洞的分析。
    (上二種,門人所著,而東洞鑒定之)

另外,屬筆錄東洞口授、或述其遺教者,有:
12、《補正輯光傷寒論》二卷
13、《輯光傷寒論》一卷
14、《刪定十二律方》一卷
15、《家塾丸散方》一卷
16、《腹診論》並圖三卷
17、《東洞先生痘瘡新論》一卷
18、《東洞先生答問書》一卷
19、《東洞先生配劑錄》二卷
20、《東洞先生應問錄》一卷
21、《東洞翁遺草》一卷

東洞娶有一妻二妾,共生九男一女。生後即死者三,夭折者三,為醫者二,傳其衣缽者為妻高木氏所生吉益猷。
吉益猷(1752-1813)字修夫,初号谦斋,后号南涯,通称周助(幼时大助)。著《方规》,言活用仲景医方之道。后以东洞万病一毒之说茫然无可据之形状为忧,乃创人身有气血水三物,毒乘此始为证之说。以此解释《伤寒论》,成《伤寒论精义》。后又著《医范》,以明气血水之辨与万病一毒之旨无悖。沿着这一轨迹,又著《气血水药征》,形成了一个新的完整体系。在籍弟子三千余人,成名之辈亦不少。(气血水之说为并河天民首创,而南涯以其释《伤寒论》)
据中川修亭《医方新古辨》说,南涯之人“大用力于实事、大禆益父之道。”但置《方极》不用、视《药征》亦多有不满之处、对《类聚方》中的“为则按”多不取。认为其父仅属“创业”,故难望“全备”。正谬误、补不足,乃其“事父之道也”。
在本節的標題中,之所以要將“家人”列入,主要是因為東洞為其母、子治病的記錄頗值得一讀。
“东洞母尝患痰喘胸痛,时年七十有三,病革矣。东洞曰:死,命也,不可如何。虽然所忧如此,岂可委于命乎?请见于之所为。众皆栗栗怀疑惧。东洞曰:病势骏急,死生在于瞬息。药难再,非一举以歼酷毒,噬脐不及。乃作南吕丸,倍甘遂以进之。顷刻发冥眩,吐泻十数回,脉息微微,如死状者一昼夜。至明日,爽然如宿醒之解而復平。其壮健无病,以天年终焉。”
從中可以看出,東洞在為其母治療的過程中,可謂堅定不移地貫徹了他所力倡的“疾醫之道”。在命懸一發之際,仍敢於峻藥攻疾,挽狂瀾於既倒。經過吐瀉不止、氣息奄奄、如死之狀的“瞑眩”階段後,竟然恢復了健康。但其子卻沒有如此幸運了:
“其子千之助四岁而患痘,症候甚急也,为紫圆饮之。虽颇奏其效,卒至不可救焉。后数年,其妹四岁亦患痘,疮窠概密,色亦紫黑,咬呀喘鸣,不胜闷苦。东洞亦为紫圆饮之,于是族人某者谕曰:嚮者或訾曰:东洞之处方也,不论内外,诸疾必下之。是以意杀其子矣。而今亦下之,如有不讳则得无不慈之讥乎?东洞曰:方证相对,其毒盛死者,是其命也。岂拘毁誉而变吾操乎?益饮之不休,诸证皆退,全愈。”
東洞在“祭兒璿文”中所記述的或許正是此四歲愛子不治身亡的過程:“再周時,顏色憔悴、視深,僉曰:夫人古今異矣,恐不能乳。余曰:毒盡矣,奚不飲哉?”我們雖然很難判斷璿究竟是死於痘疹的淫威,還是東洞的攻下,但從這篇祭文最後“汝不死,則我何以明我不明?”那充滿悲傷的哀鳴中,還是可以看到東洞對於自己所行治療的反思。同樣,還可以從其後東洞仍矢志不渝地繼續如此治療其女兒痘疹的記載中,看到他對於所謂“疾醫之道”的執著與虔誠之心。
說到東洞對於弟子的培養,出現在中川修亭閒談中的細野轉翁可謂一例。
某日修亭拜訪其師時,適逢吉益南涯外出,卻在門口遇見一位等候在那裏的老人。在二人的交談中,修亭得知此翁非尋常人。於是在老人回歸旅舍時仍跟隨其後,一路攀談中,老人告訴修亭:
“我乃岐阜一村醫。年輕時就想成爲一名醫生,故投在某醫門下作徒弟。但因在其家中偷了一把短刀而被驅出門外。雖然如此,還是一心想當醫生,於是來到京都,逐一拜訪醫者之門,陳說欲爲弟子之心願。然而無論怎樣請求,終究沒有人願意收留一個小偷作徒弟。
一天,我來到東洞先生的門前,說明欲拜師學藝的願望。但門口的幾位弟子卻阻攔說:‘這裏的先生乃日本第一大先生,像你這樣連書都沒讀過的村野之人怎能成爲他的弟子?!’東洞先生知道這一情況後,卻接見了我,並在交談之後對我說:‘你是有前途的,可以收你作弟子。沒有一概讀書的必要,只要每天跟隨在我的身邊,照我的樣子去做就可以了。”
東洞如此說過之後,即馬上讓他作了弟子,出診時也帶著他進行教誨。數年之後,因東洞先生認爲他已然可以回歸故里開業行醫了,所以便辭別先生回到岐阜作了一名鄉村醫生。東洞逝後,他時時回到吉益南涯這裏請安問候云云。
後來,中川修亭曾打發弟子去拜訪他,得知細野轉翁開業的大野村的所有人都稱他爲神醫而大感震驚。
另外,從上述諸多著作皆系出自門人之手,也可以略窺其桃李之狀。而這些著作又對日本漢方醫學的發展產生了極為深遠的影響。同時,在古代的醫學文獻中,也能看到有些弟子並不認可東洞的學問而憤然離去的記載。例如龜井南冥在《我昔詩集》中談到:
“余初以父命委贄門下。居五六日,知其說偏僻出乎不學,一再詰問。東洞以餘年少未曆事,不肯商量。餘心惡之,自悔來,遂辭去。後十餘年,因事東上通謁門下。間燕接見。時年七十,鬢髯雪白,眼光耿耿射人,但聲勢稍減。”
又如前面提到的認為東洞“所說非所爲,所爲非所說”的弟子吉村遍宜,亦終因老師面對有關其“學”與“術”之間的矛盾,無法做出使他心悅誠服的解釋,而“不欲長受其欺,請從是辭。竟絕去。”
七、對於東洞之歷史评價的評價
藝備醫學會會長、醫學博士吳秀三如此評價其家鄉的古代名醫吉益東洞:
藝備二州之地,古來多出名族。而其最著者有三焉:毛利氏以武略並有山陰山陽十三州;賴氏以文章史學稱雄於一世,到今弗衰。而吉益氏以醫學成盛名,其功績與二氏基業頡頏,或淩駕焉。慶元以降,李朱之學大行,因循苟且,其弊不知所底止。名護屋、後藤、香川、山脇之徒,相尋而興,專倡古醫學。東洞子繼起,卓然爲巨擘。後之稱古方者,以此爲宗師。其學主秦張,悉排後世百家,以萬病一毒爲治療根本。當時醫人初聞其說而疑,後皆心服。子南涯更擴充其說,主張氣血水學,門徒遂遍海內。吉益氏業由是益盛矣。自古我朝不乏名醫,而聲譽功績如東洞子者幾希。
此外他還列舉了一些其他名士對東洞的讚譽之詞。如築前儒學龜井南冥評東洞子曰:“剛明膽略不在鼂(晁)錯、周亞夫下”;山下玄门《医事丛谈》稱:“东洞翁实为和汉古今之豪识”,等等。又談到朝廷曾追贈位階於吉益東洞,作為一個醫生而能享此殊榮,實屬絕無僅有。然而在縱觀這些讚譽之詞時,如果略做一下古今之分,則不能看出讚譽者的身份、立場與角度是不一樣的。簡單地說,古代的讚譽之聲主要是來自主張與支持復古的陣營中,正如山下玄門評古醫方時所說:“中華之諸名家雖有數百,然使復長沙之舊,乃吾邦之功績也。”在這個時代,同時還存在著大量對於吉益東洞之流的激烈批評。但是到了近代,對於東洞的讚譽則未必來自仍在使用這種傳統技藝的漢方醫學家,甚至可以說主要是源自日本的“日本學”研究者。究其原因,我認為主要是由於以下一些社會需求決定的:
1、民族自尊與打造學術偶像的需要 
例如作爲吉益東洞同鄉的藝備醫學會會長、醫學博士吳秀三在爲該學會所編《東洞全集》所撰寫的、相當該書導讀與東洞傳記的長文“吉益東洞先生”中,於開篇之處即明言:“吉益東洞之名聲,即便是在三百年後的今天,依然籍籍存在、回響於我邦醫界。他的名聲,即我邦醫學之名聲。我邦漢方醫學之名聲,即所謂古方派的名聲也。”
衆所周知,古方派之所以在日本受到特別稱讚,在於這一以獨尊《傷寒論》爲基本特徵的學派雖然和其他醫學流派一樣與中國醫學具有直接的關係,但該學派旗幟鮮明地反對以《黃帝內經》爲代表的、講究陰陽五行、臟腑經絡的中醫理論,以及除《傷寒論》之外的所有理論學說和治療方法。因而日本的許多醫史著作都盛讚古方派才是真正的“日本醫學”。而在古方派中,又以對於吉益東洞的批判言詞最為激烈、否定最為徹底。
可資比較的事例還有:對於“腹診”,即通過觸摸患者腹部以診斷疾病之法的高度讚譽——因為這種診斷方法被視為是漢方醫學的獨立發明,與中醫診脈截然不同。
2、近代以來,西方醫學在日本的影響。研究與提倡漢方醫學者,在內心世界中實際上不自覺地存在著以現代科學的實證性作爲評價標準的價值取向。以吉益東洞爲代表性人物的古方派,不尚具有濃厚哲學色彩的中醫理論,即便是對於《傷寒論》中的六經辨證體系也很少言及。只是強調“有是症,則用是藥”。即認爲《傷寒論》的本質和方劑組成都是根據臨床出現的各個症狀來組方用藥的。所以盛讚古方派“當距今一百五十年前西洋醫學尚未勃興之時,早已用心於實驗親試,摒棄一切空鑿之議論,實卓見也。”
時至今日,當電腦被應用於中醫診療——只要輸入臨床所見症狀,電腦就能根據設定的程式開出藥方時,重讀吉益東洞《藥征》者又開始讚歎其思維方式簡直就和電腦的工作原理一樣。
基於上述兩種心態與需要,當然只會有意識地選取古往今來的讚譽之詞,而略去批評之語,甚至不去細看前人所讚譽的究竟是什麽。例如前引龜井南冥在《我昔詩集》中讚揚東洞“英雄士也。其膽略剛明,不在晁錯周亞夫之下”時,所舉“智略”表現的具體事例乃是:“驅使一時名士,以爲聲援。於是名聲隆隆,驚動四方。一時翕然向往,不遑及顧其說之生熟也。”——意在說明東洞是一位很會“造勢”的人物,所以才聲名大振;而追隨者並不了解其學問是否正確。
時至今日,當我們較為全面地了解了吉益東洞這位在日本醫學史上極富個性與影響之人物的生平與學術時,或許反而是應該透過種種的“與眾不同”,看到無處不在的時代共性。例如:
1、在傳統醫學領域內,實際上普遍存在着尊古的心態。其區別不過在於尊奉的學術偶像有所不同而已。
2、雖然後人在評價古方派時有“真古”與“擬古”之分,以為東洞屬“主上古之醫法,且用之”的真古,而諸如艮山、一閑齋、東洋等只能算作“其趣意本于古,但博采众方以供其用”的擬古者,但實際上不过都是在“復古”的旗幟下,行自主取捨之實,從而構建起新的醫學理論與治療體系。
3、任何一種類似終極真理的病因學說,無論是中國的金元四大家各自所提出的病因主張,還是日本古方派醫家提出的“一氣留滯”、“萬病一毒”等等,都不可能與實際治療完全吻合。但具有較高儒學素養的中日醫家,又先後表現出這種熱衷於理論構建的共性。而傳統醫學之所以能夠形成一個既具有豐富治療經驗,又具有所謂“完整理論體系”的知識體系,正是由於有在不同的歷史時期,都存在著這樣一些既懂治療技術,又有理論追求的精英。這與近代科學不斷有用以歸納客觀現象共性、解釋其本質的理論提出,又不斷用實證去驗證理論的發展過程,可以說具有某些相似之處

[출처] 古方派的代表人物吉益東洞|작성자 경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