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경제학 읽을거리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본주의[서평]

지운이 2025. 6. 3. 01:27

자본주의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 松下冽『ポスト資本主義序説』을 읽고 생각한다

  / 立命館大学名誉教授 高橋 伸彰

    現代の理論 34호(23년 5월)

   (https://gendainoriron.jp/vol.34/feature/takahashi.php)

 

 

"새로운 자본주의"가 아니라 "포스트 자본주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씨는 총리 취임시 스스로가 내거는 정책으로 '새로운 자본주의'를 언급했다. 그런데 낡은 것이건 새로운 것이건 자본주의의 본질은 성장을 지렛대로 한 부단한 자본(상품과 교환 가능한 화폐자본)의 축적에 있다. 그 때문에, 과거 수백년에 걸쳐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유한한 자원을 수탈해, 생산이나 소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효과 가스 등의 폐기물을 자연의 공간으로 계속 배출해 왔다. 선진국에서 노동력이 부족해 임금이 상승하면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도상국으로 진출하고, 유한한 자원이 고갈의 위기에 빠지면 새로운 자원을 개발하고, 오염이 문제가 되면 폐기물을 삭감하거나 재이용함으로써 지리적, 공간적, 기술적으로 프론티어를 확대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살아남아 왔다.

 

이에 대해 독특한 역사관을 가진 경제학자 미즈노 카즈오(水野和夫)씨는 30만부 가까운 베스트셀러가 된 『資本主義の終焉と歴史の危機』(集英社新書)에서 '자본주의의 死期가 다가오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 지구상의 어디에도 프론티어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갈파한다.

 

미즈노씨에 의하면, 자본주의란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윤을 「蒐集」하는 경제시스템이다. 「중심」이 蒐集하는 이윤은 「주변」, 즉 프론티어의 확대에 의해 증대한다. 근대란 이 프론티어를 지리적, 물리적으로 넓히는 것에 의해 '중심'에 위치한 국가와 국민이 계속 성장해 온 시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종언이란 프론티어의 질곡에 의해 근대라는 시대가 전환에 임박한 역사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즈노씨의 「역사관」은, 프론티어는 무한하게 있으며, 「桎梏」은 기술혁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해 온 이코노미스트나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계몽되었다고 하는 독자와는 대조적으로, 이들에게서는 “자본주의가 끝장난다고 주장하지만, 그 다음에 어떤 세계가 올 것인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비판이 적지 않게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미즈노 씨는 앞의 책에 이은 『株式会社の終焉』(ディスカヴァー・トゥエンティワン) 에서 "그것이 어땠는지"라고 일축하며, 자본주의의 다음이 제시되지 않았다고 해서 성장에 고집한다면 "성장, 그 자체가 수축을 낳는다"고 반론한다. 실제 생산능력이 과잉인 가운데, 보다 높은 성장을 목표로 투자를 거듭해도 유휴설비와 불량채권이 쌓일 뿐이며, 새로운 기술로 시장 개척을 시도해도 개발비용만 불어날 뿐 수익은 올릴 수 없다. 하물며 가상의 「금융·전자 공간」에서 화폐의 증식을 도모해도, 버블의 발생과 붕괴를 반복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요구되고 있는 것은 기시다 총리가 구가하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아니고, 「포스트 자본주의」의 정책 구상이다. 그것에는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경제사회의 존재방식을 근저에서 변혁해 나가는 것 이외에는 길은 없다. 그 길이 평탄하지는 않지만, 변혁하지 못하면 인류의 생존뿐만 아니라 지구 환경도 위기에 빠지고 만다.

 

타도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 난문에 정면에서 도전한 것이, 국제정치학자의 마츠시타 유키(松下冽)씨가 최근 저술한 『ポスト資本主義序説』(あけび書房、以下本書と言う)이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마츠시타는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인류와 공존할 수 있을까. 거대한 격차와 빈곤의 현실이나 생태계의 끝 없는 약탈 등 인류 생존에 관련된 위기를 극복하고 기존 시스템을 대체하고 올터너티브를 구상하는 것이 가능할까”라고 물음을 던지고, 끝으로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론하며 “이 전쟁의 배경에는, 우리에게 거대한 불평등, 비참한 기후변화, 빈곤, 인종적 차별(apartheid), 핵전쟁 위협의 증대를 가져온 오랜 반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말한 다음, "이런 인류의 비참한 문제를 해결할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세계자본주의 시스템과 우리의 생존 수단에 대한 그 지배권력에 국경을 넘어 집단적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언뜻 보면 과격한 호소이지만, 본서를 풀어 서두의 질문으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마츠시타 씨의 논의를 따라가보면 오히려 이러한 호소는 자연스럽게 납득이 간다.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증식이 멈추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많은 소득을 벌어, 부단하게 창출되는 새로운 상품을 매입하려고 “근로 의욕을 점점 높여, 비록 급료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가게 되어도···(사용자의) 엄격한 요구에 따르기”(W. 스트레이크 “자본주의는 어떻게 끝나는가”) 때문이다. 그 결과, 살아남고 번영하는 것은 자본주의이며, 잃어버리는 것은 사람들의 삶과 정신의 풍요이다.

 

마츠시타씨와 마찬가지로 경제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베이도 자본주의는 '타도되어야 한다'('자본주의의 종말' )라고 말한다. 하베이는 알제리의 독립을 목표로 프랑스의 식민지주의와 싸운 프란츠 파농을 본따 이 책에서는 혁명적 인간주의의 권장을 설파한다.

 

파농은 <땅에 저주받은 자>에서 “다리 하나의 건설이 만약 거기에 일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풍부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리는 건설되지 않는 것이 좋다. 시민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수영을 하거나 배를 타거나 강을 건너면 된다."고 말하고, 종주국이 바라는 다리의 건설이나 다리가 가져다 줄 편의 보다도 다리의 건설 때문에 구축당할 일하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풍요를 우선하지 않으면 식민지의 사람들은 영원히 해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파농이 말하는 다리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정신을, 현대자본주의에서 하나하나 창출되는 신제품이나 신서비스와 그 생산이나 판매를 위해 열악한 환경하에서 노동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정신으로 바꾸어서 보면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는 역사적인 시스템이라고 해도 참고 기다리기만 해서는 끝나지 않는다. 평범하지만 자본주의와의 싸움은 "적당한 필수품에 의한 풍요로운 생활과 안정된 '좋은 삶''(하베이 전게서)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증식을 도모하려는 자본주의의 맹위는 진정되지 않는 것이다.

 

만년의 마르크스가 통찰한 자본주의의 모순

『人新生の「資本論」』(集英社新書)으로 주목을 받은 경제사상가인 사이토 코헤이(斎藤幸平)씨도, 마르크스 가브리엘과의 대담에서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하는 시스템이며 지구 환경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그렇다면・・・자본주의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未来への大分岐』集英社新書)라고 말한다. 사이토씨가 환경 위기야말로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시스템(포스트캐피탈리즘)으로의 전환이다 라고 하는 배경에는 미완으로 끝난 '자본론'의 초고로 남겨진 마르크스의 통찰이 있다. 만년의 마르크스는 자본의 고도화에 의한 이윤율의 저하 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교란(섭취와 배출의 밸런스 파괴)에 자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고, 자연과학의 연구에 몰두했다고 사이토씨(『大洪水の前に』堀之内出版)는 말한다.

 

게다가 사이토 씨는 모든 재화의 사유를 '모도하는' 자본주의로부터 토지 등의 자연, 전기나 수도 등의 라이프 라인 및 의료, 개호, 교육 등의 서비스를 커먼(공유의 자본)으로 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탈성장 커뮤니즘'으로 이행하면 성장을 위해 결핍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새로운 풍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지속적인 성장을 정책으로 내세우는 정치가나 성장을 지지하는 경제학자는 온난화 대책의 추진이, 재생가능 에너지나 전기자동차의 보급 등,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의 창조를 통해 새로운 수요를 유발해, 성장의 원동력(그린 뉴딜(이하 GND라고 함)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사이토 씨는 GND의 경우에는 반대로 환경 부하가 늘어나 '지구환경을 파괴할 수 있다'(『주간 동양경제』 2021년 4월 10일호)라고 말해 GND 예찬에 못을 박는다. 

 

사이토 씨는 신간의 『ゼロからの「資本論」』(NHK新書)에서, 사람들의 평등(권력에 의한 지배 관계가 부재한 상태)과 자연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해, GDP(국내총생산)의 ​​다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풍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문명이나 테크놀로지를 버리지 않고 '고차'의 공동체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설한다. 그런 사회의 구축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비판에 대해서는, 일상의 생활에 보여지는 무료의 상호부조나 뮤니시패리즘(지역 자치주의)의 국제적인 확산을 사례에 들며, 불가능하지 않다!고 반론한다

글로벌 사우스에 배우기

마츠시타씨도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보다 인권과 케어를 … 경쟁보다 협력을 … 패권적인 서양과학보다 지식 생태학을 … 개인주의보다 커뮤니티를, 지구 규모에서는 로컬을 우선하는'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츠시다씨의 논의가 하베이나 사이또씨와 다른 점은, '경제주의적인 어프로치의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화한 자본에 의한 '계급 권력'의 부활(마츠시타씨가 말하는 신자유주의)까지도 사거리에 넣고 있는 점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유주의적인 이성에 의하여 초래된 사회적, 문회적, 그리고 개인적 생활의 근본적인 변용의 파악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후기에서 마츠시타 씨는 “포스트 자본주의에 대한 구상은 정치 공간의 재구축을 향해 20세기까지 인류가 획득한 모든 영역에서의 ‘지(知)’를 대다수의 사람들의 입장과 시점에서 재고하고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때 이른바 서양 근대의 '지'의 '식민지화'를 재검토하는 것을 전제로 글로벌 사우스의 역사, '목소리', 습관과 다양한 운동을 포함한 생활공간과 실천 '지'가 '포스트 자본주의에 대한 구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란, 마츠시타씨에 의하면(이하는, 2023년 3월 28일자 아사히신문 디지털판의 인터뷰 기사에 근거한다), 글로벌화가 진행되어 국제질서가 변용하는 가운데, '신흥국' '도상국' '북과 남'과 같은 종래의 틀로는 더 이상 현상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한 지리적·정태적인 에리어가 아니라, 글로벌화의 마이너스의 영향을 받는 나라나 지역, 여러 문제, 그리고 그 관계성을 포함한 사회적 카테고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보면, 확실히 글로벌 사우스의 대부분은 '도상국'이나 '신흥국'으로 불려 온 나라들과 겹치지만, 신자유주의적인 글로벌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반드시 '남' 국가만이 아니다. '북'의 국가 내부에서도 격열한 부의 집중이나 격차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기후 변동과 같이, '국제문제'인지 '국내문제'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문제도 늘고 있다. 이렇게 국경을 넘는 문제나 다양한 액터가 잇달아 생겨나는 가운데, 지리적인 구분인 '남'이나 국민국가를 전제로 한 구미 중심의 경제주의적인 기준으로 분류된 '도상국' 개념으로는 현상을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마츠시타씨가 글로벌 사우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것이 글로벌한 자본주의의 '피해자'이며, 구제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하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글로벌 사우스의 개념이 이미 유효성을 잃은 “국민국가 중심의 분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단계를 향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추진력으로서 다국적자본과 다국적화하는 국가에 의한 글로벌화 세계의 재편성의 현상과 행방을 고찰하기 위한 유효한 이론적 틀이다”라고 말한다.

'비비르 비엔'(Vivir Buen)이라는 이상 사회

마츠시타씨는 본서의 후반(제7장)에서, 다시 한번 차별과 격차와 환경 파괴를 가져오는 성장 우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성장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시스템, '탈성장'의 다양한 구상과 어프로치가 "추구되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그 중에서도 코로나 팬데믹 이후는 "인류와 자연의 관계가 긴급한 과제로 떠올랐다"고, "원주민의 생활양식, 부엔비빌(Buen Vivir) 또는 비비르 비엔(Vivir Buen, 이하 VB라고 약칭한다)이라는 원주민의 사고방식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VB란, 마츠시타 씨에 따르면 '남미 안데스의 원주민족에 그 뿌리가 있으며' 문자 그대로 '좋은 인생이나 좋은 생활'을 의미하는 개념이며.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운동이나 정치에 영향을 미쳐왔던' 사람들의 이상이 되어 온 사회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VB를 마츠시다씨는 글로벌 사우스로부터 배우는 실천 예로서 소개하지만, 그 전에 착수하는 것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이다. 애로우의 정리에 따르면 '가치관이 다른 다양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의 경우 개인적인 가치관을 집계하여 어느 하나의 사회적인 가치관을 민주적인 프로세스에 의해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며, 비록 VB가 포스트 자본주의의 실천 예로서 바람직하다고 사회적인 합의가 얻어져도,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는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에 있어서는, 그 실천을 위해 어떠한 방법이나 시스템을 채용해야 하는지까지를, 민주적인 프로세스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VB의 실천을 시도한 볼리비아나 에콰도르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 생활의 질, 공생을 촉진한다”는 VB의 개념을 헌법으로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성장을 우선하는 중앙정부에 의해, VB의 슬로건은 새로운 개발 계획에 편입된 채, 본래의 VB는 실천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애로우에게 사사한 적도 있는 이론경제학자인 우자와 히로후미(宇沢弘文)씨는 “애로우가 상정하는 '다양=제각각'한 가치관을 가진 개인에 의해 사회가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시민의 기본적 권리와 관련된 현상에 관해서는, 꽤 광범위한 층에 걸쳐 공통의 가치관의 형성이 보인다. 역으로 이러한 사회적인 연대감을 부정하고서는 '사회'의 존속 자체까지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다'(『近代経済学の再検討』岩波新書)라고 말하면서 애로우의 정리를 비판한다. 동일한 사회(지구상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무언가 문제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합의는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회적인 연대감이라든지, 혹은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주창한 것처럼, 타인의 기쁨이나 고통을 자신의 기쁨이나 고통으로 느끼는 동점심(sympathy)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우자와 씨는 말한다.

 

이 우자와 씨의 주장에 따르면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에서 VB의 실천에 실패한 것은 반드시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가 성립했기 때문은 아니다. VB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애로우의 불가능성정리를 능가할 수 있는 글로벌한 연대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VB의 실천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지역이나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우자와씨가 말하는 '공통의 가치관'을 안고 글로벌하게 연대한다면 VB의 실천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한 역사적인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마츠시다씨는 설파한다

대결의 끝에 있는 미래를 믿고

마츠시타씨가 글로벌한 연대를 추구하는 것은, 금융시스템 붕괴에 의한 경제위기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의한 지구환경 위기도, 그리고 미지의 바이러스가 일으킨 코로나·팬데믹도,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문제의 대부분은, 지금 국경을 넘어 전세계에 파급해, 현지화로는 충분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결론에서 마츠시타 씨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화가 전세계 사람들에게 가져온 '참사'는 곳곳에서, 특히 글로벌 사우스 사람들을 중심으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라는 외침이 되어 분출되고 있다"고 말한다.

 

마츠시타 씨의 마음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를 거듭해 온 남미 정치에 대한 생각과 공명해, 글로벌 사우스 사람들의 외침이 아플 정도로 울렸을 것이다. 마츠시타는 “현대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자본의 무한한 축적, 모든 것의 상품화, 노동과 자연의 냉혹한 착취, 그에 부수되는 잔인한 경쟁은 지속가능한 미래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그로 인해 인류종의 생존 자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깊고 체계적인 위협은 깊고 체계적인 변화를, 즉 대전환을 요청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 대전환을 요청하는 것은 바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외치는 글로벌 사우스 사람들의 항의 소리일 뿐이다.

 

이 책의 논의를 거친 마지막에 이 항의의 목소리를 들으면 "세계자본주의 시스템과 우리의 생존 수단에 대한 그 지배권력에 국경을 넘어 집단적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마츠시타 씨의 호소가 결코 과격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미래를 믿고 미래를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고리가 퍼지고, 대결을 향해 글로벌한 연대가 형성된다면, 그 끝에는 풍성한 '포스트 자본주의'의 미래가 개척되리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잠자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공생과 협력의 정신을 다시 한번 각성시켜 주는 것이다.

 

 

松下冽『ポスト資本主義序説』

目 次

序章 20世紀と決別できるか:「移行期(トランジション)」を掘り下げる

第1部 分断化されたグローバル世界の現在

  第1章 分断化の現実から見えるグローバルな世界

  第2章 新自由主義とは何であったのか?

  第3章 空洞化するウエストファリア世界秩序

第2部 政治経済学の再考:「国家ー社会」関係の視座から

  第4章 「国家ー社会」関係の再構築:政治空間と市民社会空間

  第5章 グローバル・サウスにおける社会運動:自立は可能か

第3部 プルーリバース(多元世界)に向かう地平を

  第6章 新自由主義の終焉の時代

  第7章 ポスト資本主義への政治空間を再構築する

  第8章 重層的な世界秩序とグローバル市民社会の構想

  第9章 世界社会フォーラムとグローバルな社会運動の展望

結びに パンデミックからウクライナ:グローバルな市民社会に向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