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중국 침구 이야기

동의학 종주로서의 편작의학 : 실전과 재건

지운이 2026. 5. 12. 08:31

동의학 종주로서의 편작의학 : 실전과 재건

黄龙祥:中国医学之宗的失落与重生

  / 作者:[黄龙祥] 来源:[网友推荐] 2016-11-04

 

 

편작 의학은 진한(秦漢) 시대에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사마천은 『사기』에서 편작의 맥을 위해 특별히 「편작창공열전」을 별도로 두어 편작 의학의 전승과 저작을 소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나라 이후 편작 의학은 자취를 감추었다. 편작 의학은 과연 갑자기 실전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후세에 전승된 것일까? 황룡상 연구원은 이 문제를 잘 설명하여 중의학 발전사 중의 한 가지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주었다.

 

*가장 오래된 경혈 인형 : 漆木人(노관산 한묘 출토)

 

<서론>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지역의 강성한 군사적 기반, 오음(五音) 발원의 우위, 풍부한 폄석(砭石) 자원, 그리고 영향력이 심원했던 새(鳥) 토템 문화는 편작 의학, 특히 침구학의 탄생을 위해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의 요람을 제공했다. 중국 최초의 완전한 의학 체계로서, 편작 의학은 『황제내경』보다 수백 년 앞서 탄생했다. 편작 의학은 『황제내경』과 맺는 관계는 '순종(純種)과 잡종(雜交)'의 관계와 같다. '잡종'이라는 융합 과정을 통해 편작 의학은 사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생명(新生)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편작 의학이 남긴 네 가지 단계의 발자취를 시간적 선후에 따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편작 가라사대(扁鵲曰)" 판본: 『맥경(脈經)』에 전해지는 내용.
  2. "양공이 편작에게 물었다(襄公問扁鵲曰)" 전본: 『산번방(删繁方)』에 전해지는 내용.
  3. "황제가 편작에게 물었다(黃帝問扁鵲)" 전본: 창공(倉公)이 전수받고 『천금익방(千金翼方)』에 전해지는 내용.
  4. "뇌공이 황제에게 물었다(雷公問黃帝)" 전본: 현재 전해지는 판본인 『황제내경』에 전해지는 내용.

편작 의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중의학 이론의 맥락, 특히 고전 침구 이론 체계 전체가 형성되고 발전해온 맥락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 년의 보물창고인 편작 의학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것은 의학적 사명일 뿐만 아니라, 제(齊)나라 문화를 크게 드높여야 하는 역사적 책임이기도 하다.

 

<본론>

 

1. 전설적인 탄생: 천시(天時)·지리(地利)·인화(人和)를 갖춘 제나라 의학의 요람

 

편작은 중국 의학사에서 하나의 전설이다. 그의 의학적 위상을 해석하기에 앞서, 무엇이 '편작 의학'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숙지하고 있는 편작은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출신의 명의 진월인(秦越人)이다. 호는 노의(盧醫)인데, 의술이 워낙 고초(高超)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상고시대의 신의인 '편작'이라는 명칭으로 받들어 불렀다. 젊은 시절 장상군(長桑君)에게 의학을 배워 그 비전(禁方)을 모두 전수받았으며, 각 과(科)에 모두 능통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또한 창공(倉公), 화타(華佗), 사사태(謝士泰) 등 명의들을 포함하는 사승(師承, 스승과 제자)의 맥락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편작 학파가 서로 다른 시기에 저술한 저작들의 총집을 '편작 의적(扁鵲醫籍)'이라 부르며, 이 편작 의적에 담긴 완전한 이론 체계를 바로 '편작 의학'이라 한다.

 

편작 의학이 제나라 문화권에서 기원한 데에는 천시, 지리, 인화의 깊은 역사적 연원이 있다.

 

1) 제나라의 발달한 병학(兵學)의 영향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는 병력이 강성하고 군사 과학이 발달했으며, 이손(二孫, 손무와 손빈)의 병법은 중국 고대 군사 이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병학이 의학에 미친 영향은 침구(針具)인 '구침(九針)'과 무기인 '오병(五兵)'의 대비를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전해지는 도판 및 출토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중국 초기 침구 도구는 가히 고대 무기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특히 구침 중의 참침(鑱針), 피침(铍針), 봉침(鋒針)은 출토된 한대(漢代) 이전의 구리 화살촉(銅鏃), 구리 칼(銅劍)과 매우 흡사하다. 일부 출토 병기 도판은 만약 설명을 붙여놓지 않고 침구인(針灸人)에게 감별하게 한다면, 거의 모두 침구 도구로 오인할 정도이다. 이처럼 활쏘기를 잘하고 무용(武勇)을 숭상하는 토양 속에서, 편작 의학 초기 침구인 '참석(鑱石)', '피침', '봉침'의 탄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 제나라 음률학(音律學)의 작용

"망(望), 문(聞), 문(問), 절(切)"의 사진법은 편작 의학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중 '문(聞)' 진단의 기원과 발전은 오음(五音)이 제나라에서 나온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나라 문화의 대표작인 『관자(管子)』 「지원(地員)」 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릇 치음(徵)을 들어보면, 마치 돼지를 등에 업었는데 돼지가 깨어나 놀라 짖는 소리와 같다. 무릇 우음(羽)을 들어보면, 마치 들판에서 말들이 우는 소리와 같다. 무릇 궁음(宮)을 들어보면, 마치 움 속에서 소가 우는 소리와 같다. 무릇 상음(商)을 들어보면, 마치 무리에서 떨어진 양의 소리와 같다. 무릇 각음(角)을 들어보면, 마치 꿩이 나무에 올라 우는 것과 같으니 그 소리가 빠르고 맑다. ... (현의 길이를) 3등분 하여 그중 하나를 버리는 삼분손익법을 적절히 사용하면 각음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고대 전적 중에서 오음의 명칭 및 소리를 만드는 방법(성음 방법)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황제내경』에도 오음으로 질병을 치료한다는 관점이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음이 제나라에서 나온 것은 편작 의학의 '문성(聞聲)' 진단뿐만 아니라 중의학 오행(五행)의 발단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3) 제나라 폄석(砭石) 재료의 풍부함

자연자원 측면에서 제나라에는 풍부하고 우수한 폄침(砭針) 제작 재료가 있었다. 『산해경·동산경』에 이르길, "고씨(高氏)의 산은 그 위에는 옥이 많고 그 아래에는 잠석(箴石)이 많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기술한 고씨의 산은 태산(泰山)의 북쪽에 위치하며, '잠석'이란 바로 '옹종(痈肿, 종기)을 치료하는데 쓰는 폄침'을 말한다. 실제로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지는 중국에서 폄석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곳이며, 근대 고고학 역시 산동 사현(泗縣)이 폄석의 중요한 발상지임을 입증했다.

이는 '참석(鑱石)으로 병을 치료하는 법'이 제나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소문·이법방의론』에 이르길, "동방의 영역은 천지가 시작되고 생겨나는 곳이며, 물고기와 소금이 나는 곳으로 해변과 물가에 접해 있다. 그 백성들은 물고기를 먹고 짠 것을 즐겨 먹어... 그 병은 대개 옹양(痈疡)이 되니, 그 치료는 폄석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폄석 역시 동방에서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战国策』에는 "사람들이 편작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옹종을 고치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지리적 환경과 의학적 특징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4) 제나라의 심오한 역사 문화적 축적

문화와 민족적 특성상, 초기 동이(東夷)의 조류(鳥) 토템 문화는 편작이 새 머리에 사람 몸을 한(鳥首人身) 형상으로 생성되고 유전된 강력한 증거이다. 또한 활쏘기를 잘하고 무용을 숭상하는 민족성은 침구학이 제나라 문화권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양질의 토양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편작 의학의 탄생과 발전을 위해 천시, 지리, 인화의 포궁(胞宮, 요람)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2. 실종의 수수께끼: 전성기에서 쇠퇴기로의 급격한 변화

 

1) 선진(先秦), 진한(秦漢) 시기, 편작 의학이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다

편작 의학은 사실상 초기 중국 의학 전체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망, 문, 문, 절'의 사진법을 제시했고, 혈맥 이론과 경맥 이론을 창시했으며, 수혈(俞穴)을 발견하고 탕액 약론을 수립했다. 또한 허실보사(虚实补泻)의 치료 원칙을 확립하고 침구와 방약을 융합시키는 등, 고전 중의 침구 이론 및 그 진료의 모든 요소를 거의 망라했다. 한대(漢代) 이전까지 편작 의학은 중국 의학사에서 줄곧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해 왔다.

 

『주례(周礼)』에서 『한서(汉书)』에 이르기까지 의학을 논할 때는 모두 편작 의학을 주류이자 주체로 삼았다. 『주례』에는 "오기(五气), 오성(五声), 오색(五色)으로써 그 생사를 살피고, 구규(九窍)의 변화를 헤아리며, 구장(九藏)의 움직임을 대조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서·예문지』에는 "의경(医经)이란 사람의 혈맥, 경락, 골수, 음양, 표리의 근원을 따져 백병의 근본과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찾아내는 것이니, 잠석(箴石)과 탕화(汤火)를 베풀고 백 가지 약제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실려 있다.

특히 『사기(史记)』는 편작 의학에 대해 강력한 긍정을 표했다. 『사기·편작창공열전』에 따르면, 편작은 장상군의 술법을 얻어 '방학의 종주(方之宗)'가 되었으며, 『편작내경』, 『편작외경』 및 『난경』을 세상에 전하여 편작만의 학술 체계를 형성했다. 또한 창공(倉公)은 공승양경(公乘阳庆)으로부터 전수받아 편작의 학술 체계를 계승했다.

 

"양경에게는 옛 선도가 전해준 황제와 편작의 맥서(脉书)가 있는데, 오색으로 병을 진찰하여 사람의 생사를 알며, 의심스러운 것을 결단하고 치료 가능 여부를 결정하며, 약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정교하다. (창공은) 그로부터 《脉书上下经》、《五色诊》、《奇咳术》、《揆度》、《阴阳外变》、《药论》、《石神》、《按阴阳》 등의 금서(禁书)를 전수받았다..." (『사기·편작창공열전』)

태사공 사마천의 이 서술은 창공이 '맥법(脉法)'을 인용함에 있어, 임상 진맥이나 제자 교육을 막론하고 이 편작의 『맥서』를 지극히 중시했음을 설명해 준다.

 

2) 당나라 이후, 주류의 시야에서 물러난 편작 의학

유감스럽게도 당대(唐代) 이후,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편작 의학은 급격히 주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천금방(千金方)』은 후세에 전해지는 의서 중 편작의 방론(方論)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책이지만, 정작 저자인 손사막(孫思邈)의 눈에는 기황(岐黃, 황제와 기백)의 도리, 헌원(軒轅, 황제)의 정경, 황제의 명당(明堂)만이 보였을 뿐, 오직 편작의 이름만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날 의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무릇 '대의(大醫)'가 되려면 반드시 『소문(素問)』, 『갑을(甲乙)』, 『황제침경(黃帝針經)』, 명당유주(明堂流注), 십이경맥, 삼부구후, 오장육부, 표리공혈, 본초약대(本草藥對) 및 장중경, 왕숙화, 阮河南、范东阳、张苗、靳邵 등 여러 부류의 경방(經方)에 능통해야 하며, 또 阴阳禄命,诸家相法,及灼龟五兆、《周易》六壬 등에 묘해(妙解)가 있어야 한다. 이토록 방대한 전적과 종사(宗師)들의 범위 속에서, 한때 '의학의 비조(鼻祖)'였던 편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3) 편작 의학은 실전(失傳)되었는가?

어떤 관점에서는 동한(東漢)의 화타가 편작 의학을 계승하여 당시 가장 유명한 의방사(醫方士)가 되었으나, 옥중에서 횡사하고 원고가 전해지지 않게 됨에 따라 편작 의학의 맥이 갑자기 쇠락하여 주류 의학 무대에서 신속히 퇴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편작 의학의 쇠락의 수수께끼와 그 극심한 위상의 격차는 마치 백씨 의학(甘肃省包头市 白氏 中医世家가 창시한 中医流派)과 마찬가지로 중의학 사학상의 천년 미스터리가 되었다.【주1】

 

한번 생각해보면, 만약 왕숙화가 『맥경』을 편찬할 때나 육조 시대 사사태(谢士泰)가 『산번방(删繁方)』을 편찬할 때 여전히 편작의 의서를 직접 인용하여 쓸 수 있었다면, 편작 의적이 갑자기 실전되었겠는가? 답은 "아니오"이다. 이로부터 추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사람들이 편작 의학에 대한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많은 편작 의적이 세상에 존재하고, 아무리 많은 편작 의서가 출토된다 한들, 우리는 그것을 보고도 보지 못하거나 진위를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3. 지문의 비밀: 네 줄기 맥락으로 '마갑(马甲, 위장된 겉모습)'의 진실을 밝히다

 

편작 의학의 실전(失傳)과 망각이 후세 의학에 미친 영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어찌 생각하면, 편작 의학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중의학 이론의 맥락, 특히 고전 침구 이론 체계 전체가 형성되고 발전해온 맥락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안개를 뚫고 확정된 문헌 속에서 편작 의학의 특징적인 '지문(指纹)'을 추출해내는 것이야말로 현대 의학 종사자들의 절박한 의무가 되었다.

 

 

1) 편작 의학의 행방을 탐색하는 '지문'(指纹)

편작 의학의 행방을 탐색하는 '지문'은 네 글자로 요약하면 '수수정명(守數精明)', 즉 '수치(데이터)를 지켜 다스린다(守數據治)'는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맥진(脉诊), 오색진(五色诊), 침구방(针灸方)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이 '지문'에 근거하여 『황제내경』 및 새로 출토된 문헌 속의 『편작침구방』을 식별해낼 수 있으며, 한나라 화상석(画像石)에 새겨진 편작침구도(扁鵲針刺圖)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편작과 창공의 침구방이 전세본(傳世本) 『소문』과 『영추』에 온전하게 수록되었는지 확정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판단은 내릴 수 있다. '경맥혈(經脈穴)' 처방, 침구방, 잠침자혈방(鑱針刺血方), 그리고 특히 자침의 수량(针刺数量)을 명시한 침구방 등은 모두 편작 학파에서 나온 것이다.

 

마왕퇴 백서 『맥법(脈法)』, 장가산 한간 『맥서(脈書)』, 삼부구후(三部九侯) 맥법에서부터 전세본 『영추』의 가장 후기 작품인 「경맥(經脈)」 편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는 편작 의학이 대대로 전승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영추·경맥』 편에서는 12경맥의 각 맥 아래마다 "성하면 사하고, 허하면 보하며... 성하지도 허하지도 않으면 경(經)에서 취한다(盛則瀉之, 虛則補之... 不盛不虛, 以經取之)"라는 치료 원칙을 명확하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피부의 '한열(寒熱)'을 살피고, 맥의 '견실(堅實)'함과 '함하(陷下)'함을 진찰하는 것 등은 모두 표본맥법(標本脈法)의 고유한 내용이다.

전세본 『내경』 중에도 표본맥법의 '견실'과 '함하'에 대한 치료 원칙과 치료법 규범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법들은 모두 편작의 맥법에 속하는가? 답은 긍정적이다.

  1. 첫째, '함공(陷空)'과 '견실'의 맥형 진법(脉形诊法)은 바로 편작 초기 맥법의 특징이다.
  2. 둘째, 피부 표면의 차가움(寒), 뜨거움(熱), 매끄러움(滑), 거침(澀)을 진찰하는 것은 편작 진법의 특색이다.
  3. 셋째, 표본맥법 및 그 임상 응용을 논술한 「논질진척(論疾診尺)」은 편작 맥법의 문자 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표본진법의 임상 응용 전용 편인 「사기장부병형(邪氣臟腑病形)」의 조작 방법과 완전히 일치한다.
  4. 넷째, 『편작창공열전』에 기록된 창공의 '진적(診籍, 진료기록)'에 마침 '우치통(龋齿痛, 충치 통증)'을 치료한 사례가 있는데, 이때 채택한 것이 바로 표본진법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황룡상(黃龍祥) 교수는 다음과 같은 대담한 추단을 내놓았다. 창공(倉公)이 양경(陽慶)으로부터 전수받은 편작의 의적(醫籍)들이 위진(魏晉) 시대까지 여전히 세상에 존재했으며, 왕숙화(王叔和)는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해 이를 열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왕숙화는 그중 '색맥진(色脈診, 안색과 맥 진찰)' 부분을 『맥경』이라는 책에 직접 편집하여 수록했으며, 심지어 '맥경'이라는 서명(書名)조차 창공이 언급했던 서명인 『맥서상하경(脈書上下經)』에서 직접 빌려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맥경』의 진법(診法) 부분은 편작의 『맥서』를 주체로 하고, 다른 제가(諸家)의 관련 문구들을 보충하여 편찬된 것이다.

 

이전까지 『난경·육십일난』에는 편작 의학의 '망·문·문·절' 사진(四診)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고, 『황제내경』은 편작 의학의 거의 모든 요소를 편집해 넣었으나 유독 '문성(聞聲, 소리를 듣는 진찰)'만은 빠져 있었다. 그런데 육조 시대 의가 사사태(謝士泰)의 『산번방』이라는 책에 기록된 편작 의학의 오장망색(五臟望色)과 청성(聽聲, 소리 듣기)에 관한 묘사가 특히 상세하다. 이는 의학 문헌상 처음으로 우리에게 부족했던 '사진(四診)'의 한쪽 다리를 보완해 준 것이다.

이러한 편작 의적 전본(傳本) 발견의 중대한 의의는, 기존에 수집되었던 편작 의서 일문(佚文, 유실된 글) 조각들을 정확하게 연결하여 하나의 해석 가능한 화면으로 형성했다는 데 있다. 이로써 사서(史書) 전기 속 편작 의학의 '신통한 진단과 오묘한 치료'는 하나의 전설에서 만질 수 있는 실체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전본을 빌려 판단하건대, 『영추·오색』 편은 설령 창공이 당시에 전수받았던 『오색진』 전문을 수록한 것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이 내용을 주체로 삼아 개편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발견이 편작 의학의 전체 모습을 식별하고 복원하는 데 갖는 의의와 가치는 노관산(老官山)에서 출토된 편작 의간(醫簡)에 뒤지지 않는다.

 

또한 『산번방』에서 인용한 전인(前人)의 문헌에는 오직 '편작', '창공', '화타' 세 사람뿐이며, 그중 편작을 인용한 것이 가장 많다. 그러므로 사사태는 마땅히 제(齊)나라 지역의 의가이자 편작 의학의 전수자에 속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또 다른 논증은 『천금익방』이다.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은, 이 책에 인용된 편작 의적 문구 중에 '허실보사(虛實補瀉)'의 침구 치료 대법과 편작 의학의 특징인 오색진에 관한 상세한 논술이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중 어떤 조문에는 "황제가 편작에게 물었다(黃帝問扁鵲曰)"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산번방』 전본의 "양공이 편작에게 물었다"와는 뚜렷이 다르다. 고서 전본 유변(流變, 흘러 변함)의 규칙에 따르면, 문답을 주고받는 성명의 다름은 전본을 식별하는 중요한 정보가 된다. 『사기·편작창공열전』에서 "황제와 편작의 맥서"라는 언급과 연관 지어 볼 때, 창공이 전수받은 전본 역시 "황제가 편작에게 물었다"라는 문답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기본적인 판단을 얻을 수 있다.

  1. 첫째, 『영추·경맥』에 전승된 "성하면 사하고, 허하면 보하며, 성하지도 허하지도 않으면 경에서 취한다"라는 명언의 저작권(Copyright)은 편작 학파에 귀속된다.
  2. 둘째, 오색진(五色診)은 편작 의학의 '특허(Patent)'이며, 『천금익방』이 인용한 편작 의적 판본은 『영추·오색』 편에서 채택한 판본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다.

전세본(傳世本) 『소문』 중 “著至教论”、“示从容论”、“疏五过论”、“征四失论” 등 7편의 글에는 『사기·편작창공열전』에 등장하는 진맥 술어 및 관련 서목(書目)들이 빈번하게 출현하는데, 이는 모두 편작 의학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시사한다. 이 7편이 『소문』 내에서 갖는 특수성은 바로 "황제와 뇌공(雷公)의 문답" 형식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영추』 중 "황제와 뇌공의 문답" 형식으로 서술된 「경맥」, 「금복」, 「오색」 3편을 살펴보면, 뒤의 두 편은 서로 인접해 있고 「경맥」 편은 「금복」의 글을 명확히 인용하고 있어 세 편의 연관성이 매우 긴밀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색」 편은 학술 사상 및 망색(望色)의 기술이 편작 색진(色診)과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그 속의 "황제·뇌공 문답" 내용은 그야말로 『천금요방』이 인용한 "양공(襄公)·편작 문답" 전본의 복사판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를 종합할 때, 우리는 행간에 깊이 숨겨진 중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된다. 만약 전세본 『황제내경』의 "뇌공·황제 문답" 편에 등장하는 "뇌공"을 "양공"으로 바꾸고, "황제"를 "편작"으로 바꾼다면, 그 속에 깊이 숨겨진 편작 의적의 주된 윤곽이 선명해질 것이다. 『소문』과 『영추』의 다른 편들까지 더하면, 총 24편이 편작 의적을 통째로 혹은 문단별로 인용하고 있다. 이로써 『황제내경』은 편작 의적을 가장 많이 인용한 전세 문헌임이 증명된다. 다만 인용 시에 개편을 거쳤기에 『맥경』이나 『산번방』처럼 원문을 그대로 수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편 『난경』을 살펴보면, 『난경』이 풀이한 '경문(經文)' 중 상당수가 『맥경』이 인용한 편작 의적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해당 서적의 편찬자가 인용한 경문의 의미조차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편찬자가 편작·창공 시대와 시간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거나, 혹은 본래 편작 의학의 직계 전수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전을 풀이하는 책으로서 경문을 사사로이 고쳤을 가능성은 낮으며, 오히려 『난경』이 채택한 것이 편작 의서의 말기 전본(傳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그 학술 사상이 초기나 중기의 편작 의학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2) 편작 의학의 전승 발자취

 

위의 논의를 근거로, 우리는 편작 의학의 네 가지 발자취이자 편작 의학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네 가지 맥락을 도출할 수 있다. 전세(傳世) 의적에 남아있는 편작 의적의 일문(佚文)들을 그 문답 주체와 시간적 선후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서로 다른 전본(傳本)으로 개괄할 수 있다.

  1. "편작 가라사대(扁鵲曰)" 판본: 『맥경(脈經)』에 전해지는 내용.
  2. "양공이 편작에게 물었다(襄公問扁鵲曰)" 전본: 『산번방(删繁方)』에 전해지는 내용.
  3. "황제가 편작에게 물었다(黃帝問扁鵲)" 전본: 창공(倉公)이 전수받고 『천금익방(千金翼方)』에 전해지는 내용.
  4. "뇌공이 황제에게 물었다(雷公問黃帝)" 전본: 현재 전해지는 판본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 전해지는 내용.

이로부터 추단할 수 있는 것은, 창공이 당시에 전수받았던 편작의 『맥서(脈書)』 상하경의 주된 내용이 왕숙화의 『맥경』에 편집 수록되었으며, 전세본 『황제내경』에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 말기 전본의 일부 내용은 『난경(難經)』에 보존되어 있다. 『오색진(五色診)』은 『맥경』, 『산번방』이 인용한 "양공-편작" 전본, 『천금익방』이 인용한 "황제-편작" 전본, 그리고 『영추·오색』 편을 통해 전승되었다. '약론(藥論)' 부분의 내용은 『소문·탕액요례론』과 『산번방』에 의해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의 깊은 곳에 실종된 것은 편작 의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식별해낼 수 있는 '지문(指纹)'이었다. 편작 의학은 한편으로는 제(齊)나라 의가들에 의해 전승되어 당대(唐代)까지도 대량의 서로 다른 전본들이 일문의 형태로 유통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대 의학 통합의 결정체인 『황제내경』이 바로 편작 의학을 주체로 하여 재구성된 것이다.

 

4. 전승의 부흥: 제나라 의학(齊醫)이 중국에서 실천해 온 3,000년의 역사적 사명

 

1) 『황제내경』은 편작 의학에 대한 계승과 발전이다

 

편작 의학은 이론, 진법, 치칙(치료 원칙), 치법(치료 방법) 및 양생을 하나로 아우르는 의학 체계이다. 편작 의학이 창시한 사진법, 침자 기술, '치미병(治未病, 병이 되기 전에 치료함)' 사상, 인본주의 이념, 그리고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고 치료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決死生, 定可治)" 치료 효과의 확정성에 대한 추구는 지난 수천 년간 침구학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편작과 그의 맥학을 계승한 순우의(淳于意, 창공), 그리고 그들의 스승인 长桑君、公乘阳庆、公孙光, 편작의 맥서를 전수한 왕숙화 등은 모두 제(齊)나라 사람이다. 만약 지역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이를 '제나라 의학(齊醫學)'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편작 의학의 번성과 쇠퇴를 통해 우리는 동의학 발전의 한 가지 기본 모델을 볼 수 있다. 바로 '통합과 집대성(整合集成), 그리고 시대와 함께 나아감(與時俱進)'이다. 『황제내경』과 편작 의학의 관계는, 장중경의 『상한론』과 한대(漢代) 편작 의학의 상한방론(傷寒方論)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계승과 발전의 관계이다.

왜 장중경의 『상한론』은 나중에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편작의 '방학의 종주(爲方者宗)'라는 지위를 대체하며 상한학설의 성전이 되었는가? 그것은 주로 『상한론』의 육경변증(六經辨證) 이론 체계가 더욱 선진적이었으며, 상한증의 진료 실천을 지도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대 이전의 여러 의학 유파 중에서 편작 의학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한대 이후 『황제내경』이 신속하게 의학의 정종(正宗)이자 주도적 위치가 되었는데, 이 의학 경전 속에서 편작 의학은 두 가지 형식으로 통합되었다.

  1. 새로운 이론 체계(프레임워크)와 호환되는 내용: 직접적으로 채택됨.
  2. 그렇지 않은 내용: 소재로서 채택되어 새로운 이론에 적합하도록 개편됨.

어찌 보면, 편작 의학이 『황제내경』과 맺는 관계는 '순종(純種)과 잡종(雜交, 융합)'의 관계와 같다. '잡종'이라는 융합 과정을 통해 편작 의학은 사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생명(新生)을 얻었으며, 더욱 광활한 시공간 속에서 한층 심원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2) 편작 의학 연구의 현실적 의의

 

오늘날 우리가 편작 의학을 연구하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상한론(傷寒論)』 이전의 여러 의가들의 상한(傷寒) 의미를 다시 찾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다. 『상한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듯, 『황제내경』 역시 마찬가지다. 중의학에 대하여 우리는 그 부모(직계 소스)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조부모(뿌리)까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출토된 문헌과 유물을 정확히 해석하는 데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한다. 이미 출토된 마왕퇴, 장가산, 노관산의 의학 문헌들은 만약 전세(傳世) 문헌에 근거하여 편작 의학의 '지문(指纹)'을 정확히 추출해내지 못했다면, 이번에 출토된 편작 의적의 서명(또는 편명)을 확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 문헌들이 과연 편작 의적에 속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며, 정확한 해석은 더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산동에서 출토된 한나라 화상석(画像石)의 경우, 편작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없었다면 40여 년 전 유돈원(劉敦願) 선생이 네 점의 '편작침구행의도(扁鵲針刺行醫圖)'를 알아채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편작 의학의 '지문'을 정확히 추출해내지 못한다면, 이 네 폭의 그림에 가려진 마지막 베일을 벗겨낼 수 없다.

 

셋째, 전해 내려오는 중의학 전적들을 복원하고 정확히 해석하는 데 비범한 의의가 있다. 예를 들어 『편작창공열전』, 『황제내경』, 『유연자귀유방(刘涓子鬼遗方)』, 『천금요방』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기초가 있기에 "편작 의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중의학 이론의 맥락, 특히 고전 침구 이론 체계 전체가 형성되고 발전해온 맥락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날 화타(華佗)의 오금희(五禽戲)는 이미 세계유산 신청을 통해 제3차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무형문화재)이 되었다. 노관산에서 출토된 편작 의서【주2】를 계기로 우리 역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편작 의서가 왜 (제나라가 아닌) 사천성 노관산에서 발견되었는가? 제나라 문화권의 영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우리는 어떻게 편작 의학의 정수(精髓)가 되는 요소들을 정리하고 계승하여, 제나라 문화의 명함과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가?

 

기쁘게도 '제의(齊醫) 중국' 대형 공익 활동을 비롯하여 중국 의학 발전에 뜻을 둔 수많은 인사가 발굴, 통합, 승화, 전시 및 전파 과정 속에서 편작 의학 및 제나라 의학 문화 전승을 위해 유익하고도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천시, 지리, 인화의 유전자는 편작 의학의 초석으로서의 지위를 만들었으며, 편작 의학이 제나라 문화의 파생에서 전성, 실락, 나아가 재굴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증인이 되게 하였다. 이 두 가지(의학과 문화)의 혈맥 교융은 제나라 땅 3,000년 역사의 강물 속에서 문명의 주된 맥락을 공동으로 성취해 냈다.

 

그러므로 편작 의학이라는 천 년의 보물창고를 발굴하고 선양하는 것은 의학적 사명일 뿐만 아니라, 제나라 문화를 크게 드높여야 하는 역사적 책임이기도 하다.

 

【注一】白氏中医:游走在“融”“创”之间的百年医道,网址:http://www.northnews.cn/2015/0408/1902143.shtml

【注二】成都老官山疑似出土扁鹊医书,网址:http://xh.xhby.net/mp2/html/2013-12/27/content_923908.htm

 

 

 

*관련 자료

·陆寿筠:关于《论道家的内圣外王和禅宗的不执著》一文的对话

·黄龙祥:中国医学之宗的失落与重生

·寻找禅宗的足迹(视频)

·秋风:唐太宗的钓鱼式执法

·张松辉:论道家的内圣外王和禅宗的不执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