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중국 침구 이야기

1950년대 중의학의 재건 : 「弁証論治」의 성립

지운이 2019. 9. 10. 15:56

1950년대 중의학의 재건 : 「弁証論治」의 성립

 

청말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의 시기에 근대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전파된다. 더불어 국민당정부는 서양의학 도입에 앞장서고 전통의학 폐지운동을 벌이기도 하여 중의학*)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清末 이후 연이은 전란 속에 전통의학은 국민당정부의 전통의학 폐지운동에 거의 괴멸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일반화된 ‘중의’(중의학, 중의사 등을 포함하여)라는 말도 이 시기 유입된 서양의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이 중국의 전통의학을 자신들의 서양의학과 구별하여 ‘중의’라 불렀다고 한다. 清朝가 무너지고 1936년 中華民国政府가 수립된 다음 ‘중의’가 법적인 명칭이 된다.

 

전통의학 폐지운동은 서양과의 교류에 앞섰던 일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일본의 明治정부는 이미 1875년 한의의 폐지를 선언하고 이후 서양의학을 중심으로 한 의료체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일본을 다녀온 중국의 선진 지식인들이 그 폐지에 앞장섰다고 한다. 물론 일본도 명치 후기에 이르면 전통의학이 다시 연구되고 침구치료도 부활하며 서서히 복권이 되지만..

 

일부 선진적인 의가는 서양의학을 연구하고 中西医学의 교류를 도모한 사람도 있었다.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이 唐容川인데, 서양의학의 해부생리학에 의거해 중의학이론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20세기 초에는 이러한 中西交流派 의가가 증가하여, 중약과 양약을 병용하게 되었다.

 

그 후 우여곡절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전통의학 부흥이 국책으로 설정되며 다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렇게 재정립된 것이 이른바 ‘중의학’이다. 특히 혁명과정에서 중의학 기여가 인정되었을 것이다. 공산당정부는 '古為今用'의 精神을 기치로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전통의료인들을 「老中医」이라 칭하긴 하였으나 그들 대부분은 가업이거나 마을에서 전해져 온 민간의 生薬方이나 鍼灸方이었다. 정부는 이들을 불러 모아 재교육하여 제도화하는 한편, 毛沢東의 강한 의지를 토대로 전통의학이 정리 통일되고 ‘중의학’이론도 확립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1955년 中国中医科学院(China Academy of Chinese Medical Sciences)이 창립되고 이후 1979년 中華中医薬学会(China Association for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원래는 中華全国中医学会)가 창립된다.

 

그리고 1958년 교과서가 편찬되고(南京中医学院의 『中医学概論』), 1959년 통일교과서 교육이 정립된다. 이를 ‘중의학’이라 하는데, 이전까지의 전통의학을 ‘중국의학’이라 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이는 재현성이 있고 안정된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처방을 표준화하려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의학이 새롭게 재건되는 과정은 공산당정부의 전통의학 부흥 의지에 의존한 바가 크다. 1950년대 중의학 재건 과정에서 중의이론이 전개되어 온 주요 흐름을 짚어 보고자 한다.

 

1950年代 中国鍼灸에서는 朱璉(hu Lian, 1910-1978)이라는 女医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毛沢東이 아끼던 그녀는 파블로프学説에 기초한 神経学説의 鍼을 하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흐름은 1958年8月30日에 上海市 第一人民医院 耳鼻咽喉科에서 尹恵珠主任医師에 의해 合谷을 활용한 扁桃腺 摘出手術 시의 침마취라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물론 저 유명한 1971년 전세계에 공개된 침마취 수술 역시 이 흐름에 있다.

 

朱璉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침술의 재건에도 불구하고 西洋医学에 편중한 풍조가 중시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承淡安의 활약으로 경락이 붐을 이루게 된다(1955년). 그는 흥미롭게도 일본의 침구학 책을 번역 소개하게 되는데, 이것이 경락붐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예컨대 대표적인 것으로 『針灸真髄』, 『経絡の研究』(長浜善夫)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전통적으로 건재했던 気功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48年 劉貴珍(1902-1983)先生이 河北省(北戴河气功疗养院)에서 共産党 간부를 気功으로 치료하여 신임을 얻게 된 것이 계기 되었다고 한다. 이어 일련의 정책이 공산당 주도로 급속히 전개된다.

 

1950年 中国 「第1回全国衛生会議」에서 西洋医師로 하여금 中国医学을 배우도록 했고, 伝統医師도 西洋医学을 배워야 한다는 방침이 확인되었다.

1954年에는 毛沢東이 「祖国医学의 遺産을 継承発展시키자(繼承與發展祖國醫學遺產)」、「西洋医師는 中医를 배우자(西醫學習中醫)」라고 제창하였다. 이러한 方針 전환에 의해 「唐山市氣功療法所」가 설립되고, 劉貴珍先生이 西洋医師에게 気功을 가르쳤다고 한다.

1955年12月, 唐山気功研究그룹은 祖国医学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하여 中醫研究院 創立式에서 상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劉貴珍先生의 気功에 관한 논문이 『中医雑誌』에 개재되었다.(劉貴珍, ’ 在實驗研究中的中醫氣功療法, 中醫雜誌 10 (1955): 22–23.)

 

1955年 承淡安이 일본 長浜善夫의 『経絡の研究(经络之研究』를 번역 출판하였다.

1955年 任応秋(1914~1984)이 『中医雑誌』에 「中医的弁証論治的体系」를 발표하고, 『弁証論治』를 제창하였다.(伟大的祖国医学的成就. 中医杂志,1955,(2):1.)

1956年, 北京・上海・広州・成都에서 中医学院이 창설되었고, 또 西洋医師가 2年間 伝統医師 아래에서 배우도록 하는 제도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1956年에는 南京中医資進修学校에서 呂炳奎가 편집한 『中醫學概論』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이 『中醫學概論』에 気功이 全面的으로 採用되어 수록되었다. 이것이 世界 최초의 中医学 文献이 되었다.(『中国漢方医学概論』 南京中医学院編 中国漢方医学概論刊行会 (1965年) http://amzn.asia/aHFpGdL)

 

1957年 秦伯未(1901-1970)가 「弁証論治概説」에서 弁証論治를 中国伝統医学의 본질이라 논하였다.(秦伯未.中医“辨证论治”概说.江苏中医,1957,(1):2.)

1957年 任応秋(1914―1984)가 『中医病理学概論』을 출판하게 된다. 表裏寒熱虚実陰陽의 八綱弁証을 기본으로 배치하였다.(中医病理学概论.上海:上海卫生出版社,1957.1.)

1958年に陸痩燕(1909-1969)이 『江蘇中医』에 「鍼灸医学的発展道路」를 발표, 鍼灸弁証論治의 흐름을 발전시켰다.

1958年 承淡安先生의 『現代針灸資料選集』 역시 그 흐름 속에 있었다. 秦伯未(1901-1970), 鄭魁山(1918-2010) 등의 針灸 관련논문을 모은 귀중한 책으로 남아 있다.

 

1965年부터는 文化大革命이 시작되었고, 1980年代까지 中国은 다시 文化의 暗黒時代가 된다. 침구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혁 후에는 다시 서양의학 도입이 확대되고, 심장수술에까지 적용했다던 침마취조차 활용이 크게 줄어들고 만다.

 

 

이렇게 「弁証論治」라는 진단시스템은 1950年代 共産党 정권 아래에서 탄생하였다. 「弁証論治」의 진단은 전통적 '사진'법의 변증론에 기반하긴 하지만, 현대의학적 병리학적 사고도 중첩되어 발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오행적 사고는 교과서에서 거의 사라져 간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後漢의 『傷寒雑病論』에는 「平脈弁証」이라는 章이 있는데, 바로 六経弁証의 原型이라 할 것이다.

元代 滑寿가 지은 『読素問鈔(读素问钞)』(1513年)에도 「論治」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

明代 周之干(1503-1586)이 지은 『慎斎遺書』에도 「弁証施治」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清代、章虚谷(zhāng xū yù)가 지은 『医門棒喝』(1825年)에서 처음으로 「弁証論治」라는 용어가 文脈 속에서 사용됨을 볼 수 있다.

 

* * *

 

한편 이후 공산당정부는 중의학의 과학화를 중시하여 중의와 서양의학을 결합시키는 의료행정의 지도이념도 내세웠다. 그로 탄생한 것이 이른바 ‘中西医結合醫學’으로, 중의학과 서양의학의 상호 결합을 도모하며,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제거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술 전이나 수술 중 刺鍼을 하여 마취 효력을 도모하는 침마취는 中西医結合의 대표적인 성과이기도 하다.

 

중서의결합 속에서, 침구는 '조국의학'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서양의학의 영향 하에 침구도 현대병리학을 기반으로 한 치료로 변화되어 가면서 어쩌면 서양의학의 한 방편으로 역할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예컨대 해부학에 기초한 신경 주행부 자침, 병인부 근처로 여겨지는 화타협척혈 중시, 해부학 기반의 임상실천에 의거한 신혈 등의 침구 임상은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예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이후 중의학의 재부활 속에서 중국침구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남게 된다. 대체로 신경계 및 운동기계 질환은 침구로, 내장계 질환에서는 침구 감소, 또 외과계질환에서는 보조요법으로 자리매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신경주행부를 강조하는 경향은 '소수혈/강자극'이라는 중국침구의 특징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마도 조직학적으로나 구조학적으로 원인을 식별하는 보편성 높은 병리학이 전통적 증후학 보다 인체의 실체를 잘 반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즉 해부학 및 병리학을 기반으로 한 치료 접근이 보다 양호한 예후로 이어지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경혈에 약물을 주입하는 치료의 발달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경혈의 해부학적 구조나 실체가 밝혀지며 원인부에 약물을 직적 주입하는 치료방식이 가능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침법, 두침법, 면침법 등의 발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두침법은 각종 뇌관련질환이 대뇌피질의 지각구나 운동구의 문제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두침법이 소개되어 다양하게 활용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출발점에서의 문제의식을 도외시한 채 그 용례에만 눈길을 돌리고 있어 안타깝다.

 

한편 중의학도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아 中医内科、中医外科、中医婦人科、中医小児科 등 세분화되고, 중의사 자격도 약물 중심의 중의사와 침구 중심의 중의사로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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