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3
조선시대의 민중의(民衆醫)
-김명관 부산대교수/ 신동아(03/1월)
어떤가. 감동스럽지 않은가? 이 한미한 의원의 말에 의업의 정도(正道)가 있지 않은가? 필자는 요로결석으로 한동안 고생을 하였다. 서울의 유명한 대학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그 거룩하신 비뇨기과 과장님께서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환부를 깊이 찌른다. 너무나 고통스럽다. 고통을 참는 소리가 이빨 사이로 스며나오자, “아파? 아프긴 뭐가 아파?” 대놓고 반말이다. 사람대접이 아니다. 통증으로(결석의 통증은 대단하다) 밤을 꼬박 새는 고통을 겪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런 식의 막말이라니, 나는 병원을 나오면서 다시는 이 병원을 찾지 않으리라 하였다. 환자는 인정없는 의사, 매몰찬 간호사, 관료적인 병원의 시스템, 복잡한 조사와 거대한 의료기기가 주는 공포감에서 이미 절반은 죽는다. 어디 조광일 같은 헌신적 의원은 없는가?
비슷한 시기에 정래교(鄭來僑)가 지은 ‘백광현전(白光炫傳)’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작자 정래교도 흥미로운 사람이다. 양반은 아니고 중인에 속하는 인물인데, 중인 중에서도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시인이었으나, 신분의 장벽에 막혀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가 의원의 전(傳)을 지은 것도 자의식의 반영일 것으로 생각된다. ‘백광현전’에 의하면 백광현은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사람이다. 한의학은 원래 외과 수술이 발전하지 않은 의학이다. 종기의 치료도 외과적 방법에 의한 치료술이 드물었던 바, 그는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종기 치료사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
백광현은 원래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馬醫)였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원도 별 볼일이 없는데, 마의라니 지체가 형편없이 낮았던 것이다. 마의로서 그는 말의 병을 오로지 침을 써서 고쳤고 의서는 보지 않았다. 정통적인 의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침으로 말의 병을 다스리는 기술이 진보하자, 사람의 종기에도 시술해 보았더니 효험이 있었다. 그는 이내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수많은 종기의 증상을 보면서 의술이 더욱 정심해졌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임상경험이 풍부해졌던 것이다.
하필이면 종기인가? 지금은 종기가 나는 경우도 적고 병 취급도 않지만, 해방 전까지도 종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큰 병이었다. 종기에 관한 한 불후의 명약인 ‘이명래고약’이 없었더라면 저승에 갔을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종기의 역사는 장구하다. 2000년 전 사마천은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종기에 관한 인상적인 이야기를 남겼다. 장군 오기가 졸병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주자, 그 소식을 들은 졸병의 어머니가 펑펑 운다. 옆에 있던 사람이 장군이 종기를 빨아서 치료해 주었으니 영광이 아니냐, 왜 우느냐 하니, 어미 말인즉 저 아이의 아버지도 오기 장군이 종기를 빨아주자 감격한 나머지 전쟁터에서 돌아설 줄 모르고 싸우다가 죽었노라고, 그러니 저 아이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종기를 한번 빨아주고 부하의 목숨을 손에 넣다니, 끔찍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시라. 오늘 누가 당신의 종기를 빨아주는가?
과격한 종기 치료술
종기는 요즘 들어 흔한 병이 아니지만, 필자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큰 병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하다. 조선시대에 효종과 정조는 종기로 목숨을 잃었다. 제왕의 권력도 조그만 종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종기가 이토록 큰 병이다 보니, 조선전기에는 종기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종청(治腫廳)’이란 관청까지 있었다. 종기는 참으로 심각한 병이었던 것이다.
백광현의 종기 치료 장면을 보자.
독기가 강하고 뿌리가 있는 종기는 옛 처방에 치료법이 없었다. 광현은 그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큰 침을 써서 종기를 찢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침을 너무 사납게 써서 간혹 사람들이 죽기도 했지만, 효험을 보아 살아난 사람이 또 많았기 때문에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집으로 몰렸다. 광현 역시 자신의 의술을 자부하여 환자의 치료에 더욱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명성을 크게 떨쳐 그를 신의(神醫)라고 불렀다.
과격한 치료술이다. 침을 써서 절개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칼 같은 것으로 종기의 뿌리까지 절개했을 것이다. 외과적 방법인 것이다. 정래교는 “종기를 절개해 치료하는 방법은 백태의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니, 그는 종기의 외과적 치료의 신기원을 열었던 것이다.
정래교는 백광현을 백태의(白太醫)라고 부르고 있다. 태의는 곧 어의(御醫)다. 민간의 무면허 의사 백광현이 어떻게 내의원 의관이 되었는지 그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내의원 의관이란 원래 의과 출신들이 차지하는 법이고, 또 의과란 대개 의원을 세습하는 가문 의과중인들이 독점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의 의원이 의술이 탁월할 경우 내의원 의원이 되는 길도 열려 있다. 내의원에 소속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대로 의원을 하는 집안에서 의과를 통과해 내의원 어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본원인(本院人)이라 한다. 둘째는 의약동참(醫藥同參)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대부부터 미천한 사람까지 의술만 좋으면 모두 보임될 수 있는 것이다. 백광현은 아마 후자의 길을 밟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과방목(醫科榜目)에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숙종 21년 12월9일 숙종은 백광현을 각기병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에게 보내는데, 이날 실록은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奇效)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라 하고 있다. 아마도 종기를 치료하는 능력 때문에 내의원에 들어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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