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조선의 동의학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4

지운이 2020. 1. 16. 12:26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4

   조선시대의 민중의(民衆醫)

 

  -김명관 부산대교수/ 신동아(03년 월호)

 

백광현이 내의원 의원이 된 것은 현종 때다. ‘현종개수실록’ 11년 8월16일에 현종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를 하는데, 백광현이 거기에 처음 보인다. 그는 공이 있을 때마다 품계가 올랐고 마침내는 현감까지 지낸다. 숙종 10년 5월2일에 왕은 그를 강령 현감(康翎縣監)에 임명했다가 이어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의원이 현감이 된 것은 대단한 출세다. 사람이 이쯤 출세하면 교만해지게 마련이다. 민중을 치료하는 것으로 의업을 시작했던 백광현은 귀한 몸이 된 뒤에도 초발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병자를 보면 귀천과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다. 누가 부르면 즉시 달려갔고, 가면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기량을 다 쏟아 환자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보고서야 그쳤다. 나이가 많고 귀하신 몸이 되었다고 게으른 적이 없었으니, 기술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원래 타고난 성품이 그랬던 것이다. 

임금의 병을 고치는 귀하신 분이 되었다 하여 민중에 대한 헌신적 의료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민중의(民衆醫)로서의 모습이 약여하지 않은가? 무릇 의원이란 이래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종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백광현이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개발했다면, 고약으로 유명한 종의도 있다. 피재길(皮載吉)이란 사람이 바로 그인데, 역시 홍양호가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이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정조는 1793년(정조 17년)에 머리에 작은 종기가 났다. 침을 쓰고 약을 썼지만 종기는 점차 얼굴과 턱 등으로 번져나갔다. 무더운 여름철이었다. 기거동작(起居動作)이 편할 리가 없다. 방치하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종기다. 내의원에서 별별 방도를 다 썼으나 종기는 번져갔다. 이토록 위급한 순간에 누군가 피재길의 이름을 아뢴다.

피재길은 원래 의원 가문 출신이다. 중인의 족보를 모은 ‘성원록(姓源錄)’이란 책이 있는데, 여기에 의원 가문으로서 홍천(洪川) 피씨의 가계가 나온다. 하지만 피재길의 이름은 없다(다른 載자 항렬의 인물들은 물론 있다). 이건 다분히 그의 가정적 이력과 관련이 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지 못했고, 의서는 아예 읽은 적이 없었다.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의원노릇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 생전에 보고 들었던 처방을 그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처방이란 것은 딴 게 아니라 고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배운 의술로 오만 가지 종기에 듣는 고약을 팔며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근본 없는 의원인 탓에 의원이란 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약은 잘 들었다. 양반가에서도 이 근본 없는 의원을 불러 고약의 효험을 보곤 했다고 하니, 그는 애초 양반가가 아니라 민중의 세계를 떠돌던 민중 의원이었던 것이다. 


떠돌이 약장수의 벼락출세 

정조는 피재길을 불렀다. 길거리의 떠돌이 고약장수가 지엄한 분을 뵙다니, 땀이 쏟아지고 온몸이 벌벌 떨린다. 말문이 막힌다. 정조는 이 약장수를 안심시킨다. “두려워말고 네 의술을 다 발휘해 보도록 하라.” 약장수는 “신에게 한 가지 써볼 만한 처방이 있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웅담을 주재료로 한 고약을 만들어 올린다. 

이것이 이른바 웅담고다. 환자(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하자, “하루면 통증이 가라앉고 사흘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고 답한다. 과연 말과 같아 사흘이 지나자 깨끗이 나았다. 명의가 따로 없다. 묵은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고마운 일이 있으랴? 왕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을 붙이고 조금 지나 전날의 통증을 씻은 듯 잊었다. 지금 세상에 이런 알려지지 않은 비방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하였다. 의원은 명의라 할 만하고 약은 신방(神方)이라 할 만하다. 그의 노고에 보답할 방도를 의논해 보라.” 

내의원 의원들은 그를 내의원 침의(鍼醫)에 차정하고 6품의 품계를 내려 줄 것을 아뢰니, 정조는 당연히 허락하였다. 이어 나주감목관(羅州監牧官)이 되었다. 떠돌이 약장수의 벼락출세가 아닌가? ‘정조실록’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皮載吉)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재길을 약원(藥院)의 침의(鍼醫)에 임명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7년 7월 16일) 

정조는 그로부터 7년 뒤(정조 24년 6월)에 종기로 죽는다. 피재길 역시 정조의 치료에 참여했지만, 이번에는 효험이 없었다. 왕이 죽고 나면 치료를 담당했던 의원을 귀양 보내는 전례에 따라 피재길은 무산부(茂山府)로 귀양을 갔다가 순조 3년 2월에 석방되었다.

피재길이 정조의 종기 치료에 쓴 웅담고는 마침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고 하니, 어떤가? 요즘 세상이라면 특허신청부터 하고 값을 턱없이 올려받아 돈벼락을 맞을 궁리부터 하지 않았을까? 다른 의원이 웅담고를 만들어 쓰면 환자야 죽든 말든 고소부터 하지 않았을까? 피재길 이야기를 하니 이명래고약이 생각난다. 이명래의 고약으로 살아난 사람이 그 얼마였던가?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짐작하실 것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정조의 치료에 참여했던 민간 의원이 또 있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실린 이동(李同)이란 사람이다. 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으나 역시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사람은 정조의 치질을 치료한 적이 있는데, ‘환부’를 부복해 들여다보느라 대머리가 되어 상투를 짤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존의 항문을 정확하게 들여다본 것은 이동이 역사상 최초일 것이다. 이런 수고 덕에 정조의 치질이 완치되었고, 정조는 탕건을 하사하고, 아울러 호조 돈 10만 전을 내렸다. 이동도 아마 민간에서 얻은 명성으로 동참의원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