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탕 이야기는 그야말로 신비스러움으로 착색된 이야기다. ‘전설의 고향’에는 나올지 몰라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청구야담’에는 한 가지 얘기가 더 있다. 유상이 입궐하여 진찰을 하고 저미고(猪尾膏)란 약재를 쓰기로 하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준제(峻劑·약성이 강한 약)라며 쓸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아무리 청해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유상은 소매 속에 몰래 약을 넣고 들어가 쓰니, 병세가 누그러졌고 이내 회복되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후자가 좀더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전염병에 관한 의원 이야기는 제법 여럿 남아 전한다. 정조대의 문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예의홍익만전(例醫洪翼曼傳)’이란 전을 남겼다. 주인공 홍익만은 특별하게도 전염병 전문의인데 그의 인간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는 가슴 속에 경계를 두지 않아 성품이 툭 트였고 사람의 위급함을 보면 비록 평소 모르는 사이라도 오직 그 급한 처지를 구원하려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품이었기에 그는 임술년(1742, 영조18)과 계해년(1743, 영조19) 전염병이 돌았을 때 치료하여 살린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홍익만이 어느 날 밤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일흔쯤 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이 고장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러고는 추운 날에 피곤하실 터이니 자신의 집으로 가서 박주(薄酒)일망정 한 잔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을 건넸다. 익만이 노인을 따라 한참을 갔더니 노인은 홀연 보이지 않고, 움집에 시신 네댓이 가로 세로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그를 인도했던 노인이었다. 그리고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술 한 병이 시렁 위에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신 뒤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고 떠났다.
이 이야기도 전염병이 돌던 상황을 배경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으로 죽은 노인이 술을 미끼로 자신을 묻어줄 사람을 이끈다는 비합리적인 설정이지만, 전염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홍익만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을 두려움 없이 묻어주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익만이 민중을 위한 의원이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홍익만 역시 정통 의원 출신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홍국신(洪國藎)으로 숙종 때 비변사 서리였다. 당대의 세도가이던 허적(許積)의 명으로 문서를 기초하는데 글자를 한 자 잘못 쓰니 허적이 지적하여 꾸짖었다. 홍국신은 붓을 던지고 그렇게 글을 잘 지을 수 있다면 왜 서리가 되었겠냐고 대드니 허적이 어쩌지 못하고 용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홍국신은 원래 허적의 인간됨을 미워했던 것이다.
홍익만은 홍국신의 아들이다. 서리 집안 출신인 것이다. 의원과 서리는 아예 계통이 다른 집안이다. 아마도 홍익만 역시 어떤 계기로 하여 의학을 익혔을 것이다. 그가 정통적 의원 집안 출신이었다면 이런 민중의로서의 의식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6
조선시대의 민중의(民衆醫)
-김명관 부산대교수/ 신동아(03/월호)
한의학 부정한 정약용
홍익만의 이야기에는 전염병을 직접 치료하는 부분이 없다. 하지만 다산의 경우라면 약간 다르다. 정약용은 이헌길(李獻吉)이란 사람을 다룬 ‘몽수전(蒙?傳)’이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물론 의원으로 뛰어났던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기로 하고 먼저 다산의 의학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다산은 그야말로 백과전서파라 의학에도 적지않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대충 꼽아보면 ‘의설(醫說)’ ‘종두설(種痘說)’ ‘맥론(脈論)’ 등의 논문이 있고, ‘마과회통(麻科會通)’과 같은 천연두 치료법을 다룬 저술이 있다. 이들 중 상당한 부분은 한의학을 부정하고 있다. 한의원에 가면 손목의 맥을 살피는 진맥부터 하는데, 다산은 이 진맥을 부정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맥을 가지고 오장육부를 진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약간 인용해 보면 이렇다.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어찌 반드시 오장과 육부로 하여금 그 모습을 손목 위에 환히 벌여놓게 하여 사람에게 이를 진맥하게 하겠는가?”
‘육기론(六氣論)’에서는 오행설까지 부정해버렸다. 이쯤 되면 한의학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겠는가? 다산의 의학은 상당 부분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 ‘종두설’과 ‘마과회통’은 제너(Edward Jenner)의 종두법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근시론’에서는 종래 한의학의 음양오행으로 근시 원시를 설명하던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안구의 평돌(平突)에 의해서 근시 원시가 결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 중에 한의사가 있다. 십 년 전에 몸이 좋지 않아 찾아갔더니 진맥을 한 뒤 약을 지어놓겠노라 하면서 앞으로 술 담배를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진하게 하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다. 가야겠다고 하니 병원문을 닫는다. 같이 나가서 한잔 하잔다.
“야, 너 나보고 술먹지 말랬잖아!”
“의사하고 먹는 술은 괜찮아!”
어쨌거나 그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흠뻑 취했다. 그런데 이 친구 술자리에서 다산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실학자라서 대단한 줄 알지만 의학 쪽은 형편없이 무식한 사람이라고. 다산의 위의 이야기를 보면 그 친구가 화를 낸 이유를 알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몽수전’의 주인공 이헌길은 정종(定宗)의 후손이고, 이철환(李喆煥)의 제자이다. 이철환은 성호 이익의 손자뻘이다. 그러니 성호학파에 속한 인물이고, 다산과도 관계가 아주 없지 않다. 다산은 어렸을 적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이헌길의 치료로 천연두를 순하게 앓았다. 오른쪽 눈썹 위에 가볍게 마마 흔적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누어졌다. 다산은 자신이 10세 이전에 ‘저작’한 시문을 모아서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 했으니, 마마의 흔적으로 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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