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외국 제약회사가 압력을 넣어 보건복지부 장관이 그만두었느니 아니니 하며 세상이 시끄러웠다. 속내가 어떠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이 머리 속을 맴돈다.
약은 사람의 병을 고치자고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약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병을 고치게 된 지 벌써 오래다.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치료제의 값이 너무 비싸 사람이 죽어나가고, 우리나라에서 혈액암의 특효약 글리벡이 너무 비싸 환자들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딱한 사연을 들은 지 오래다. 서구의 제약회사가 개발비를 뽑고,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짓이다. 희귀병에 걸린 사람은 제약회사에서 약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시장성이 없기 때문에 약값이 비싸 결국 포기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결국 치료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 죽는 것이다. 오로지 화폐를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잘못이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뭔가 개운치가 않다. 사람의 목숨이 먼저인가? 돈이 먼저인가?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았을 때 과연 우리는 이 소박한 질문에 쉽게 답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병들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의·약업은 인간의 다른 직종과 견주어 정말 특수하다. 의·약업은 병을 치료하는 직종이다. 병들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의학적 소견으로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해도 앞으로 병이 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죽음이란 병으로 향해 가는 존재인 이상, 의·약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 점에서 의업의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병든 인간, 그리고 병이 들 수 있는 인간이기에 의사 앞에서는 누구나 약자가 된다. 나 역시 책권이나 읽은 인간이고, 학생들 앞에서 공연히 목소리에 힘을 주고 훈시(?)하지만, 의사 앞에서는 육신을 전적으로 맡긴 초라한 ‘환자’일 뿐이다.
나는 조선시대 문헌을 뒤적이면서 의원에 관한 기록을 다소 보았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거니와 요즘 세상에도 같이 읽어봄직한 것 같아 소개한다.
조선초기의 복잡한 의료기관은 성종 대의 ‘경국대전’에서 체계적으로 정비된다. 먼저 궁중에는 TV 사극에서 숱하게 본 내의원(內醫院)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기관은 임금의 약을 조제하는 기관이니, 왕을 제외한 일반 백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전의감(典醫監)이란 곳도 있는데, 이곳은 대궐 내에 필요한 약재의 공급이나 또는 약재의 하사를 관장하는 곳이다. 역시 왕실에 관계된 의약기관인 것이다.
내의원과 전의감의 의료기술 혜택을 볼 수 있는 대상은 왕과 왕비, 세자 등 왕실 가족이나 고급관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통 백성들은 병이 나면 어떻게 치료를 받았던 것인가?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란 곳이 있다. 이 두 관청은 이름부터 재미있다. 혜민서는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고, 활인서는 사람을 살리는 관청이다. 두 기관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경국대전’을 보면, 혜민서는 “서민의 질병을 구료(救療)”하는 기관이고, 활인서는 “도성의 병난 사람을 구료”하는 기관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차이가 선명히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혜민서가 주로 일반 백성의 질병을 담당하는 관청이라면, 활인서는 주로 무의탁 병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돌 때면 임시로 병막(病幕)을 지어 환자의 간호를 담당했다. 그리고 환자가 죽으면 묻어주는 일도 활인서의 몫이었다.
이것이 대표적인 의료기관이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런 기관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 이런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두종의 ‘한국의학사’에 ‘지방의료기관’이란 항목이 있기는 하다. 태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기간에 지방에 의원(醫院) 의학원(醫學院)을 두고 의원(醫員)을 파견했다고 하지만 이 기관들은 뒷날 종적이 묘연하다. 사실 조선시대 지방에는 서울의 혜민서와 활인서 등에 필적하는 공식적 의료기관이 부재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의원이 천시당한 사회
조선시대의 의학을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상의 의료기관을 들고, 또 세종 시대에 엮어진 의학서적(‘향약집성방’과 ‘향약채취월령’과 ‘의방유취’)을 언급한다. 그리고 여기에 허준의 ‘동의보감’과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을 꼽으면서 찬란한 의료사(醫療史), 의학사(醫學史)를 말하지만, 나는 사실 이 점에 대해 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서울에 있던 의료기관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지방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민중은 의료 혜택에서 제외돼 있었다. 더욱이 의학서적은 한문으로 쓰여 있어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이 어떻게 질병과 싸워나갔는가 하는 문제는 의료기관과 의학서적의 발달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차원에서 민중을 위해 의료활동을 했던 민중의(民衆醫)에 주목한다.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