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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5

지운이 2018. 10. 19. 10:40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5

   조선시대의 민중의(民衆醫)

 

  -김명관 부산대교수/ 신동아(03/1월)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

 

이동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그가 썼다는 약재다. 그는 침과 뜸을 기본으로 썼지만, 약만은 독특했다. 그의 처방이란 손톱, 머리카락, 오줌, 똥, 때 같은 것이었다. 풀이나 나무, 벌레, 물고기 따위를 처방한 적도 있는데, 도무지 돈을 쓸 필요가 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그의 주장인즉 이렇다.
 
“제 한 몸에 본디 좋은 약재를 갖추고 있거늘 무엇 때문에 다른 물건을 쓴단 말인가?”
 
약이 될 것 같지 않은 약재의 사용 이면에는 저렴한 비용으로 민중을 구료한다는 절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이동은 의과에 합격한, 정통 코스를 밟은 의원이 아니었다. 그 역시 백광현이나 피재길처럼 민간의 의원으로 출발하여 왕실에까지 알려진 경우로 짐작된다. 나는 이동의 이상한(?) 약재에서 민간요법에 숨어 있는 오묘한 약리보다는 조선시대의 공식 의료시스템에서 제외되어 있던 민중들의 처절한 삶의 의지를 본다.

전염병의 홀로코스트 

종기도 목숨을 거두어가는 시절이었으니, 전염병이라면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정조가 사망하기 1년 전인 23년에 전염병이 돌았던 적이 있다. 이해 전국의 사망자는 모두 12만8000여 명이었다(‘정조실록’ 23년 1월13일).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대량의 사망자는 지금 드물게 남아 있는 통계를 보아도 전염병 때문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천연두·장티푸스·콜레라는 전염병의 삼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세 전염병의 거두는 번갈아 등장하여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  

1821년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평양에 수만 명, 서울에 13만 명이다. 전국으로 따지면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1859년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40만 명이었다. 서양 중세의 흑사병(페스트)만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특히 정조 23년의 전염병에는 정치인들의 죽음이 눈에 띈다. 1월7일에는 김종수(金鍾秀)가, 18일 채제공(蔡濟恭)과 서호수(徐浩修)가 죽었다.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였다.  

서호수는 소론가로 이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서명응(徐命膺)의 아들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에 의해 각 당파의 거두들이 죽었고, 약 7개월 뒤에 정조가 종기 때문에 죽었다. 당쟁의 지도가 일순 바뀐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는 미생물이 만드는 것인가? 어쨌거나 전염병은 조선후기 민간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전염병이 미생물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알려진 것은, 파스퇴르가 탄저균을 발견하고부터다. 미생물과 전염병 사이의 메커니즘이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였으니, 발본적 치료법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전염병이 돌면 정부는 바빴다. 아니 바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란 여제(?祭)를 지내는 것이었다. 국가의 의료기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에서 약제를 공급하는가 하면, 병막을 짓고 병자를 모아 간호했다. 이따금 전염병이 돌았던 곳에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은 없었다. 전염병이 저절로 그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와중에 정부가 아닌 민간인이 전염병의 구제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 정조 15년과 16년 사이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을 때 황해도 재령(載寧)의 김경엽(金景燁)이란 사람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는데, 이 사람은 매번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준 것이 거의 1000명에 가까웠기에 표창을 받은 것이었다(‘정조실록’ 16년 2월28일).

명의의 전설이 탄생하는 배경 

전염병이 돌면 의원에 관한 전설이 생긴다. 죽음을 앞에 둔 환자와 가족의 마음은 약해진다. 그 허약해진 심리의 대지에서 우연과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싹튼다. 난치병과 불치병을 격퇴하는 명의(名醫)의 전설은 이래서 시작된다. 적지않은 문헌과 구전은 전설상의 의원과 의술을 전하고 있다. 미신성, 비합리성을 동반하고 말이다.  

유상(柳?)이란 의원이 있다. 숙종 때 사람이다. 이 사람은 숙종의 천연두를 치료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왕은 범인과 달라 천연두에 걸리면 곤란해진다. 살아나도 얼굴이 곰보가 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병을 방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숙종은 재위 9년(계해년, 1683년)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유상의 약으로 수월하게 치료가 되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유상은 숙종 25년 세자(뒷날의 경종)의 천연두에도 능력을 발휘하여 벼슬이 올라갔다. 유상은 양반이 아니고 감사의 얼자(孼子)였으니 의술로 꽤나 출세를 한 것이다.

임금의 천연두를 고친 유상의 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숙종실록’에는 기록이 없지만, 민간에는 기록이 있다. ‘청구야담(靑邱野談)’을 보자. 유상이 젊어 경상도 감사의 책실(冊室)로 따라갔다가 할 일도 없고 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던 길에 어떤 집에 들러 하루를 묵는데 주인이 잠시 출타한 틈에 우연히 그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서를 뒤적여 보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와 허락도 없이 남의 서책을 본다고 책망을 들었음은 물론이다.

날이 새자 주인은 유상더러 빨리 출발하고 중간에서 쉬지 말라고 채근을 한다. 유상이 탄 나귀조차 바람처럼 달려 지금의 성남 판교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판교에는 별감 10여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이 천연두를 앓고 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유의원을 불러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유의원인가를 묻고 빨리 대궐로 가자 한다. 유상이 남대문을 통과해 구리개를 지나는데, 어떤 노파가 마마를 앓고 난 아이를 업고 있었다. 무슨 약을 썼냐고 물었더니, 거진 죽게 되었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枾?湯)을 쓰라고 하여 나았다는 것이다.  

유상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지난 밤에 언뜻 본 의서에도 시체탕에 관한 말이 있었던 것이다. 입궐하여 임금의 증세를 보니, 어제 본 어린아이의 증세와 같지 않은가? 시체탕을 썼더니 바로 효험을 보았다. 시체탕이 무어냐고? 사람 죽은 시체가 아니라 감꼭지 시체를 말린 것을 달인 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