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古醫書 해제

사의경험방 (四醫經驗方)

지운이 2020. 5. 9. 14:39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四醫經驗方 筆寫本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發行年不明] 1冊(65張) : 行字數不同; 20.0 x 19.6 cm
表題 : 經驗方


본서는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에 <광제비급(廣濟秘笈)>의 치법 일부를 덧붙여 향약 경험 지식을 정리한 필사본 의서(醫書)이다. <사의경험방>은 이석간(李碩幹), 채득기(蔡得 己), 박렴(朴濂), 허임(許任)의 경험방 및 여러 경험방서들을 모아 17세기 당시 조선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치료 경험들을 정리한 의서이며, <광제비급>은 조선 정조(正祖) 14년(1790) 평안도에서 활동하던 이경화(李景華)가 백성들의 질병 치료를 위해 만든 의서이다.


이석간, 채득기, 박렴, 허임은 조선 중기(17세기 무렵)에 이름을 떨쳤던 명의들로 이들을 ‘사의(四醫)’라고 칭하여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이라고 표제하였다. 이들이 당시에 서로 교류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대에 크게 명성을 떨쳤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석간(李碩幹, 1509-1574)의 자(字)는 중임(仲任) 호(號)는 초당(草堂)으로 생원 이함(李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 사람으로 공주이씨(公州李氏) 46세손이다. 중종(中宗) 29년(153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에 입격하였고, 1541년에는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는 평소 퇴계 이황과 그의 문인들과 교류하였으며 퇴계선생 임종 시 곁에서 시료(施療)를 펼치기도 하였다. 당시 “동방의 편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의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한편, 그의 후손인 이의태(李義太)가 <경험방휘편 (經驗方彙編)>을 편찬한 사실을 통해 그의 의술이 후손들을 통해 가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채득기(蔡得己) 역시 의술에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은 <해사록(海槎錄)> (인조 14년(1636) 8월 22일(癸巳) 기사)에서 “교수 채득기(蔡得沂)가 침술(鍼術)에 신묘한데…”라고 기록 하였다. <사의경험방>의 판본들과 <삼의일험방(三意一驗方)>, <광제비급(廣濟秘笈)·인용제서(引據諸書)> 등에는 채득기(蔡得己) 혹은 채득이(蔡得已)로 적고 있는데, 이 채득기 혹은 채득이라는 인물에 대해 남아있는 사료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다. 한편,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채득기(蔡得沂, 1605-1646)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인천(仁川)사람으로 자(字)는 영이(詠而), 호(號)는 우담(雩潭), 학정(鶴汀)이다. 학문이 깊어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역학 ·천문 ·지리 ·복서 ·음률 ·병서 등에도 두루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32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화산(華山) 선유동(仙遊洞)에 들어가 은거하였고, 다시 상산(商山, 지금의 상주)의 무지산(無知山)에 들어가 독서에 전념하였으며, 후에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된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과 세자 ·대군들을 받들기도 하였다. 시문집으로 <우담유고 (雩潭遺稿)>2권 3책을 남겼는데, 병자호란 이후 왕자들을 호종하여 심양(瀋陽)에 갔을 때의 여러 시문들을 수습한 것이다.


박렴(朴濂) 역시 17세기에 활동했던 의가로서 호(號)는 오한(悟漢)이다. 그의 생몰연대 및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허임(許任, 1570-1647)은 임란직후 등장하여 큰 명성을 떨쳤던 침구의가로 젊은 시절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학에 입문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그는 내의원에서 침의(鍼醫)로 활동하면서 탁월한 치료 실력을 발휘하였으며, 왕의 신임 속에서 마전군수(麻田郡守), 실첨지(實僉知) 등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영평현령(永平縣令, 1616), 양주목사(楊州牧使), 부평부사(富平府使,1617), 남양부사(南陽府使, 1622)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자신의 의학적 견해를 모아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1644)을 저술하였다.


<광제비급>의 저자 이경화는 평안도 성천(成川)의 의사로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지만 당시 관직에 대한 지역차별이 심한 것에 회의를 품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고향에.서 줄곧 의사생활을 하였는데, 의사경력이 50여년이 되던 무렵 1790년에 함경도 관찰사로 있던 이병모(李秉模)에게 의서 집필을 권유받고 <광제비급>을 저술하였다. 그는 대략 1720년대를 전후해서 출생하여 1830년 이전에 작고한 것으로 보인다.


해제본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의 <사의경험방> 내용과 후반부의 <광제비급> 내용이 그것이다. <사의경험방>은 전체 내용이 실려 있는 반면, <광제비급>은 권2의 「잡병(雜病)」 부분만 필사되어 있고 필사자는 이 내용을 ‘신응감(神應鑑)’ 혹은 ‘신응경(神應經)’이라고 밝히고 있다. 필사자는 자신이 <신응감>(혹은 <신응경>)이라고 알던 서적을 필사해 넣은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광제비급>의 내용이라는 사실은 몰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서에는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이 따로 없으며, 해당 의서의 내용을 충실히 필사해 놓았다. 우선 <사의경험방>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두부(頭部), 이부(耳部), 목부(目部), 비부(鼻部), 구부(口部), 인후부(咽喉部), 흉부(胸部), 심부(心部), 복부(腹部), 요통(腰痛), 신부(身部), 노채(勞瘵), 수면부(眠睡部), 풍부(風部), 궐역부(厥逆部), 광간부(狂 癎部), 학질부(瘧疾部), 대변부(大便部), 음림부(陰淋部), 산부(疝部), 치질부(痔疾部), 이질부(痢疾部), 설 사부(泄瀉部), 곽란부(霍亂部), 해수부(咳嗽部), 음식부(飮食部), 구토부(嘔吐部), 소갈부(消渴部), 한부(汗 部), 상한부(傷寒部), 온역부(瘟疫部), 창종부(瘡腫部), 제창부(諸瘡部), 잡병(雜病), 부인문(婦人門), 소아 (小兒), 노인제병(老人諸病), 복약기식(服藥忌食)


<광제비급> 「잡병(雜病)」의 내용은 여러 가지 병증이 모여 하나의 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목록을 나열하기 어렵다. 다만 양자 모두 향약을 이용한 경험방들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치료에 사용된 경험방들은 병증에 따라 짧고 간략한 형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들 경험 방은 성격에 따라 향약 한 가지만을 이용한 단방, 여러 가지 약제를 혼합하여 만든 복합방, 복용하지 않고 체표에 붙이거나 바르는 외용법, 침과 뜸을 이용한 침구법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혼재하여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사의경험방>은 간행년이 불분명한 두 종의 목판본과 다수의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종의 목판본은 수진본(袖珍本)으로 휴대하여 이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진 점으로 볼 때, 임상에 빈번히 사용되었음 을 알 수 있다. 매우 다양한 형태의 필사본이 광범위하게 산재되어 있는 점 역시 <사의경험방>이 전통사회 의가들에게 매우 애독되었음을 방증한다.


한편, 18세기 후반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기근과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 있던 이병모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을 목적으로 의서편찬을 구상하였으며, 이를 위해 주변에 명의를 수소문하던 중에 윤포암(尹圃巖)이라는 사람의 소개로 이경화를 알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만들어진 <광제비급>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부족한 의료지식과 약재들로 질병을 치료해 왔던 향의(鄕醫)의 치료 방법들이 대거 실려 있다. 해제본에 인용된 「잡병」의 내용이 가장 대표적이다.


해제본은 여러 의가, 여러 서적의 경험들을 한데 모아놓았다는 점에서 조선의 경험의학을 대변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경험방들은 여말선초로부터 이어진 향약 전통을 계승하였고, 그간에 축적된 침구 치법들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학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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