葛洪과 연단술
葛洪갈홍(283년~343년)
과거 중국 의사들 가운데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다. 대부분이 누군가에게 의학을 배우게 되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순전히 독학으로 명의가 된 인물이다. 그것도 고학으로.. 가세가 기울어 땔나무 장사로 연명했던 그는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목탄으로 바위에다 글씨를 써서 공부했다고 한다. 하여간 과거의 뛰어난 선배들이 쓴 한방 처방약이나 침구에 대해 쓴 책에서 배우면 누구든 의사가 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중국 전통의학은 약제나 침뜸 시술을 통해 인체에 뭔가 도움을 주어 환자 스스로가 병을 고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도와 주어도 환자 스스로가 고치지 못하는 병에 대해서는 고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도움을 준다는 것은 현대의학적으로 보자면, 아마도 환자의 면역력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어 스스로 자연치유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의학 자체가 곧 치료학이며 치료하는 것이 곧 의학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즉 환자가 오면 통상 수증치료에 따라서 처방을 구성하고 침구를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한방처방을 구성하는 방법도, 물론 수많은 환자를 보는 임상을 통해 환자에게 가장 효과가 있는 방식을 환자로부터 배우는 것이 기본이 된다. 주위에 의술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습득할 수 있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학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죽게 만드는 한방 생약이란 것도 없고, 뜸으로 사람이 죽을 것도 아니다. 물론 침은 어느 정도 숙련이 필요했겠지만..
갈홍도 향학심에 불타 유학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학문과 도인이나 양생법에 관해 공부하고 동시에 의술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중국의 의학사상에 명의로 전해지는 의술자들은 그 명성과 천재성이 황제에게 알려지면서 황제의 총애를 받기도 하는데,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평생 모든 분야에서 진실을 구하려는 구도자적인 분위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구도자로 통하는 길에는 얼마나 건강하게 장수하느냐라는 목표가 있기 마련이다.
갈홍도 마지막에는 세속적인 명성을 피하고 신선도에 몰입하고, "시해선(尸解仙)"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尸解仙은 선인의 길을 터득한 사람이 죽으면 몸의 껍데기를 남기고 영혼만 하늘에 떠오르는 법을 익힌 사람이라 한다.
갈홍은 불로장생을 가져온다는 약을 만드는 "연단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원래 그의 선조인 갈현이 도가학자이자 수련자로 연단술에 능했다고 하는데(“葛仙公” 혹은 “太極左仙翁”이라 불렸다고..), 그 비방을 전수받은 이가 정은이었고, 갈홍은 이 정은을 만나 그 비법을 전수받게 된다. 그 인연이 절묘하다.
연단은 도교를 실천하고 있는 도사들이 진사(모래)를 단련, 금단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진사는 유황과 수은을 화합한 것이다. 진사는 유황과 수은이 섞이면 금처럼 보여서 금단이라고도 한다. 또 진사를 단사라고도 한다. "단"의 원래 의미는 적토이다. 사실 이 적토는 유황과 수은이 화합된 것이므로 진사라 라 한다. 수은은 색깔이 백금 같고 그 형태가 자유롭게 바뀌는 금속이다. 보통 금속이라는 것은 고체인데,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면서 고체인 듯 하면서도 액체와도 같아 뭔가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때로는 정체가 없는, 알 수 없는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금빛과 비슷한 황색 유황에다가 변환이 자유자재인 신비로운 수은을 화합하여 만들어진 약을 여러가지 비율을 바꾸어 보거나 여러가지 다른 물질을 섞어 보거나 때로는 달구어 보거나 식혀 보거나 하면서 장수하기 위한 연단법에 매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연단법을 더욱 발전시켰다면 중국에서도 서양 못지 않은 과학의 발전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연구한 사람은 없었다.
어떻든 연단술로 만든 연단을 도교에서는 근거도 없이 불로불사의 약으로 마셨다고 한다. 갈홍도 마지막에는 불로불사의 약을 찾아 연단에 힘썼는데, 이 연단으로 만들어진 진사(수은과 유황 화합물)를 많이 마셔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은 상태를 尸解仙시해선이라 한 것은 아닌지.. 갈홍이 만들어 마셨다는 연단은 무기 수은이었으며 갈홍의 최후는 무기 수은 중독으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하여간 죽을 때 그는 앉은 채 마치 잠자는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고, 사람들을 그것을 두고 그가 尸解仙이 되었다고 말하였던 것 같다. 스스로 신선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이는 당대 중국인의 독특한 정신세계였던 것 같다.
연단술로 유명한 갈홍이지만, 그가 남긴 의서로 <肘後備急方>이 있다. 팔꿈치 뒤의 옷깃에 담아두고 위급할 때 참고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를 아무 대가도 없이 치료하는 한편, 이들이 구하기 쉽고 저렴한 약재로 처방을 구성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첫째 효험이 있을 것, 둘째 편리할 것, 셋째 가격이 저렴할 것 등 세 가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익에 집착하지 않는 소박한 선비, “抪朴子”라 불렀던 모양이다.
질병에 대한 처방은 연단연구와도 맥을 같이하는데, 광물약의 성능과 효능을 보면(登涉篇에), 웅황(雄黃-또는 석웅황이라고도 한다. 삼류화비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광석으로 습을 없애고 담을 삭이며 살충, 살균작용을 한다. 주로 외용약으로 사용)은 독사에 물린 것을 치료할 수 있고, 주사(朱砂)는 소독작용을 한다고 적고 있다. 또〈선약편(仙藥篇)〉에서는 식물약(植物藥)이 기록되어 있는데 복령(茯 -구멍버섯과에 속하는 복령균의 균핵을 말린 것으로 죽은 소나무 둘레에서 자란다. 이뇨, 혈당강하, 진정작용등이 있음), 지황(地黃), 맥문동(麥門冬), 구기(枸杞), 백부(百部), 황정(黃精), 호마(胡麻), 창포(菖蒲) 등의 별명, 특징, 성능, 생장환경 등과 사용법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위급상황에 대한 간편처방도 나온다. 예컨대 中風 昏迷 暴死 腹痛과 같은 위급한 병이 급작스럽게 발생하였을 때는 人中穴을 손톱으로 눌러주는 간편한 방법을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또 <肘後備急方>에는 천연두(天然痘/天花), 상한병(傷寒病), 이질(痢疾), 학질( 疾), 결핵(結核), 마풍(麻風), 성병(性病), 광견병(狂犬病) 등이 기재되어 있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흥미롭다.
"이 해에 병이 돌았는데, 부스럼이 머리에서 온 몸으로 번졌다. 삽시간에 주변으로 번져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흰 진물이 부스럼 속에 들어 있어서 터트려도 계속 생겨났다.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죽는 사람이 많았다. 치료를 한 후에도 검붉은 자색의 반점이 남아 마치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1,600년 전에 천연두를 이렇게 생생히 기록한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세계 최초가 아닐까. 이외에도 각기병, 마풍병, 황달 등 많은 병증에 대해 그 증세와 진단에 대해 생생히 묘사해 놓고 있다.
특히 그는 침 보다는 뜸을 중시하였다. 그의 <肘後備急方>은 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사용할 혈자리를 20~30개로 한정하여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해 주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그에게 있어 구급혈로 중요시되는 중완, 인중, 승장, 거궐 등의 혈자리는 <내경>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뜸을 중시함에 따라, 오늘날 간접구라 알려진 격물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전해진다. 격물구란 뜸을 뜰 때, 뜸쑥과 피부 사이에 소금, 마늘 등과 같은 격물을 깔고 하는 뜸을 말하는데, 그의 책에 격염구(소금뜸), 격산구(마늘뜸)에 대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었던 포고鮑姑 역시 의사였는데, 특히 침뜸에 정통하여 뜸으로 많은 질환을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갈홍이 쓴 유명한 책으로는 <神仙伝신선전>과 <抱朴子포박자>, <肘後備急方주후비급방>(<肘後方>이라고도 함) 등이 있다. 이 <肘後方>은 응급에 도움이 되는 책으로, 실용적이고 효과가 좋은 간단한 한방 처방약과 쉽게 할 수 있는 뜸이나 침의 방법이 쓰여 있다. 이 <肘後方>을 증보 수정하고 발전시킨 것이 이 남북조 시대에 흥하였던 양梁나라 "陶弘景"이다.
이렇듯 그는 ‘신선도교’의 대표적인 사상가 내지는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로지 현실을 초탈하여 장생불사를 꿈꾸던 비현실적이고 반사회적인 인물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 포박자외편에 따르자면, 포박자내편과 달리 정치·사회·문학 등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유가와 법가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군주 중심의 중앙집권적 질서체계를 옹호하였다고 한다. ‘군주를 바로 세우고 군주를 존중할 것’(立君尊君)을 역설하는가 하면, 또한 법가의 형법사상과 법치주의를 옹호하여 ‘관직을 잘 설치하고 직분을 잘 배분할 것’(設官分職)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고 한다. 어쨌던 갈홍은 신선도교에 몰두함으로써 현실 세계를 초월하길 꿈꾸기에 앞서, 현실에 적극 참여하면서 세파를 능동적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포박자외편과 포박자내편에 나타나는 이러한 상이한 측면은 사상적 모순이라기 보다는, ‘入儒出道’라는 그의 독특한 삶의 모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이석명, 抱朴子外篇 에 나타난 葛洪의 사회·정치사상). 요컨대 그는 신선도교의 수행자였을 뿐 아니라, 철학자이며 정치이론가이고,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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