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구인을 위한 [중의학의 역사] 3 : 명/청대~현대
*중의학의 역사를 아는 것이 침구를 공부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관점에서 정리해 봅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3회로 나누어 올려둡니다. 마지막 편으로 '명/청대~현대'까지입니다
明・清代
이 시대에 이르면 침구 처방이 원숙기를 맞이한 것으로 평가된다. 『鍼灸逢源』에 162항목, 『鍼灸聚英』에 59항목 『鍼灸全生』에 407항목, 『鍼灸大成』에 249항목 등, 많은 침구 처방이 나오게 된다. 특히 명대는 중국 침구사상 전성기였다. 그 결과 침구 치료의 적응증이 크게 증가하고, 치료 효과도 높아졌다. 당대 치료가들은 침술에 대한 辨証施治 법칙를 탐구하여 정리하게 되는데, 특히 楊継州, 高武 등의 공헌이 주목된다.
예를 들면 『鍼灸大成・巻九』에 "심와부 통증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 벌레나 음식에 의한 것. 心痺의 냉통으로 일어나는 것. 음양이 승강하지 않은 것. 노기가 마음에 충격을 준 것" 등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또한 두통을 『鍼灸聚英・巻二』에 "風、風熱、痰湿、寒、真頭痛"으로 나누고 있다. 또한 『鍼灸大成・巻九』에서는 중풍으로 인사불성이 된 환자에 대해 인중에 刺鍼을 해도 효과가 없었던 사례를 분석하여 "침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補瀉가 불분명하며 기혈이 교란되어 있다. 또는 抜鍼이 너무 빨랐다. 그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고 결론지으며, 자침조작에 신중을 기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명대에는 특히 자침조작 연구의 전성기였다. 『金鍼賦』에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각종 조작 방법을 鍼灸歌賦(암기하기 쉽도록 노래와 한시의 오언절구처럼 정리한)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기를 환부에 이르게 하는" 조작도 명나라의 의사는 매우 중시했다. 楊継州도 『鍼灸大成・巻四』에서 "원격혈로 떨어진 곳을 치료할 때는 반드시 병소부에 도달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竇漢卿의 『鍼経指南』에 기초하여 또 "기를 병소에 이르게 하는"방법과 補瀉를 융합시키는 식으로 고도화된 자침 조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정확하게 실시하여 치료 효과를 높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鍼灸聚英・巻四下』의 『梓岐風谷飛走気撮要金歌賦』에는 ‘기혈을 몰아 순식간에 온몸에 순환시켜 상하를 연결하여, 한하면 따뜻하게 하고, 열이 있으면 식히고, 아프면 통증을 제거하고 붓기를 끌어낸다. 수문을 열어 물이 솟구치듯 즉시 효과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時間刺鍼法은 명대에 크게 발달하였다. 徐鳳은 『徐氏子午流注逐日按時定穴歌』를 지었다. 이 노래는 子午流注納甲法을 사용한 처방으로 침구계에 크게 보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대의 치료가들은 子午流注를 급병에 사용하는 경우에는 증상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에 사로 잡혀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뜸요법은 명대에는 鍼法 만큼 쓰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진전이 있어 『類経図翼』처럼 뜸 치료 전문서도 보인다. 명대 李梃은 『医学入門・巻二 灸法』에서 ‘虚하면 뜸을 뜨는데, 이는 화기가 元陽을 돕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実인 경우에도 뜸을 뜨는데, 그것은 実邪가 화기에 의해 발산되기 때문이다. 寒에 뜸을 뜨는 것은, 기를 따뜻하게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熱에 뜸을 뜨는 것은 欝熱의 기를 끌어내 밖으로 발산시켜 건조시키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아직 정리되지 않았던 뜸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혀주고 있다. 또한 명대 이전에는 직접구와 隔物灸 뿐이었지만 명대에는 棒灸가 출현했다. 棒灸는 온도와 施灸 시간을 컨트롤하기 쉽기 때문에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명나라의 棒灸는 대부분 약물을 섞은 薬条灸로 太乙鍼이라든가 雷火鍼이라 불렸다. 뜸의 장수에 관해서는 張景岳은 『類経図翼・巻十一』에서 "뜸은 화기가 독이 있는 부분까지 도달해야 한다. 장수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만약 "앞뒤가 서로 연결되면 가장 속효성이 있다"고 하여 새로운 사고를 보여준다. 여기서 뜸 장수를 잘 조합하여 "기가 병소에 이르는‘ 일을 실천하려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清代가 되면 침의 적응증이 다소 늘어나고 역대의 처방으로는 불치였던 것이 치료법의 개선으로 치료되게 된다. 예를 들어 『鍼灸逢源・巻五』의 疔瘡 走黄(발열을 수반하는 종기) 치료는 "독기가 내공하고 황이 확산되어 그치지 않고 창상은 반드시 무너져 함몰한다. 경을 탐구하고 芯이 똑바로 선 곳이 중심이다. 곧 刺鍼하여 어혈을 풀고 刺鍼 부위에 뜸을 3장 떠서 독을 흩어 준다’라고 한다. 또한 鍼法과 뜸법의 종류도 크게 늘었다. 隔物灸의 경우 청대에는 파라핀뜸, 豆鼓餅灸, 根切虫灸(풍뎅이의 유충) 등이 추가되어 『串雅外編』에는 민간의 玉子灸(계란 흰자로 종독을 덮고 그 위에 쑥뜸을 뜨는), 碗灸 등도 기록되어 있다.
명청 시대의 침구 처방은 기존의 소수혈 치료가 아닌, 3혈 이상, 특히 3~7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침구 처방의 형식과 구성의 기본 규칙이 확립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이전 시대의 치료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치료법이 넓어져 많은 양의 처방이 출현했다. 局部配穴, 近隣配穴, 循経配穴, 上下配穴, 前後配穴 등 다양한 配穴法을 조합하여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약물학(본초학)도 크게 발전하였다. 李時珍이 「本草綱目」을 완성시켰다. 「본초강목」은 고전적인 형식과 신선계 의학의 영향을 받은 3종의 분류를 취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새롭게 분류를 시도한 것으로, 16부의 대강 하에 세분류하고 1892종의 동식물에서 광물에 걸친 약물이 기재되어 있으며 중국 약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현대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까지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근대 서양의학이 중국에 전파된다.*) 특히 국민당정부는 서양의학 도입에 앞장서고 전통의학 폐지운동을 벌이기도 하여 중의학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清末 이후 연이은 전란 속에 전통의학은 국민당정부의 전통의학 폐지운동에 의해 거의 괴멸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런 가운데 일부 선진적인 의가는 서양의학을 연구하고 中西医学의 교류를 도모한 사람도 있었다.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이 唐容川인데, 서양의학의 해부생리학에 의거해 중의학이론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20세기 초에는 이러한 中西交流派 의가가 증가하여, 중약과 양약을 병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일반화된 ‘중의’(중의학, 중의사 등을 포함하여)라는 말도 이 시기 유입된 서양의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이 중국의 전통의학을 자신들의 서양의학과 구별하여 ‘중의’라 불렀다고 한다. 清朝가 무너지고 1936년 中華民国政府가 수립된 다음 ‘중의’가 법적인 명칭이 된다.
**전통의학 폐지운동은 서양과의 교류에 앞섰던 일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일본의 明治정부는 이미 1875년 한의의 폐지를 선언하고 이후 서양의학을 중심으로 한 의료체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일본을 다녀온 중국의 선진 지식인들이 그 폐지에 앞장섰다고 한다. 물론 일본도 명치 후기에 이르면 전통의학이 다시 연구되고 침구치료도 부활하며 서서히 복권이 되지만..
그 후 우여곡절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전통의학 부흥이 국책으로 설정되며 다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렇게 재정립된 것이 이른바 ‘중의학’이다. 공산당정부는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전통의료인들을 「老中医」라 칭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가업이거나 마을에서 전해져 온 민간의 生薬方이나 鍼灸方이었다. 정부는 이들을 불러 모아 재교육하여 제도화하는 한편, 毛沢東의 강한 의지를 토대로 전통의학이 정리 통일되고 ‘중의학’이론도 확립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1955년 中国中医科学院(China Academy of Chinese Medical Sciences)이 창립되고 이후 1979년 中華中医薬学会(China Association for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원래는 中華全国中医学会)가 창립된다.
그리고 1958년 교과서가 편찬되고(南京中医学院의 『中医学概論』), 1959년 통일교과서 교육이 정립된다. 이를 ‘중의학’이라 하는데, 이전까지의 전통의학을 ‘중국의학’이라 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이는 재현성이 있고 안정된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처방을 표준화하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편 공산당정부는 중의학의 과학화를 중시하여 중의와 서양의학을 결합시키는 의료행정의 지도이념도 내세웠다. 그로 탄생한 것이 이른바 ‘中西医結合醫學’으로, 중의학과 서양의학의 상호 결합을 도모하며,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제거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中西醫結合醫學’이란.. 참조). 수술 전이나 수술 중 刺鍼을 하여 마취 효력을 도모하는 침마취는 中西医結合의 대표적인 성과이다. 또 중의학도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아 中医内科、中医外科、中医婦人科、中医小児科 등 세분화되고, 중의사 자격도 약물 중심의 중의사와 침구 중심의 중의사로 구별된다.*)
*중국의 중의사제도는 중의학부를 수료하여야 하는데, 생약처방을 위주로 하는 중의사와 침구 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중의사로 구분된다고 한다. 또 서양의가 있는데 이들은 중의학 연수를 받고 「中西医結合」치료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중의학부에서도 서양의학을 학습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50년대 이후 치료도 다양화되는데, 毫鍼과 艾灸 뿐만 아니라 경혈에 약액을 주입하는 穴位注射(水鍼), 통전 자극하는 전기침, 레이저침과 마이크로파를 조사하는 등 여러 가지 치료법이 생겨났다. 또한 치료 부위도 신체의 경혈 이외에도 耳穴이나 眼穴, 手穴, 鼻穴, 口穴등으로 확산되었다. 1972년부터 연구를 통해, 뇌혈관 질환에 대해 石学敏교수가 중풍에 관하여 「竅閉神匿」이라는 병기설을 제창하여 醒脳開竅刺鍼法을 창안하였고, 역시 1970년대에 대뇌피질의 기능을 두피에 투영시켜 두피의 투사구에 刺鍼을 하는 頭鍼療法도 개발되었다. 또한 그 침법을 기초로 한 「頭鍼穴名国際標準化法案」이 1989년 11월에 세계보건기구가 열린 国際標準鍼灸穴名科学組会議에서 정식으로 통과되어 세계 침구계에 추천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적응증은 더욱 넓어졌고, 한약과 의약품을 사용하여 약물 치료를 한 대조군을 만들어 비교 대조관찰에 의거한 연구도 이루어지는 등, 실증에 대한 노력도 경주되어 왔다. 침구 치료의 효능을 검증함은 물론, 각종 침구시술이 치료 과정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인 치료 기준을 마련하고 엄격하게 침구 치료의 효과를 확인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각 분야의 관점에서 침구 치료의 治効 메커니즘의 연구가 수행되어 왔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대에 와서 나타나고 있는 중의학의 특징은 자유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다양한 처방이나 요법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오늘날 중의학에는 위기적 측면도 존재한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국민당 초기 중의사가 80만 명에 달하던 것이 1949년 50만 명으로 줄었고, 2005년 현재 27만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또 일부 지방의 주의병원에서 탕약을 처방전으로 내는 중의사가 10%도 되지 않는다고도 한다.
‘중의학’의 글로벌화
마지막으로 근년에 특히 주목을 요하는 점은 ‘중의학’의 글로벌화이다. 미국과 유럽을 필두로 전세계적으로 '중의학’이 Traditional Chinese medicine(TCM、전통중국의학)으로 불리며 보급되어 ‘보완대체의료’로 치료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침뜸요법이 세계적으로 새롭게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당시 중국의 침마취 장면이 전세계에 보도되면서부터일 것이다. 이를 계기가 전세계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해 드디어 1979년 WHO가 침구치료의 적응질환으로 43개 질환을 발표함으로써, 세계인의 침뜸요법에 대한 관심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를 거치며 중국 중의사들의 국제적 활약이 활발해지며 각국에 침구를 보급하는 활동이 확대되고 나아가 침구사를 양성하는 침구전문교육기관 설립도 이루어지게 된다.
1983년에는 각국에 정착했거나 양성된 침구인들에 의해 국제적인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르러 세계침구학회연합(World Federation of Acupuncture and Moxibustion Societies : WFAS)이 설립된다.
나아가 1980년대 이후 지속된 경락 및 경혈과 관련한 표준화를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361개 경혈, 48개 기혈 및 두피침에 관한 용어가 정해져, 1989년 WHO 제나바회의에서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그후 경혈 위치를 표준화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어, 2003년에 공식적인 경혈위치가 정해졌다. 나아가 WTO는 침뜸 시술과 전통적인 약물을 건강보험에 적용토록 하는데도 노력을 경주하여 점차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어 중국은 세계 각국에 중의사들을 파견하여 활동케 하는 한편,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후진국에 다수의 봉사인력을 파견해 왔다. 중동지역 진출도 눈비시다. 아랍에미리트, 헝가리, 카자흐스탄, 말레이지아 등에 17개의 의료서비스센터를 구축하였고, 2020년까지 30개의 센터를 세계 각지에 창설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관련 제품의 수출도 급증하였다. 최근 남부의 하이난에 진료소를 개설하여 외국인들을 유치하고 있으며 이를 모델로 한 진료소를 15개 만들 것이라고 한다.
(*芝雲 씀)
*중의학의 역사는 여기서 마무리한다. 앞으로도 필요한 부분에 대해 더 공부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유의미한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1950년대 현 중국(공산당)정부 성립 이후 '중의학 재건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핵심 구호가 되었던 '중서의결합의학'에 대해서는 아래 별도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ㆍᆢㆍ
블로그의 다른글 참조
*芝雲이의 책 소개
코로나19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동의학 요법의 활약과 그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래의 책을 소개합니다
https://blog.daum.net/hooclim/4934
책 소개 : 코로나19와 동의학 그리고 침뜸요법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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