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동의학 : 역사와 명의

덕의〔德醫〕

지운이 2019. 1. 18. 08:22

덕의〔德醫〕/역대 의학 인물

*의림촬요(醫林撮要/ 양예수) 중에ᆢ

 

바로 명의(明醫)와 세의(世醫) 가운데 덕(德)이 있는 사람이다.

 

서문백(徐文伯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제(南齊) 시기)

자(字)는 덕수(德秀)이고, 남송(南宋) 서도도(徐道度)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이 있었으며, 비록 의술에 정통하였으나 의술을 업으로 삼지는 않았다. ○요통(腰痛)이 심장(心臟)에까지 이르러 통증이 닥칠 때마다 기(氣)가 끊어지려는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여러 의원들은 육징(肉癥)이라고 진단하였다. 공(公 서문백)은 말하기를, “이것은 발징(髮癥)이다.”라고 하였다. 기름을 목구멍 속으로 넣으니 머리카락 같은 물질을 토하였다. 조금씩 당겨보니 3자〔尺〕 길이에 머리는 이미 형체를 갖춘 뱀 같은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문 위에 걸어두니, 물방울이 모두 떨어지자 한 다발의 머리카락이었을 뿐이었다. 스스로 낙태하려는 임산부를 치료할 때였다. 족태음비경〔足太陰經〕을 배출시키고 수양명대장경〔手陽明經〕을 보(補)하니, 태(胎)가 침 놓는 것에 맞춰 곧바로 몸 밖으로 배출되었다.

 

서사백(徐嗣伯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제(南齊) 시기)

자(字)는 숙소(叔紹)이고, 남송(南宋) 서숙향(徐叔嚮)의 아들이다. 효행(孝行)이 있었고, 좋은 말〔淸言〕을 잘하였다. 관위는 정원랑(正員郞)에 올라 여러 관부에서 일을 도왔다. ○옥석(玉石) 약을 복용했다가 냉증〔冷〕에 시달리면서 여름에도 항상 두꺼운 옷을 입는 것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서사백)이 진맥하고 말하기를, “열(熱)이 숨어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물〔水〕로 열을 발산시켜야 하는데, 겨울이 아니면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11월에 얼음과 눈이 아주 많을 때에 이르러서, 두 사람으로 하여금 병자를 붙잡아서 옷을 벗기고 돌 위에 앉혔다. 그리고 찬물을 병자의 머리에서부터 들이부으니 2~3말〔斗〕 만에 병자의 입이 꽉 물리면서 기절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울며불며 그만하라고 요청하였다. 공(公 서사백)은 사람을 시켜 몽둥이를 쥐고 그만두라고 간하는 사람을 때리게 하였다. 다시 물 100말을 모두 부으니 병자가 비로소 감각이 돌아오면서 움직이게 되었는데 등 위로 팽팽하게 기(氣 열기(熱氣))가 드러났다. 얼마 뒤 병자가 몸을 일으켜 앉아서 말하기를, “뜨거운 것을 참지 못하겠으니 찬 것을 마시고 싶다.”라고 하였다. 공(公 서사백)이 물을 주니, 1되를 단번에 마시고 병이 나았다. 나중에 겨울이 와도 그 병자는 홑옷만 입었으며 몸은 다시 살지고 장대해졌다. 어떤 노파가 몸이 아프면서 온몸 곳곳에 무수히 검은 점〔?黑〕이 생긴 것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서사백)이 말하기를, “이것은 정저(疔疽)이다. 이틀 후에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하였다. 이에 10여 첩의 탕제를 주어 복용시켰다. 복용 후 통증의 정도가 더욱 심해져서 침상(寢床)에서 뛰어오르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잠시 후 몸의 검은 부위에서 길이 1치〔寸〕 가량의 정창〔疔〕을 뽑아낸 다음, 고약을 발랐다. 3일 후에 나았다. 한 사례는 적체(積滯)를 앓으면서 몇 년이 지나도 낫지 않은 것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서사백)이 말하기를, “시주(尸注)이다.”라고 하였다. 또 한 사례는 어떤 사람이 복창(腹脹)에 시달리면서 황달이 생긴 것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서사백)이 말하기를 “석우(石疣)이다.”라고 하였다. 또 한 사례는 어떤 사람이 안통(眼痛)을 앓으면서 귀신〔鬼物〕이 많이 보이는 것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서사백)이 말하기를, “사기(邪氣)가 간(肝)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세 병은 다르지만 모두 죽은 사람의 목침(木枕)을 달여 복용시키니 쾌차하였다. 대개 시주(尸注)란 귀기(鬼氣)가 몸 속에 잠복한 채 움직이지 않아서 침체(沉滯)가 생기는 것이므로, 죽은 사람의 목침을 얻어 몰아붙이면 귀기가 날아가서 다시는 몸에 붙지 않게 되어 시주를 낫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석우(石疣)란 오래된 회충(蛔蟲)이다. 치료가 이미 도식적일 뿐이어서 회충이 더욱 단단해짐에 따라, 세상의 약으로는 회충을 쫓아낼 수 없게 된 것이니, 모름지기 이러한 귀물(鬼物 죽은 사람의 목침)로 쫓아낸 후에야 회충을 흩뜨릴 수 있는 것이다. 사기(邪氣)가 간(肝)으로 들어가면 눈을 아프게 하면서 귀물(鬼物)이 보이는 것이다. 모름지기 사물(邪物)을 끌어내야 하는데, 기(氣)는 베개(목침)로 인해 흩어지므로 이 약을 써서 다시 사물(邪物)을 무덤〔塜〕 속에 묻게 된 것이다.

 

전을(錢乙 중국 송(宋)나라 시기, 1032~1113)

자(字)는 중양(仲陽)이고 송(宋)나라의 전당(錢塘) 사람이다. 아버지인 전호(錢顥)는 침을 잘 놓는 의원이었지만, 술을 좋아하여 하루아침에 이름을 숨기고 동해(東海) 지역을 유랑하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공(公 전을)은 이때 3세였는데, 재가한 어머니를 따라서 의원(醫員) 여씨(呂氏)에게 갔다. 점차 자라면서 의붓아버지 여군(呂君 여씨)에게 의학을 배웠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집안 내력을 말해 주었다. 공이 울면서 아버지의 자취를 찾겠다고 하였다. 30여년 동안 6차례 왕복을 한 끝에 아버지를 맞이해서 돌아왔다. 나중에 자기가 주비(周痺)에 걸리자, 문을 닫아걸고 《서경(書經)》과 역사서를 읽었으니 의학으로만 이름이 난 것은 아니었다. 중경(仲景 장기(張機))의 심오한 의술을 습득하고 오장(五臟)에 따른 처방을 세워서 각각 마땅한 바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간장(肝臟)에는 상화(相火)가 있으니 사법(瀉法)은 있지만 보법(補法)은 없으며, 신장(腎臟)은 진수(眞水)이므로 보법(補法)은 있지만 사법(瀉法)은 없다는 것이니, 이러한 것은 모두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內經〕의 비의(秘意 숨겨진 뜻)를 열어젖힌 것이다. 그 후 장원소(張元素), 유 수진(劉守眞 유완소(劉完素)), 장종정(張從正)〔張從政〕은 전을의 의법(醫法)을 모두 취하였지만, 요즘 사람들은 단지 그를 영아의(嬰兒醫 소아과 의원)로만 알고 있다. 《상한지미론(傷寒指微論)》 5권과 《영아백편(嬰兒百篇)》을 저술하였다. ○어느 산모〔乳婦〕가 크게 놀란 탓에 휘둥그레진 눈을 감을 수가 없는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공(公 전을)이 욱리주(郁李酒)를 달여서 취하도록 마시게 하니 나았다. 그 까닭은, 눈이 안으로 간(肝)ㆍ담(膽)과 연결되어 있는데, 놀라면 기(氣)가 맺히면서 담(膽)이 충돌하여 기가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오직 욱리인(郁李仁)만이 맺힌 것을 제거하므로, 욱리인이 술을 따라 담으로 들어가게 해서 맺힌 것을 없애고 담은 아래로 내려가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양사영(楊士瀛 중국 송(宋)나라 시기, 13세기)

자(字)는 등보(登父)이고 호(號)는 인재(仁齋)이며, 송(宋)나라 삼산(三山)의 명의(名醫)이다. 사람을 구제하고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 《인재직지방(仁齋直指方)》을 저술하였다.

 

유윤방(劉潤芳 중국 송(宋)나라 시기)

자(字)는 □□이고, 송(宋)나라 요주(饒州)의 파양(鄱陽) 사람인데, 의술에 종사하면서 은거하였다. 가난한 집 환자의 질병을 치료할 때마다 금(金)을 몰래 가져다가 병자의 자리 밑에 두고, 떠나온 다음에 그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찾도록 하였다. 병자가 한 번 기뻐함에 그 질병은 절반이 나았다. 그 자손이 번성하면서 대대로 가업을 이었다.

 

오원(吳源 중국 송(宋)나라 시기, ?~1174)

자(字)는 덕신(德信)이고 휴녕(休寧) 사람이며,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한림의관(翰林醫官)에 임명되었는데,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유학자 생활을 하며 은거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5세(世) 동안 사람을 살렸으니 공덕(功德)은 이미 쌓였고, 일경(一經)으로 자식을 가르쳤으니 그 뜻은 잊혀지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건도(乾道) 계사년(1173) 겨울에 스스로 진맥하니 “춘맥(春脈)이 없다.”라고 하였다. 때가 봄이 되자, 과연 옷을 단정하게 입고 세상을 떠났다.

 

육몽(陸蒙 시기 미상)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으며, 호(號)는 동원산인(東園散人)이다. 경사(經史 유학(儒學)과 역사학)를 널리 배우고,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정통했다. 이인(異人)을 만나서 자오안마법(子午按摩法)을 습득했다. 질병을 치료할 때는 침과 뜸을 시술하지 않고 환자와 마주 앉은 채 담소하다보면 얼마 뒤 질병이 나았으며, 사람들에게 치료비를 요구한 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벼슬길을 권하면 묵묵히 대꾸하지 않았다.

 

왕규(王珪 중국 원(元)나라 시기)

자(字)는 균장(均章)이고 호(號)는 중양노인(中陽老人)이며, 오군(吳郡) 사람이다. 원(元)나라가 번성했을 때에 활동했으며, 규범에 맞는 행동은 뛰어났고 도(道)를 보면 그 도를 진실로 밝혔다. 장년(壯年)에는 단술(丹術 도교의학의 단학)을 흠모하면서 의학에 더욱 천착하였다. 세상을 등지고 오(吳)의 우산(虞山)에 깊이 은거하였는데, 둘러친 담장도 없이 거처한 것이 30년이었다. 눈동자는 형형하고 몸은 속세의 진토(塵土)〔廛〕를 밟지 않았다. 《태정양생주론(泰定養生主論)》을 저술하였으며, 곤담환(滾痰丸)을 제조하였다.

 

이중남(李仲南 중국 원(元)나라 시기)

자(字)는 내계(乃季)이고 호(號)는 벽산(碧山)이며, 원(元)나라의 천지(天池) 사람이다. 평생 세속의 욕심이 없었고 부모님이 장수하기만을 바랐다. 손윤현(孫允賢)과 함께 《영류검방(永類鈐方)》을 저술하였다.

 

대원례(戴原禮 중국 명(明)나라 시기, 15세기)

호(號)는 복암(復菴)이고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포강(浦江) 사람이다.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서 《시경(詩經)》과 《예기(禮記)》의 가르침을 습득했으며, 사람들에게 은택을 미치려는 뜻이 확고했다. 이에 단계선생(丹溪先生 주진형(朱震亨))에게 의학을 배웠다. 단계선생은 그의 총명함을 보고, 여느 때의 배 이상으로 마음을 쏟아 가르쳤다. 이때부터 공(公 대원례)의 식견은 날로 넓어지고 배움은 날로 두터워졌으므로, 나가서 질병을 치료하면 왕왕 신기한 효과를 보였다. 영락(永樂) 연간(1403~1424) 초에 황제가 불러서 태의원(太醫院)의 사(使)가 되었다. 《증치요결(證治要訣)》을 지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의도(醫道)는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內經〕을 근본으로 삼는데, 개원(開元) 연간(713~741)에 한 번 무너지고 대관(大觀) 연간(1107~1110)에 다시 무너졌다. 이에 습속(習俗)이 서로 이어서 오직 《화제국방(和劑局方)》〔局方〕만을 고집하고 《황제내경소문》에서 찾는 것은 싫어하였다. 오직 전을(錢乙)ㆍ유완소(劉完素)ㆍ이고(李杲)ㆍ주진형(朱震亨)이 등장한 이후에야 《황제내경소문》의 학문이 밝혀졌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6개월 동안 대열(大熱)에 시달리면서 헛소리〔譫語〕를 하고 반점이 나타나며, 육맥(六脈)이 부허(浮虛)하여 힘이 없는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부자이중탕(附子理中湯)을 차게 해서 마시도록 하니 땀을 많이 흘리며 나았다. 학질로 땀을 많이 흘리고, 분노로 인해 결국 정신을 잃었는데 죽은 듯한 궐증〔厥〕을 치료할 때였다. 환자에게 소합향환(蘇合香丸)을 입 속에 흘려주니 다시 살아났다. 나중에 환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나 닭과 개 소리만 들어도 궐증이 나타났으니 바로 한다망양(汗多亡陽)이었다. 인삼(人蔘)과 황기(黃耆)〔蓍〕로 날마다 몸을 보(補)하니, 그 놀람이 조금씩 감소하다가, 10일이 지나자 편안해졌다. 어떤 부인이 젖을 뗀 후 놀라는 병이 들어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구름을 탄 듯하고, 눈을 들면 방안이 빙빙 돌아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증상을 치료할 때였다. 의원들이 허(虛)한 것을 보(補)하는 처방으로 놀라는 증상을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공(公 대원례)이 말하기를, “왼쪽 맥(脈)이 비록 규맥(芤脈)ㆍ색맥(濇脈)이지만, 얼굴빛이 움직이지는 않으니, 이것은 놀람으로 인해 심포락(心胞絡)에 어혈(瘀血)이 쌓인 것이다. 치료법으로는 마땅히 배설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옻같이 검은 적혈(積血 어혈(瘀血)) 1말〔斗〕을 배설시키니 곧 나았다.

 

서오(徐鏊 중국 명(明)나라 시기, 16세기)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태의원(太醫院)의 의사(醫士)였다. 정덕(正德) 연간(1506~1521)에 황제의 남순(南巡)을 간언하다가 옥에 갇히고 변방에서 수자리〔戍〕 생활을 했으니, 충신이었다.

 

사금(沙金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정보(廷寶)이고 호(號)는 행헌(杏軒)이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의진(儀眞) 사람이다. 의술로 사람을 구제하면서도 그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몹시 가난한 경우에는 도리어 돈을 주기도 하였다. 그 아들 사직(沙稷)은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부주사(工部主事)로 추증되었다.

 

심학(沈鶴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수상(壽祥)이고, 국조(國朝 명(明)나라) 양주(揚州)의 소양(昭陽)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의업에 종사했으며, 헌기(軒岐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와 기백(岐伯))를 비롯하여 중경(仲景 장기(張機))과 하간(河間 유완소(劉完素))의 의술에 능통하였다. 몸에 병이 나는 것을 돌보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데 힘쓰므로, 그 명성이 공경(公卿)과 나란하였다. 나이 마흔도 되기 전에 부인을 잃었는데, 그 후 부인을 다시 얻지 않았으므로 관리〔有司〕가 그 집 문에 의부문(義夫門)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호종인(胡宗仁 중국 명(明)나라 시기)

자(字)는 언덕(彦德)이고,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진릉(晉陵) 사람이다. 아버지 호정(胡禎)은 의술에 밝았으며, 상주로(常州路) 의학(醫學 지방의 의학 교육 기관)의 학록(學錄)이었다. 어머니 서씨(徐氏) 역시 의술을 알았는데, 학록(남편인 호정(胡禎))이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40여년을 수절하면서, 항상 약으로 사람들을 살렸다. 공(公 호종인)에 이르러 의업이 더욱 정밀해졌다. 그의 배우자인 이씨(李氏)는 부덕(婦德 부녀자의 덕)이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의술을 알았다.

 

육중원(陸仲遠 중국 명(明)나라 시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구화산(九華山) 사람이다. 창공(倉公)과 편작(扁鵲)의 의술을 아울렀다. 항상 말하기를, “의가(醫家) 책의 내용은 인(仁)에 가깝고, 의가(醫家) 일의 지향은 이익〔利〕에 가깝다. 이익에 뜻을 두지 않는 것이 바로 인자(仁者)의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진립흥(陳立興 중국 명(明)나라 시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고소(姑蘇) 여구(蠡口) 사람이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신실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의 질병으로 인해 우연히 이인(異人)을 만나서 약표(藥瓢 약 표주박)를 받았는데, 진립홍의 치료법〔方藥〕은 귀신처럼 사람을 살렸다. 그가 죽자 그 지역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그의 제사를 모셨다.

 

심이잠(沈以潛 중국 명(明)나라 시기)

의술에 밝았다. 심역(沈繹)의 조카인데, 의술로 집안이 이름을 떨쳤다. 태의(太醫)인 장무(蔣武)는 자신의 병이 위급해지자, 자신을 대신하도록 그를 천거하여, 마침내 심이잠은 어의(御醫)에 제수되었다. 시율(詩律)에 뛰어났지만 문을 걸어 잠근 채 다른 사람들과 함부로 교류하지 않으니, “나귀 타고 가르치는 장공근(張公瑾), 문을 닫고 치료하는 심이잠(沈以潛).”이라는 노랫말이 생겼다.

 

황효자(黃孝子 중국 명(明)나라 시기)

국조(國朝 명(明)나라)의 여요(餘姚) 사람이다. 태어나서 두 살 때까지 어머니가 젖이 나오지 않아서, 할머니에게 양육되면서 할머니 집에서 얹혀살았는데 항상 어른 같았다. 아버지가 여씨(厲氏)를 다시 부인으로 맞아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아버지는 계모에게 깊이 빠졌다. 황효자는 눈물을 흘릴 뿐 아버지 집의 문에서 울부짖지를 못했으며, 몇 번을 찾아가도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의학〔醫經〕 공부에 힘써 의식(衣食)을 마련하였다. 당국자가 추천하여 춘관(春官 예부(禮部)의 별칭)에 들어가서는 상의(尙醫 황제(皇帝)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御醫))의 일을 맡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3년간 여묘살이를 하자, 황제에게 주청하여 그의 집 문에 ‘효자문(孝子門)’이라고 정표(旌表)하였다.

 

[주-D001] 육징(肉癥) :

오랫동안 고기를 많이 먹어서 생긴 뱃속의 응어리를 가리킨다.

[주-D002] 발징(髮癥) :

음식에 섞여 몸속에 들어간 머리카락이 뭉친 것을 가리킨다. 가슴과 목구멍에 벌레가 오르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주-D003] 족태음비경〔足太陰經〕 :

족태음경(足太陰經)은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의 줄임말이다. 12경맥(經脈)의 하나로서, 엄지발가락의 끝에서 시작하여 복사뼈, 무릎, 넓적다리, 사타구니를 거쳐 복강(腹腔)으로 진입하여 비장(脾臟)으로 들어간다. 족태음비경은 여기에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한 줄기는 위(胃)에 닿은 후 횡격막으로 올라가 식도를 거쳐 혀뿌리까지 연결된다. 또 다른 줄기는 위(胃)에서 갈라져 나와 심장(心臟)으로 가서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과 연결된다.

[주-D004]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 :

수양명경(手陽明經)은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의 줄임말이다. 12경맥(經脈)의 하나로서, 둘째손가락 끝에서 시작하여 팔꿈치, 어깨를 거쳐 결분(缺盆)으로 들어갔다가 폐와 횡격막을 지나서 대장(大腸)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줄기는 결분에서 목으로 올라와 뺨과 치은(齒齦)을 거쳐 인중(人中)에 이른다.

[주-D005] 정창(疔瘡)〔疔〕 :

못〔丁〕처럼 생긴 부스럼이다. 못머리처럼 피부 위로 솟아있는데, 속에는 뿌리〔根〕가 들어있어서 치료가 어렵다.

[주-D006] 시주(尸注) :

오한과 발열이 오락가락하면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며, 온몸이 가라앉는 듯한 증상이다.

[주-D007] 석우(石疣) :

석우는 석우(跖疣)이다. 원래 석우는 발바닥에 생기는 사마귀를 말하는데, 독소에 감염되어 피부를 뚫고 돌처럼 단단하게 생기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오래된 회충’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주-D008] 주비(周痺) :

온몸이 아프고 통증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마비 증상이다. 몸이 허(虛)해져서 풍사(風邪)ㆍ한사(寒邪)ㆍ습사(濕邪)가 혈맥(血脈)이나 피부로 침입해서 발생한다.

[주-D009] 자오안마법(子午按摩法) :

시간의 변화에 맞춰 안마를 시행하는 치료법이다. 인체의 상태는 일(日)과 시(時)의 영향을 받는다는 천인상응론(天人相應論)의 사유 방식이 전제되어 있다. 자(子)는 숫자 9에 해당하는 양(陽)이며, 오(午)는 숫자 6에 해당하는 음(陰)을 의미한다.

[주-D010] 곤담환(滾痰丸) :

습열(濕熱)이나 식적(食積)으로 인한 담(痰) 등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몽석(礞石)ㆍ대황(大黃)ㆍ황금(黃芩) 등으로 구성된다.

[주-D011] 화제국방(和劑局方)〔局方〕 :

《국방(局方)》은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 즉 《화제국방(和劑局方)》을 가리킨다. 《화제국방》은 송(宋)나라의 대표적인 제제약(製劑藥) 처방집이다. 1078년 이후에 초간(初刊)될 때는 《태의국방(太醫局方)》이었지만, 이후 몇 차례의 수정 증보 과정을 거쳤다. 대관(大觀) 연간에는 진승(陳承), 배종원(裴宗元), 진사문(陳師文) 등이 교정하면서 《태평혜민화제국방》으로 서명을 바꾸었다. 본문에서 ‘대관 연간에 다시 무너졌다’고 표현한 것은, 《화제국방》이 송나라 태의국에서 편찬한 관찬의서로서 임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황제내경소문》에 대한 연구가 퇴보하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개원(開元) 연간에 한번 무너졌다’고 표현하였다. 당(唐)나라 개원 연간에는 진장기(陳藏器)가 《본초습유(本草拾遺)》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연호를 따서 《개원본초(開元本草)》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본문에서 비판한 것은 이 시기에 현종(玄宗)의 명으로 편찬된 《개원광제방(開元廣濟方)》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12] 부자이중탕(附子理中湯) :

간(肝)과 신(腎)이 허랭(虛冷)하여 생기는 간헐적인 복통 등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부자(附子)ㆍ건강(乾薑)ㆍ백출(白朮) 등으로 구성된다.

[주-D013] 한다망양(汗多亡陽) :

치료하느라 사용한 약재들로 인해 땀이 과다하게 배출되면서 양기(陽氣)가 부족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주-D014] 학록(學錄) :

학록은 로(路), 주(州), 현(縣) 같은 지방 단위의 학관(學官)이다. 교수(敎授)를 보조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주-D015] 고소(姑蘇) :

소주(蘇州)를 가리킨다. 소주(蘇州)는 성(城) 서쪽에 있는 고소산(姑蘇山)에서 비롯된 지명이어서, ‘고소(姑蘇)’로 소주를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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