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中期醫術과 醫藥의 發達
孫弘烈** 淸州大學校歷史敎育科敎授.
Ⅰ. 序言
Ⅱ. 醫術의 發達
1. 治腫學의 發展
2. 鍼灸術의 盛行
3. 痘科및 其他醫術
4. 醫書의 編纂과 諺譯
Ⅲ. 醫藥의 開發
1. 鄕藥의 開發과 普及
2. 藥材의 栽培
3. 藥材의 貿易
Ⅳ. 結言
Ⅰ. 序言
조선중기는 국내외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던 때였다.중국대륙에서는 明·淸이 교체되었고, 日本에서는 豊臣秀吉이 죽고 德川幕府時代가 시작되었다. 朝鮮은 그 와중에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당하여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醫學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戰亂으로 많은 醫書가 산실되거나 약탈되었고, 의원도 각지에 흩어져 국가의 醫療政策에 커다란 차질을 초래하였다. 또 種藥田을 비롯한
藥田이 荒廢化하여 藥材의 공급이 부족하였다. 조선전기에 世宗을 비롯한 歴代의 國王과 여러 醫官·儒醫의 관심 속에서 이룩된 鄕藥의 개발과 보급이 外患에 의해 큰 차질을 빚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전란으로 각종 질병이 유행하고 부상병이 속출하여 醫療에 대한 욕구는 더욱 증가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를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질병 치료를 위한 새로운 醫書의 編撰, 治腫術·鍼灸術등 外科的기술의 개발, 鄕藥의 개발과 이를 활용한 질병의 치료 등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조선전기의 의학을 계승함은 물론 韓國醫學發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조선 중기 醫學의 學問的·技術的발달을 고찰하여 그것이 조선중기의 사회에 어떻게 기능하였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 醫術의 發達
조선중기의 醫術은 새로운 醫書의 편찬과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의술의 개발은 물론 治腫術의 발달로 治腫廳과 같은 새로운 기구가 설치되었으며, 許浚·許任·任彦國·李馨益·白光炫등 우수한 의원이 많이 배출되어, 특히 外科學이 발달하였다. 이를 治腫術·鍼灸術·痘科·其他醫術및 醫書의 編纂과 諺譯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 治腫學의 發展
治腫學은 현대의 外科學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東洋醫學에 있어서 外科는 癰腫·金瘡·骨折 등을 치료하는 간단한 수술을 말하는 것으로서, 서양의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양의 外科는 針術에 뛰어난 자가 주로 鍼을 이용하여 수술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鍼醫가 外科醫였지만, 鍼醫라고 해서 모두 外科醫는 아니고 그 중에 이러한 手術에 능한 자를 外科醫, 즉 治腫醫라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外科學이 발달하였는데, 그것은 고려시대에 벌써 呪禁師라고 하는 外科醫가 있었던 것으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呪禁師는 隋·唐代의 醫職으로서 그 임무는 주문을 외워서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다.1) 그리고 중국의 南朝와 긴밀한 外交關係를 맺고 있던 백제의 呪禁師와 신라의 供奉卜師는 이러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지만,2) 고려시대의 呪禁師는 이와는 달리 外科專門醫였으며, 그것은 呪禁業의 시험과목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3) 즉 呪禁業의 시험과목4)은 醫業과는 달리 주로 外科學(劉涓子方·瘡疽論)5)과 鍼學(明堂經·鍼經)으로 試取하였던 것이다. 또 外科에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자도 있었다. 毅宗때의 李商老는 왕의 종기를 고쳐 吏部尙書에 올랐고,6) 忠烈王때의 賛成事趙簡이 癉疽(惡性의 腫氣)가 나서 고생할 때 醫僧(姓名未詳)이 이를 外科手術法으로 고치는 등7) 外科에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진 자가 있었기 때문에 呪禁師와같은 外科醫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外科學의 전문적 기술은 宋醫學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1) 《新唐書》권48, 百官3 太醫署條.
2) 孫弘烈, 《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서울 : 修書院, 1988) pp. 53∼56 참조.
3) 孫弘烈, 위의 책 pp. 129∼131 참조.
4) 《高麗史》志권27, 選擧1 科目1, 仁宗14년 11월 判文.
5) 《劉涓子方》은 《隋書》에 실려 있는 《劉涓子鬼遺才十卷》(龔慶宣撰) 또는 《唐書》에 보이는
《龔慶宣劉涓子單方十卷》으로서, 宋武帝가 北伐할 때 金瘡을 입은 자에게 약을 발라 치료하게
하였는데, 그 약은 晋나라 말기 사람인 劉涓子가 鬼神으로부터 얻은 《癰疽方》一帙을 이용하여
제조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를 《鬼遺方》이라고도 한다. 다음 《瘡疽論》은 확실치는 않으
나 이것도 惡性의 腫氣를 치료하는 醫書이다(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大阪: 自家出版,
1963. p. 53 참조).
6) 《高麗史》列傳권35, 李商老傳.
당시 宋은 醫學이 分科되어 있었다. 그 중에 외과에 속하는 것으로는 瘡腫科(外科)·金鏃兼書禁科(金鏃은 重傷을 處置하는 科이고 書禁은 呪禁科)·金鏃兼傷折科(傷折은 骨折) 등이 있었는데,8) 이러한 宋醫學이 고려에 수입되었음은 물론 《外科精要》·《外科精義》등의 醫書도 수입되어 고려의 外科學발달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학문적 전통은 조선에까지 이어져 《經國大典》에, 醫員으로서 비록 方書를 이해하지는 못하나 능히 瘡腫및 여러 惡疾을 치료하여 효과가 많은 자 1인을 歲抄때 王에게 啓聞하여 등용한다9)고 하여 鮮初부터 治腫醫(外科醫)가 特叙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으로 보아 특히 外科學은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중기에 治腫術이 크게 발달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연한 일은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治腫學의 발달로 治腫醫와 治腫廳을 설치하게 되었다. 治腫醫는 전술한 바와 같이 《經國大典》이 완성된 成宗代(혹은 世祖代)에 이미 설치되었는 바 이는 당시
治腫學이 醫學의 한 분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治腫廳의 설치가
治腫醫制의 실시와 그 시기가 반드시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治腫廳은 瘡腫과 여러
惡瘡을 전문으로 치료하던 기관이었지만, 이의 置廢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增補文獻備考》에,
治腫廳은 本朝宣祖36년(1603)에 다시 설치하였는데, 그 初置年및 革罷年代는 알 수
없다. 腫氣의 治療를 관장하였는데 후에 典醫監에 併合하였으며, 敎授1員(典醫監의 敎
授를 移屬한 것임)·鍼醫3員·前銜10員·生徒10인이 있었다10)
7) 《高麗史》列傳권19, 趙簡傳.
8) 吉田寅, 〈南宋における醫學敎育の一資料〉(《東洋敎育史硏究》3, 1979) pp. 2∼3 참조.
9) 《經國大典》권3, 禮典獎勸條에 “醫員雖不解方書能治瘡腫及惡疾成効最多者一人歲抄啓聞叙用
產婆則給料”라 하였음.
10) 《增補文獻備考》권223, 職官考10 典醫監附治腫廳條에 “本朝宣祖三十六年復置治腫廳剏置與革
罷年代未詳掌治腫後併于典留監有敎授一員以典醫監敎授移屬本廳鍼醫三員·前銜十員·生徒十人”
이라 하였음.
- 197 -
는 기사 뿐이다. 이로 보아 治腫廳은 전에 설치되었다가 폐치된 후 宣祖36년에 설치되
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初置年代는 알 수 없다. 그러나 治腫廳이 설치될 수 있었
던 기본적인 조건, 즉 治腫醫와 治腫學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조성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선초에 治腫醫를 特叙함으로써 이러한 기구를 설치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中宗38년(1543)에 편찬된 《大典後續錄》에 治腫醫員1명이 西班遞兒職을 받
은 것으로 보아,11) 世祖혹은 成宗代부터 歲抄때 1명씩 錄用하던 治腫醫員을 中宗代부
터는 제도적으로 이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治種廳과 같은 常設機構가 설치되었다고 생각
된다. 따라서 治腫廳은 中宗흑은 明宗代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 후 언젠가 廢置되었다가 임진왜란 후 外科學의 발달로 이러한 기구의 필요를 느끼게
되어 宣祖36년 復設되었을 것이다.
이때 복설된 治腫廳의 敎授는 처음에는 典醫監의 敎授를 임명하였으나, 뒤에는 治腫敎
授가 別設되었다. 이것은 별설된 것이었기 때문에 正職은 아니었지만, 仕日이 만료되면
東班의 6品正職을 除授받았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기 위해 仁祖때 吏曹判書崔鳴吉등
이, 이들은 仕滿후 軍職6품에 서용하도록 하되, 그 재주를 보아 임용하도록 건의하였
으나 전대로 시행하게 하였다.12) 治腫敎授등에 대한 이러한 叙用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
다. 즉 肅宗27년(1701) 吏曹判書李畬의 剳子에 의하면, 治腫敎授·吏文學官·觀象監敎授
등이 仕滿60개월에 東班6品正職으로 陞遷할 때는 반드시 考講한 연후에 서용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13) 임용조건이 강화되었을 뿐 그 제도는 그대로 운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治腫廳이 別設(典醫監에 附設된 것인지도 모르지만)되고, 治腫敎授도 叙用하여
治腫醫를 養成할 수 있었던 것은 朝鮮中期에 外科學이 발달하였기 때문이지만, 이미 선
초부터 鍼灸醫·瘰癧醫등 外科專門醫가 설치되는 등 의학의 分科敎育을 실시하여 專門醫
를 양성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鍼灸專門醫는 世宗朝부터 별도로 서용하였고, 成宗3년
(1472)에는 鍼灸專門法을 別設하여 四孟朔取才에 이들을 선발하였던 것이다. 또 瘰癧醫
(연주창 전문의)도 濟生院에 속해 있으면서 치료를 담당하였는데, 뒤에 濟生院이 惠民局
에 合屬되었을 때 前銜權知와 瘰癧醫權知가 69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14) 이미 전
11) 《大典後續錄》권4, 兵典遞兒條.
12) 《仁祖實錄》권28, 11년 7월 壬寅條에 “吏曹判書崔鳴吉上剳子請曰…(中略)… 観象監·天文地理·
命課三學敎授·都案廳郞廳·關王廟守直等皆非正職而都目則例爲陞遷此爲仕路不清之一端而全然不
叙則亦係寃悶仕滿後軍職六品叙用以爲量才調用之地事…答曰…(中略)…觀象監敎授以下正職西
陞意非偶然此類ー欵依前施行”이라 하였음.
13) 《肅宗實錄》권35上, 27년 정월 辛亥條.
14) 孫弘烈, 앞의 책 pp. 218∼221 참조.
- 198 - 國史館論叢 第56輯
문의로서의 瘰癧醫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鮮初부터 鍼灸醫와 瘰癧醫가 外科專門醫로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中宗
代에 治腫廳이 설치될 수 있었고, 여기에 鍼醫와 前銜醫員10명 그리고(治腫)生徒10명
이 속해 있으면서 敎育과 治療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 治腫廳은 中宗·明宗代에 특히
발달한 外科學으로 인하여 설치된 것이었지만, 뒤에 廢置되었다가 宣祖36년 復設되었는
데, 그것은 倭亂으로 外科專門醫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典醫監에
合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肅宗代에도 治腫敎授가 別設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別設(혹은 典醫監에 附設)되어 있던 기간은 전후 합해 적어도 1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중기에는 특히 외과학이 발달하여 治腫學과 鍼灸學의 大家가 배출되었고, 아울러
이 분야의 괄목할만한 의서도 저술되었다. 조선시대 治腫術의 名醫는 《治腫秘方》을 찬
술한 任彥國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생몰년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成宗代末
(1490년대)∼明宗代初(1540년대)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본래 井邑人으로서 지극
한 효자였는데, 한 때 그의 母親이 腫患을 앓아 고치지 못하고 있던 차에 靈隱寺에서 한
老僧을 만나 그에게서 鍼法(手術法)을 배워 모친의 병은 물론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
기 때문에 조정에서 이를 듣고 서울에 불러 올려 수만 명의 생명을 구하였다 한다.
왕은 그를 禮賓寺主簿에 特叙하였는데, 그 기술을 다 전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때(明
宗14, 1559) 마침 井邑을 지나던 全羅道觀察使安瑋가 그의 遺方(《治腫秘方》)을 얻어
錦山郡守李億祥에게 부탁하여 刊行(木板)한 것이 일본에 전하고 있다.15) 이 책은 序文
2枚·本文8枚의 小册字이지만 그의 治腫法은 과거와 같은 鍼術에 의한 姑息的腫瘍의 절
개수술에 그친 것이 아니고 현대의 外科的決裂法을 사용하고 있다. 任彦國은 그의 저서
인 《治腫秘方》에서 膿瘍을 火丁·石丁·水丁·麻丁·縷丁의 5丁(疔)으로 나누어 각기 그 증
상과 치료법 및 外用的療法인 鹽湯沈引法·土卵膏·千金漏蘆湯·蟾灰·鹽湯沐浴法등에 의
한 치료법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러한 그의 치료법을 모두 살펴볼 필요는 없고, 그 중 한가지인
火丁의 치료법에 대해서만 설명해 보고자 한다. ‘火丁’은 赤黑色으로서, 이것이 머리에
발생하면, 針을 놓아 出血을 시킨 후 소금 끓인 물(鹽湯水)을 늘 발라주되, 바르지 않을
때와 잠잘 때는 患部의 머리털을 깎아낸 후 土卵膏를 붙여 惡毒을 빨아내도록 한다. (다
음) 이것이 얼굴에 발생했을 때는 患部및 그 바로 위(直上), 머리 부근(髮隣), 정수리(百
會) 또는 尺澤16)에 鍼을 놓아 독을 빼고 소금 끓인 물을 자주 종기에 발라 열을 식히고
15) 三木榮, 《朝鮮醫書誌》(大阪: 學術圖書刊行會, 1973) p. 78, 《治腫秘方》序文참조.
- 199 -
토란고를 바른다. (끝으로) 이것이 手足에 발생했을 때는 針과 藥의 치료법은 위와 같게
하되, 특히 소금을 끓여 沈引法을 쓰도록 한다. 그래도 만약 치료가 안될 때는 千金漏蘆
湯을 蟾灰(두꺼비 재)에 섞어서 하루에 3번 복용하고, 병세가 중할 때는 소금 끓인 물에
목욕을 한다.
그리고 外用療法중 鹽湯沈引法은 물 1사발에 소금 1合을 넣고 2·3차례 끓인 다음 물
이 어느 정도 식기를 기다렸다가 환부에 흘려 붇는 것이며, 土卵(膏)(일명 母立이며, 本
草名은 土芋이다)은 이것을 갈아 汁을 내어 종이 위에 바른 다음 患部에 붙이는 것이다.
蟾灰는 두꺼비의 내장을 제거한 후 두개의 기와 사이에 이것을 넣고 끈으로 묶은 다음
진흙으로 머리를 비롯하여 드러난 곳(隙處)을 다 바른 다음 불속에 넣어 오래 있다가 꺼
내 (두꺼비를) 갈아서 가는 가루로 만들어 한번에 1錢씩 복용하는 것이며, 鹽湯沐浴法은
蛇毒草와 蒼茸을 넣은 鹽湯에 목욕하는 것을 말한다.17)
이 火丁이외의 石丁·水丁·麻丁·樓丁등은 腫瘍의 형태(大豆形·鳥卵形등)·色彩(白·赤·
純赤·微赤등)에 따라 針刺法은 약간씩 다르지만 用藥·浴法등 치료법은 대개 火丁과 같
은 것이었다. 任彦國은 5丁治療法이외에 ‘背腫’치료법도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鍼을 놓
지 않고 수술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腫處를 十字形으로 切開하는 수법을 사용
함으로써, 현대의 外科的수술법을 연상하게 하는 觀血的切開療法의 단계에까지 이르렀
다고 생각된다. 당시 明에서 저술된 薛己의 《外科樞要》나 조금 후인 陳實功의 《外科
正宗》보다도 훨씬 뛰어난 수술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背腫을 십자형으로 절개하는
방법은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으로 대단히 과학적인 것이었다.18)
당시의 또 다른 治腫書인 《治腫指南》은 任彦國혹은 그의 제자(후계자)의 저서로 추
정되고 있는데, 이 책은 上下2권(目2枚·上卷27枚·下卷31枚·識語半枚)의 寫本으로서
현재 일본에 전하고 있다. 이 책은 《治腫秘方》의 치료법을 상세히 설명한 것으로서 腫
瘍뿐만 아니라 각종 外科的질환은 물론 內科·耳·咽喉·性病·眼科的疾患도 內服藥을 사
용하지 않고 針에 의한 決裂切開法을 주로 하는 鍼灸法·罨法·洗滌法·膏劑貼法등에 대해
설명한 외과수술서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질병의 수술법을 도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上권에는,
背腫圖·己膿腫形圖鍼破法·長腫形圖鍼破法·腫中陷裏形圖·丹腫形鍼破圖·內腫圖·陰腫圖.項
髮際腫圖·鼓張圖·胸腹痛圖·腰痛圖·浮腫圖·哮喘圖·疔腫圖·食傷圖·上氣證圖·項筋不仁圖·
耳痛圖·咳嗽圖·淋疾圖·背寒圖·膝臏腫圖·疝氣痛圖·腰背傴僂圖·狐疝痛圖·面腫圖·咳喘氣逆
16) 尺澤은 脈經의 한 部位로서 肺脈의 氣(肺之氣)에 해당하는 곳을 말한다.
17) 이 火丁의 치료법과 外用療法은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pp. 387∼388을 참고한 것임.
18) 三木榮, 위의 책 p. 388 참조.
- 200 - 國史館論叢 第56輯
圖·脚氣圖·腹部下鍼圖·臂肘曲急圖·眼胞八穴圖·眼瞼胞虛腫圖·背腧刺鍼圖
등 33種의 腫膿切開法이 들어있다. 이들 수술법에 대한 설명은 세밀하고 정확하며, 특히
背腫의 치료법은 매우 우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下권에는,
背腫·內腫·陰腫·項腫·鼓張·浮腫·胸腹痛·腰痛·脇痛·食傷·上氣·咳嗽·哮喘·耳痛·疔腫·淋疾·
㿗疝·狐疝·諸疝·外腎腫·項筋不仁·腰背傴僂·面腫·眼疾·唇腫·喉腫·重舌·雙蛾·脚氣·懸癰·
偏頭痛·有臂酸痛·齒痛·頭痛·齒齲·髀脛酸痛·臀腫·附骨疽·丹毒·乳腫·瘰癧·癭氣·瘤贅·痰核·
頭瘡·偸針·漏瘡·肉毒·濕腫·腋腫·鼠瘻·縷疔·便毒·肬目·痔疾·面瘡付口舌瘡·徧身瘡·丁瘡·耳
瘡·鼻瘜·月蝕·濕瘡·癬瘡·手掌瘡·舌緩涎出·轉筋·臂痛·手腫·膝脛腫·中暑·腹中冷塊·走注風·
落傷·四肢不仁·中風治熱法·角弓反張·半身不遂·牙關緊急·啞不能言·吐血·瘟疫·白癩·諸痢·
瘧疾·癲癎·癲狂·邪熱·臍瘡·燥證·傷寒發熱附諸熱·杖瘡·竹木刺傷·治瘢痕·背寒
등 95종의 疾患을 기재하고, 그 수술법이 설명되어 있는데,19) 그 질환은 현대의 內科·外
科·耳鼻咽喉科·齒科·眼科·泌尿器科·皮膚科등 거의 全科를 망라하고 있다.
끝으로 치료상 특히 주의해야 할 ‘治法綱要’ 9條와 수술할 때 응용하는 ‘用藥法’ 19條
가 부기되어 있다. 이 책은 대단한 가치를 지닌 外科書로서, 전술한 《治腫秘方》은 주
로 膿瘍의 切開手術을 기술한 것인데 비해, 이 《治腫指南》은 한걸음 더 나아가 전술한
95종의 각종 질환까지 針으로 절개하여20) 觀血的치료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더 큰 가치
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수술법에 대한 설명도 매우 과학적이며, 종래의 漢方外科學과는
다른 특이한 것으로서 당시의 동양외과학에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겠다. 下卷
의 질병에 대한 鍼刺切開法은 현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
만, 그것이 이 책의 학문적·기술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며, 당시 조선에서 이와
같은 독자적 醫術의 新境地를 개척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21)
그러나 당시 任彦國과 같은 外科學의 名醫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
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선초부터 많은 名醫가 배출되었고, 또 당시 동양의학을 대표할
만한 《醫方類聚》와 같은 의서가 찬술되는 등 한국의학 발전의 자주적 기초가 마련되
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학문적·기술적 토대
19) 三木榮, 위의 책 p. 389 참조.
20) 手術에 사용하는 鍼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鍼이 아니라 일종의 메스(Mes)와 같은 것으로서 腫
鍼(자르는 칼과 같은 것)·曲鍼(針끝이 갈고리 〔鉤〕모양으로 된 것)·三稜鍼(끝이 세모진 것) 등
이 있어 용도별로 여러 종류가 있다.
21) 三木榮, 앞의 책(1963) p. 389 참조.
- 201 -
가 조성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任彦國의 이러한 새로운 의술의 개발은 당시 조선의 의학
수준을 東洋諸國은 물론 서양에까지 과시한 커다란 성과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白光炫(1625, 仁祖3∼1697, 肅宗23)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治腫醫員으로서 顯宗과 肅
宗代에 활약한 인물이다. 조선중기는 특히 治腫醫學이 발달한 시대였는데, 白光炫은 任
彦國이후 그와 비교할만한 명의였다. 그러나 그의 醫術이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다만 《白光炫知事公遺事附經驗方》이라는 小册字(寫本) 한 책이 현재 일본에 전
하고 있어 그의 편모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熙朝軼事》에 의하면, 그의 字는 叔微로
林川人이며, 仁祖3년에 출생하였는데, 人品이 醇謹하고 체격이 장대하였다 한다. 처음에
는 針으로 말을 주로 치료하였으나, 方書를 연구하여 점차 숙련하게 되자 사람의 腫瘡을
치료하였는데, 큰 효과를 보게 되었으므로 그후 전적으로 사람을 치료하게 되었다 한다.
그는 疔疽(부스럼)를 치료하는데 있어서 古方에 의하지 않고 반드시 大鍼을 이용하여
종기를 째고 뿌리를 뽑아 치료하였는데, 큰 효과를 보아 많은 사람을 구하였다.22) 이렇
게 그의 의술이 알려지자 顯宗代에 御醫가 되었으며, 同11년(1670) 왕의 병을 치료하여
加資되었고,23) 肅宗10년(1684) 5월에는 康翎縣監에 特叙되었다가 이어 抱川현감에 임명
되었는데, 이때 그의 신분이 천하고 글자도 모른다 하여 臺諫에서 크게 반발하였으나 그
대로 임명되었다.24)
그는 의학을 혼자서 공부하여 끝내 治腫의 명의가 된 인물로서 顯宗때 발탁되어 治
腫敎授가 되었으며(治腫廳의 敎授인지 惠民署의 治腫敎授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어 內
醫院의 의관을 겸하였다. 顯宗의 項腫을 수술하여 치료했기 때문에 堂上官에 特叙되었으
며, 仁宣王后(孝宗妃)가 項後髮際瘡을 앓았을 때 큰 針으로 瘡根을 길이 4寸씩 川字形으
로 決裂하여 치료하였다. 이 수술은 특히 왕모를 수술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큰 부
담을 안겨 주었던 듯하다. 그것은 그가 치료 후 집안 사람들에게 10년 감수했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어려운 수술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治
腫에 관한한 상당한 기술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肅宗의 喉腫과 臍腫을 鍼과
灸로 완치하는 등 腫瘡手術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25)
白光炫은 疔疽를 수술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大鍼을 사용하여 決裂한 뒤 독을 뚫고 根
22) 李慶民編, 《熙朝軼事》권下, 白光炫條.
23) 《顯宗改修實錄》권23, 11년 8월 庚子條.
24) 《肅宗實錄》권15上, 10년 5월 丁卯條에, “(前略)醫官白光炫康翎縣監仍換抱川縣監醫官之除拜守
令屢出於中批物情因己未小匧而至於光炫起身賤微且不識字而驟授是職人皆爲駭臺論重發而終
不允”이라 하였음.
25) 白光炫, 《白光炫知事公遺事附經驗方》;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p. 390 및 金斗鍾, 《韓
國醫學史》(探求堂, 1979) p. 337 참조.
- 202 - 國史館論叢 第56輯
을 뽑아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기 때문에,26) 世上에서는 그를 神醫라 하였다.27) 그는 수
술할 때 일반 의원과는 달리 腫鍼·曲鍼·三稜鍼·散鍼등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經驗例》
에 실려 있는데, 이렇게 다양한 鍼을 사용하여 腫瘍을 근본적으로 수술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수술법은 그가 독자적으로 연구·개발한 것인지 또는 任彦國이후의 治腫秘
法을 전수받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특히 川字形의 決裂法등으로 미루어 볼 때, 任
彥國의 치료법에 그의 독자적 수술법이 가미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으나 아들 興齡이 그 업을 계승하여 명성이 있었고, 弟子인
朴淳역시 治腫醫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醫術은 白光炫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鄭來僑는,
지금 世上에서 행하고 있는 疔疽決裂法이 白太醫(光炫)로 시작한 것인데, 後學者들이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하여 치료하기 어려운 疽毒(腫瘍)이 걸린 병자가 있으면 반드시 白
光炫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28)
고 하였으며, 張志淵은 《逸士遺事》에서,
外史氏曰我朝鮮疔疽決裂之法이 自白太醫始니 今世西洋醫士之手術이 是已라 但其
發明之後에 世無勸獎者고 亦無講究善學者야 更無如白太醫者出고 至今遂讓步於西
人니 噫라29)
하여 白光炫의 腫瘍手術法이 뛰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觀血的外科手術法(疔疽決裂法)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것은 任彥國의 수
술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白光炫의 이러한 治腫(外科)術은 그가 남긴 의
서가 없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李慶民의 《熙
朝軼事》, 張志淵의 《逸士遺事》와 顯宗·肅宗實錄의 기사로 보아, 그가 뛰어난 外科醫였
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 고찰한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가장 저명한 治腫醫는 전술한 任彥國과 白光炫
이었다. 그후 英祖때의 金應麟·正祖때의 李同·趙光一등이 治腫醫로 이름이 높았으나
이들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당시에 있어서 神技에 가까웠다고 하는 그들의 의술이 계속
26) 張志淵, 《逸士遺事》권2, 白光炫條(서울 : 滙東書館, 1922) pp. 44∼45.
27) 《肅宗實錄補闕正誤》권29, 21년 12월 丁酉條에 “上命送御醫白光炫於領敦寧尹趾完處光炫善治
腫多有奇効世稱神醫”라 하였음.
28) 李慶民編, 앞의 책 白光炫浣岩集引用文.
29) 張志淵, 앞의 책 p. 46.
- 203 -
이어지지 못하고 각각 一代로 끝난 것도 매우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2. 鍼灸術의 盛行
鍼과 灸는 옛날부터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었다. 鍼이 언
제부터 치료수단으로 이용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국 最古의 醫書인 《黄帝內經》
에 이것이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전하고 있다.30) 그런데 이 책은 漢代중기 이후에 완성
된 것이지만, 그 내용의 일부는 春秋戰國시대 이전의 醫學知識을 전해주고 있으며,31)
《山海經》역시 先秦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 알려지고 있다.32) 그리고 이 先秦時
代는 古朝鮮시대에 해당함으로 砭石의 術이 이미 고조선에서 행하고 있었고, 이것이 다
시 중국에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33)
이렇게 볼 때 鍼術은 우리 민족 古來의 치료수단이었고, 따라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에도 이를 매우 중요시 하여 醫生에게 鍼灸法을 교육하였다. 삼국의 경우, 高句麗와 百
濟는 알 수 없으나 新羅는 醫生의 敎科書7종 중 4종(甲乙經·針經·明堂經·難經)이 針灸
書였으며,34) 고려의 경우 교과목은 알 수 없으나, 科擧의 시험과목 8종 중 5종(甲乙經·明
堂經·針經·難經·灸經)이 鍼灸書였던 것으로 보아,35) 鍼灸가 더욱 중요한 치료수단이 되었
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太宗15년(1415) 明으로부터 새로운 《銅人圖》를 구입하여36) 이를 보
급하였고, 世宗15년(1433)에는 典醫監提調黃子厚의 건의에 따라 鍼灸專門法을 세워
專門醫를 양성하였고,37) 同20년부터는 鍼灸專門生(醫) 3인을 叙用, 三醫司에 1명씩 배치
30) 《黄帝內經》권2, 第12篇異法方宜論에 “故東方之域天地之所生也…(中略)…其病皆癰瘍治宜砭石
故砭石者亦從東方來”라 하였고, 이에 대한 張隱庵의 註에 “砭石石鍼也山海經曰高氏之山有石
如玉可以爲鍼即此類也…(中略)…從東方而普及于宇內故砭石之法亦從東方而來以施于九州也”라
하여 石의 針術이 고대에 동방에서 행해졌고, 이것이 중국에까지 전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31) 孫弘烈, 앞의 책 p. 35 참조.
32) 津田左右吉, 〈神僊思朝に關する二三の考察〉(《滿鮮地理歷史學報》第9, 東京帝大文學部, 1922)
p. 447 주 14) 《山海經》참조.
33) 金斗鍾, 《韓國醫學史》p. 26 참조.
34) 孫弘烈, 앞의 책 p. 57 圖表에 의하면, 新羅醫生의 敎科目(書)은 《本草經》·《甲乙經》·《素問
經》·《針經》·《脈經》·《明堂經》·《難經》등 7종이었음.
35) 《高麗史》志권27 選擧1 科目1, 仁宗14년 11월 判文醫業式에 보면, 《素問經》·《甲乙經》·
《本草經》·《明堂經》·《脈經》·《針經》·《難經》·《灸經》이 시험과목으로 되어 있다.
36) 《太宗實錄》권29, 15년 5월 己丑條및 권30, 15년 10월 丁亥條.
37) 《世宗實錄》권60, 15년 6월 壬午條.
- 204 - 國史館論叢 第56輯
하였다.38) 그러나 이 법은 同24년(1442) 取才時에 三醫司醫員들에게 모두 《鍼灸經》
을 시험하게 함으로써 변경되었는데,39) 그것은 특히 鍼灸術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
이었다. 그 후 端宗즉위년 任元濬의 건의로 다시 실시하였고40) 世祖때 또 取才를 전문
별로 하지 말도록 함으로써 폐지되었으나,41) 成宗3년(1472) 3월 다시 鍼灸專門法을 別
設하여 전문의를 양성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42)
그러나 成宗이후로는 醫員과 별도로 鍼灸를 取才에 의해서 선발하였는데, 그 과목을
보면, 《纂圖脈》·《和劑指南》·《銅人經》·《直指脈》·《針經指南》·《子午流注》·《玉龍
歌》·《資生經》·《外科精要》·《十四經發揮》·《鍼經摘英集》등 11과목이었고,43) 이 중
《纂圖脈》·《和劑指南》·《直指脈》을 제외한 8과목이 모두 鍼灸書였다, 이와 같이 專門
醫로서의 鍼灸醫는 成宗代에 비로소 제도화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鍼灸醫의 제도화는 조
선시대에 특히 의학이 발달하여 학문적·기술적으로 괄목할만한 성과가 이룩되었기 때문
이며, 또한 鮮初歷代君主들의 의학에 관한 깊은 관심과 醫療를 통한 爲民政策의 실시에
힘입은 바 크다. 鍼灸醫의 독립은 이후 많은 鍼灸醫를 출현시켜, 民疾의 치료에 공헌함은
물론 새로운 鍼灸術을 개발, 韓國鍼灸學의 독자적 발달의 기초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조선전기에 확립된 鍼灸醫制度로 유능한 침구의가 많이 배출되었고, 이들에 의한 鍼灸
術의 진전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그 결과 몇 종의 鍼灸書가 찬술되었다. 이러한 鍼灸
書는 鍼灸專門醫書와 일반의서에 포함된 鍼灸篇등이 있는데, 본 항에서는 鮮初에 찬술
된 鍼灸書부터 고찰해보고자 한다.
(1) 《鍼灸擇日編集》1卷
이 책은 世宗29년(1447) 內醫院醫官全循義와 金義孫이 《孫眞人備急千金方》·《資
生經》등 16종의 의서를 참고하여 鍼灸日時의 吉凶을 택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다.44) 이
때 이러한 의서가 편찬될 수 있었던 것은, 世宗20년(1438) 3월부터 매년 침구전문생 3
인씩을 叙用하여 三醫司에 1명씩 배치하기 시작한 후, 鍼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이때 간행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原刊本은 없어지고
38) 위의 책 권80, 20년 3월 庚子條에 “議政府據吏曹呈啓針灸專門生每三人叙用三醫司各用一人”이
라 하였음.
39) 위의 책 권95, 24년 丙午條.
40) 《端宗實錄》권1, 즉위년 5월 丁巳條에 “行副司正任元濬條陳醫學便宜…(中略)…一. 復立鍼灸專
門之法使之習慣鍼藥并用”이라 하였음.
41) 《世祖實錄》권20, 6년 5월 己亥條에 “傳旨禮曹曰醫學取才勿用專門依舊行之”라 하였음.
42) 《成宗實錄》권16, 3년 3월 庚戌條에 “禮曹同醫司提調磨鍊醫學勸勵條件以啓…(中略)…一· 別設
鍼灸專門”이라 하였음.
43) 《經國大典》권3, 禮典取才鍼灸醫條.
44) 三木榮, 《朝鮮醫書誌》pp. 54∼55 참조.
- 205 -
그 抄本이 일본에 전해졌다가 1890년 중국에서 다시 간행한 것이 전하고 있다.45)
(2) 《鍼灸要訣》1卷
이 책은 宣祖33년(1600) 柳成龍이 편찬하여 간행한 것으로서 《醫學入門》鍼灸篇의
복잡한 經穴과 施行方法및 그 효과를 계통적으로 분류해서 圖表로 표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다.
(3) 《東醫寶鑑》의 鍼灸篇
이 鍼灸篇은 《東醫寶鑑》의 마지막 편으로서 《銅人經》을 주로 하고 《資生經》·
《醫學人門》·《醫學綱目》등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鍼의 종류와 각종
鍼灸方法및 그 주의할 점을 기술하고 있는데, 먼저 針의 종류 9가지를 보면,
① 鑱鍼: 길이는 1寸6分인데, 머리가 크고 끝이 銳利한 것으로서, 주로 陽氣를 뽑
아내는(瀉)데 쓴다.
② 圓鍼: 길이는 1寸6分으로 針이 계란형인데, 잘 닦고 마찰하여 肌肉을 傷하지 않
도록 하고 分氣를 빼는데 쓴다.
③ 鍉鍼: 길이는 3寸半으로 끝이 黍粟과 같이 날카로우며, 脈을 살펴 그 氣가 虛少한
데 쓴다.
④ 鋒鍼: 길이는 1寸6分이며 날은 세모꼴로 되어 있는데, 瀉熱이나 出血또는 痼疾
을 發泄하는데 쓴다.
⑤ 鈹鍼: 길이는 4寸이고 넓이는 2分半인데, 一名破鍼이며, 癕腫을 터뜨리고 膿血을
내는데 쓴다.
⑥ 圓利鍼: 길이는 1寸6分에 털 같이 뾰족하면서 圓利하여 陰陽을 고르고 暴氣를
제거한다.
⑦ 毫鍼: 길이는 3寸6分. 끝이 모기 주둥이와 같이 뾰족하며, 經絡을 고르고 痛痺를
제거하는데 쓴다.
⑧ 長鍼: 길이가 7寸에 鋒이 銳利하고 주둥이가 넓으니 먼곳의 痺를 취하는데 쓴다.
⑨ 大鍼: 길이는 4寸. 一名焠鍼. 鋒이 가늘고 둥글어 機關의 水를 취하는데 쓴다.
등으로 나누어 각각 그 모양과 鍼이 소용되는 病證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각
종 鍼灸의 방법과 주의할 점을 89개 項으로 나누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중요
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鍊鍼法: 오래된 말자갈로 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으며, 鍼을 사용하기 전에 각종
藥材를 이용하여 이를 삶고 닦는 법 등을 기술한 것.
45) 孫弘烈, 〈麗末·鮮初醫書의 編纂과 刊行〉(《한국과학사학회지》11권 1호, 1989) pp. 45∼46 참조.
- 206 - 國史館論叢 第56輯
四時의 鍼法: 계절에 따른 鍼法의 차이점을 기술한 것.
鍼刺의 淺深法: 體位에 따라 鍼의 길이를 달리하는 법과 灸의 용법 등.
火鍼法: 艾灸를 두려워 하는 자에게 鍼을 불에 달구어 쓰는 鍼法으로 燔鍼法이라고
도 한다.
點穴法: 施鍼하기 전 鍼을 놓을 곳을 정확하게 재는 법.
量分寸法: 身體各部位(頭部·背部·腹部등)의 分·寸을 헤아리는 법.
製艾法: 作艾炷法·取火法·下火灸時法·灸法등 쑥뜸의 제작과 뜸법.
發灸瘡法·療灸瘡法: 灸瘡을 발하게 하여 이를 치료하는 법.
調養法: 뜸을 뜨기 전과 후에 조심해야 할 음식과 약물치료법.
鍼灸不可並施·不耐鍼灸·用鍼須合天時: 鍼과 灸의 施術上주의할 점과 그 시기를 적은
법.
鍼의 補瀉法: 施針하기 전에 形의 肥瘦와 氣의 虛實을 살펴 實하면 瀉하고 虛하면
補하는 법.
用鍼宜審逆順: 鍼을 쓰기 전에 形과 氣의 順逆을 살피는 법.
五奪勿用鍼瀉: 5奪에는 鍼瀉를 하면 안된다는 것으로서, 5奪란 形肉巳脫·大失血之後·
大汗出之後·大泄之後·新產下血之後등을 말한다.
그리고 鍼法有瀉無補·灸補瀉法·鍼灸禁忌·鍼要得術·鍼有上工中工·鍼入着肉등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다음으로는 주로 《銅人經》과 《醫學入門》·《靈樞》등 서에 의거하여 經絡腧穴에
대한 설명 50개조가 있으며, 諸藥灸法(豉餅灸法·硫黄灸法·隔蒜灸法·桑枝灸法·附子灸法·黄
土灸法)과 鷄足灸法이 들어있고, 끝으로 擇鍼灸吉日法등 10조가 기술되어 있다. 이 鍼灸
篇은 製九鍼法에서 坐向法까지 모두 90개조로 나누어 기술한 것으로서, 《東醫寶鑑》의
한 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鍼灸法에 관한 일체를 망라한 것이며, 이를 통해
조선중기 鍼灸學(術)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것이다.46)
(4) 《鍼灸經驗方》1卷
본서는 조선중기의 대표적 鍼醫인 許任의 저서로서 仁祖22년(1644)에 간행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처음에 鍼灸諸穴의 總說로서 訛穴·五臓總屬證·一身所属臟腑經·五臟六府属
病·十二經抄穴·鍼灸法·別穴·折量法등이 기술되어 있고, 다음에는 身體各部位에 관계되
는 각종 질병과 諸風瘧嫌疾·瘡腫(騎竹馬穴法·諸藥灸法)·眼垂·消渴·婦人門·小兒門등에 대
한 鍼灸法을 기술하였으며, 끝으로 鍼灸擇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각종 질병에 대한 鍼灸治療法을 자기가 개발한 補瀉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補瀉法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許任은 자기의 경험으로 新說을 수립함으로써 우리나라의
46) 許浚, 《東醫寶鑑》鍼灸篇참조.
- 207 -
독자적 鍼灸學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번역한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이를 諺解한
《鍼灸經驗方諺解》가 전하고 있다.
(5) 《三方》宋時烈編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三木榮이 소장하고 있는 《簡三新編》의 서문에 의하
면 이 책은 孝宗때 8道의 名醫를 소집하여 각자 경험한 鍼·灸·藥方을 講論하게 한 후
이것을 宋時烈이 편집하여 《三方》이라 하였다 한다.47) 책이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학술적 가치 등은 알 수 없으나, 전국 名醫들의 醫方을 수록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 당
시의 經驗方으로는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당시에 많이 이용되던 中國의 鍼灸書로는 《銅人圖》·《鍼灸銅人圖》·《新刊補
註銅人腧穴鍼灸圖經》·《神應經》·《資生經》·《十四經發揮》·《鍼經指南》·《子午流
注》·《玉龍歌》·《鍼經摘英集》등이 있어 한국 鍼灸學(術) 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許任은 宣祖·光海君·仁祖朝에 활동한 針醫로서, 仁祖22년(1644)에 간행된 《鍼灸經驗
方》을 저술한 바 있다. 그는 常人出身이었으나, 針術에 뛰어나 조선에서 으뜸가는 鍼醫
라는 평이 있었다. 그는 말년에 《鍼灸經驗方》을 저술하면서, 각종 질병에 대한 鍼灸治
療法을 자기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한 補瀉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補瀉法은 그가 처
음 발명한 것은 아니며, 古代醫書인 《素問》이나 晋代의 《鍼灸甲乙經》에도 보이는 것
으로서, 뒤에 여러 의서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許任은 옛날의 補瀉法을 자기
나름대로 개량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補瀉法을 《鍼灸經驗方》
序文에 의해 보면 다음과 같다.48)
(前略) 病者를 치료하려면, 반드시 (아픈)部位經絡의 榮腧經과 臟腑募原의 會穴을
살피고, 그 動脈의 搓捻·催氣를 진찰한 후에 先陽·後陰의 補瀉·迎隨之法을 행하면 반응
이 좋다. 이른바 補라는 것은, 穴에 (鍼) 5分을 刺할 때는 먼저 鍼2分을 刺入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2分을 (더) 刺入하며, 또 잠시 있다가 (나머지) 1分을 刺入한 다음 환자
로 하여금 숨을 들이쉬게 하면서 鍼을 뽑고, 針맞은 자리(鍼穴)를 손으로 눌러 眞氣를
보호하는 것으로서, 이를 補라 한다. 瀉라는 것은 穴에 5分을 刺할 때, 단번에 5分을 刺
入한 후 잠시 있다가 2分을 뽑고, 조금 지난 뒤에 또 2分을 뽑으며, 또 조금 지난 뒤에
환자로 하여금 숨을 내쉬게 하면서 나머지(1分)를 뽑아 그 邪氣를 탈취하는데, 이를 瀉
라 하는 것이다. 灸에도 補瀉法이 있는데, 쑥에 붙인 불이 살까지 타들어가 스스로 꺼지
47) 三木榮, 앞의 책(1973) pp. 114∼115 참조.
48) 許任, 《鍼灸經驗方》序文參照.
- 208 - 國史館論叢 第56輯
는 것을 補라 하고, 쑥에 붙인 불이 다 타들어 가기 전에 꺼버리는 것을 瀉라 한다. 自
古로 用手의 法이 다 자세치 않은 것은 아니나, 後人이 그 뜻에 達치 못하고 한갖 穴의
分寸을 헤아리기에 힘쓸 뿐이다. …(中略)…이제 老衰하게 되어 미처 正法을 전하지 못
한 것이 걱정되어 平素에 聞見한 바를 가지고 編次한 것이다. 먼저 察病의 要를 적고,
함께 轉換의 기틀을 논하여 補瀉의 法을 발명하고, 取穴의 잘못을 校正하며, 또 雜論약
간을 記述하고, (여기에)試効의 要穴과 當藥을 기록하였으며, (이를 모두)합하여 1卷을
만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許任의 補瀉法은, 옛 醫書에 전해 오던 종래의 鍼灸
法에 자신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補瀉法을 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許浚이 《東醫寶
鑑》의 鍼灸篇에서 조선의 針灸學을 총정리 하였다면, 許任은 이를 토대로 새로운 鍼灸
術을 발명함으로써, 朝鮮時代鍼灸術의 독자적 발전의 기틀을 조성하였다고 할 것이다.
李馨益은 燔鍼術로서 仁祖의 총애를 받던 鍼醫였다. 이 燔鍼術에 대하여 《東醫寶鑑》
鍼灸篇에서는 艾灸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쓰던 火鍼이라 하였지만, 이 鍼術은 흔히 행하
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가 있다. 즉, 《鍼灸大成》권4, 九鍼
圖의 火鍼條에,
일명 燔鍼으로서 길이는 4寸이다. 風虛와 腫毒에 毒을 빼는데 이 침을 쓴다(고 하였으
며, 또 燔鍼·火鍼·溫鍼을 구분하여) 燔鍼은 體溫정도로 침을 데우는 것이고, 火針은 麻油
에 그 針을 담갔다가 등불에 붉게 태우는 것인데 붉게 된 후에 쓰는 것이 공이 있고, 만
약 붉지 않으면 병을 치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에게 해가 된다. (溫鍼에 대
하여는) 이것은 楚人의 법인데 그 법은 鍼과 灸를 겸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침을 쓰면 뜸
을 뜨지 아니하고, 뜸을 뜨면 針을 놓지 않았는데, (이것은) 鍼에 灸를 가하고 灸에 鍼을
가하는 것이니, 이것이 후인의 俗法으로 시골의 가난한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다49)
하였다.
三木榮은 燔鍼에 대해 “이것은 鍼에 臘혹은 기름을 묻혀 태운 뒤 紫色이 되면 쓰는
것으로 일명 火鍼또는 烙鍼이라 하는 것이다”50) 라고 하였으며, 《中國醫學辭典》에서
도 “燔鍼은 鍼을 태운 뒤 쓰는 것으로, 곧 火鍼이다”라고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러
나 醫書에도 이런 정도의 설명 이외에 어떤 病證에 어떻게 사용해야 한다는 분명한 해
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燔鍼術은 흔히 행하던 것은 아니었다. 또 李馨益이 이에 대한 저
49) 金斗鍾, 앞의 책 p. 330 참조.
50) 三木榮, 앞의 책(1973) p. 205 참조.
- 209 -
술도 남기지 않아 그의 燔鍼術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燔鍼
術은 溫針術과 같이 鍼과 灸를 겸하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것은 여러 신하의 반대
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仁祖에게 뜸을 施術했던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는 그의 특기인 燔鍼術외에 뜸에도 一家見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李馨益은 大興人으로 燔鍼術에 능하여 효험을 본 자가 많았기 때문에 內醫院에서 그를
불러 서울에 머물게 하였다. 처음 그에게 料米를 지급하도록 內醫院에서 건의했을 때 仁
祖는 ‘論誕之術’을 권장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급하지 말도록 하였으나,51) 이듬해 정월에
는 그에게 料米를 지급함은 물론, 그의 燔鍼을 受針하게 되면서부터 그를 총애하게 되었
다. 특히 그가 다른 의원이나 大臣들의 嫉視를 받은 것은, 그가 능히 邪祟(詛呪에 의한
일종의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52)
그러나 仁祖자신은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李馨益을 만나 그의 燔鍼術로 효험
을 보았기 때문에 群臣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승하할 때까지 그의 針術에 의거하였던 것
이다.
李馨益의 針術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그가 저서 한 권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다만 불에 데운 鍼으로 施鍼한 것으로 보아 溫針과 같이 동시에 鍼과 灸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모든 병에 燔鍼을 쓰지는 않았다. 즉
仁祖23년(1645) 6월 왕에게 施灸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이때 李馨益은 다른 醫官이
나 대신들과는 상의도 없이 밤중에 왕의 腰眼穴에 施灸하였기 때문에 司憲府·司諫院·弘
文館등에서 그의 처벌을 요청하기도 하였다.53) 이와 같이 다른 醫官이나 大臣들이 그를
미워한 것은 단지 그의 鍼術이 ‘詭誕’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그가 鍼術로 인하여 왕의
총애를 받은 데다가, 형제와 아들에게까지 蔭職이 제수되었고,54) 또 본인은 縣令을 역임
하고 特叙되는 등55) 특별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의 燔鍼術은 특이한 것이었기 때문에 궁중에서는 仁祖와 왕비 이외에는 그
의 치료를 받지 않았고, 심지어는 王世子(孝宗)까지 그의 施鍼을 거절하는 등56) 그의 鍼
術을 불신하였다. 따라서 仁祖가 승하하자 그는 즉시 탄핵되었으며, 대신들은 극형에 처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仁祖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慶源府에 유배되었고,57) 이듬해 王大
妃(仁祖妃)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특별히 석방되었으나, 그후로는 활동한 기록이 없는
51) 《仁祖實錄》권27, 10년 11월 丙申條.
52) 위의 책 권28, 11년 정월 庚戌및 甲寅條.
53) 위의 책 권46, 23년 6월 癸亥條.
54) 위와 같음.
55) 위의 책 권46, 23년 정월 戊子條.
56) 위의 책 권46, 23년 11월 辛亥條.
57) 《孝宗實錄》권1, 즉위년 6월 辛亥條.
- 210 - 國史館論叢 第56輯
것으로 보아, 관직을 떠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그의 燔鍼術은 여러 사람에게 인
정받지 못하였으나, 특이한 이 針法은 그의 경험에 의한 독자적 鍼法이었던 것으로서,
조선시대 鍼術의 한 분야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중기에는 침술이 발달하여 독자적 분야를 개척하였음은 물론, 한국의
학의 기술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때 이렇게 鍼術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선초
이래 조선 의학계의 꾸준한 노력과 연구에 힘입은 것이지만, 이외에 전술한 많은 중국의
鍼灸書가 수입·간행되어 의학교육과 치료에 적극 활용된 것도 조선중기 鍼灸術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3. 痘科및 其他醫術
조선시대에는 상술한 治腫術과 鍼灸術이외에 痘科·產婦人科·小兒科등 여러 분야의
의술도 발달하였다. 본 절에서는 이를 專門別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 痘疫이 언제 전래하였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삼국시대를 전후
하여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생각되며,58) 그것은 그후 조선말기까지 때때로 유행하
며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
다.59) 疫이라는 것은 널리 유행하는 전염병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說文解字注》에 ”疫
民皆疾也”라 하였고, 《釋名》에는 “疫役也言有鬼行役也”라 하여 많은 사람이 동시에
앓게되는 병을 말하는 것이다.
痘는 痘瘡즉 麻疹을 말하는 것으로 天然痘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나 통
일신라시대에 痘瘡이 유행하였다는 분명한 기사는 없으나, 그것이 이미 일본에서 유행하
였고,60) 宣德王이 갑자기 疾疹을 만나 13일만에 薨去하였으며, 文聖王이 疾疹에 감염되
서 몇일만에 훙거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61) 이것이 혹시 痘瘡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외에도 《三國史記》에 ‘疫疾’ 또는 ‘大疫’ 등의 기사가 보이지만, 이것이 痘瘡인가는 확
실치 않다.
痘瘡의 유행을 확실히 알려주는 것은 고려시대 醫書인 《鄕藥救急方》이다. 고려시대
58) 金斗鍾, 〈우리나라의 痘瘡의 流行과 種痘法의 實施〉(《서울大論文集》人文·社會科學제 4집,
1956) pp. 32∼34 참조.
59)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pp. 3∼5 참조.
60) 三木榮, 위의 책 pp. 36∼39 참조.
61) 《三國史記》권9, 新羅本紀9 宣德王6년 정월條및 권11, 新羅本紀11 文聖王19년 9월條.
- 211 -
의 것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책 下卷의 小兒雜方에 “小兒豌豆瘡欲發及已發而陷
伏者皆宜速療”라 하여 小兒의 豌豆瘡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다. 이 豌豆瘡은 痘瘡을 말
하는 것으로서, 隋·唐代의 醫書인 《病源候論》·《千金方》·《外臺秘要方》등에도 散見
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는 이 병이 주로 小兒에게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것이 여러 차례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朝鮮王朝實錄》과 官報등 기타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62) 이 痘瘡은 사망률이 높
고 특별한 치료법이나 예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두려워하던 질병이었다. 따라서 이
를 치료하기 위한 專門醫書도 수종이 편찬되었고, 專門醫도 양성하여 이 병에 대비하였
다. 醫書의 경우, 선초에 편찬된 《鄕藥集成方》이나 《醫方類聚》에도 그 치료법이 기
재되어 있으나, 그것은 재래의 치료법을 인용한 것이고, 전문의서는 아니었다. 조선시대
에 편찬된 痘瘡전문의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瘡疹集》任元濬撰
《瘡疹方》이라고도 하는 이 책은 世祖때 任元濬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것으로 현재
일본에 전하고 있다. 上中下3卷인 이 책은, 上卷諸家論에서는 聖惠方論·和劑指南論·錢
氏小兒藥證直訣論·東垣試効方論·陳氏小兒痘疹方論·瘡疹方論·玉機微義論등 20種의 醫書
에서 瘡疹에 관한 方論을 뽑아 수록하였고, 中卷에는 豫防之劑·發出之劑·和解之劑·救陷之
劑·消毒之劑·護眼之劑를, 그리고 下卷에는 催乾之劑·滅瘢之劑·通治之劑·禁忌등을 수록하
였다. 또한 中卷과 下卷에는 위에 열거한 의서 이외에 宋初부터 明初까지의 여러 醫書와
선초의 《本朝經驗方》등을 인용하여 痘瘡의 증상과 그 치료법을 기술하였다.63)
이로 보아 이 책은 痘瘡의 예방과 치료 및 그에 따른 禁忌등 痘瘡治療의 諸方을 망
라한 탁월한 전문의서라 하겠다. 따라서 이 책은 편찬된 이후 醫官의 科擧와 取才科目으
로, 또 醫生·醫官·醫書習讀官의 所讀講書로 지정되어 의학교육과 질병 치료에 크게 활용
되었던 것이다.64) 그런데 여기에서 논한 瘡疹이 痘瘡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와
유사한 다른 發疹性熱病을 모두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책을 찬술한 任元濬
은 世祖때, 文科에 급제한 文官으로서 官이 左賛成에 이르렀으며, 특히 의학에 밝았던
儒醫로서 醫學敎育과 醫術普成에 커다란 업적을 이룩한 인물이었다.
(2) 《諺解瘡疹方》
이 책은 任元濬이 편찬한 《瘡疹集》을 諺解한 것으로서, 언제 언해한 것인지는 확실
치 않으나 世祖때 편찬한 후 곧 언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언해한 후
62) 三木榮, 앞의 책(1963) pp. 38∼39 참조.
63) 三木榮, 《朝鮮醫書訪》pp. 56∼57 참조.
64) 孫弘烈, 앞의 책 pp. 207∼255 참조.
- 212 - 國史館論叢 第56輯
開刊되었으나 반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1517년(中宗12) 金安國이 慶尙道觀察使로 갈 때
가지고 가서 이를 간행·반포하였으며, 이듬해 이를 廣布할 것을 건의, 왕명으로 撰集廳에
서 開刊廣布케 하였던 것이다.65)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지만, 당시 전국에 반포되어
痘瘡의 예방과 치료에 크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의술의 보급에도 공헌하였을
것이다.
(3) 《諺解痘瘡集要》許浚撰
이 책은 許浚이 왕명을 받아 宣祖34년(1601)에 편찬하여, 同41년(1608) 內醫院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跋文에 의하면, 許浚이 任元濬의 《瘡疹集》을 抵本으로 이를
언해한 듯이 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으로서, 당시 전래한 새로운 明醫書
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것이다.
2卷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上卷에는 痘瘡의 原因·豫防法·證候(發熱3日·出痘3日·起
脹3日·貫膿3日·收靨3日)·解痘毒·辨虛實證·痘瘡諸證(聲音·咽喉痛·腰腹痛·驚搐·嘔吐·泄
瀉) 등에 대해 설명하고, 下卷에서는 痘瘡에 걸렸을 때의 여러 증상(痰喘·煩渴·腹脹·自
汗·痒痛·寒戰·便秘·倒靨·黑陷·護眼)에 대한 치료법이 기술되어 있으며, 끝으로. 飲食·禁忌·
浴法·禳法·痘後雜病·痘後醫膜.痘後癰癤·痘後下痢와 附錄으로 孕婦痘瘡과 㿀疹에 대한 것
이 실려 있다.66)
이와 같이 이 책은 전술한 瘡疹集이나 그것을 언해한 《諺解瘡疹方》과는 그 내용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방법에 의해 두창을 예방·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며, 이것은 조
선시대의 痘科에 대한 의술이 중국에 비교될 수 있을 만큼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다. 許浚은 이 책을 편찬하는데 《醫學入門》·《古今醫鑑》·《錢氏小兒直訣》·《世醫得効
方》·《萬病回春》등을 인용하였는데, 특히 이 책의 한글 표기는 국어연구에도 많은 참
고가 되고 있다. 許浚의 이 《諺解痘瘡集要》는 《東醫寶鑑》과 같은 방대한 의서는 아
니지만, 두창의 전문의서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 후 조선 痘科專門醫書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4) 《痘瘡經驗方》朴震禧撰
이 책이 언제 편찬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찬자 또한 어느 때 생존했는지 전기
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대개 仁祖∼顯宗代에 활동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 책이 孝宗~顯宗代에 편찬·간행된 후, 肅宗37년(1711)에 尙州에서 重刊된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다.67) 이 책은 許浚의 《諺解痘瘡集要》이후 가장 뛰어난 痘科専門
65) 《中宗實錄》권32, 13年4월 己巳條.
66) 金信根, 《韓醫藥書攷》(서울大出版部, 1987) pp. 161~166 참조.
67) 三木榮, 《朝鮮醫書誌》p. 115에 있는 《痘瘡經驗方》跋文및 金斗鍾, 앞의 논문 pp. 36∼37 참
조.
- 213 -
書로서, 저자의 오랜 경험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어느 다른 의서보다도 독창적인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顯宗이후 두창의 치료는 주로 이 책에 의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稀痘方·延生第一方·三豆飮·辨痘▼(疒+登)·飮食·禁忌·發熱三
朝(升麻葛根湯등 藥方8條)·出豆三朝(化毒湯등 藥方6條)·出痘終日(敗草散등 藥方6
條)·起脹三日(神功散등 藥方2條)·貫膿三日(窆中湯등 藥方2條)·收靨三日(楿理中湯등
藥方5條)로 되어 있는데, 찬자는 여기에서 각 증상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그에 따
른 처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책의 末尾에 결론 삼아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痘瘡은 脾
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脾胃를 충실히 하여 生氣가 가득하게 하면, 痘瘡은 저절로 순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四君子湯·保元湯과 같은 藥으로 補하면 10중 7·8 은 효험
이 있다”고 하였다.68) 그의 이러한 탁견은 경험에 의한 결과로서 그를 조선중기 이후 가
장 탁월한 痘科專門醫로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각지에서 간행되어 조선시대
두창 치료에 크게 이바지 하였던 것이다.
(5) 《龍山療痘編》李蕃撰
이 책은 李蕃이 顯宗13년(1672)에 편찬한 痘科專門醫書이다. 李蕃(1641∼1708)은 李
植의 孫으로 三陟府使를 역임한 文官이었으나, 의학에 밝은 儒醫였다. 그가 이 책을 편
찬하게 된 것은 醫學에 밝았기 때문이지만, 顯宗12년(1671) 2월 飢饉으로 餓死者가 많
은 데다가 癘疫과 痘疫으로 죽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것이69) 이 책
을 편찬하게 된 동기가 아니었나 한다. 그는 醫員이 아니었기 때문에 朴震禧와 같이 경
험에 의한 새로운 의서를 편찬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여러 의서 중에서도 특히 痘科의
전문서를 종합하여 이를 편찬하였는 바, 주로 《諺解痘瘡集要》와 《痘瘡經驗方》을 참
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보면, 預養法·稀痘方·延生第一方·辨痘症·痘瘡諸症·辨痘虛實法·痘瘡臓腑虚寒
者見症·痘瘡臓腑實熱者見症·痘瘡表裏虛症·痘瘡表裏實症·痘瘡氣不足三症·痘瘡血不足三症·
照燈影法·痘瘡吉凶症·痘瘡輕重症·痘瘡順逆症·痘瘡五臓屬症.痘瘡治法·主治經·主治藥등으
로 되어 있다. 그가 《痘瘡經驗方》을 주로 참고한 것은 權萬이 그 跋文에서,
朴震禧의 痘方이 對症投藥에는 神効가 있으나 鄕村에 없는 藥을 주로 사용하였기 때
문에 쉽게 구해 치료할 수 없어서 岐黄(黄帝와 岐伯; 醫家의 始祖)의 術(治方)을 참고
68) 三木榮, 위의 책 pp. 116∼117의 引用文“(前略) 盖痘瘡雖曰本五臟之毒而脾爲之主也足太陰脾經
所司者肌肉也脾胃充實生氣滿盈痘瘡自順有何邪熱爲祟乎乃用四君子湯·保元湯等藥以補之得効
者什常七八痘瘡之出於脾明矣”를 재인용하였음.
69) 《顯宗實錄》권19, 12년 2월 辛亥條에 “八道人民飢餓癘疫及痘疫死者不可勝紀而三南尤甚”이라
하였음.
- 214 - 國史館論叢 第56輯
하여 번잡한 것을 줄이고 빠진 것을 보충하여 만들었다70)
라고 한 것으로 보아 療法은 《痘瘡經驗方》을 주로 참고하되, 藥材는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하여 다시 편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6) 《村家救急方》金正國撰
이 책은 痘瘡專門醫書는 아니지만, 여기에 痘瘡治療方이 들어 있으므로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이 책은 中宗때의 학자인 金正國이 편찬한 것으로, 그가 全羅道觀察使로
있던 1538년(中宗38) 南原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그는 이 책을 1519년 己卯士禍로 削職
되어 高陽에 가서 있는 동안 鄕村窮民의 질병치료를 위해 여러 의서와 村老의 경험을
참작하여 편찬한 것인데, 여기에 〈小兒痘瘡方〉1篇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發熱三日·起脹三日·貫膿三日·收靨三日·痘瘡不透·痘瘡陷入·痘瘡黑陷·痘
瘡入眼·痘瘡爛·痘瘡爬搔·痘瘡欲發·痘瘡後瘡·痘瘡痂·痘瘡疳蝕등과 痘瘡合併症10條로 되
어 있다. 이에 대해 金斗鍾은 그 분류방법이 중국의 明代痘書에 의한 것이라 한 바 있으
나,71) 그보다는 《諺解瘡疹方》을 주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諺解瘡疹
方》이 그의 형인 金安國의 건의로 中宗13년 撰集廳에서 開刊·廣布되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原書인 任元濬의 《瘡疹集》은 조선전기의 痘書로는 대표적인 것이었기 때
문이다.
찬자인 金正國은 이듬해(1519, 己卯)부터 1537년(中宗37) 復官할 때까지 鄕村에 머물
면서 학문에 전심하였는데, 그동안에 이 책을 편찬하였던 것이다. 현재 《瘡疹集》과
《諺解瘡疹方》이 모두 전하지 않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의서를 언해·간행하고,
이의 廣布를 건의한 金安國의 實弟가 이 책의 찬자임으로, 양자의 관계로 보아 〈小兒痘
瘡方〉은 《瘡疹集》을 많이 참고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1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卷
首에 本草之部가 있고 本文은 大方科(자주 접하게 되는 어른들의 질병 78證에 대한 치료
법)·婦人門(부인들의 병 24證)·小兒門(小兒가 자주 걸리는 병 24證에 대한 치료법, 여기
에 小兒痘瘡方이 들어 있다)으로 되어 있고, 卷末에 溺水·自縊·失欠頷車蹉候·破傷風·恠
疾·肉毒등의 치료법이 첨가되어 있다. 인용한 의서는 明初까지의 중국의서와 출전을 밝
히지 않은 국내의 각종 경험방을 참고로 하였으며, 위와 같은 내용으로 보아 村民의 질
병 치료에 크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7) (《攷事撮要》附)《痘瘡經驗方》
이 책은 明宗9년(1554) 魚叔權이 卿大夫와 胥吏및 일반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
아야 할 格式과 常識등을 편찬한 것으로서, 魚叔權의 原撰에서 英祖47년(1771) 徐命膺
70) 李蕃, 《龍山療痘編》權萬跋文참조.
71) 金斗鍾, 〈우리나라의 痘瘡의 流行과 種痘法의 實施〉p. 35.
- 215 -
이 《攷事新書》로 대폭 개정할 때까지 모두 12차에 걸쳐 續撰과 改修가 이루어졌다.72)
두창에 대하여는 光海君5년(1613)과 仁祖14년(1636)의 續修本에 ‘治小兒痘瘡方’, ‘治痘
毒上攷方’ 등이 간단히 수록되어 있으며, 《痘瘡經驗方》은 顯宗15년(1674)에 改修한 이
책의 부록에 실려 있다. 이 附錄에는 本《痘瘡經驗方》이외에 19개의 醫方·獣醫方·救
荒方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痘瘡經驗方》의 내용은 前述한 朴震禧의 《痘瘡
經驗方》과 내용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이를 그대로 전재한 것으로 생각된다.
(8) (《山林經濟》)《痘瘡經驗方》
肅宗때 洪萬選이 편찬한 이 책에도 《痘瘡經驗方》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農藝·醫
藥·救荒에 관한 저서로서, 전문의서는 아니다. 그러나 實學者인 저자가 실용적인 경제를
위해 醫藥에 관한 내용을 다수 포함시켜 각종 질병을 쉽게 치료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
히 구하기 힘든 약이나 치료하기 어려운 方文보다는 실용할 수 있는 鄕藥과 우리나라
의 경험방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本書1~4卷은 모두 의학
에 관한 것인데, 특히 卷3에는 일상생활에서 접하기 쉬운 病症이 138개나 열거되어 있으
며, 이외에 각종 약재와 약품도 기재되어 있다.73) 《痘瘡經驗方》은 卷3에 들어 있으나,
그 내용은 전술한 《攷事撮要》에 있는 것을 전재한 것이다. 이 책을 편찬하는데 참고한
醫書는 《東醫寶鑑》을 비롯해 모두 21종이었다.
(9) 《古今經驗活幼方》柳瑺(尚·相) 撰
이 책은 肅宗代의 痘科專門醫인 柳瑺이 편찬한 것인데, 그의 年譜는 자세히 알 수 없
으나, 肅宗9년(1683) 9월 서울에 痘患이 크게 일어났을 때 왕을 치료하였고, 同25년에
는 王世子를, 同37년(1711)에는 왕자를 치료하여 큰 효험이 있었기 때문에 內醫로서 官
이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論治痘藥性·患十五日內不治死證論·發熱三朝內決生死門·報痘三朝
決生死門·起脹三朝內決生死門·貫膿三朝決生死門·結靨三朝內決生死門·發熱三朝證治門·收靨
三朝證治門·痘後餘毒證治·痘瘡首尾戒忌例·食治·豫防痘瘡禁方·豫解胎毒方·麻疹論등으로
되어 있으며, 이상의 각 증상에 따른 설명과 처방 및 치료법을 기재하였다.74) 위의 내용
으로 볼 때, 그는 국내외의 痘書와 본인의 경험을 참고하여 이 책을 편찬한 것으로 생각
된다.
이러한 痘瘡專門醫書의 편찬 역시 조선중기 醫術발달의 한 척도가 되는 것이며, 당시
성행하던 두창의 치료에 많은 醫人들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
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학문적·기술적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국내외의
72) 金致雨, 《攷事撮要의 册板目錄硏究》(부산 : 民族文化, 1983) p. 7.
73) 洪萬選, 《山林經濟》권1~4 참조.
74) 三木榮, 《朝鮮醫書訪》p. 120 참조.
- 216 - 國史館論叢 第56輯
종합의서와 두창전문의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痘科의 발달은 뒤에 丁若鏞의 《麻科會通》·李鍾仁의 《時種通編》등 괄목할
만한 痘瘡書(種痘書)를 출현케 하였던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전문의로는 鍼灸醫·瘰癧醫·
治腫醫밖에 없었으나, 顯宗·肅宗代에 이르러 朴震禧·柳瑺등이 痘醫라는 칭호를 얻게 되
어 專門醫로서의 痘醫가 탄생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조선중기에 痘科가 현저하게
발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술한 의술 이외에 특히 발전한 것은 產婦人科와 小兒科가 있으며, 그 밖에 齒科·眼
科·耳鼻咽喉科·養生(養老)科등도 발달하였다. 본 절에서는 이러한 의술의 발달을 科別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⑴ 産·婦人科
產科와 婦人科는 인간을 생산하고 또 그 일을 담당하는 부인의 질병에 관계되는 의학
의 한 분야이기 때문에 어느 科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
던 古代에는 婦人科나 小兒科같은 것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漢代에 이르면 《婦人嬰兒
方》19권이 저술되고,75) 張伯景의 《金置要略》에 婦人證候3篇이 기술된 이후 婦人科
가 점차 발전하였으며, 晋王叔和의 《脈經》卷9는 婦人과 小兒의 脈證만을 기술한 것
이다. 그리고 隋巢元方의 《病源候論》에는 婦人雜病·妊娠病·將產病·難產病·產後病及小
兒雜病諸候등 14卷436論이 기술되고, 唐代▼(处+曰)殷이 《產寶》를 저술함으로써, 이
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宋代에 이르러 陳自明의 《婦人大全良方》·李師
聖의 《婦人產育寶經方》·鄭汝明의 《胎產眞經》등이 저술됨으로써76) 婦人科는 하나의
독립된 科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產婦人科에 대한 관심이나 치료법도 있었을 것이지만, 고려시대의 국
내의서 중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 그러나 巢元方의 《病源候論》과 王叔和의 《脈訣口義
辨誤》등 產婦人科에 관계되는 의서가 간행되어 교육과 치료에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
아,77) 주로 중국의학에 의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 분야의 의
술도 발전하였고, 또 醫女制度의 신설과 產姿의 등장으로 產婦人科學은 독립된 분과의
모습을 점차 갖추게 되었다. 그렇지만 男醫로서 그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
서 관계되는 醫書를 편찬한 의원은 있었지만, 產婦人科의 專門醫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것은 麗末에 전래한 性理學의 영향으로 조선시대에는 남녀의 別이 더욱 엄격해져서 良
家의 부녀들이 男醫의 진찰을 꺼렸기 때문에 産婦人科專門醫로서의 男醫는 존재할 수
75) 《漢書》권30, 藝文志10 經方11家.
76) 鄭曼靑·林品石編著, 《中華醫藥學史》(臺灣: 商務印書館, 1982) pp. 237~238 참조.
77) 孫弘烈, 앞의 책 pp. 155∼156 참조.
- 217 -
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인의 질병과 출산을 돌보게 하기 위해 女醫를 양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醫女制度는 太宗6년(1406) 濟生院知事許衜의 건의에 의해 실시되었다.78) 이들에게는
처음에 《脈經》과 鍼灸法(《銅人圖》등)을 교수하였지만, 점차 調劑法(《和剤方》·《加
減十三方》등)과 《產書》·《婦人門》등이 추가되고, 內醫·看病醫·初學醫등으로 구분
하여 褒贬을 가하는 등 교육을 강화하였으며, 成才한 자는 우대하였다.79) 그러나 이들은
京鄕各司의 官婢들이었기 때문에 成才하여 女醫로 활동하는 자는 점차 증가하였지만, 產
婦人科의 專門醫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官婢출신이었기 때문에 신
분이 낮아 전문의원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없었고, 또 그들이 이수한 교육 정도로는 전
문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內醫院에 속해 있던 內醫(女) 이외에는 의원을 보좌하여 병자(주로 婦
女子)를 치료하거나, 看病醫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醫女制度의 신
설은 부인의 질병, 특히 產婦人科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또 이 제도
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產婆가 있다. 그것은 의녀제도가 창설된 이후 이들에게는 산부인
과에 대한 교육을 특별히 시켰고, 그 중에서 診脈이나 鍼灸보다 出產의 技法에 숙달한
자를 택하여 分娩의 일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산파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생각된
다.80) 그리고 이후 이러한 출산의 기법을 전승하여 전적으로 이 일에만 종사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어 산파라는 직업인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직업적인 산파는 醫
女制度의 성립 이후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는 醫女모두가 產婆의 일을 하였으나, 차츰 그 기능이 분리되어 독립된 직업인
으로서의 산파가 생겨났고, 이에 국가에서도 그 기능을 인정하여 매년 歲抄때 가장 성
과가 많은 산파 1명에게 料米를 지급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81) 이렇게 醫女와 산파는
專門醫는 아니었지만 産婦人科의 專門醫療人으로서 부녀자의 질병과 분만의 일을 담당
함으로써 조선시대 產婦人科學과 그에 따른 의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따
라서 男醫로서는 產婦人科의 전문의가 된 사람은 없고, 醫書를 편찬하거나 諺解하여 이
의 학문적·기술적 발전에 공헌함으로써 產婦人科學을 정립시켜 나갔다. 이렇게 편찬된
의서는 아래와 같다.
① 《鄕藥集成方》兪孝通·盧重禮·朴允德編
이 책은 이들이 왕명을 받아 世宗15년(1433)에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최고의
78) 《太宗實錄》권11, 6년 3월 丙午條.
79) 孫弘烈, 〈朝鮮時代의 醫療制度Ⅲ ―鮮初의 醫女敎育과 醫學敎科書를 中心으로―〉(《藍史鄭在
覺博士古稀記念東洋學論叢》, 1984) 참조.
80) 金斗鍾, 〈近世朝鮮의 醫女制度에 관한 研究〉(《亞細亞女性硏究》1, 1962) p. 10.
81) 《經國大典》권3, 禮典獎勸條.
- 218 - 國史館論叢 第56輯
鄕藥書이지만 여기에 產婦人科에 관한 것이 기재되어 있다. 즉 卷54~66까지가 그것인데,
주요 목차를 보면,
調經門(月經序論外12條)·崩漏門(崩暴下血不止外5條)
婦人諸病門(婦人風眩頭痛外29條)·女陰門(婦人陰腫外8條)
求嗣門(求子及求男外7條)·胎敎門(妊娠總論外17條)
妊振疾病門(妊娠隨月數服薬法外46條)·坐月門(將護孕婦外15條)
產難門(催生靈符外22條)·產後門(產後將護外57條)
등으로 되어 있다.82) 이러한 내용은 중국의서인 《聖惠方》과 《婦人大全良方》을 많이
참고한 것이지만, 婦人科에 속하는 각종 질병과 妊娠에서 출산 및 產後調埋에 이르기까
지를 망라한 것으로서 현대 산부인과의 내용과 흡사한 것도 많으며, 이 책의 편찬은 선
초 產婦人科學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② 產書
이 책의 찬자는 불명이나 선초에 편찬된 產科專門의서로서, 世宗朝부터 醫官과 醫女
의 必讀書가 되었다. 즉 世宗12년(1430) 12월부터는 醫員의 四孟朔取才科目과 의녀의
교과서로 지정되었고, 世祖8년(1462)에는 醫書習讀官의 시험과목 중 하나가 되었으며,
同10년에는 醫官의 필독서가 되는 등83) 후술할 盧重禮의 《胎產要錄》과 함께 매우 중
시되던 의서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책은 《諺解產書》라는 이
름으로 번역되어 全州에서 간행되었으나,84) 역시 전하지 않는다. 이 외에 이와 유사한
것으로 《產書該錄》과 《產書集錄》등의 서명이 전하고 있으나,85) 그 내용은 알 수 없
다. 이와 같이 여러 종류의 產書와 번역서가 편찬·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아, 선초의 產科
學도 상당한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 《胎產要錄》盧重禮撰
이 책은 찬자가 世宗16년(1434) 王命을 받아 편찬·간행한 것이다. 찬자는 선초의 저
명한 의관으로서 조선전기 의학발달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上下2卷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내용을 보면, 上卷은 胎產門으로,
胎敎論·轉女爲男法·胎養謹愼法·妊娠逐月十二經脈養胎將息愼護法·食忌法·胎殺避忌產前
82) 俞孝通等撰, 《鄕藥集成方》권54∼66 참조.
83) 孫弘烈, 〈麗末·鮮初醫書의 編纂과 刊行〉(《한국과학사학회지》11권 1호) p. 45.
84) 《攷事撮要》八道册板全州條.
85) 三木榮, 《朝鮮醫書誌》p. 52 참조.
- 219 -
將護·十二月產圖·滑胎例·妊娠難產·楊子建產論·推婦人行年法·產寶諸方產婦衣色及首指并
起日法·推日遊神法·日曆法·體玄子借地法·禁草法·禁水法·入月預備藥物·將護產婦·產後食
忌幷調護法·產後避忌
등 21條이며, 下卷은 嬰兒將護門으로,
擧兒法·拭口法·治不啼法·斷臍法·初生洗兒法·與甘草汁法·與朱蜜牛黄法·藏胞衣法·擇乳母
法·乳兒法·乳母忌愼法·三朝浴兒法·裏臍法·衣兒并護養法·刺泡法·治重舌法·治重腭重斷法·
初生兒防撮口着噤及鵝口重腭法·小兒始哺法·治小兒穀道無穴法·通便法·治不成肌肉法·小
兒變蒸·小兒客忤并雜忌·小兒食忌·小兒受氣法·剃頭法·小兒行遲
등 28條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요점을 간결하게 서술하여 매우 실용적인 醫書로 평가되
고 있으며, 《聖惠方》·《婦人大全良方》·《產書》등 국내외 의서 17종을 참고하여 편
찬하였다.86) 이 책은 뒤에 許浚이 《諺解胎產集要》를 편찬할 때 藍本으로 이용되었으
며, 그때까지 널리 활용된 產科專書이다.
④ 《妊娠最要方》
찬자는 알 수 없으나 燕山君9년(1503)에 活字(乙亥字)로 인쇄·간행된 產科專書로서,
그 내용은 妊娠可食·妊娠無忌·禁忌內無毒可食·妊振食忌·凡食物相反등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주로 妊婦들의 음식 섭취(可食·禁忌·食毒등)에 관한 것으로, 妊婦의 건강관리 지침
서라 하겠다.
⑤ 《醫林撮要》楊禮壽撰
13卷13册으로 된 조선중기 대표적 의서의 하나로서 疾病을 121門으로 나누고, 病論과
處方을 기록한 것으로서, 참고한 의서가 《鄕藥集成方》·《醫學正傳》·《東垣十書》·《醫
方類聚》등 28종에 이르고 있는데, 여기에는 조선전기로부터 당대까지의 저명한 국내의
서와 중국의서가 거의 망라되어 있어 당시 의학의 전모를 살필 수 있다. 이 책의 卷11
∼12에 婦人門·經候門·求嗣門·胎前門上·胎前門下·產後門등 產婦人科에 관한 내용이 포
함되어 있다. 이 책 이외에 鄭敬先이 찬하고 楊禮壽가 校正한 《醫林撮要》8권이 있다
고 하나,87) 현재 전하지 않는다.
⑥ 《諺解胎產集要》許浚撰
이 책은 許浚이 宣祖34년(1601)《諺解救急方》·《諺解痘瘡集要》와 함께 편찬하여 同
41년 內醫院에서 開刊한 產科專門의서이다. 이것은 盧重禮의 《胎產要錄》을 藍本으로
86) 盧重禮, 《胎產要錄》(韓國科學技術史資料大系醫藥學篇33, 驪江出版社).
87) 許浚, 《東醫寶鑑》內景篇1, 歷代醫方條에 “醫林撮要本國內醫鄭敬先所撰楊禮壽校正”이라 하였음.
- 220 - 國史館論叢 第56輯
하여 《醫學入門》과 《醫學正傳》을 주로 참고하였으며, 그 외에 《古今醫鑑》·《婦人
大全良方》등 9종의 의서를 참고하여 改撰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胎產要錄》을 藍
本으로 하였다 하나, 사실은 그 뒤에 수입된 明代醫書를 주로 하여 개찬한 것이기 때문
에 조선전기 產科學의 신지식을 정리한 새로운 의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求嗣·孕胎·胎脈·驗胎·辨男女法·轉女爲男法·惡阻·禁忌·將理·通治·安胎·欲產候·保童·十產
候(正產·坐產·臥產·横產·逆產·偏產·礙產·盤腸產·熱產·凍產)·禳法·半產·察色驗胎生死·下死
胎·下胞衣
의 순으로 되어 있고, 다음 產前諸證으로,
子癎·子煩·子腫·子淋·子痢·子瘧·子嗽·子懸·感寒·不語·兒在腹中哭·腹中鍾鳴
이 있으며, 마지막 產後諸證에는,
兒枕痛·血暈·血崩·衄血·喘急·咳逆·不語·發熱·乳懸·陰脫·過月不產·下乳汁·臨產預備薬物·
貼產圖法·安產藏胎衣吉方·借地法·月遊胎殺所在·附初生兒救急
등으로 되어 있다.88) 이러한 疾病分類方法과 치료법은 새로운 지식에 의한 것이며, 이
를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이용하였을 것은 물론, 醫女와 產婆의 교
육에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許浚의 이러한 저술활동은 우리나라 產婦人科學발달
에 크게 공헌한 것이라 하겠다.
⑦《東醫寶鑑》(雜病篇婦人門) 許浚撰
《東醫寶鑑》에 대하여는 후술할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雜病篇卷10 婦人門에 대해서
만 간략히 기술하고자 한다. 이 책의 婦人門에는 求嗣·相女法·脉法등 모두 51조의 疾病
과 그에 대한 치료법·예방법 등이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전술한 허준의 《諺解胎產集
要》의 내용과 유사함으로 그 細目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전기의 의
서 보다는 새로운 내용과 치료법을 추가하여 조선중기 의술의 발전된 면을 보여주는 것
으로 특히 일반 의원들이 이를 많이 참고하여 치료에 활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살펴 본 7종의 產婦人科醫書는 조선전기로부터 중기까지 저술·간행된 것으로서,
이것도 당시 조선의 산부인과 의술이 중국에 못지 않을 만큼 발전하여 독자적인 위치를
88) 許浚, 《諺解胎產集要》참조.
- 221 -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2) 小兒科
중국에서는 소아의 치료법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成人과는 다른 치료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小兒와 婦人의 병을 함께 취급하여 그 전문의를 婦兒醫라고도 하였다.89) 따라서 醫
方도 《婦人嬰兒方》·《婦兒科醫方》등 부인과 소아의 치료법이 함께 들어 있는 의서도
많았다. 그러나 宋代에 이르러 小兒科의 名醫錢乙(仲陽)이 나타나 小兒科를 하나의 分
科로 만들었으며, 그는 小兒科(幼科)의 醫聖으로 추앙되었다. 특히 그가 《小兒藥證直
訣》3권을 저술한 후 小兒科는 큰 발전을 이룩하여 이에 대한 註釋書가 수종이나 편찬
되었으며, 明代에는 小兒科學이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90)
이러한 소아과 치료법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현존하는 最古의 의서인 고려시대
의 《향약구급방》에도 小兒雜方·小兒誤呑諸物·水腫등 치료법이 들어 있고, 중국에서 수
입되어 간행된 의서 중에도 《小兒巢氏病源》·《小兒藥證病源一十八論》등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91) 小兒科는 일반 질병과 별도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의
서에는 小兒科에 대한 것이 더욱 많아졌고, 특히 소아에 잘 감염되는 것이 痘疹이었기 때
문에 痘疹書에는 小兒에 대한 처방이 들어 있다. 그러나 조선중기까지는 소아에 대한 의
서가 별도로 편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큰 발전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소
아의 질병과 그 치료법은 일반 의서 중에 포함된 病門(小兒門)을 통해 推察할 수밖에 없
다. 본 절에서는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의 小兒門만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① 《鄕藥集成方》小兒科
世宗朝에 편찬된 이 책은 한국 최고의 鄕藥書로서 여기에는 卷67∼75까지가 小兒科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보면 6세 이상은 小, 16세 이상을 少, 20세 이상을 壯이라 한 것으
로 보아, 6세에서 16세 미만의 어린이에 대한 질병과 그 치료법을 기술한 것이며, 치료
하는데 있어서도 소아는 氣勢가 微弱해서 치료가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92) 小兒科에는
病名이 너무 많아 그 중 중요한 것만 보면, 初生兒防撮口着噤及鵝口重腭法·小兒臍瘡·小
兒驚啼·小兒欬嗽·小兒熱病·小兒霍亂·小兒急驚風·小兒誤呑物·小兒赤白痢·小兒齒不生·小兒
耳瘡·小兒吐血·小兒髮不生·小兒毒腫·小兒尿疪·小兒湯火瘡·小兒尿血·小兒大便靑·小兒脫肛
등 모두 219條의 질병과 그 치료법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아기가 처음 태어나 자랄 때까지의 신체 각 부위의 질병과 정신병·火傷·말더
듬이 등 소아의 특징적인 각종 병의 치료법을 주로 중국 의서인 《太平聖惠方》·《錢氏
89) 鄭曼靑·林品石編, 《中華醫藥學史》p. 237 참조.
90) 鄭曼靑·林品石編, 위의 책 pp. 237∼238.
91) 《高麗史》世家권8, 文宗12년 9월 己巳條.
92) 《鄕藥集成方》권67, 小兒科小兒序論.
- 222 - 國史館論叢 第56輯
小兒方》·《世醫得効方》·《子母秘錄》·《經驗良方》및 唐·宋·元·明初의 각 小兒方과 국
내의 《향약구급방》·《三和子方》·《鄕藥簡易方》·《鄕藥濟生集成方》등을 참고하여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소아과 치료의 지침서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② 《東醫寶鑑》雜病篇小兒
자고로 小兒의 병은 대단히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小兒篇의 첫머리에,
옛말에 이르기를 ‘차라리 10人의 남자를 다스릴지언정 한 婦人을 다스리기 어렵고, 또
10인의 부인을 다스릴지언정 한 소아를 다스리기 어렵다’ 하였는데, (이는) 小兒는 病
勢를 물을 수도 없고, 脈을 진찰할 수도 없으니 더욱 구하기 어렵다(醫學入門). 醫療의
道는 대체로 脈을 다스리기가 어렵고 小兒가 더욱 어려운데, (그것은) 그 臟腑가 脆弱
하고 皮膚가 軟弱하며 血氣가 盛하지 않고 經絡이 실끝과 같으며 脈息이 털과 같아
虛하기 쉽고 實하기도 쉬우며 冷하기 쉽고 熱하기도 쉬운데 말도 못하고 손으로 가르
키지도 못함으로 疾痛하는 症을 알 수가 없고, 다만 얼굴을 보고 빛을 살피며 소리를
듣고 脈을 만져보아 그 病源을 연구하고 陰陽과 表裏와 虛實을 詳定하여 다스리는 道
理밖에 없으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得効方)93)
라고 하여 小兒치료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소아치료법 중 중요한 것을 보
면, 小兒難治·初生解毒法·虎口三關脈法·噤口撮口臍風證·五臓所主虛實證·驚風證·諸疳·吐瀉·
腹痛腹脹·髮不生齒不生·痘瘡預防法·痘瘡治法·痰喘등 모두 112條의 病證과 그 치료법이
기재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의 小兒篇은 전술한 《鄕藥集成方》의 그것에 비해 明代의 새로운 의서를
많이 참고하였기 때문에 신지식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중요한 小兒病의 하나인 두창
에 대해서도 자세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아직 소아과가 分科될 정도로 발달한 것
은 아니며, 소아과가 독자적 분야를 개척하는 것은 조선후기 (英祖代) 趙廷俊의 《及幼
方》이 찬술된 후부터라 하겠는데, 이에 대하여는 뒤에 篇을 달리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3) 齒科
옛날부터 이(齒)는 5복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로 모든 음
식물을 섭취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분이었고, 따라서 이에 따른 질
병의 발생도 빈번하였다. 그러므로 齒科學도 발달하였지만, 分科하여 독립할 정도는 되
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의서인 《향약구급방》上卷에 齒蚶이 들어
있고, 여기에 齲齒·齒痛·牙齒不生·齒根腫痛등에 관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94) 고
려시대에도 齒科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93) 許浚, 《東醫寶鑑》雜病篇11, 小兒小兒難治條.
94) 《鄕藥救急方》권上, 齒蚶條.
- 223 -
한편 《향약집성방》의 齒牙門에는 牙齒疼痛·牙齒蚛孔有蟲·齒齲·齒䘌·牙齒風疳·牙齒歷
蠧·齒黃黑·牙齒動搖·牙齒挺出·齒齗腫痛·斷間血出·牙齒脫落牢牙·牙齒不生·齘齒·齒齗宣露·揩
齒등 이의 痛症에서부터 이 닦는 법까지 치아의 치료와 관리에 대한 병명과 치료법이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서양의 齒科技工法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고, 주로 충치·잇몸출
혈·치아의 동요·통증 등에 대한 것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또 《동의보감》外形篇의 牙齒에도 齒者骨之餘·上下斷屬手足陽明·齒痛惡寒惡熱·牙齒
盛衰·牙齒異名·脉法·牙齒痛有七(風熱痛·風冷痛·熱痛·寒痛·毒痰痛·虫蝕痛·瘀血痛)·牙齒動
搖·牙齒脫落·塞耳鼻止牙痛方·出牙虫殺虫法·牙齒疳䘌瘡·牙齒漸長·齒黄黑·消齒壅法·闘齒·齒
衂·齘齒·落齒重生方·食酸齒齼·修養固齒法·齒病禁忌등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층
발전하여 치통을 7가지로 구분하고, 특수치료법으로 出牙虫殺虫法이나 塞耳鼻止牙痛方
같은 것이 있고 이의 빛깔로 병을 구별하는 법(視齒色占病) 등 다양하게 세분되어 있다.
이로 보아 조선중기에 이르면 齒科도 더욱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치과가 分
科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전기에는 이를 잘 치료한 醫女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濟州의 醫女였는
데, 世宗13년(1431) 5월 濟州醫女孝德은 眼疾과 齒疾을 잘 치료하여 米豆와 鹽醬·綿布
등을 하사 받았고,95) 成宗19년(1488) 9월 濟州治齒醫女長德이 죽었으므로, 이를 잘 치
료하는 사람은 남녀를 가리지 말고 뽑아 보내라고 濟州牧使許熙에게 馳書한 바 있으
며,96) 同23년 6월에는 長德에게 그 기술을 전수받은 貴今과 黄乙등이 그것을 다 전하
지 않으려 해서 문책하는 등97) 齒科에 남다른 재주를 지닌 醫女가 있었다.
成宗때의 成俔도 이 濟州醫女에게서 치료를 받았다. 즉 그는 먼저 온 醫女(長德)가
죽은 뒤 새로 온 醫女(貴今일 것이다)에게서 치료를 받았는데, 입을 벌리게 하고 은숟가
락으로 조그만 흰벌레를 꺼내는데 숟가락은 이에 들어가지 않고 이에서 피도 나지 않으
면서 치료를 하였으며, 그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려 해서 죄를 주었다고 하
면서, 이를 幻術이라 말하고 있다.98) 그러나 그것은 幻術이나 妖術이 아니라 치아 치료
에 특별한 기술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4) 眼科
우리나라에서의 眼科는 조선시대부터 특히 발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眼科疾患에
대하여는 고려 때의 《향약구급방》에도 眼病條에 언급되어 있으나 이는 기초적인 單方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초의 《鄕藥集成方》에는 卷30에서 32까지가 眼門으로 되
95) 《世宗實錄》권52, 13년 5월 己巳條.
96) 《成宗實錄》권220, 19년 9월 戊子條.
97) 위의 책 권266, 23년 6월 癸丑條.
98) 成俔, 《慵齋叢話》권10.
- 224 - 國史館論叢 第56輯
어 있어 病名과 치료법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그것은 赤眼·眼內障·眼偏視·眼見黑花·眼
昏暗·眼晴疼痛·眼鉤割鍼鎌法등 모두 29條의 각종 眼疾患의 증상과 치료법으로 되어 있
는데, 이 책은 중국의서를 주로 하였지만, 우리 고유의 經驗方과 明初醫書의 새로운 지
식이 많이 포함된 것으로 眼科의 독자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초기 우리의 안과가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것은 倭人이 眼科를 硏修한 것으로 보
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즉 1440년(世宗22) 일본의 足利義敎(將軍)가 죽은 뒤 그의 부
하로 있던 渡邊小太郞義隆이 난을 피하여 조선에 와서 7년간 있다가 갔는데, 그동안 그
는 眼科를 연수하였다. 그는 귀국 후 安藝의 土生에 거주하면서 姓을 土生으로 고쳤는
데, 그 子孫은 대대로 眼科를 업으로 삼았으며, 江戶時代말기 眼科醫로 이름을 남긴 土
生玄硕도 그의 10世孫이라 한다.99)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의 의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
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특히 眼科도 괄목할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라 하겠다. 이것은 眼科가 分科되지는 않았지만, 이에 관한 특별한 기능을 가진 醫員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成宗15년(1484) 정월 金良璥의 眼疾을 치료하기 위해 羊
肝을 사용한 것도100) 眼科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초부터 안과가 발전하였지만, 이러한 학문적·기술적 업적을 정리하여 의학의
한 분야로 정립한 것은 許浚의 《동의보감》眼門이라 하겠다. 이 眼門은 전문안과서로
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서, 그 내용 중 중요한 것만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
첫머리에,
‘眼爲臟腑之精’이라 하여, 五臓六腑의 精氣가 모두 위의 눈으로 올라가 精이 되는데,
그 精氣가 눈이 되고, 뼈의 精氣가 瞳子가 되며, 筋의 精氣가 검은 눈자위가 되고, 피
의 精氣가 絡이 되어서 다시 눈의 白眼이 된다. 눈이란 것은 五臓·六腑의 精이요, 榮
衛와 魂魄이 머무는 곳이요, 神氣가 생기는 곳이다101)
라고 하여 눈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신체와 정신의 건강이 눈에 직접적
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五輪之圖(氣·風·肉·血·水)와 八廓之圖(天·地·火·水·風·雷·山·澤)는
中國眼科學의 兩大이론이며, 眼晴屬五臓·眼有內外眥·諸脉屬目·目者肝之竅·眼病無寒·眼無
火不病·眼病所因등은 眼病의 발생원인을 기술한 것이다. 이어 眼病을 內障과 外障으로
나누어 病證과 치료법을 기재하였는데, 內障은 肝病이라 하면서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99) 富士川游, 《日本醫學史》(東京: 日新書院, 1941) pp. 558∼560 참조.
100) 《成宗實錄》권162, 15년 정월 己亥條.
101) 許浚, 《東醫寶鑑》外形篇1眼.
- 225 -
는,
圓瞖·氷瞖·滑瞖·散瞖·橫開瞖·浮瞖·沈瞖·偃月瞖·棗花瞖·黄心瞖·黑花瞖(*이상 11종의 증상
은 주로 白內障의 각종 症狀을 지칭하는 것이다)
胎患(先天的盲目)
五風燮·雷頭風·驚振(*이상 3症은 內障의 急性症)
綠風·烏風·黑風·靑風(*이상 4風은 綠內障내지는 黑內障에 해당하는 것임)
肝虚雀目·高風雀目·肝虛目暗(*이상 3症은 夜盲症에 해당한다)102)
등 23症을 열거하였다.
外障으로는,
肝障積熱·混睛·努肉攀睛·兩除睛·膜入水輪·釘瞖根深·黑瞖如珠·花瞖白陷·水瑕深瞖·玉瞖浮
滿·順逆生瞖·鷄冠蜆肉·瞼生風粟·胞肉膠凝·漏睛膿出·蟹睛疼痛·突起睛高·風起喎偏·倒睫拳
毛·風牽瞼出·神祟疼痛·旋螺尖起·鶻眼凝睛·轆轤轉關·被物撞打·撞刺生瞖·血灌瞳人·眯目飛
塵飛絲·天行赤目·赤眼後生瞖·胎風赤爛·風赤瘡疾·衝風淚出·暴風客熱·瞼硬睛痛·痛如鍼刺·
痒極難任·瞳人乾欠·黄膜上衝·赤膜下垂·小眥赤脈·小兒通睛·小兒胎中生贅·小兒靑盲·偸針
등 45症을 들고 이에 대한 증상과 치료법이 기재되어 있다.
이 內外障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瞖膜·眼花·眼疼·眼昏·老人眼昏·不能遠視不能近視·目不得開合·眼生眵糞·視一物爲兩·讀書
損目·哭泣喪明·眼病當分表裏虛實·眼病易治難治辨·眼中生花(火)·眼病禁忌·眼病調養·目視
凶證
등 17症이 있고, 끝으로 點眼藥·洗眼藥·通治眼病藥과 50種의 單方및 鍼灸法등 藥品과
藥方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이 《동의보감》의 眼門은 당시의 眼科書로는 상당한 수준에
달했던 의서였으며, 이것이 비록 안과전문서는 아니었지만, 당시 조선의 眼科치료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中宗35년(1540)에는 明顧鼎臣의 《醫眼方》의 翻刻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간단한 안과전문의서이지만, 이러한 眼科專書의 간행은 조선의 眼科學이 발전하고 있었
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외에 耳鼻咽喉科·口腔科등도 학문적으로 발달하였으나, 전술한
諸科에는 미치지 못하였음으로 본고에서는 생략하였다.
102) *표는 三木榮의 《朝鮮醫學史及疾病史》p. 118을 참조한 것임.
- 226 - 國史館論叢 第56輯
(5) 養生科
養生이란 병에 걸리지 않도록 몸을 건강하게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養生法또는 養生學이 조선시대에 성행하게 된 것은 朱子學의 영향 때문이었다.
우리는 고래로 孝를 중시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효를 인간이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士大夫는 經史이외에 醫學도 공부하여 부모나 임금의 질병
치료에 의관과 함께 처방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많은 儒醫를 배출하였고, 선초의
《醫方類聚》나 《향약집성방》등 의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던 것이다.
또한 道敎의 不老長生思想은 우리나라의 양생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道敎가 본래 불노장생을 목적으로 한 神仙術이었기 때문에 辟穀·導引·按摩·調氣·
服食·養精·房中秘術등의 道家方術이 保養의 방법으로서 의학에 많이 실용되어 왔기 때
문이다.103)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養生學이 의학의 한 科로 醫書에 편입되거나 또
는 이에 관한 전문서로 편찬되어 孝道와 함께 건강을 위한 보건서로 상류사회에 보급되
었던 것이다. 이러한 養生書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향약집성방》補遺神仙諸方
이것은 이 책 끝에 있는 補遺篇으로서, 神仙이 되는 여러 方文이 실려 있다. 그 내용
중 몇 가지만 보면, 神仙延年不老의 地黄服用法·神仙天門冬服用法·神仙松實服用法·眞人茯
苓服用法·神仙凝雪膏·地仙枸杞子服用法·神仙蒼朮服用法·神仙菟絲子食餌法·神仙蜂房丸服用
法·神仙四靈丹·神仙七精散등 의서가 아닌 經書와 古典(이것은 道敎와 관계있는 서적이
었을 것이다)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라 한 것으로 보아,104) 이것은 道家的불노장생의
비법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神仙諸
方은 우리나라 의서에 기재되어 있는 최초의 養生篇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方
文이 실제로 얼마나 활용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② 《食療纂(撰) 要》全循義撰
이 책은 世宗朝의 名醫全循義가 편찬한 것으로서,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
은 알 수 없으나, 醫官으로서 飮食物에 대한 의학적 해설을 한 養生書로 생각된다. 孫舜
孝가 慶尙道監司로 있을 때 간행한 것을 成宗18년(1487) 4월 왕에게 바쳤는데, 성종이
이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는 것으로 보아,105) 養生書로 상당히 우수한 책이었을 것
이다. 그리고 이 책은 宣祖初에 간행된 《攷事撮要》의 册板目錄중 襄陽板과 尙州板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지방에서도 간행되어 보급된 것으로 생각된다.
③ 《頣生錄》鄭惟仁撰
103) 孫弘烈, 앞의 책 p. 158 참조.
104) 《鄕藥集成方》권下, 補遺神仙諸方條.
105) 《成宗實錄》권202, 18년 4월 丙申條.
- 227 -
이 책은 中宗18년(1523)에 간행한 것으로, 찬자가 오랜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여러
醫書를 공부하여 養生의 術을 터득한 데다가 자신의 경험을 더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保養總要·養心神條·養精元條·養脾胃條·導引法·養性·朝宜·晝宜·夜宜·天時避
忌·四時調攝·視聽.談笑·津唾·起居·行立·坐臥·沐浴·洗面·櫛髮등 心神을 가다듬고, 精氣를
보호하며, 계절에 따라 調攝하는 방법을 제시한 養生書이다.106)
④ 《동의보감》內景篇卷1 身形附修養·養老
이 책의 內景篇에는 養生에 관한 것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의서에 없는 이 內景
篇이 특히 道家의 영향을 받아 淸靜과 修養을 本으로 삼은 도가의 실용성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 중 養生·長壽·道家秘方등이 채록되어 있는데, 이 중 중요한 것을 보
면, 壽夭之異·形氣定壽夭·丹田有三·保養精氣神·古有眞人至人聖人賢人·論上古天眞·四氣調
神·以道療病·虛心合道·學道無早晚·人心合天機·搬運服食·按摩導引·攝養要訣·還丹內煉法·養
性禁忌·四時節宜·先賢格言·養性延年藥餌등과 養老로는, 老人血衰·老人治病·老人保養등
이 기재되어 있어, 그때까지 찬술된 어느 의서보다도 이 분야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그 내용이 道家의 秘術에 의한 것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養生과 養
老에 도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⑤ 《二養編》曺倬(耻齋·二養堂) 撰
이 책은 모두 上下2篇9卷으로 되어 있는데, 上篇6권은 立敎·明倫·格致·誠正·修齊·治
平등에 관한 先賢의 가르침을 기술하였고, 下篇3권이 醫學과 養生에 관계되는 것인데
권1 耻忘은 天地運氣·內景篇(精·氣·神·五臟六腑등 24條)·外形篇(頭·面·眼·耳등 26조)으
로 되어 있고, 권2 耻徇은 戒耳慾·戒目慾·戒口慾·戒鼻慾·戒四肢慾등 5慾을 경계하는 格
言이며, 권3 無耻는 養生格言·運氣·攝養·治病·雜病有因등 養生과 攝生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跋文에는 찬자를 단지 病隱이라 하였으나, 卷末曺明勗의 題에 그의 부친이 二
養編을 저술한 지 오래되었다 하였고, 부친인 曺倬의 號가 二養堂·耻齋인 것으로 보아
그의 저술임이 확실하며, 光海君10년(1618)에 편찬된 것이다.107) 그는 이 책을 편찬하는
데 醫家와 道家의 雜書를 참고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특히 양생법에는 도가의 비술을
많이 참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⑥ 《壽養叢書類輯》李昌庭撰
찬자인 李昌庭은 跋文에서 이 책은 古今修養家의 養生要法인 三元延壽書·壽親養老書·
食物本草·養生月覽·保生攝生集覽類纂·(養生)食忌·食鑑·修眞(秘要)·(養生) 導引등 12종의
양생서를 편집하여 이를 만들고, 이름을 叢書라 하였는데, 주로 참고한 책의 저자를, 南
極臞仙·京口山臞·河濱丈人·李鹏飛·陳(君)直·周守中·胡文焕등이라 하였다. 그러나 위의 여
106) 金斗鍾, 《韓國醫學史》pp. 296∼297 참조.
107) 金斗鍾, 위의 책 p. 386 참조.
- 228 - 國史館論叢 第56輯
러 참고한 책의 내용과 저자의 의견이 각기 다르고 중복되는 바가 많으며, 食物과 藥物
도 중국과 우리의 것이 產地와 명칭이 서로 달라 같은 것이 10중 4~5개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誣誕하여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많으므로 이를 다시 16篇으로 편집한다고
하였다.108)
그 내용을 보면, 上卷은 總論·養心志篇·保身體篇·愼起居篇·省嗜慾篇·節飮食篇·順天地
篇·調節序篇·孕育篇이며, 下卷은 服用篇·米穀篇·草木篇·禽獸篇·虫魚篇·導引篇·醫藥篇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문의서는 아니지만, 攝生과 養生및 이에 필요한 藥物과 藥方을
수록한 건강관리서라 할 수 있다.
이상 열거한 養生書이외에 조선후기 英祖때의 《降氣要訣》(崔奎端撰)이 있으며,
중국의 것으로는 《臞仙活人心法》·《壽親養老新書》·《壽養叢書》등이 수입·간행되어
보급되었다. 그리고 저자와 서명만이 전하는 것도 몇 가지 있다. 즉 中宗代의 成世昌이
편찬한 《食物纂要》와 許守谷이 편찬한 《養生說》, 그리고 明宗代朴雲의 《衛生方》
이 그것이다. 이 책들은 서명만이 전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앞
에서 살펴 본 養生書와 큰 차이가 없는 養生과 攝生에 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4. 醫書의 編纂과 諺譯
조선중기에는 전술한 책 외에도 많은 醫書가 편찬되었는데, 그것은 의술 발달의 결과
였다. 본 절에서는 이때에 편찬·諺譯·刊行된 의서를 살펴보고자 한다.
燕山君4년(1498) 가을 內醫院都提調尹弼商·提調洪貴達·副提調鄭眉壽·內醫金興壽
등이 왕명으로 이를 편찬·언역하여, 다음해 3월 校書館에서 간행·반포한 것이다. 그 내용
은 中風·心痛·瘧疾·虫毒·淋疾·凍傷·乳癕·產後·小兒啼·瘡疹·本朝經驗등 모두 87條로 되어
있으며, 病名다음에 치료법이 부기되어 있다.
洪貴達의 序文에 의하면, “病中제일 급한 것과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을 뽑아 이를 편
집하고 이를 諺譯하여 널리 반포하면, 婦人과 어린이라도 病證에 따라 누구나 쉽게 치료
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또 權健은 跋文에서, 《향약집성방》과 《의방류취》는 너무 방
대하고, 《救急方》(世祖代)은 간략한데다가 鄕藥만을 취했기 때문에, 널리 뽑아 간략하게
한 것은 이 책만 못하다. 그러나 이 책은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잃지 않았으므로 僻村의
匹夫라도 알기 쉽게 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이 의원이 없더라도 쉽게
108) 李昌庭, 《壽養叢書類輯》跋文.
- 229 -
치료할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었고, 따라서 많은 백성이 이를 이용했으리라 생각된다.109)
이 책은 본래 世宗때 한글로 번역하여 반포되었던 것인데, 모두 없어져서 中宗때 金
安國이 다시 번역하여 간행한 것이다. 즉 그가 慶尙道觀察使로 있던 1517년 《正俗》·
《農書》·《諺解瘡疹方》등과 함께 간행·반포한 것인데,110)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3) 《續辟瘟方》(佚)·《簡易辟瘟方》1卷(存) 金順蒙等撰
이 책은 中宗20년(1625) 정월 壬午(23일) 《新抄辟瘟方》을 만들어 전례대로 諺解하
도록 지시하는 한편, 癘疫이 심한 함경·평안 양도에는 우선 筆寫하여 辟瘟藥과 함께 보
내도록 하였는데, 이 책을 전에 편찬한 《辟瘟方》과 구별하기 위해 《續辟瘟方》이라
하였다.111) 그런데 현존하는 《簡易辟瘟方》의 서문에 의하면, 甲申年(中宗19, 1624) 가
을 關西地方에 癘疫이 크게 일어 백성이 많이 상하였는데, 이것이 이듬해(乙酉) 봄까지
그치지 않음으로 金順蒙·劉永貞·朴世擧등에게 특명하여 諸方에서 瘟疫治療法을 뽑아
《簡易辟瘟方》을 만들게 하고, 이를 번역하여 嘉靖4년(乙酉) 정월 25日(中宗20, 1625)
에 中外에 반포하게 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112) 이 두 책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내용은 疫癘病候·蘇合香元治鬼氣·雄黃人佩之鬼神不敢近·螢火丸主辟疾病惡氣百鬼·神
明散辟疫癘·爆竹辟妖氣등 모두 45조로 되어 있으며, 누구나 쉽게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
료할 수 있도록 편찬하였다. 이 잭을 편찬한 醫官3인은 모두 中宗代의 名醫이다.
이 책은 中宗37년(1542)에 편찬·간행된 것으로, 이 해에 함경·강원·경상·전라도에 癘
疫이 심해 왕명으로 金安國이 朴世擧·洪沉率·文世▼(王+蓮)·柳之蕃·李倜등과 함께 여러
醫書에서 시술하기 쉬운 方文과 구비하기 쉬운 약으로 된 藥方文60餘方을 전에 편찬
한 두 醫書(辟瘟方과 簡易辟瘟方)에서 뽑고 새로 40餘方을 첨가하여 4門(鎮禳門·不相傳
染門·服薬方術門·勞復門)으로 나누고, 藥名과 採取法등 모두를 한글로 변역, 누구나 쉽
게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내용은 疫癘病候·爆竹辟妖氣·端午日以艾爲人安門上辟瘟·虎
頭殺鬼元辟瘟·神明散辟疫癘·粉身散辟瘟病常用·治天行熱病黃疽등 모두 100여 조의 예방
법과 치료법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편찬하는 데는 전술한 2종의 辟瘟書이외
에 《鄕藥集成方》·《御醫撮要方》·《備急千金要方》·《肘後方》·《聖惠方》등의 의서
109) 尹弼商等撰, 《救急易解方》序文및 跋文.
110) 《中宗實錄》권32, 13년 4월 己巳條.
111) 위의 책 권52, 20년 정월 壬午條.
112) 金順蒙等撰, 《簡易辟瘟方》序文참조.
- 230 - 國史館論叢 第56輯
를 참고하였다.113)
이 책은 明宗초기 각도에서 유행하던 癘疫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편찬한 것으로,
同5년(1550) 12월 諸州·郡·縣·僉使·萬戶處와 監司및 州府의 巨邑에 인쇄하여 보내, 백
성들이 쉽게 黃疽과 瘧疾을 치료하도록 한 것인데,114)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그 내용이
나 학술적 가치 등은 알 수 없다.
이 책은 전술한 任彥國의 《治腫秘方》뒤에 合本되어 있는 本文7枚의 小册字이다.
찬자는 알 수 없으나 安瑋의 跋文에 의하면, 당시의 左相이 內醫院醫官들과 함께 편찬
한 것으로서, 그 내용이 지극히 簡要하고 신기한 효과가 있어 여러 사람이 사용할 수 있
도록 《治腫秘方》에 붙여 간행한다고 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傷風寒三日以前·心腹脇痛
之劑·疝氣上衝之劑·腰膝酸痛之劑·喘嗽之劑·腹脹之劑·勞熱困倦之劑·食滞不下之劑·霍亂吐下
之劑·落傷之劑·大便秘澁之劑·小便不通之劑·丁腫·肉毒·痢疾之劑·中暑之劑등 모두 16조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病證에 대하여 간단하지만 정확한 치료법을 기재하고 있다.115)
退思翁楊禮壽가 편찬한 조선중기의 대표적 의서. 이 《醫林撮要》는 2종이 있었던 것
으로 생각된다. 즉 하나는 內醫鄭敬先이 편찬하고 楊禮壽가 校正한 것으로서,116) 편찬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그 아들 鄭禮男이 宣祖9년(1576) 醫科에 합격한 것으로 보아, 그
가 저술 등의 활동을 한 연대는 주로 明宗代와 宣祖초기가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이 책
을 교정한 楊禮壽가 醫科에 급제한 것이 明宗4년(1549)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 책의 간
행연대는 明宗후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을 편찬한 鄭敬先은 慶州김씨로 典醫監
의 副正을 역임한 內醫였으나, 책이 전하지 않아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존하는 楊禮壽의 이 《醫林撮要》는 書名이 같은 것으로 보아 상술한 鄭敬先의 그
것을 저본으로 하여 다시 편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것도 뒤에 누군가에 의해
改撰한 것이 전하고 있다.117) 그 내용을 보면, 앞의 歷代醫學姓氏條에는 上古聖賢·儒醫·
113) 金安國等撰, 《分門瘟疫易解方》참조.
114) 《明宗實錄》권10, 5년 12월 己亥條.
115) 《救急良方》本文및 安瑋의 跋文참조.
116) 許浚, 《東醫寶鑑》內景篇1, 歴代醫方條에 “醫林撮要本國內醫鄭敬先所撰楊禮壽校正”이라 보
이고 있다.
117) 현존하는 《醫林撮要》가 누군가에 의해 改撰된 것은 이 책의 서두에 있는 歷代醫學姓氏條本國
明醫에 楊禮壽와 許浚이 들어 있으며, 引用書目중에 《本國退思翁(楊禮壽의 號)所製方》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 231 -
明醫·世醫·德醫·仙禪道術·本國明醫등이 들어 있고, 본문 내용은 中風門·瘟疫門·三消門·結
核方·婦人門·小兒門·痘瘡등 모두 21문에 대한 病證과 그에 대한 처방 및 치료법이 기재
되어 있다. 《동의보감》이 찬술되기 이전에 개인이 편찬한 의서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
로서, 당대 조선의학의 전모를 살필 수 있는 탁월한 의서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六朝時代의 高陽生이 編輯한 것이지만, 許浚의 跋文에 의하면 高陽生이 晋王
叔和의 《脉經》을 剽竊하여 만든 것으로 글이 鄙淺하고 본뜻을 잃은 것이기 때문에,118)
허준이 그 잘못을 교정하여 개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脉經》을 저본으로 하
고, 希范·潔古·雲岐子·通眞子등의 脈論을 집성하여 편집한 診脈書로서 교육과 치료에 활
용되었으며, 조선중기의 대표적 診脈書로 평가되고 있다.
宣祖33년(l600)에 편찬·간행된 鍼灸書로서, 柳成龍이 은퇴 후 河村(安東河回洞)에서
《醫學入門》의 鍼灸篇을 발췌하여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그 내용이 상술한 그것과 다
른 것은 없지만, 복잡한 經穴과 그 시술방법 및 효과를 圖와 表로 나타내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뒤에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婦女子까지도 이용하게 하려 했지
만,119)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내용은, 天地人物氣候相應說·十二經穴名·臓腑內觀圖·督
任脉穴圆·明堂尺寸法·回春煉臍法등 모두 17조로 되어 있다. 유성룡은 이외에 《醫學入
門》을 참고하여 《醫學辨症指南》도 편찬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이 책은 世祖때 왕명으로 편찬한 《救急方》을 허준이 왕명으로 諺解하여 宣祖40년
(1607) 內醫院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 내용은 上卷에 中風·卒死·邪祟·頭痛·舌腫·吐血·饑死
등 40條, 下卷에 諸獸傷·金瘡傷·諸藥毒·疫癘·天疱瘡·難產·藥酒方文등 30조로, 모두 70조
의 病證과 그 치료법이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문이 병기되어 있다.
이렇게 자세하게 번역하여 간행한 것은 의술의 보급을 확대하려 한 것이었으며, 특히
왜란 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민중을 치료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편찬하는데, 《直指方》·《經驗秘方》·《聖惠方》·《得効方》·《本草》·《婦人良
方》·《鄕藥救急方》·《鄕藥集成方》·《醫方類聚》·《產書》등 34종의 의서가 참고된
것은, 이것이 단순한 諺解本이 아니라 許浚의 改撰諺解本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18) 許浚, 《纂圖方論脈訣集成》跋文.
119) 柳成龍, 《鍼灸要訣》序文참조.
- 232 - 國史館論叢 第56輯
이 책은 宣祖29년(1596) 허준이 왕명으로 鄭碏·楊禮壽·鄭禮男등과 함께 편찬을 시작
하였다가 丁酉再亂으로 중단, 그 후 단독으로 편찬하여 光海君2년(1610)에 편찬을 완료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의서의 하나로서 3년 뒤인 光海君5년(1613) 內醫院에서 開刊하였
다. 이 책은 目錄2卷·內景篇4卷·外形篇4卷·雜病篇11卷·湯液篇3卷·減鍼篇1권 등 모
두 25권 25册으로 되어있으며, 引用醫書는 국내는 물론 중국의 고대로부터 明代醫書까
지 모두 86종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고, 편찬기간도 전후 14년이나 걸린 것이었다. 이
것은 당시 의서의 百科全書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醫員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
기 때문에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인쇄되어 널리 보급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光海君4년(1612) 가을부터 시작하여 이 책이 편찬·간행된 이듬해 봄까지 유
행한 전국의 癘疫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편찬되었다. 이 책은 전에 간행되
었던 《辟瘟方》·《諺解辟瘟方》·《簡易辟瘟方》등의 辟瘟書를 보완하여 편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火運之歲多疫癘·四時失節亦爲疫·瘟疫脉·瘟疫治法·瘟疫發黃·大頭瘟·瘴疫·
不傳染法·鍼法·不治證·禁忌등 모두 22조로 되어 있으며, 각 병증마다 치료법 및 예방법
이 기재되어 있다. 이 책은 中宗때의 《簡易辟瘟方》에 비해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술하
였으며, 또 과학적으로도 탁월한 의서로 평가되고 있다. 이때 유행한 瘟疫에 대하여 三
木榮은 이를 發疹티브스(Typhus)로 추정하고 있다.120)
이 책은 光海君5년(1613) 12월 內醫院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을 새로 편찬하여 간
행하게 된 것은, 전년부터 유행하여 사망자가 많이 생겼던 癘疫이 종식되지 않은 상태에
서 이 해 여름부터 다시 唐毒疫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唐毒疫
은 허준이 말한 바와 같이 醫書에 病名이나 치료법이 없던 酷疾이었다. 그러나 허준은
이 병의 증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치료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병을 唐毒疫이라 한 것
은 惡性의 질병에 唐字를 붙였기 때문이었다. 즉 唐瘧(惡性Influenza)·唐瘡(梅毒) 등이
그러한 것이다. 또 唐疫은 疹인데, 그것은 첫째로 痘(痘瘡), 둘째로 㿀(濕疹또는 蕁麻疹
類), 셋째는 疹(麻疹또는 猩紅熱類)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병의 중상으로 頭痛·身疼·惡寒·高熱후에 얼굴과 몸에 붉은 색의 發疹이 생
기고 정신이 혼미해져 헛소리를 하며, 앓고 난 후에는 머리가 모두 빠지고 熱毒으로 피
부가 말라 벗겨진다고 하였다.121) 이러한 내용은 猩紅熱의 증상을 그대로 기술한 것으로
서, 痘疹이나 麻疹과 혼동하기 쉬운 이 병에 대해 1613년에 이렇게 정확히 病證과 療法
120)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pp. 28∼31 참조.
121) 許浚, 《辟疫神方》唐毒疫·毒疫換形·毒疫形證條참조.
- 233 -
을 기술한 것은 이 책이 세계 최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獨逸의 D. Sennert(1572~1637)의 死後報告(1641)가 효시이며, 전모가 정확
히 알려진 것은 1676년이었다.122) 이로 미루어 볼 때 世界病理學史上허준의 업적은 매
우 탁월한 것이었으며, 당시 조선의 의학, 특히 傳染病學은 세계적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허준의 이러한 醫學知識과 의술에 대한 탁견은 《東醫寶鑑》을 찬술한 후
더욱 완숙해졌던 것이다. 《辟疫神方》은 이와 같이 매우 탁월한 과학적 의서로서 《동
의보감》과 함께 그의 큰 업적의 하나였으며, 조선의학의 학문적·기술적 수준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이 책은 四醫, 즉 李碩幹·蔡得己·朴濂·許任등의 經驗方과 《本草》·《東醫寶鑑》·《聞
見方》등의 方文을 수집하여 후인이 편집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頭部·目部·心部·邪
祟部·痔疾部·辟瘟部·折傷·婦人門·小兒諸病·老人諸病·雜方등 모두 37부로 되어 있으며,
각부에 따른 病證과 그 치료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일부 병명·약물명·치료법 등은 한글
로 써넣은 것도 있다. 이 책은 평상시에 걸리기 쉬운 병을 간단히 치료할 수 있도록 만
든 것이다.
이 책은 孝宗4년(1653) 7월 校書館에서 간행하였는데, 그것은 이 해 봄 海西地方에
癘疫이 크게 일어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御醫安景昌등이 왕명을
받아 전에 편찬된 辟瘟書를 참고하여 구하기 어려운 藥材를 사용해야하는 것은 빼고, 俗
方(經驗方) 중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덧붙이며, 한글로 번역문을 달아 校書館에서
印出하여 諸邑에 보내게 하였다.123) 그 내용을 보면, 瘟疫病源·瘟疫表證宜汗·瘟疫半表半
裏宜和解·瘟疫裡▼(疒+登)宜下·瘟疫發黄·大頭瘟·瘟疫禳法·瘟疫辟法·不傳染法·禁忌등으로
되어 있는데, 각 병증에 대한 치료법과 예방법이 간략히 기재되어 있다. 이때 유행한 ‘瘟
疫’이 어떤 병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장티프스 혹은 發疹티프스類의 전염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24)
본서는 肅宗13년(1687)에 편찬한 筆寫本과 뒤에 鉛活字로 간행한 활자본 등 2종이 있
다. 申曼(號舟村)은 宋時烈의 門人으로 활동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鄕里에 있으면서
이 책을 편찬했다. 이 책은 그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옛부터 사용하던 藥중에서
122) 三木榮, 〈許浚の傳梁病學〉(《朝鮮學報》48, 1968) pp. 299∼300 참조.
123) 《辟瘟新方》序文.
124) 金斗鍾, 《韓國醫學史》p. 388 참조.
- 234 - 國史館論叢 第56輯
긴요하고 큰 효과가 있는 것은 택하고, 구하기 어려운 약재는 減하였으며, 특별히 鄕藥
중에서 藥性이 비슷한 것을 (골라) 덧붙혀서 다시 方文을 지어 活命을 돕고자 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125) 체계와 내용이 많이 改編된 의서였다고 하겠다.
필사본의 내용은, 氣·血·心·脫肛·頭·足·癎·腫·救急·婦人·小兒·雜方등 모두 59조로 되어
있는데, 각 병의 증상과 이에 대한 치료법이 병기되어 있다. 한편 활자본은 3권으로 되
어 있는데, 1권은 小兒篇으로서 運氣流行法·初生危症·破傷風·腹痛·眼疾·身軟·紅疫·藥方등
모두 64門으로 되어 있고, 2권은 婦人篇으로 產前·產後·求嗣方등 3門이며, 3권은 大人篇
으로 傷寒·中風·舌·咽喉·浮腫·淋疾·瘟疫등 모두 7門인데, 이러한 각 病門에 속하는 질병
의 증상과 치료법·藥方등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간혹 병명과 약명 등을 한글로 풀이
해 놓은 것도 있다. 그리고 附錄으로 《藥性歌》390文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人蔘등
藥材390종의 藥性과 사용상의 주의할 점을 기록한 것으로 藥材의 성분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필사본과 활자본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은 후인이 筆寫本에 새
로운 것을 첨가하여 재편집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조선시대 의술의 발전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의 의서 이외에 찬자와 서명만 전하고 있는 의서가 있는데 그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17) 《經驗方》·《活人新方》: 朴英撰(中宗代〉
18) 《救荒切要》: 安瑋·洪胤昌撰(中宗36년, 1541)
19) 《疽瘧易解方》: 柳之蕃·金允誾撰(中宗∼明宗代)
20) 《鄭北窓方》: 鄭▼(石+廉) 撰(中宗~明宗代)
21) 《治疱易驗》·《治疱方》: 撰者不明, 앞의 것은 宣祖18년(1585)에 간행된 《攷事
撮要》의 8道册板目錄에 보이고, 뒤의 것은《東醫寶鑑》의 引用書임.
22) 《三方撮要》: 桂山房編
23) 《醫方》: 昌成君佖編
24) 《丹谷經驗方》: 李镇泰撰
그리고 서명만 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惡病(疾)治療方》·《河中樞方》·《普救
錄》·《中朝質問方》·《諸疝治方》·《聞見方》·《三意ー驗方》·《簡三新編》·《經驗方彙
編》·《李國美方》·《全方》·《尹方》·《白醫方》·《吳文》·《文生方》·《智異山僧方》
등이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이렇게 많은 醫書가 편찬된 것은 조선시대의 의학이 발달한
125) 申曼, 《舟村新方》活字本序文.
- 235 -
결과였다. 이러한 醫書는 조선의 의학을 학문적·기술적으로 발전시켰음은 물론 民疾의
치료에도 크게 기여하였고, 醫書의 번역과 簡易方書의 편찬은 시골에까지 의술을 보급시
켰던 것이다.
Ⅲ. 醫藥의 開發
1. 鄕藥의 開發과 普及
鄕藥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개발·보급되어온 것이지만, 선초에 크게 진흥되어 한국의학
발달에 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世宗에서 成宗에 이르는 약 70년 간에 鄕藥에 대한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어 한국의학의 자주적 기초를 완성하였던 것이
다.126) 즉 世宗은 16년(1434) 1월 藥材의 採取法과 乾正法을 각지에 하달하고, 外方에서
상납하는 藥材는 敎諭가 직접 封하여 醫生을 시켜 보내도록 하였고,127) 21년(1439) 4월
에는 모든 鄕藥을 栽培하도록 하고, 自生藥材는 계절에 따라 採取하여 병자를 구료하도
록 하되, 藥材의 재배·채취의 多少, 施藥의 勤慢을 憲司로 하여금 毎季月에 점검하도록
하는 등128) 鄕藥의 재배·보급·관리에 더욱 철저를 기하였으며, 나아가 同30년(1448) 정
월에는 諸道監司에게 명하여, 鄕藥의 채취시기와 乾正을 법에 따라 하여 藥性을 잃지
말게 하고, 상납할 때는 採取者의 官職·姓名·日時및 藥名을 모두 적어 올리게까지 하였
던 것이다.129)
또 成宗은 鄕藥의 보급과 이용을 위하여 대신들의 의견을 물은 바 있는데, 이때 禮曹
에서 건의한 鄕藥興用條件을 보면,
첫째, 전에는 內用藥材는 典醫監이, 典賣藥材는 惠民署가, 朝官에게 施與하는 藥材는 濟
生院에서 專掌하였는데, 濟生院을 罷한 뒤로는 鄕薬이 크게 쓰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內醫院을 설치하여 內用의 諸藥을 專掌케 하였기 때문에 典醫監은 다만 賜給
하는 藥만 조제하고 있으니 이는 (典醫監의) 일을 매우 가볍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
서 앞으로는 惠民署의 所掌諸事를 典醫監에 移屬시키시고, 惠民署는 濟生署라 칭하여
전례대로 鄕藥의 施與를 專掌하도록 하시고,
126) 金斗鍾, 〈世宗大王의 濟生偉業과 醫藥의 自主的發展〉(《서울大論文集》5, 1957).
127) 《世宗實錄》권63, 16년 정월 戊申條.
128) 위의 책 권85, 21년 4월 丙午條.
129) 위의 책 권119, 30년 정월 乙未條.
- 236 - 國史館論叢 第56輯
둘째, 《鄕藥集成方》을 많이 印出·廣布하여 興用케 하고, 四孟朔醫員取才時에 이것
을 시험하게 하시고,
셋째, 병자가 와서 證候를 물으면, 醫員은 鄕藥方으로 약을 지어 치료케 하고, 醫女는
옛날처럼 濟生署에 속하게 하시고,
넷째, 《本草》에 실려 있는 鄕藥은 이미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농촌의 백성이 한
가지 藥材로 치료하여 효과가 있는 것이 있으면, 諸道를 방문하여 그것이 비록 《本
草》에 실려 있지 않다 하더라도 효과가 있는 약이면 《鄕薬本草》의 뒤에 添入하게
하시고,
다섯째, 各道의 採藥人은 大官은 5戶·小官은 3戶씩 差定하여 雜役을 면해주고 月令에
따라 전적으로 (藥材를) 채취하게 하고 父子가 계승하여 世業을 삼게 하시고,
여섯째, 전에 편찬한 《鄕藥本草》에는 모든 藥材의 採取·乾正法이 다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서 크게 쓰이는 약재가 뒤에 발견되어도
《本草》에 添錄하지 않았기 때문에 各官에서는 貢納藥材를 마음대로 採取하여 (藥의)
本性을 잃게 됨으로써 치료하여도 효과가 없으니 자세히 (다시) 撰集하여 開刊·廣布케
하소서130)
라고 건의함으로써 그대로 시행케 하였다. 다만 위의 내용 중 惠民署를 濟生署라 칭하게
하고, 鄕藥業務를 專掌케 한 것은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興用策은 정
책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鄕藥의 개발을 위한 노력도 병행되었다. 즉 世宗은 自國產藥材의 藥性과 藥効를
비교하여 이를 치료에 이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遣明使편에 의관으로 하여금 약재를 가
지고 가서 이를 감별, 사용의 適否를 판별케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同5년(1423)
3월 盧仲禮등을 明에 보내 國產藥材62종을 중국산과 비교하여 藥性이 다른 14종을 찾
아내어, 그 중 새 약재 6종을 발견하였고, 나머지 藥性이 다른 8종은 사용을 금지시켰
다.131) 그리고 同12년(1430) 4월 節日押物使盧仲禮가 20종의 약재를 가지고 가서 그
중 10종을 판별하여 왔으며,132) 同13년 9월 明의 太醫張本立이 왔을 때 藥性을 묻는
등133) 향약개발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이러한 鄕藥에 대한 관심과 노력으로 인해 선초에 《鄕藥濟生集成方》·《鄕藥採取月
令》·《鄕藥集成方》등 조선전기의 의학지식을 알려주는 의서가 편찬되었던 것이며, 특
히 《鄕藥集成方》의 편찬은 우리나라 의학의 자주적 발전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서
韓國科學史上빛나는 문화적 업적이었던 것이다.134) 그러나 燕山君이후 점차 鄕藥을
130) 《成宗實錄》권98, 9년 11월 壬申條.
131) 《世宗實錄》권19, 5년 3월 癸卯條.
132) 위의 책 권48, 12년 4월 庚寅條.
133) 위의 책 권53, 13년 9월 己卯條.
- 237 -
등한히 한 결과 전기에 이룩한 업적을 계승하지 못하였고, 또 明의학의 성행으로 鄕藥
에 대한 연구가 부진하게 되었으며, 방만한 醫政의 운영으로 藥田이 황폐하게 된데다가,
兩大戰亂으로 鄕藥의 생산과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등 鄕藥政策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135)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향약에 대한 연구와 이를 이용한
치료법도 꾸준히 개발되어 전술한 《東醫寶鑑》·《村家救急方》·《醫林撮要》등 향약을
이용한 의서가 다수 편찬되었고, 또 많이 諺譯되어 의술 보급에 기여하였다.
한편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熟藥(調剤된 藥)도 판매하였는데, 그것은 한번 복용
하는 양을 기준으로 하여 米로 가격을 정하였다. 宣祖원년(1568)에 간행된 《攷事撮要》
의 熟薬一服價値條에 보면, 醫司에서 調劑한 淸心元·保命丹·烏藥順氣散등 266종이 病證
別로 나뉘어 기재되어 있는데, 毎藥마다 가격과 병증 및 用法이 附記되어 있다. 이렇게
266종이나 되는 藥을 醫司에서 調劑하여 판매한 것은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었지만, 그것은 조선중기의 의술이 상당히 발달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 藥들은 쉽게 걸릴 수 있는 일반적인 병, 즉 中風·頭痛·痢疾·泄瀉·腫脹·咳嗽·眼疾·齒
痛·痔疾·瘡瘍·黄疽·瘧疾·小兒등 각종 질환에 사용하던 것으로서, 淸心元등 丸(錠)藥27
종·烏藥順氣散등 散藥(가루약) 87종·救苦膏등 膏藥5종·通氣驅風湯등 湯劑(湯樂材料〉
127종·飮子(조제된 湯藥) 20종이다. 이러한 약은 주로 서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현대의 약국에서 조제된 약을 판매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湯劑가 127종으로서
가장 많은 것은 東洋醫學의 특성상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 人蔘은 많은 약에 사용되는
것이지만, 이 266종의 약 중에도 인삼을 주로 한 人蔘順氣散·人蔘姜活湯·人蔘益氣湯·人蔘
敗毒散·人蔘丁香散·人蔘定喘湯·人蔘淸肺湯·人蔘飮子·人蔘養胃湯등 9종이 있는 것으로 보
아 인삼이 대중의 약재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藥材의 栽培
鄕藥의 개발과 보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藥材의 재배라 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種藥田을 관리하던 種藥色을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太宗11
년 6월 典醫監에 흡수되었음),136) 이는 수입에만 의존하던 唐藥을 국내에서도 재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民疾治療에 주로 사용되던 것은 鄕藥이었으므로 국가는 이의 재배와
134) 孫弘烈, 〈麗末·鮮初醫書의 編纂과 刊行〉(《한국과학사학회지》제11권 1호, 1989) pp. 44∼45
참조.
135) 孫弘烈, 〈朝鮮中期의 醫療制度〉(《한국과학사학회지》제15권 1호, 1993) pp. 19∼21 참조.
136) 《太宗實錄》권21, 11년 6월 壬辰條에 “革種薬色屬典醫監”이라 하였음.
- 238 - 國史館論叢 第56輯
道
種藥
京畿忠淸慶尙全羅黃海江原平安咸吉
白扁豆○ ○ ○ ○ ○ ○
黑扁豆○ ○ ○
鸎栗○ ○ ○
紫蘇○ ○ ○ ○
薄荷○ ○ ○ ○ ○
香薷○ ○ ○ ○ ○
惡實○ ○ ○ ○ ○ ○ ○
芥子○
麻子○ ○ ○ ○
茴香○ ○ ○ ○
生地黃(乾·熟) ○ ○ ○ ○ ○ ○
大黃○ ○ ○ ○ ○ ○ ○
靑木香○ ○ ○
荊芥○ ○ ○ ○ ○
葵子○ ○ ○ ○
蘿䔰子○
蔓菁子○ ○
眞花帶○
鷄冠花( 赤) ○ ○ ○
鷄冠花( 白) ○
甘菊○ ○ ○ ○ ○
보급 및 관리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조선시대 藥材의 생산과 재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世宗實錄》地理志
가 있다. 여기에 보면 각도의 생산약재와 種養藥材가 들어 있는데, 전자는 각 지역(道)마
다 생산되는 일반약재로서 각 도의 것이 서로 중복되는 것이 많다. 그리고 후자는 각 道
別로 재배하는 약재인데, 이것도 중복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은, 전자는 비교적 쉽게 채취할 수 있는 것이
고, 후자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어서 특별히 재배하도록 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同
地理志에 실려 있는 약재의 종류는 너무 많아 이를 일일이 기록할 수는 없다. 世宗때
이와 같이 각지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상세히 파악하고 또 재배할 약재까지 지정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醫學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이를 관리할 수
있는 醫官(醫學敎授·審藥·醫生등)과 이의 채취를 專掌하던 採藥丁夫등이 그 소임을 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世宗때 鄕藥이 크게 발달하였던 것은 世宗
뿐만 아니라 醫藥에 종사하던 모든 구성원의 한결같은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러한
世宗代각도의 種養藥材를 보면 아래 〈표 1〉과 같다.
〈표 1〉
- 239 -
紅花○ ○
薏苡○ ○ ○ ○
元蠶蛾○
韮子○ ○
道
種藥京畿忠淸慶尙全羅黃海江原平安咸吉
仁木瓜○
豆花○ ○
荊芥穗○ ○
眞瓜帶○ ○ ○
牽牛子( 黑) ○ ○ ○
牽牛子( 白) ○ ○ ○
黄菊○ ○
黄葵子○
赤小豆○
大麥○
黑大豆○
芎藭○ ○ ○ ○
靑黛○
胡○ ○
胡蘆○
薑○
深黄○ ○
商陸○
乾薑○
黑豆○
粟楔○
何首烏○
蓮實○
桃仁○
杏仁○
麻花○ ○
總51 種22 種21 種31 種7 種22 種12 種10 種4 種
위 표에 의하면, 7道에서 2종, 6道에서 2종, 5道에서 4종, 4道에서 6종, 3道에서 7종, 2
道에서 8종, 1道에서 22종 등 모두 51종의 약재가 재배되었는데, 그 중 慶尚道가 31종으
로 가장 많고, 咸吉道가 4종으로 가장 적게 재배되었다. 이러한 藥材는 各邑의 風土에
맞는 것을 재배하도록 하였고, 각 도의 醫院에서 이를 관리하도록 하였다.137)
137) 《世宗實錄》권148, 地理志, 京畿種養藥材條에 “以上薬材隨各邑風土所宜使醫院種養凡非山野
所產故皆不錄于各邑之下”라 하였음.
- 240 - 國史館論叢 第56輯
약재는 재배도 중요한 것이지만, 이의 採取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採取時期와
乾正法에 따르지 않으면, 약효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成宗5년(1474)에는 鄕藥
採取의 책임자인 審藥을 ‘秩高術精者’를 뽑아 보내 《月令》에 따라 채취케 하고 《乾曝
之方》대로 乾正하게 하되, 醫司의 巡行時嚴히 고찰하도록 하였으며,138) 藥夫는 그 직
을 세습하도록 하는 등139) 鄕藥의 재배와 채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런데
土產藥材는 본래 우리땅에서 생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재배와 채취에 어려움이 없었으
나, 種養藥材는 대부분 외국에서 種子를 수입하여 재배한 것이었기 때문에 風土가 달라
재배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한약에 가장 많이 쓰이는 甘草는 世宗때 중국에서 종자를 수입, 上林園에서 재ᅵ
배하여 각도(全羅·永安·慶尙·平安)에 나누어 심게 하였으나,140) 큰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大典續錄》에,
各道에 栽植하는 甘草·麻黃의 培養狀況은 매년 한번씩 內醫院官員으로 傳香別監을
兼任시켜 擲奸하고 工曹에 啓下한 뒤에 內醫院에 옮겨서 文簿에 기록하여 주고 檢察
하라141)
고 하였으며, 그 후에도 甘草를 성의껏 재배하지 않아 生長한 것이 가장 적은 수령은 罷
黜하고, 다음은 降資하며, 色吏는 엄히 처벌하도록 하는 등142) 甘草의 생산에 많은 노력
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방만한 醫政과 이로 인한 藥田의 荒廢는 鄕藥發展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즉
中宗34년(1539) 憲府의 啓文을 보면, 전에는 醫方(月令)에 의해 약재를 採取·乾正하여
상납하였기 때문에 藥材가 풍부하고 또 매우 精潔하였는데, 뒤에는 藥材採取의 책임을
가진 各官의 수령들이 이 일을 점차 소홀히 여겨 醫生을 약재채취보다는 다른 일에 사
역함으로써, 어느 약재가 어느 고을에서 생산되는지 조차 알지 못해 各官은 藥材대신
締布를 兩醫司에 輸納하는데, 이때 兩醫司의 노비와 소속인들이 약재를 훔쳐 다시 醫司
에 납입하고 綿布를 가져가 날로 약재가 적어진다고 하였으며,143) 또 同39년에는 三醫
司에 地黃(이것은 6道에서 재배되는 薬材였음, 〈표 1〉참조)이 없어 왕의 병을 치료하
지 못해 급히 구하게 하는 한편 藥田荒廢의 죄를 물어 兩醫司의 해당 관원을 처벌하도
138) 《成宗實錄》권41, 5년 4월 丁巳條.
139) 《大典續錄》권3, 禮典獎勸條.
140) 《成宗實錄》권178, 16년 閏4월 己酉條.
141) 《大典續錄》권3, 禮典雜令條.
142) 《各司受敎》禮曹受敎內醫院都提調單子內(嘉靖32, 明宗8, 1553년 정월 12일).
143) 《中宗實錄》권92, 34년 12월 壬午條.
- 241 -
록 하였던 것으로 보아,144) 鄕藥특히 種養藥材의 재배와 관리에 문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藥田의 황폐화는 상당 기간 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仁祖11년(1633)에 重刊한 《鄕藥集成方》의 崔鳴吉이 쓴 跋文에도 ‘鄕藥方’은 폐
한 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한 것으로 보아,145)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鄕藥政策이 燕山君이후 후퇴하게 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방만한 醫政
의 운영과 藥田의 황폐가 큰 원인이었지만 한편 明醫學의 盛行과 양대전란이 전기와
같은 鄕藥의 발달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鄕藥의 개
발과 보급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중기에는 醫司에서 주로 鄕藥을
이용한 266종의 藥을 조제해서 판매하는 등 향약은 꾸준히 개발·보급되어 국민보건에 이
바지하였던 것이다.
3. 藥材의 貿易
우리나라는 고대사회로부터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醫員·醫書·藥材(品) 등을 교류해 왔
다. 특히 漢族의 諸王朝와의 이러한 교류는 매우 빈번한 것이었으며, 醫書와 藥材(品)는
公·私貿易을 통해 수입·수출되어 한국의 의학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본고에
서는 이러한 교류 중에서 약재(品)에 대한 것만 중국과 일본으로 나누어 간략히 살펴보
고자 한다.
국내에서 사용되는 약재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우
리는 삼국시대부터 이러한 것들을 수입하여 왔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약재의 수입을
定例化함으로써, 조선의 鄕藥發達을 도모하였다. 즉 太宗6년(1406)부터 매 使行마다 醫
員1명을 보내 약재를 구입하게 하였으며,146) 世宗5년(1423)부터는 毎使行마다 典醫監·
惠民局·濟生院으로 하여금 黑麻布5匹을 가지고 가서 藥材購入하는 것을 恒式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사행 때 의원이 구입해오는 약재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왕의 병에 꼭 필요한 것,147) 또는 전갈(蝎) 같은 기를 수 없는 곤충148) 등이
그 대상이 되었고, 때로는 龍眼·荔枝와 같은 희귀식물 등도 있었다.149)
144) 위의 책 권105, 39년 11월 丙申條.
145) 《鄕藥集成方》崔鳴吉의 跋文에 “(前略)時鄉方廢且百餘年厪厪收拾卷帙不全購求完本得諸耽羅
又得補遺ー卷刊成一帙”이라 하였음.
146) 《大宗實錄》권11, 6년 정월 己未條.
147) 《世宗實錄》권20, 5년 4월 丙辰條.
148) 위의 책 권13, 3년 10월 丙申條및 《燕山君日記》권2, 원년 정월 甲辰條.
149) 《成宗實錄》권227, 20년 4월 壬辰條·9월 乙丑條.
- 242 - 國史館論叢 第56輯
그러나 중국에서 수입한 약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초 중국에서 사신편에 조선의 왕실에 보내온 藥材와 《世宗實錄》地理志에 있는
種養藥材를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太宗과 世宗代에 보내온 약재를 보면,150)
木香·丁香·乳香·辰砂·黃蓮·丹砂·澹礬·川芎·縮砂·肉豆蔲·良姜·白花蛇·麝香·朱砂·沈香·蘇合
油·龍腦·片腦·犀角·束香·檀香·附子·金櫻子·肉蓯蓉·巴戟·當歸·沒藥·藿香·零陵香·甘松香·蘆
薈·川烏·鎻陽·龍眼·荔枝151)
등 35종의 약재가 보이나, 이보다 더 많은 종류의 약재가 수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전술한 種養藥材51종과 甘草등도 수입·재배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 약재
는 중국산이 많았지만, 熱帶地方이나 中央Asia 產의 약재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
아, 중국을 중개로 한 公貿易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약재의 수입은 주로 公貿易에 의한 것이었지만, 使臣을 수행한 譯官이나 醫官
에 의해 밀무역되기도 하여 관계자가 처벌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152) 藥材대신 他物
로 代納하는 경우도 있어,153) 중국약재의 구입에 따른 문제도 있었다. 그런데 구입해 오
는 약재는 대개 귀한 것이어서 고가였기 때문에 國庫의 지출도 적지 않은 것이어서, 더
욱 향약개발에 힘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수입하는 약재는 많았지만,
國產藥材의 중국수출은 많지 않았다. 수출약재는 주로 人蔘과 松子였고, 간혹 五味子·葫
蘆·虎骨·鹿角·鹿脯·昆布·藿·海衣·燒酒등이154) 方物로 또는 사신이나 수행원에게 선물로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藥品의 교류는 국산약재의 수출보다는 중국약재의 수입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약재의 수입은 질병의 치료는 물론 약재의 개발과 보급
에도 기여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일본과의 교역은 倭寇가 終息된 世宗이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것은 주
로 倭王을 비롯한 각지 領主에 의한 약재의 獻納과 이에 대한 賜給의 형식을 취한 공무
역이 많았으나, 양국 商人에 의한 私貿易도 적지 않은 것이었다. 일본과는 醫員이나 醫
書의 교류보다 약재의 교역이 더 빈번하였다. 世宗원년(1419 己亥) 對馬島征伐을 계기
150) 《燕山君日記》권21, 3년 2월 壬辰條·권27, 3년 9월 丁卯條.
151) 《太宗實錄》권2, 원년 9월 丁亥條·권8 4년 11월 己亥條·권12, 6년 12월 丁未條·권22, 11년 8월
甲辰條및 《世宗實錄》권30, 7년 11월 壬寅條등.
152) 《成宗實錄》권48, 5년 10월 辛丑條·권88, 9년 정월 乙亥條및 《大典續錄》권2, 戶典唐物貿
易條와 《大典後續錄》권5, 刑典禁制·雜令등.
153) 《中宗實錄》권74, 28년 5월 丙午條·5월 己酉條.
154) 金斗鍾, 앞의 책 p. 258. 참조.
- 243 -
로 倭寇는 거의 종식되고, 평화적인 通交者로 전환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三
浦倭亂으로 일시 중단되거나 通商規程이 개정되어, 來往하는 일본 각지의 歲遣船의 수가
일정치는 않았으나, 世宗代歲遣船約定者112명이 1년 중에 파견하는 歲約船·受職人船·
受圖書人船이 모두 204∼218 隻이나 되었고,155) 이때 進上과 下賜의 형식을 취한 公貿易
의 물량도 상당히 많아 국가의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조선에서 파견한 使節은 太祖7년(1397)~宣祖25년(1592)까지 2세기 동안 모두
62回였고,156) 倭亂이후 宣祖40년(1607)∼純祖11년(1811)까지 朝鮮後期에 파견된 通信
使는 모두 12회로서,157) 전후기 합해 74회였는데, 이것은 入國倭使의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과의 교역은 수출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고, 그 중에는
약재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입된 약재가 100여 종이나 되므로 그 품목을 모
두 열거할 수는 없고, 중요한 것만 보면, 胡椒·蘇木(丹木)·白▼(棥+石)(明礬)·朱紅·硫黄·黑
角(水牛角)·龍腦·樟腦·象牙·犀角·銅·鑞鐵·蘇合香·麒麟膠등을 들 수 있는데, 위 품목 중
銅과 鑞鐵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재로서 日本產뿐만 아니라 南方產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進上品중에는 특이한 것도 있어서, 世宗3년(1421) 11월 九州
의 源道鎭이 보낸 것 중 樟腦와 砂磄은 南方產으로서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
이다.
回賜品중 약재로는 人蔘이 가장 중요한 품목이어서 거의 매번 賜給하고 있으며, 약품
으로는 淸心元과 蘇合元이 조선의 가장 저명한 약품이었기 때문에 이를 요청하면 보내
주었다.158) 하사한 약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世宗28년(1446) 2월 對馬島主宗貞盛이
米豆와 藥材를 요청하므로 米豆각 100石과 人蔘·五味子·大黃·黄耆·黄芩·杏仁·蓮子·天麻
등을 하사하였다는 것으로 보아,159) 인삼 이외에 다른 약재도 보내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倭人들의 進上品에 대해 후하게 下賜하여, 필요없거나 지나치게 많
은 물건도 다 받았기 때문에 胡椒의 경우는 한 때 義盈庫가 넘칠 정도였지만, 약재로 필
요한 것이어서 다 받았고, 그 종자를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160)
또 成宗은 通信使에게 지시하여 조선의 不產藥材를 구해오도록 지시하는 등161) 약재
수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12回에 걸친 중기 이후의 通信使行은 일본에 우리의 약품
155) 國史編纂委員會編, 《한국사》9, pp. 366~367 表1~2.
156) 國史編纂委員會編, 《한국사》9, p. 409 表9 참조.
157) 國史編纂委員會編, 위의 책 12, p. 369 圖表참조.
158) 《太宗實錄》권35, 18년 3월 甲子條.
159) 《世宗實錄》권111, 28년 2월 乙丑條.
160) 《成宗實錄》권132, 12년 8월 戊辰條·권140, 13년 4월 甲寅條·권176, 16년 3월 丁未條·권184, 16
년 10월 戊子條등 계속하여 그 종자를 구하려 하였으나, 倭人들은 자기네의 所產이 아니라 하
면서 종자를 주지 않고 現品으로 진상하였다.
161) 위의 책 권102, 10년 3월 辛巳條.
- 244 - 國史館論叢 第56輯
과 약재를 많이 전했다. 즉 약품은 淸心元, 藥材는 人蔘이 가장 많았으며, 기타 약재로는
生地黃·麥門冬·赤白茯苓등 42종이나 되었다. 그러나 중기에 들어와 일본은 전기와는 달
리 조선의 약재를 구하는 것 이외에 약재의 種子(根·實)를 구해 自國에 移植하고자 했다.
즉 仁祖16년(1638) 4월에는 일본 關伯의 叔父紀伊大納言이 土產藥材39종의 根과 實을
요청했기 때문에 이를 보내주었는데,162) 이 중 沙蔘·丹蔘·防己등 21種은 實을, 百部根·
草薢등 15種은 根을 구하는 것이었다.163)
그러나 이것들이 재배되어 성공하였는지의 如否는 알 수 없다. 그리고 仁祖17년과 18
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양의 藥材와 藥種子의 구입을 희망하였는데, 당시는 병자
호란이 끝난 지 얼마 안되어 그 요청을 다 들어주지는 못하였지만, 18년에는 26종의 약
재를, 同20년(1642)에는 31종의 약재를 賜給함으로써,164) 일본은 많은 약재의 종자를 가
져다가 재배하였다. 그후에도 일본은 對馬島를 중개로 약재를 교역하였는데, 肅宗2년
(1676) 이후 점차 수량이 감소되고, 약재도 人蔘·鹿茸·熊胆·虎骨등 특수한 것으로 한정
되었다. 일본의 이러한 조선 약재의 수입은 民疾의 치료는 물론 日本醫學, 특히 本草學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Ⅳ. 結言
이상으로 조선중기의 醫術과 醫業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조선전기는 鄕藥이 발달하고,
醫學이 학문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조선시대 의학의 학문적 기초를 완성한 시기였다. 중
기에도 《東醫寶鑑》·《醫林撮要》등 저명한 醫書가 편찬되어 의학 발전과 醫術普及에
기여하였는데, 특히 각 분야의 專門醫術이 발달하였다.
外科學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발달하였지만, 조선중기에 설치되었던 治腫廳은 이때의
治腫術(外科醫術)이 독립된 醫司를 설치할 만큼 발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결
과 《治腫秘方》을 저술한 任彥國과 같은 治腫術의 名醫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의 새로운 치료법은 당시 조선의 의학수준을 東洋諸國은 물론 서양에까지 과시한 커다
란 성과였다.
鍼灸術도 크게 발달하여 선초부터 鍼灸專門醫를 양성하였으며, 그에 따른 각종 鍼灸專
門醫書가 찬술되어 鍼灸術은 의학의 한 專門分科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
라서 鍼術의 大家도 여러 명 배출되었는데, 특히 許任·李馨益등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162) 《仁祖實錄》권36, 16년 4월 甲午條.
163)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p. 329.
164) 《典客司日記》仁祖19년 8월 13일條.
- 245 -
許任의 補瀉法은 종래의 補瀉法에 자기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치료법을 발명한 것으로
서 조선시대 鍼灸術의 독자적 발전의 기틀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또 李馨益의 潘鍼術도
그의 경험에 의한 독자적 鍼法으로 조선시대 鍼術의 한 분야를 개척한 것이었으며, 이들
은 조선중기 한국 鍼術의 기술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던 것이다.
이 외에 痘科·產婦人科·小兒科·齒科·眼科·養生科등도 상당한 수준에 달하였다. 조선의
학이 이렇게 발전하게 되자 그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 많은 醫書였다. 이러한 의서
는 《東醫寶鑑》·《醫林撮要》와 같은 綜合醫書도 있지만, 한 분야에 대한 專門醫書도
많았다. 특히 傳染病醫書인 辟瘟書가 諺解書를 포함하여 8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許浚의 《辟瘟新方》은 당시 조선 병리학의 수준을 세계에 과시한 탁월한 과학적 의서
로서 《동의보감》과 함께 그의 큰 업적이었다.
鄕藥은 조선전기에 크게 발달하여 民疾의 치료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중기 이후 醫政
의 방만한 운영과 양대 전란으로 인한 藥田의 황폐로 점차 위축되어 큰 발전은 없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 활발한 藥材의 對外交流와 鄕藥을 사용하는 치료술의 개발·새로운 醫
書의 찬술 등으로 계속 개발 보급되었다. 결국 조선중기에는 전기에 발달하였던 鄕藥과
醫學의 자주적 발전을 토대로 하여 의술이 더욱 발달하였고, 각종 약재의 수입과 개발로
藥品이 발달하여 국민보건에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동의학 이야기 > 스크랩 동의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靈樞·官鍼에 對한 硏究2 (0) | 2019.03.20 |
---|---|
靈樞·官鍼에 對한 硏究1 (0) | 2019.03.20 |
이덕무의 장부론 (0) | 2019.02.23 |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7 (0) | 2018.10.19 |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6 (0) | 2018.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