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가구급방 (村家求急方)
村家求急方 / 金正國(朝鮮) 編 影印本
서울 : 國立中央圖書館, 1995 1冊(51張) : 10行14字; 25.2 x 35.0 cm
原本版事項 : 筆寫本
원본소장기관 : 日本杏雨書屋(300-13) 日本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은 중종(中宗) 33년(1538) 6월에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향촌(鄕村) 백성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저술한 의방서로서, 민간에서 손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藥材)를 이용한 기존 처방들과 현지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치법들 가운데 효험이 있는 것을 채록하여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김정국의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또는 팔여거사(八餘居士)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그는 아버지 김연(金璉)과 어머니 양천 허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 허준 (許浚, 1539-1615)이 그의 5촌 당질(堂姪)이다. 그의 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서 관직에 나아간 토족(士族) 집안으로 그 역시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1507년 (중종 2) 생원시와 진사시에 오르고 150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 홍문 관부수찬, 승문원 교검을 거쳐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사간 원정언에 제수되었다. 1510년 이조좌랑으로 선임되어 문관의 의사행정을 담당하고 1512년 홍문관부교리로 옮겼다가 이듬해 교리로 승진한다. 곧 사간원헌납에 임명되고, 1514년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해 이조, 공조, 호조의 정랑을 거쳐 승문원교리로 전작되었다가 1515년 다시 이조정랑에 선임되었다. 1516년 의정부검상을 거쳐 이듬해 의정부사인으로 승진하고 사간원간, 군기시 부정, 성균관사성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518년 직제학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왕명을 출납하였다.
중종 14년(1519) 김정국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축출된 조광조 등 사림파 학자들의 무고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림파를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형인 김안국과 함께 관직이 삭탈되었다. 고양군 망동으로 내려가 스스로 ‘팔여거사’라 칭하며, 중종 32년에 재임용되기 전까지 망동에 거주하면서 학문을 닦고 저술과 후진 교육에 전심했다. 향약과 향교 교육 등 향촌 교화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시골 백성들이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약방문을 수집하여 구급방서인 <촌가구급방>을 저술하였다.
중종 32년(1537) 관직이 복구되어 이듬해 용양위대호군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 중 수십조에 달하는 정책을 건의하여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촌가구급방>을 초간하였다. 이외에도 김정국은 성리학과 역사, 의학 등에 밝았으며 문인으로는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한 정지운(鄭之雲) 등이 있다. 또한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어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蜂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촌가구급방>이외에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사재집(思齋集)>, <역대수수승총립도(歷代授受承銃立圖)>, <기묘훈적(己卯勳籍)>, <경민편(警民編)> 등이 있다.
<촌가구급방>은 향명(鄕名) 2장, 본문(本文) 48장, 발문(跋文) 1장 등 총 51장으로 구성되어있다. 목록과 향명 일부는 결실(缺失)된 것으로 보인다. 향명에는 88여종의 약재에 대한 향약명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은 대방과(大方科), 부인문(婦人門), 소아문(小兒門)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대방과에는 78증, 부인문에는 24증, 소아문에는 30증 등 모두 132종의 병증을 싣고 있다. 병증 다음에는 ‘一’, ‘二’, ‘三’과 같이 번호를 부여하여 구분하였다. 대방과에는 중풍(中風), 역절풍(歷節風)을 시작으로 제수상(諸獸傷), 제중독(諸中毒) 등 일반적으로 호발하는 78개 병증에 대한 치법을 실었다. 부인문에는 태동불안(胎動不安), 인신복통(姙娠腹痛)을 시작으로 임신금기(姙娠食忌), 약기(藥忌) 등 여인이 월경, 임신, 출산 과정 등에서 겪을 수 있는 24개 병증을 다루었다. 소아문은 중풍(中風), 경간(驚癎)을 시작으로 괴질(怪疾), 육독(肉毒) 등 소아들에게 다발하는 질환들에 대한 치법을 설명하였다. 발문은 김정국 자신이 지은 것으로, 책의 저술 동기 등을 적어 놓았다.
<촌가구급방>은 남원과 진주에서 간행되었다. 중종 33년(1538) 김정국이 정계에 복귀하여 전라도 관찰사에 재임되었을 때 남원에서 처음으로 간행하였고, 이듬해인 선조 5년(1572)에는 함경도 관찰사 이우민 (李友閔)이 함흥에서 중간(重刊)하였다. <고사촬요(攷事撮要)> 「팔도책판목록(八道冊板目錄)」에는 초간본에 해당되는 전라도 남원판과 재간본에 해당되는 경상도 진주판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미키사카에[三木榮] 소장본, 성암문고본, 한독본, 홍재휴본이 알려져 있다. 해제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미키사카에 소장본의 영인본이다. 미키사카에는 자신의 소장본을 초간본(初刊本) 이후에 성립된 이본(異本)으로 보았다.
<촌가구급방>의 의학 경험은 다른 서적을 통해 전승되기도 하였다. 편자미상의 의방서인 <의방합부(醫方合編)>가 대표적인데, 이 책은 <촌가구급방>을 비롯하여 <삼의일험방(三意一驗方)>및 몇몇 경험방서들의 내용을 모아 필사해 놓은 대형 의방서이다.
<촌가구급방>은 구급방이라는 측면과 향약의학이라는 측면에서 의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으로, 의료의 접근성을 담보로 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김정국의 발문에는 약재를 구할 수 없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많은 방서들을 버리고 <촌가구급방>을 엮은 경위를 설명하였다. 또 이 책을 만든 이후에 약재를 찾아 헤매는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고 설명하였 다. 이를 보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등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대규모 의방서 편집을 정점으로 고급 의학지식은 풍부해진 반면, 약재 수급과 유통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향촌에서 자생적으로 축적된 경험 의학 지식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질병치료에 체계적으로 응용할 만큼 성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정국은 목민관이자 유의(儒醫)로서 이러한 의료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적이고 간편한 구급의서를 만들었던 것인데, 향촌에 흩어져 있던 치료 지식들이 지식인의 손을 거쳐 정리되었다는 점에서 의학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촌가구급방>에는 약재들에 향명(鄕名)을 그대로 싣고 있는데, 향명은 당시 민간에서 사용되는 구어(口語)를 가장 보편적인 표기법으로 표기한 것이기 때문에 국어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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