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침뜸의학의 역사
일본에서 침뜸의학을 거론함에 있어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언급이 자주 거론된다. 그 가운데 하나로 欽明천황 때(539~571년) 조선 고려에서 呉知聡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일본에 와서 전파하고자 침뜸 경혈이 적혀 있는 「明堂圖」, 「儒釈方書」 164권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柳谷素霊). 나라(奈良)왕조(710~794년) 이전 불교 문화가 일본에 도래할 무렵이었다. 더불어 중국 전통의학의 유입도 분명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느 지역에서나 그렇듯이 민간에서 전개되던 전통의 의술·의료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도 자명하다. 다만 그러한 민간 의료는 문자를 가지지 않았던 조건에서는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굳이 그 원류를 찾자면, 가장 오랜 기록인 일본의 古事記, 日本書紀 속에 등장하는 오오남치(大國主命)와 스쿠나히코나(小彦名)라는 의료신이 거론된다. 이 두 신은 협력하여 국토경영에 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신이 의료를 담당한 것으로 되어있으니, 일본의 고대인 역시 병, 나아가 의료를 중시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침뜸의학이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것은 나라(奈良)시대(710~794년)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율령체제가 구축되는데, 養老律令(757년)에 따라 典薬寮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전약료(典薬寮)는 의료 관련 중앙위생행정의 최고기관이었고, 더불어 의학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그 기관에서 의사, 침사, 안마사, 주금사(呪禁師)는 각각 전문 의료를 담당하며 의생, 침생, 안마생, 주금생의 교육에 종사했다. 교과내용에 대해서는 의생도 침에 의한 치료를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어 의사와 침사의 차이는 전자가 후자에 비해 맥을 보고 본초(약초)에 의한 치료를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주금은 도교계의 주술을 가리킨다. 안마도 도교의 방술이다. 율령제도 이외에도 도교계 의술이 여러 계층에서 사용되었다. 그 모습은 万葉集이나 風土記에 그려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라 7대, 京都의 平安朝期、鎌倉期、戦国時代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일반인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한방의의 중요한 치료방법으로서 침뜸의학이 널리 일본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침사(시술사), 침박사(대선생이나 교수), 침생(학생, 견습생)의 제도로 불렸다.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년), 984년에 典薬寮 의/침 박사였던 丹波康頼(912~995)가 医心方을 저술하여 上皇에게 헌상하였다. 이것이 현존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의서이다. 전 3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수·당의 의서, 방술서 중에서 추려 정리한 것으로 사료 가치도 높다. 중국 고전의학의 집대성의 일본화이다. 이전 시대에 중국 전통의학이 줄곧 유입되어 왔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한데, 특히 인용된 의서 가운데는 이미 소실되고 없는 고의서도 포함되어 있어 고전의 복원과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마쿠라(鎌倉) 시대(1180~1333년)에 들어서면 임제종(臨済宗)의 시조인 에이사이(栄西)가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 1214년)에서 차의 효용에 대해 정리하고 있는데, 이와 더불어 오장에 대한 오미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 특기할 것은 관의도 아니고 승의도 아닌 개업의도 이 시기에 출현하였다고 한다.
무로마치(室町) 시대(1333~1573년)부터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에 걸쳐서는, 금원의학에 이어 한층 체계화되는 대륙의 의학과 보다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며 민간에서 양의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예컨대 室町시대 초기 竹田昌慶(1338-80)은 명나라로 건너가 의술을 배우고 다수의 의서와 함께 '동인형'을 가지고 돌아오는 등,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로는 曲直瀬道三(1507~1594)이 거론된다. 그는 관동의 명의인 승려 田代三喜에게 사사하고 임상의로 또 의학교육가로, 그리고 저술가로 크게 활약하였다고 한다. 저술이 많은데 내과 소아과 약물 침뜸 양생 등 다양하다. 그는 탕액 뿐만 아니라 침구에 의한 치료도 실시하였으며, 후에 일본에서는 탕액 전문가와 침구 전문가가 분리 독립하게 되어 중국과는 다른 변용을 이루지만 道三은 양자 모두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침구는 平安・鎌倉期까지는 탕약보다 더 중요한 치료였으나 한때 시들해졌다. 그러다가 曲直瀬道三가 새롭게 주창하면서 다시 성행하고 침 전문가들이 등장하였다. 田代三喜、曲直瀬道三으로 이어지며 구축된 의학(대륙에서 건너온 李朱医学을 계승, 발전)은 이 시기 폭넓게 뿌리내리며 이후 약 200여년 동안 일본 의료의 중심적 규범으로 역할하게 된다. 특히 침법 이상으로 뜸요법의 요칙을 다루어, 뜸요법의 대중적 확산에도 기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에 다루어야 할 또 한 사람으로 침박사였던 御園意斎(1557~1616년)를 들 수 있다. 기존의 철침을 바꿔 금은침을 이용하였고, 타침법을 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침의 유연성을 이용해 작은 망치로 침머리를 두드려 서서히 바늘을 삽입하는 방법이다. 正親町 天皇、後陽成 천황을 섬겨 御園流(夢分流라고도 함)의 시조가 되었다. 의사 중 침만으로 치료를 하는 침가의 흥륭은 意斎에서 알 수 있듯이 비교적 빨랐던 것이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통상 '捻鍼' 기법이었는데, 이와 다른 일본 고유의 '打鍼'기법이 창안되었다고 한다(아래 사진). 그 후 '打鍼'이라는 기법을 일본에서 발명한 것은, 奥田夢分斎로, 「鍼灸秘訣集」이라는 책도 저술하였다. 그는 원래 奥州二本松의 선승이었는데, 교토의 多賀検校로부터 多賀流의 침을 배우고 만년에 京都御所의 말라붙은 모란꽃을 침술로 살렸다고 해서, 당시의 花園천황으로부터 칭찬의 말을 받고 姓을 받았고, 그 후에 奥田로 고치고 御薗意斎가 되었다. 이 흐름을 이어온 부류를 '打鍼流'라고 하며, 만병의 기원은 복부(腹)의 조절에 있다고 하여 주로 복부에 打鍼을 하여 잘 영위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후에 만들어진 管鍼法(杉山和一)의 원류로 보기도 한다.
에도(江戸) 시대(1603~1867년)로 오면 한층 발전된 양상을 보게 된다. 앞의 御園意斎와 활약하는 시대가 일부 겹치는 저명한 침의로 坂寿三、入江頼秋、吉田意休 등이 거론된다. 사카주조(坂寿三)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시의(侍医)가 되었다. 그리고 이리에(入江)로, 또 스기야마 카즈이치(杉山和一, 1610~1694)로 이어졌다고 한다.
杉山和一은 이세(伊勢)의 사람으로 장님이었기 때문에 에도로 나가 検校 山瀬琢一(入江流)에 입문했지만 노둔(魯鈍)을 이유로 파문당했다. 이후 관침법(管針法)을 고안하여 오늘날 침술의 기초가 된 스기야마 3부서(杉山三部書)를 남겼다. 1671년에는 검교가 되었고 쇼군 쓰나요시(綱吉)의 난치병을 고쳐 크게 명성을 얻으며 쓰나요시에게 중용되었다. 1682년에는 침치학 강습소를 곳곳에 설치하여 시각장애인 침술교육을 조직화하였다.
*管鍼 기법은 杉山検校가 江野島邊齋天에 참가하였다가 ‘대나무 관과 솔잎'을 하사받고, 이 관속에 들어간 솔잎으로부터 괌침을 발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은 그 전 元禄 무렵의 책에도 이미 '管鍼'이라는 글자가 나와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의 침술 기법은 모두 관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杉山検校가 펼친 '관침'기법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염침(捻鍼)'이나 夢分斎가 발명한 ‘打鍼’ 기법을 알고 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관침은 1회용 침이 보편화됨과 더불어 프라스틱 침관이 일반화되며 보편적인 도구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이 플라스틱 침관의 이용이 확산되고 있다.
徳川記에 杉山検校의 활약을 중심으로 일본 침뜸의학이 중흥기를 보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이른바 침뜸의료 중흥의 시조로까지 추앙받게 되었다. 물론 이외에도 吉田流의 吉田이라든가, 垣本鍼源、菅沼周桂 등 후세까지도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었다.
또한 杉山流에는 三島安一、和田春徹、石坂志米一 등의 제자들이 잇따라 나타나 고도의 기술 발달을 이루면서 점점 杉山真伝流의 발전을 꾀했기 때문에 徳川의 중세기는 일본 침·뜸의학의 기술면에서 가장 현란한 꽃을 피웠던 시대라 할 수 있다.
한편 에도(江戸) 시대에는 주자학이 융성을 이루어 의학 역시 그 흐름과 함께 하였으나, 주자 이전의 유학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의 흐름도 나타났다. 의학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장중경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가 일어났다. 金元의학을 벗어나 새로운 의학을 세우며 고방파의 시조로 여겨진 인물로 後藤艮山(1659~1733년)을 볼 수 있다. 반면 金元의학의 흐름을 잇는 曲直瀬道三(1507~1594년)의 一派를 후세파라고 부른다.
*고방파는 결코 오래된 의학 학파가 아니다. 金元의학을 관념론적이라고 비판하고 경험적 실증적 의학으로 돌아가자는 학파이다. 상한론은 경험적으로 확립된 증거에 따라 약방을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고방파의 자세와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 고방파의 경험주의 실증주의 입장에서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와 같은 인체 해부로 향하는 흐름이 나왔다. 같은 고방파인 吉益東洞(1702~1773년)도 실증주의를 첫째로 삼고 음양오행설 등 전통의학 이론을 철저히 거부했다. 상한론 조문을 처방별로 재편집하여 유취방(類聚方)을 저술하였다. 한편 앞서 주류를 이루었던 田代三喜 및 曲直瀬道三을 필두로 宋金元医学을 기반으로 형성된 유파를 후세방파(後世方派)라 한다.
침구가 중에서도 고방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다. 침구칙을 저술한 菅沼周桂(1706~1764년)는 치료에는 70혈이면 충분하다며 소수의 혈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중시했다(『鍼灸則』). 또, 자락을 장려했다. 전통이론의 답습보다는 현장실험을 주장한 吉益東洞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이시자카(石坂宗哲, 1770~1841)는 네덜란드 의학을 연구하며 침구면에서의 漢-洋(漢-蘭)의 절충을 꾀했다. 메이지 시대를 맞이하여 의학 사정은 일변한다. 메이지 초기의 일본에서는 근대화는 곧 서양화이며, 의료에서도 서양 의료제도를 통째로 이식하고자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한의사(물론 침의나 뜸의사 포함)에 대해서는 그 의료를 직접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의학교육과 의사시험 쪽에서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졌다. 즉, 앞으로는 서양의학을 익혀 면허를 얻지 않는 한 새로운 의사가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明治시대(1868~1912년)로 들어서면, 이렇게 폭넓게 밀려든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의학분야에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해부생리학 등 서양의학이 도입되며 근대적 의학이 변화를 추동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초기부터 의료제도에 일대 변화가 나타나며 침구의료도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메이지 9년 정부는 각 부현에서 의사 개업 자격시험을 실시할 것을 명령하고 새로 의술을 개업하려면 모두 이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침구·한의사는 각 부현의 실정에 따라 5년간 의사로서의 특례를 인정하되, 그 이후에는 침구·한의사로서의 특별한 의사면허는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정부는 서양의학이야말로 의학이며, 한의학·침구술 등은 결국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구축되어 가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맹인의 관직 폐지, 한의사 제도 폐지 등과 더불어 침뜸의도 금지되었지만, 메이지 18년에 그러면 맹인의 생활이 곤란할 것이라고 해서 간단한 면허 규칙이 생겨 비로소 한방의와 떨어져 개업하게 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개정되어 시험제도가 되어 전후 오늘날의 침구사 신분법이 되었다.
*그래서 明治 초에 국립 맹학교에 '鍼按科'가 생겨 맹인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과거 杉山流의 직계를 잇는 것으로 昭和시대까지도 奥村三策이 이를 따랐고, 이것이 현대의 '国立教育大学雑司ヶ谷分校'로, 역시 杉山流의 직계인 吉田弘道가 '築地盲人技術学校'에 근거해 맹인 교육을 시행한 것이 오늘의 東京都立文京盲学校이다.
이렇게 침구학교는 맹인 중심으로 번창한 것처럼 보이지만, 물론 청안자들의 학교도 따로 열려 있었다. 종전 전에는 10개교 정도였고, 종전 후에는 전국에 30개교 정도였다. 이들 학교들이 후생성의 인정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메이지 이전의 침·뜸은 도쿠가와 중세 이후에는 대부분 한방의가 외과적 치료의 하나로 침·뜸을 시행해 왔는데, 杉山検校처럼 직접 쇼군가에 들어간 경우도 있고 여러 大名(무사)에게 초빙받은 경우도 있고 개업의도 있어 도쿠가와 중기의 전성기는 침술의 기법도 '90여 종'이라고 하며 온갖 병을 여러 가지 침술을 사용하여 각각의 특징적인 기법으로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일본 침뜸의 역사에는 동서교류가 중요한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일본에 들어온 서양인들에 의해 근대적 해부 지식이 전해지며 침뜸의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반대로 침뜸의학이 이들에 의해 서양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1826년 3월 15일 네덜란드인 시볼트가 쓴 '江戸参府日記'에 막부의 침의 石坂宗哲에게 일본의 침·뜸기술을 배웠다고 쓰여 있고, 후에 시볼트에 의해 石坂이 쓴 「鍼灸知要」의 네덜란드 번역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특별한 인물도 나타난다. 오쿠보(大久保適斉, 1840~1911)라는 인물인데, 그는 일찍이 서양의학을 공부했는데(동경대 의대의 전신인 東京大病院兼医学校), 서양의학 의사로 병원장을 지내면서 침구과 의사로 전향했고, 이윽고 근대의학 이론에 입각한 새로운 침 치료체계 수립에 힘썼다. 저서로 鍼治新書가 있다.
그를 비롯한 침구술의 존속과 부흥을 바라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따라 정부는 메이지 44년(1912년) 침구사 자격시험제도와 영업면허 단속에 관한 내무성령 침구술 영업규칙 개정법을 발령하고 침구술 존속의 기본 방침을 제시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침구의료가 자리를 잡게 되고, 전후 미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침구의료가 중단되기까지 빠르게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서양의학이 제도화됨과 더불어, 앞서 언급한 오쿠보(大久保適斉)와 같이, 서양의학의 생리해부, 병리 등의 지식을 바탕으로 침구의 작용, 효능을 분석하고 종합해 나간다는 서양의학적 침구술을 표방하는 흐름이 침구술의 새로운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柳谷素霊(1906~1959)의 ‘고전으로 돌아가라’는 목소리로 대표되는 고전적 침구술을 내세우는 흐름이 있다. 이들은 전통적 침구이론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훨씬 강력하다. 이제 고방파, 후세파의 흐름에 현대의학적 침구도 추가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통 의학은 메이지 초기에 밀려든 서양의학에 그 종주의학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한편, 일시적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로 '침구의료'로써 그 지위를 유지하며 다양한 유파를 이루며 크게 발전하게 된다. 그 결과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폐절의 위기에 처했던 대륙에 다수의 의서가 소개되며 중국의 전통의학 폐절에 반대하는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이 시기와 공산당 정부 이후 다수의 일본의서가 중국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한편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에 미군정이 들어서며 일본 침구는 일시적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되지만, 이를 돌파해 내고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정리하려 한다.
*당시 한국 역시 미군정에 의해 전통의학이 금지되는데, 한국에서는 줄곧 금지령이 유지되다 박정희정권에 의해 한의사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침구사제도는 끝내 도입되지 않은채 미아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현대에 와서는 중의학의 침구이론과 임상지식이 재도입되며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이루게 된다. 즉 오늘날 일본의 침구의료는 다기다양한 이론과 그에 기초한 임상이 제각기 발전하며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서로를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면 늦게 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은 가능하면 빠르고 겸허히 해나간다는 태도로 정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어쩌면 이러한 접근 태도가 일본 침구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지탱하는 배경 요인이 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柳谷素霊, <五十からの青春>(1951년)의 'ハリ・灸の日本の歴史'
鍼灸・按摩・マッサージの歴史, 協同組合 兵庫県保険鍼灸師会 創立10周年記念誌
鍼灸の歴史:広瀬日出治著、大阪府立盲学校同窓会発行
漢方の歴史:小曾戸洋著、大修館書店、あじあブックシリー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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