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방통휘 (麻方統彙)
麻方統彙 / 丁若鏞(朝鮮) 撰, 洪奭周(朝鮮) 編 筆寫本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發行年不明] 1冊(87張); 25.6 x 21.9 cm
序 : 壬武(1802)...洪奭周 印記 : 曺秉桂
이 의서는 조선시대 1802년(순조 2)경에 간행 되었다고 생각되는 마진에 대한 전문의서이다. 정약용(丁若鏞)이 찬(撰)하고 홍석주(洪奭周)가 편(編)한 �마방통휘�는 본래 목판본 4권4책이지만 이 책은 그 일부만을 필사한 것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유형원(柳馨 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본관은 나주(羅 州)이며,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이다.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 산인(鐵馬山人)이며,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낸 정재원(丁載 遠)이며, 어머니는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로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 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하였고, 그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 다.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으며,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 ·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 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 ·병조참지 ·동부승지 · 부호군 ·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1799년에는 「전론(田論)」을 저술하여 토지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공동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여전제(閭田制)을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정치개혁론으로 「원정(原政)」 · 「원목(原牧)」을 저술하여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 이념을 표방하였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는데,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을 연마했다. 말년에는 �주례(周禮)�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를 확립하고 이른바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을 제출하였다.
�경세유표 (經世遺表)�에서는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 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는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 의 운영개선을,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는 옥사(獄事)에 통치자의 인정(仁政)·덕치(德治)의 규범을 명 확히 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천문 ·지리 ·물리 등 제반 자연과학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의학에 있어서 는 마진(痲疹)에 관심을 기울여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두법(種痘法)을 소개 하는 �종두심법요지(種痘深法要旨)�를 저술하였다.
이 책을 편집한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 泉)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영의정 낙성(樂性)의 손자이며, 우부승지 인모(仁謨)의 아들이다. 정조 19년(1795) 문과에 급제한 뒤 직장(直長)·주서(注書)·검열(檢閱) 등을 거쳐 순조 2년(1802)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응교(應敎)가 되어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순조 7년(1807) 이 조참의, 순조 15년(1815) 충청도관찰사, 순조 34년(1834) 이조판서로 승진한 뒤, 좌의정 ·세손부(世孫傅) 등을 지냈다.
저서로 �연천집(淵泉集)�, �학해(學海)�,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동사세가(東史世家)�, �학강산필(鶴岡散筆)�등이 있으며, 편저로 �마방통휘�외에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 �상예회수(象藝薈 粹)�, �풍산세고(豊山世稿)�, �대기지의(戴記志疑)�, �상서보전(尙書補傳)�등이 있다.
�마방통휘�는 1798년(정조 22)에 정약용이 편술한 �마과회통�의 권수(卷首)에 채록된 총론에 해당하는 중국 마진서들의 서문 및 제론(諸論)의 발췌와 아속편(我俗編), 오견편(吾見編)을 삭제하고, 그 나머지인 원증편(原證編), 인증편(因證編), 변사편(辨似編), 자이편(資異編), 합제편(合劑編)을 원병편(原病編), 잡증편(雜證編), 변사편(辨似編), 방통편(旁通編), 탕액편(湯液編)으로 고쳐 개편하였다. 내용은 �마과회통� 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원병편에서는 마진의 원인과 경과, 잡증편에서는 마진에서의 합병증, 수반증, 변사편에서는 마진의 증상별 진단, 방통편에서는 두진의 증상, 경과, 합병증, 치료법을 썼으며, 탕액편에서는 약방과 효능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마방통휘�는 정약용의 �마과회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이를 개편한 홍석주는 정약용의 이름을 적고 있지 않다. 아마도 정약용이 서학(西學)으로 인해 유배되었던 사정 때문으로 보이는데, 홍석주가 일부러 책의 이름과 권차를 바꾸어 교정,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마방통휘�는 목판본이지만 이 책은 필사본인데, 이는 �마방통휘�가 필사되어 널리 이용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는 홍석주가 지은 서문과 목록이 실려 있으며, 본문의 제목에는 ‘마방통휘초(麻方統彙抄)’라고 하였는데, 실제 �마방통휘�원문과 비교하면 긴요한 부분이 초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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