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동의학 에세이

사와다, 의도(醫道)의 길 : 書物은 죽었다?

지운이 2017. 4. 6. 15:05

사와다, 醫道의 길 : 書物은 죽었다?

 

'書物은 죽은 것일 뿐이고, 죽은 고전을 가지고 인체를 읽어내야 한다'는 말은, 일본의 유명 침구인이었던 사와다(沢田健)가 한 말이다. 아마도 인체 그 자체가 곧 고전의 발상지인 만큼, 인체를 올바로 읽을 수 있는 것이 곧 고전을 해독해 내는 길이라는 것이다. 즉 고전의 발상지인 인체에 빈 손으로 다시 서서, 말(언어)이 있기 이전의 그 무엇을 구하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醫道의 기본을 말해 주는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글자(언어)라는 부호로 표시된 고전에 의문을 품고, 그 언어를 뛰어넘는 진실의 세계를 찾아나서라는 것이다. 아마도 환자가 곧 스승이라는 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환자의 신체로부터 진정한 고전의 정수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참으로 귀중한 醫道의 경구라 할 만하다.

 

장자에 나오는 윤편(輪扁)이라는 장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나라 환공(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천하의 패자로 올라선 당대의 영웅)이 당(堂) 위에서 한가히 책을 읽고 있었고, 수레 만드는 장인(匠人) 윤편은 당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는데.. 윤편이 당 위에 올라가서 물었다.

 

“주군이 읽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인들 말씀이 기록된 책이지.”

“그 성인들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돌아가신지 오래지.”

 

이에 윤편이 말하길,

“그렇다면 그것은 그냥 빈 껍데기군요”

 

환공이 정색을 하고서,

“과인이 성현의 책을 읽는데 일개 장인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구나. 이치에 맞는 설명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각오하라.”

 

이에 윤편은 작심한 듯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신이 평생 해온 일은 이 바퀴를 깎는 일입죠. 허나 이런 천한 작업이라도 조금만 많이 깎으면 바퀴가 느슨하여 덜컥거리고 조금만 덜 깎으면 바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참으로 알맞게 깎는 일이란 어렵지요. 그 ‘알맞음’이란 것이 손맛으로 얻고 마음으로 응할 뿐, 말로는 전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아들놈에게조차 가르칠 방도가 없고 그놈이 알아들을 수도 없어, 신이 칠십 평생을 깎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옛 성인들은 모두 전해줄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죽어버린 거지요. 그러니 주군이 읽고 계시는 것이 빈껍데기가 아닙니까?(『장자』「천도天道」)

 

장자에 나오는 이 윤편착륜(輪扁斲輪)의 이야기는 지성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말(언어)을 뛰어넘어 真実’을 구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찍이 이미 장자가 말했던 것이니,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의 내적 갈등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하든 말(언어)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구하려는 우리의 지성방법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일종의 반지성주의). 아마도 그것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그것은 곧 자유이고, 반권위주의를 출발점으로 한다.

 

물론 윤편의 체득된 그 무엇이 곧 진실이라고 해서.. 고전의 경구들이 일거에 無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언어가 내포하는 표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록이 없고서는 오늘과 같은 문명발달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자. '書物은 죽은 것일 뿐이고, 죽은 고전을 가지고 인체를 읽어내야 한다' 언제나 진실을 궁구하려는 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경구일 것이다. 고전의 속박에 구애됨이 없이 언어를 넘어 진실을 구하려는 자세로 오늘 우리의 동의학을 발전시켜 가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醫者에게 주는 卓見이라 할만하다.

 

 

이러한 사와다의 醫道는 나름 17세기 일본 지성사의 결과물이라고도 한다. 사와다가 절찬해 마지 않았다는 <難経鉄鑑>(広岡蘇仙)이라는 책이 있다. 이야기가 좀 엇나가지만, 사와다는 이 책에 나오는 12원기도를 늘 보며 치료하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신간동기와 삼초와 원혈의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동의학의 인간생리구조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으로 一元気론적인 신체관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難経鉄鑑>의 신체관은 17세기말 이후 일본지성사에서의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難経鉄鑑>의 저자인 広岡蘇仙은 18세기초 京都에서 難経을 배우게 되는데, 그의 스승이 井原閲(井原道閲(1649~1720)으로 추정)였고, 井原閲의 스승은 味岡三伯라고 하는데, 이 味岡三伯의 제자들 사이에서 <난경>의 삼초론을 기초로 한 신체관이 폭넓게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으로 강호시대 지성사에서 私學(전국시대 흐트러진 상상적 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경향으로 官學에 대비되는.. 당시 관학은 주로 주자학을 도입하여 사상질서를 통합하려 하였다고..)의 반지성주의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당시 관학이 주로 주자학적 전통을 고수하는데 비해 私学은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에 반하여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띠는 부류(中江藤樹이 중심)로 양명학적 전통과 만나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반지성주의적 경향이란, 단지 지성을 내팽개치고 본능에 매달린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근거인 언어에 의문을 갖고 언어를 넘어 진실의 세계에 입각하려는’사고를 말한다

 

'書物은 죽은 것일 뿐이고, 죽은 고전을 가지고 인체를 읽어내야 한다'라는 사와다의 동의학 방법적 사고 역시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臍下丹田을 중심으로 한 気一元의 身体観’도 바로 이러한 강호시대의 반지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좀 더 많은 설명을 요하는 측면이므로 다른 기회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인체를 궁구하는 노력, 환자의 신체를 궁구하는 노력은 당연할 것이나, 오늘 우리에게 반권위의 대상은 무엇일까? 또한 자유는 무엇에 대한 자유일까? 침구계를 바라보며 생각이 복잡하다. 침뜸을 독점하고 생활침뜸조차 가로막는 저들의 권위로부터의 자유.. 반드시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재야침구인들 내적으로도 형체없는 권위는 수 없이 존재한다. 특정한 대가의 침법의 권위도 있고, 또 무차별적으로 쫓아가는 이런 저런 비방이라는 권위도 있으며, 내가 해보니까 효과가 있더라는 몰과학적인 태도의 권위, 무턱대고 고전에 의한다는 고전신봉주의의 권위.. 등등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나부터 되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인체를 궁구하는데라도 빠져들길 바라며.....

(지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