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학 이야기/침술 기법과 기술

침술(鍼術)의 성립에 관한 연구[펌]

지운이 2023. 7. 6. 00:11

침술(鍼術)의 성립에 관한 연구

 /정우진(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 경희대학교 철학과)

 /의사학 제20권제2호(통권제39호)2011년12월 KoreanJMedHist20ː463-492Dec.2011 ⓒ대한의사학회pISSN1225-505X,eISSN2093-5609

 

 

1. 들어가며

2. 침술의 등장시점

3. 뜸

4. 폄(砭) 

5. 치미병(治未病)과 보정(保精, 정의 보존)의 이념

6. 논의의 정리

 

1. 들어가며

 

한의학은 흐르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이 케케묵은 인류의 유산이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아 주류의학에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을 불어넣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현재의 한계 속에서 좌절할 때,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원시림으로 기능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희망이 학자의 몫인가? 희망은 실존적 문제다. 한의학의 미래는 골방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학자만의 소임은 아니다. 그러나 한의학의 원형과 발전과정을 탐색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작업은 온전히 학자의 몫일 것이다. 한의학으로 흘러 들어오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일 먼저 서양의 영향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도교나 성리학과 같은 사상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것은 한의학의 본류가 아니다. 지류를 지나쳐서 본류를 따라 더 올라가면 우리는 흔히 한의학의 정체성이라고 말해지는 중요한 개념을 만난다.

 

그 하나는 양생이고 또 하나는 감응(感應)의 시대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시(四時), 구궁팔풍(九宮八風) 등의 수비학적 체계다. 그리고 유사한 시기에 상한론(傷寒論)이라고 불리는 중요하지만 좀 낯선 임상의학의 정신을 만난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 종종 마왕퇴(馬王堆)의 시기라고 불리는 전한(前漢, 기원전 206~기원후 8)초에 이르면, 한의학의 원형을 볼 수 있다. 마왕퇴의 시기에 한의학은 양생의 이념과 경맥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원형을 이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한의학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침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로 이론 의학화 되는 의술은 침이 아니라 뜸이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침의 직계조상이라고 말해지는 사혈의 존재도 뚜렷하지 않다. 도대체 마왕퇴 직후에 보이는 침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된 것일까?

 

나는 침이 ‘폄과 뜸의 경험의학적 지식이 전한기의 시대적 이념인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에 반응하여 등장한 혁신적 기술’이며 그 과정은 ‘몇 번의 도약을 거친 중첩적 발전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이 생각을 폄과 뜸 그리고 예방의학의 정신을 검토하면서 확인할 것이다. 그런데 마왕퇴 문헌이 선진기(先秦期, 기원전 221년 이전) 침의 부재를 선언함에도 불구하고, 침술의 등장시점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2. 침술의 등장시점

 

과거에 사람들은 늦어도 전국(戰國)시기에는 침이 있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원전 168년에 매장되었다고 추정되는 마왕퇴 문헌의 발굴(1973)은 이 믿음을 뒤흔들었다. 마왕퇴에서는 총 15종의 의학·양생관련 자료가 출토되었다. ‘『족비십일맥구경(足臂十一脈灸經)』, 『음양십일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 갑본, 『맥법(脈法)』, 『음양맥사후(陰陽脈死候)』,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 『각곡식기(却穀食氣)』, 『음양십일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 을본, 도인도(導引圖), 『양생방(養生方)』, 『잡료방(雜療方)』, 『태산서(胎産書)』, 이상의 책은 백서의 형태로 출토되었다. 이 외에 죽간이나 목간의 형태로 출토된 것으로, 『십문(十問)』(죽간), 『합음양(合陰陽)』(죽간), 『잡금방(雜禁方)』(목간),  『천하지도담(天下至道談)』(죽간)이 있다.’ 그런데 이들 문헌에는 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혈위(穴位)도 확인되지 않았다(침은 혈위를 요구한다. 따라서 혈위가 없다는 것은 침의 부재를 함축한다). 이런 사실은 침의 연원을 내려잡아야 하며, 다른 문헌자료에 대한 해석도 뒤집어야 한다는 선언과 같았다.

 

물론 마왕퇴 한묘에서는 침에 관한 책이 출토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호남(湖南), 장사(長沙)에서 발굴된 마왕퇴 의서가 호남 중심의 남방의학을 대표할 뿐이라고 하거나, 침과 혈위에 관한 책이 함께 묻히지 않았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 학자들은 마왕퇴 의서의 대표성을 주장해왔다. 그 근거 중 하나는 마왕퇴 문헌의 폭이다. 즉, 마왕퇴 의서의 규모가 크고 당시 의학의 범주를 포괄하므로 침이나 혈위를 다룬 책이 출토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견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전한대(前漢代)의 서목집인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가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한서』 「예문지」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하위목차 중 하나인 방기략 (方技略)은 생명을 살리는 수단(生生之俱)이다. 방기략은 의경(醫經), 경방 (經方), 방중(房中), 신선(神仙)이라는 하위범주로 이루어져 있다. 의경은 의학의 기초이론과 침구요법, 경방은 약물요법 위주의 임상의학, 방중과 신선은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양생분야의 문헌이다. 이 분류에 따르자면, 마왕퇴 의서 중 『족비십일맥구경』과 『음양십일맥구경』, 『음양맥사후』, 『맥법』은 의경에 『오십이병방』과 『태산서』는 경방에 『십문』과 『합음양』, 『천하지도담』, 『양생방』, 『잡료방』은 방중과 신선에 『각곡식기』, 도인도는 신선에 포함시킬 수 있다.

 

1) 이처럼 출토의서는 당시의 의학범주를 포괄한다. 1)  이강범의 분류기준은 이와 다르다. 그리고 특정한 문헌이 두 가지 이상의 분류기준에 포함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런 차이와 분류의 복잡성은 『漢書』, 藝文志, 方技略에 보이는 문헌과 마왕퇴 발굴문헌이 부합한다는 관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양쪽 모두 부합자체에는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강범은 마왕퇴 의서 전체의 서지학적 검토를 통해 마왕퇴 의서가 『한서』 「예문지」의 목록과 부합한다는 견해를 취한 후, 당시의 지적전통이 일종의 공간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한다(이강범, 2005: 374).

 

추론이지만 나는 당시 귀족 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장안을 중심으로 빠르고 정확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언급한 지방의 노자 읽기 열풍이 장안과 비슷하다는 추론 이외에도 장례에 쓰인 완벽한 모습의 호화 칠기세트가 멀리 사천(四川)에서 공수되어 온 점에 주목한다. (나는 그 위에 새겨진 군행식(君幸食)세 글자는 일류공장에서 찍은 일종의 상표라고 생각 한다.) 묘주(墓主)인 신추(辛追)의 죽음이 초여름 갑자기 찾아 왔기 때문에 미리 장례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갑자기 장례준비를 하면서 소요되는 물품을 구할 때,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천의 칠기공장에 관한 정보가 이미 귀족사회에 널리 퍼져있어야 할 것이다.”

 

이강범 등의 연구에 따르면 마왕퇴 의서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는 반론은 방어가 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침은 빨라도 마왕퇴 한묘의 매장시점인 기원전 168년 이후에 나타났다는 추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두 개의 자료가 있다. 하나는 침의 잔편과 같은 발굴유물이고 둘은 문헌자료다. 침의 등장시점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문서보다는 발굴유물의 증거력이 더 강력하다. 확인 가능한 최초의 침으로 여겨지는 발굴 유물은 논의의 시작점으로 삼기에 적절하다.야마다는 출토 유물을 의료기구나 약물이라고 단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첫째 특수한 모양에 근거한 의료기구여야 하고, 둘째 한 벌로 되어 있는 의료기구가 의술과 관련된 것이어야 하며 셋째, 표시된 문자가 이를 입증해야 한다는 기준을 밝혔다(山田慶兒, 2002: 20). 야마다의 연구에 따르면 상기의 기준에 따를 때, 신뢰할만한 것으로 하북성 만성현 유승(劉勝, ?~기원전 113)의 묘에서 나온 발굴유물이 있다(山田慶兒, 1999: 54). 이곳에서는 금은제의 의침 9개와 은제 관약기 그리고 동제 거름기 동약시 제약용 동분, 제약용 쌍이동확이 발견되었다.이곳에서 발굴된 의침 중 파손되지 않은 금침 4개는 『황제내경』에 수록되어 있는 9종류의 침 중 3종류와 그 모양이 일치한다. 따라서 바늘 등이 아닌 의침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추정은 특히 의술관련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강화된다. 그렇다면 침은 늦어도 기원전 113년 이전에는 등장했다고 해야 한다. 그 시기는 한무제(漢武帝, 기원전 156~기원전 87)에 해당하고,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86?)이 『사기(史記)』를 저술하던 시기와도 가깝다. 그렇다면, 침은 기원전 168~113년 사이에 등장한 것일까? 사마천의 『사기』에는 침의 연한을 기원전 168년 이전으로 소급시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동양의 히포크라테스로 불리는 편작(扁鵲)의 활동연대는 난제로 악명이 높다. 당장 『사기』 「편작창공전(扁鵲倉公傳)」의 기록만 해도, “괵(虢)나라의 멸망(기원전 655년)부터 진(秦)의 함양천도(기원전 350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300년의 차이가 있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보이는 진나라 무왕(기원전 310~307재위)과의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하면 하한선은 더 낮아진다.”(加納喜光, 1999: 51) 그렇지만 편작의 활동시기가 마왕퇴 매장 이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文帝, 기원전 180~157)가 순우의(淳于意, 기원전 205~?)를 소환하여 사승관계와 치료의 경험 등을 물은 것이 기원전 176년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이기(移記)한 「창공전」의 순우의 의안도 같은 해에 기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때는 마왕퇴 의서가 땅에 묻힌 시기(기원전 168)와 대략 부합한다. 물론, 순우의가 의안에 보이는 진료를 행한 때는 기록된 시점보다 앞설 것이다. 「편작창공전」에는 침이 세 번 등장한다. 이 중 둘은 「편작전」에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제자에게 침을 준비시키는 대목에 나온다. “편작은 이에 제자인 자양으로 하여금 숫돌에 침을 갈아…”2) 지석(砥石)의 해석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다.

 

2)  “扁鵲乃使弟子子陽厲鍼砥石.” 『史記』, 扁鵲倉公傳.

 

사마천이 「편작전」을 지을 때, 참고했으리라고 여겨지는 『한비자』에도 지석이 보인다. 군주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어야 함을 치료를 위한 고통에 빗대어 말한 이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좌저의 고통에는 골수를 자하지 않으면 번심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반치크기의 지석으로 자하게 하지 못합니다.”3) 문체상 이곳의 지석은 틀림없는 명사다. 그러나 「편작전」의 지석은 석을 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침(厲鍼)이라고 해서 침과 석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병이 살과 피부에 있으면, 침석이 미치는 바”4)라는 구절에 보인다. 이 구절은 『한비자(韓非子)』 「유노(喩老)」에도 보인다.5) 그러나 ‘침’이나 ‘침석’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침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째는 용도라면 현대적 의미의 침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비자』 전체에서 이 편에서만 침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점에도 주의해야 한다. 주지하듯이 노자의 최초주석서인 「유노」와 「해노(解老)」는, 허정(虛靜)을 주장하는 한비후학계통에서 지어진 것으로, 법가서인 『한비자』 내에서도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한 중기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한비자』의 이 구절을 근거로, 침의 성립연대를 기원전 113년 이전으로 올려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관련 구절은 혈맥과는 무관하다.

 

3)  “夫痤疽之痛也, 非刺骨髓, 則煩心不可支也; 非如是, 不能使人以半寸砥石彈之.” 『韓非子』, 外儲說右上. 4)  “病在肌膚, 鍼石之所及也.” 『史記』, 扁鵲倉公傳. 5)  『韓非子』 전체에서 침(鍼, 針)은 이곳에만 보인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특이한 단서를 남겼다. 이 구절이 실려 있는 『한비자』 유노에는 편작이 채환공(蔡桓公)을 진단한 내용이 전해진다. 사마천은 이 글을 「편작전」으로 옮기면서 문리가 순하지 않은 몇 곳을 고쳤다. 그 와중에 기부가 혈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문리와 무관하다. 즉, 『한비자』의 “임금의 병은 살갗에 있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장차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 병이 살갗에 있으면 침석이 미치는 바입니다.”6)라는 구절의 뒷부분이 「편작전」에 이르면 “임금의 병은 혈맥에 있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심해질 것입니다….”7)로 바뀌었다. 

 

6)  “君之病在肌膚, 不治將益深… 在肌膚, 鍼石之所及也.” 『韓非子』.

7)  “君有疾在血脈, 不治恐深.” 『史記』, 扁鵲倉公傳.

 

그런데 ‘기부(肌膚)’를 ‘혈맥(血脈)’으로 바꾼 까닭은 무엇일까? 기부는 기육과 살의 외피를 가리킨다. 경맥이 전제되지 않은 기부의 치료는 침과의 관련성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기부를 혈맥으로 바꾸면 침술과의 관련성이 분명해진다(山田慶兒, 1999: 40). 그러므로 사마천의 고쳐 적기에서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사마천 당시에는 침이 유행했을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상식을 소급 적용시켰다. 당시에는 침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와 같이 고쳐 적은 까닭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추론이 가리키는 시기를 유물로 확인되는 시점(기원전 113년) 이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편작전」에서 확인되는 고쳐 적기는 「편작전」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침술의 성립년을 기원전 113년 이전으로 소급시키는 다른 증거가 있을까? 「편작전」과 병치되어 있는 「창공전」에도 침술의 성립 년을 소급시키는 근거가 보인다. 그런데 이 근거를 검토하기 전에, 순우의 의안(醫案, case history)과 마왕퇴 의서의 유사성에 주목해야 한다(순우의 의안의 기록년과 마왕퇴 의서의 매몰년은 시기가 부합하므로, 둘이 유사하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예를 들어, 족소음맥(足小陰脈)에 대한 『족비십일맥구경』의 기술은 먼저, 족소음맥의 운행노선을 말하고 그 맥과 관련된 병변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병을 앓으면 모두 족소음맥에 뜸뜬다.”8)고 한다. 혈위나 뜸자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순우의 의안에서도 환자가 앓는 증상을 말한 후에 맥에 뜸뜬다고 하고 있는데 표현이 일치한다. “제의 태의가… 환자가 곧 설사를 하면서 뱃속이 비었기에, 다시 그 소음맥에 뜸떴다. 그러나 환자의 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다.”9) 족소음맥은 『영추』에서는 신(腎)에 관계하지만 『족비십일맥구경』에서는 간을 지난다. 그런데 순우의는 족소음맥에 뜸을 떠서 간기에 이상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순우의는 『영추』「경맥」보다는 『족비십일맥구경』에 근거한 치료를 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료가 구체적이므로 양자 간의 친연성은 증명된다.

 

8)  “諸病此物者, 皆灸足少陰脈.” 『足臂十一脈灸經』. 발굴문헌의 자와 표점은 馬繼興, 『馬王堆古醫書考釋』 (湖南省: 湖南科學技術出版社, 1992); 周一謨主編, 『馬王堆醫書考注』 (臺北: 樂群文化事業有限公司, 1989)을 참고했음.

9)  “齊太醫… 病者卽泄注, 腹中虛; 又灸其少陰脈, 是壞肝剛絶深.” 『史記』, 扁鵲倉公傳.

 

이처럼 마왕퇴문헌과 친연성이 있는 「창공전」에는 침이 보인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음식과 희노에 절도가 없거나, 약을 먹어서는 안 되는 때에 먹거나, 침구를 쓸 수 없는 경우에 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과 달리 죽은 것입니다.”10)

 

10)  “此皆飮食喜怒不節, 或不當飮藥, 或不當鍼灸, 以故不中期死也.” 『史記』, 扁鵲倉公傳.

 

그렇지만, 『한비자』의 경우처럼 이곳의 침이 우리가 말하는 침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폄의 용도로 사용되었다면 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순우의 의안에는 침의 존재를 지지하는 보다 강력한 근거가 있다. 순우의 의안에서 순우의가 행한 시술 중, 침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둘이다.

 

a.  두 발의 족심에 세 번 자한다. 자한 자리를 눌러서 출혈이 없도록 한다.11)

b. 발의 양명맥을 자한 것, 좌우 각각 세 자리로 한다.12)

 

족심이라는 구체적인 자리가 보이지만, 혈자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도 마왕퇴 의서와 닮았다. 어쨌든 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위의 a, b이다. 이 외에도 순우의가 다른 의사의 의료행위를 비난할 때, 자(刺)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하고 있는데, 그 쓰임은 b와 부합한다. 물론 a, b의 ‘刺’라는 표현은 침에만 쓰인 것이 아니다. 『한비자』 「안위(安危)」편에는 ‘刺’자가 째는 행위의 묘사에 사용된 용례가 있다. “듣건대 옛날 편작이 그 병을 치료함에 칼로 골을 자한다.”13)라는 구절은 ‘刺’가 일종의 째는 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했음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a의 출혈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이곳의 ‘刺’가 사혈이 아닐 가능성을 강력하게 제기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문제가 대두된다. 즉, 순우의 의안과 마왕퇴 의서의 충돌이 그것이다. 양자의 유사성과 시기의 인접을 고려할 때, 마왕퇴에서는 보이지 않는 침이 순우의에게서 보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11)  “刺其足心各三所, 案之無出血.” 『史記』, 扁鵲倉公傳.

12)  “刺足陽明脈, 左右各三所.” 『史記』, 扁鵲倉公傳.

13)  “聞古扁鵲之治其病也, 以刀刺骨.” 『韓非子』, 安危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순우의 의안의 증거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실, 순우의 의안(치료가 아니라 단순히 보이는 확인되는 것임)에는 폄구가 3번, 참석이 3번, 구가 10회 정도 보이고 있어 약치를 제하고는 砭灸와 참석이 치법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순우의 의안에 침이라고 생각되는 구절이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떤 것의 비율이 적다고 해서 그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그 보다는 침이 치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고 해석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순우의의 의학을 마왕퇴보다 선진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실제로 야마다는 순우의의 진단법이 마왕퇴보다 선진적이었다고 말한다.  “창공순우의가 스승에게 받아 깨달은 것은 맥진을 중심으로 하는 진단법이었다. 그 진단법은 마왕퇴한묘에서 출토된 十一脈灸經, 陰陽脈死候 등의 기술과 비교하자면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다.” (山田慶兒, 1999: 40) 그렇다면 맥진만이 아니라 전체의학의 수준이 마왕퇴보다 높았을 가능성도 있다.그런데 순우의 당시에 침술이 막 등장하고 있었다면, 순우의가 스승에게서 교육받은 내용과 제자에게 전한 관련 내용의 비교 속에서 침의 등장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의 표는 순우의가 스승에게서 받은 의서와 제자에게 전해 준 의서목록 혹은 가르친 내용이다. .

 

표1.『史記』「扁鵲倉公傳」에 보이는 倉公淳于意를 중심으로 수수된 의서목록

 

-순우의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의서 : 脈書上下經, 五色診, 奇咳術, 揆度, 陰陽, 外變, 藥論, 石神, 接應陽禁書..

-순우의가 제자에게 전해준 의서 : 定五味, 和齊湯法, 上下經脈, 五診, 奇咳, 四時應, 經脈高下, 奇絡結, 當論兪所居, 宜鑱石, 定砭灸處...

 

석신(石神), 정폄구처(定砭灸處), 참석(鑱石) 등이 서명이라면 폄석에 관한 서적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침과 관련된 이름도 보인다. ‘兪所居’가 그것이다. 모리타 덴이치로(森田傳一郞)은 ‘兪所居’를 穴位에 관한 것으로 본다.  “『의설(醫說)』에는 수혈소재(兪穴所在)로 되어 있다. 수(兪)는 수(腧)와 같다. 혈회(穴會)를 말한다.”(森田傳一郞, 1986: 124) 넓은 자리에 시술하는 뜸이 아니라, 정확한 자리에 시침하는 침술에 필요한 혈위는 순우의가 전수받은 서적의 목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순우의가 활동하던 때 즉, 기원전 176년 직전에 침이 막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침은 순우의 때에야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치법으로 등장해서, 사마천이 『편작창공전』을 기록할 때인 기원전 100년경에 이르면 유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사마천은 『한비자』의 편작관련 고사를 전재하면서 ‘肌膚’를 ‘血脈’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탐색영역의 시간좌표를 알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이 시간좌표를 염두에 두고 침술의 연원으로 추정되는 뜸, 폄, 예방의학의 정신을 순서대로 검토해보자.

 

3. 뜸

 

마왕퇴의 두 『십일맥구경』은 체계적으로 경맥과 치료를 연결시킨 최고(最古)의 맥서다. 이곳에서 경맥은 오직 뜸과만 연결된다. 그렇다면, 경맥과 결합되었던 최초의 의술은 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족비십일맥구경』에서는 열 한 개 맥의 노선을 언급하고 해당맥과 유관한 병을 말한 후, 이런 병은 이 맥에 뜸뜬다는 식으로 맺고 있다. 족태양맥(足泰陽脈)을 보면,

 

족태양맥은 바깥쪽 복사뼈의 오목한 곳으로 나와 위로 장딴지를 뚫고 오금으로 나온다. 분지는 볼기 아래로 간다. 곧장 가는 것은 볼기를 뚫고 척추를 따라 목으로 나와 머리로 올라간다. 분지는 미간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귀로 간다. 그 곧게 움직이는 것은 눈의 안쪽을 뚫고 코로 향한다. 그 병은 다음과 같다. 새끼발가락을 못 씀, 장딴지에 통증이 있음, 오금이 땡김, 엉덩이에 통증이 있음, 치질, 허리 통증, 척추통증, □통, 목통, 손의 통증, 얼굴이 참, 귀가 안 들림, 눈의 통증, 코피를 쏟음, 간질. 무릇 이런 증상에 속하는 자는 모두 태양맥에 뜸뜬다.14)

 

경맥에 뜸뜬다고 하고 있으므로 뜸은 분명 경맥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험의술로서의 뜸은 경맥도입 이전에도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뜸에 관한 최초의 기술은 『장자』와  『맹자』에 보인다. 도척을 만나러 가서 도를 설하려 했으나, 도리어 쫓겨나고 만 공자는 망연자실하여 한숨을 쉬면서 노나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른바 병이 없는데도 뜸을 뜬 것이다.”15) 이 곳의 ‘灸’가 뜸임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所謂’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無病而自灸”가 상투어였음을 알 수 있다.

 

14)  “足泰陽脈, 出外踝婁中, 上貫腨, 出於郄, 枝之下□, 其直者貫臀, 挾脊, 出項, 上于脰, 枝顔下, 之耳, 其直者貫目内眦, 之鼻. 其病, 病足小指廢, 腨痛, 郄攣, 脽痛, 産痔, 腰痛, 挾脊痛, □痛, 項痛, 手痛, 顔寒, 産聾, 目痛, 鼽衄, 數癫疾. 諸病此物者, 皆灸太陽脈.” 『足臂十一脈灸經』. 산치(産痔), 산롱(産聾) 등의 산(産)은 생(生)과 같다. ‘치질이 생기다. 이롱병이 생기다.’는 뜻이다. 마왕퇴에서는 생육, 생산 등의 생(生)자가 대개 산(産)자로 대치되어 있다.

15)  “丘所謂無病而自灸也.” 『莊子』, 盜跖. 

 

『맹자』에 보이는 기록은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해당 구절은 『맹자』 「이루상(離婁上)」에 실려 있다. “지금의 왕과 같이 바라는 것은 마치 칠 년 된 병에 삼 년 된 쑥을 구하는 것과 같다.”16) 칠 년을 넘는 오랜 병환에 채집한지 아직 삼 년이 지나지 않은 효과가 적은 쑥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16)  “七年之病求三年之艾.” 『孟子』. 離婁上

 

야마다는 후한 대의 조기주(趙岐注)와 『본초강목(本草綱目)』의 구절을 근거로 위의 艾가 ‘뜸용 쑥’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趙岐注에서는 ‘애는 사람의 병에 뜸뜨기 위한 것이다. 오랫동안 건조하면 좋다.’고 한다. 『本草綱目』 艾, 修治에서 이시진은 말하기를 ‘무릇 쑥 잎을 사용함에는 모름지기 오래된 것을 사용하되 잘 다듬어서 가늘고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날 쑥으로 뜸을 뜨면, 사람의 피부가 다친다. 그러므로 『맹자』에서 칠년 병에 삼년 된 쑥을 구한다고 한다.’고 했다. 애에는 약으로 갖가지의 용법이 있는데 오래된 것을 알맞은 것으로 하는 것은 뜸용의 쑥이기 때문에 맹가(孟軻, 기원전 372~289)의 말은 구법의 존재를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山田慶兒, 1999: 13). 그러나 寥育群은 위의 艾는 養이며 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廖育群, 1997: 78). 아무래도 『맹자』의 해당구절은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장자』의 증거력은 분명하다. 물론 『장자』의 「盜跖」편은 『맹자』보다 늦은 전국 말기 혹은 진한교체기의 글이다(강신주, 2004: 61-4). 그렇다면 최소한 전국말에는 뜸이 쓰였을 것이다.

 

이미 전국 말에 뜸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다른 증거로 『오십이병방』을 들 수 있다. 주지하듯이 『오십이병방』은 마왕퇴 의서 중에서도 성립이 빠른 문헌에 속하므로 문헌의 성립을 전국말까지 올리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오십이병방』에 보이는 뜸은 넷으로 나뉜다. 하나는 환부에 직접 뜸뜨는 것인데, 당연히 현대적 의미의 뜸과는 다르다. 둘은 훈증에 쓰이는 경우다. 셋은 환부가 아닌 부위에 뜸뜨는 것으로 현대적 뜸과 부합하지만 경맥과 관련 없이 뜸을 뜬다는 특성이 있다. 넷은 경맥에 뜸뜨는 것으로 현대적 뜸에 부합한다. 환부에 직접 뜸을 뜨는 방법은 모치(牡痔, 수치질)와 우(疣, 사마귀)의 치료에 보인다.

 

1)환부에 직접 뜨는 뜸

모치(牡痔) : 밖으로 마치 소라의 살과 같이 돋아난 치질은 혹 쥐젖의 모양으로 끝은 크고 뿌리는 작으며 그 속에 구멍이 있다. 그것을 치료함에는 급히 뜸을 떠서 열나게 하고 그 작은 뿌리를 묶어서 끊어낸다.17)

 

모치(牡痔)는 외치질이고, 오절(盩絶)이라는 것은 묶어서 끊어내는 것을 말한다. 뜸이라고 해석한 부분의 자는 일실되어 알 수 없지만, 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곳의 뜸은 현대적 의미의 뜸과는 다르고 끊어내기 좋게 만드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이곳에서 말하는 뜸은 쑥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山田慶兒, 1999: 46). 그런데 사마귀의 경우에는 헤진 부들과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우(疣) : 헤진 부들로 만든 자리나 깔개를 가져다가 새끼줄을 만든다. 그 끝을 태워서 사마귀의 끝에 뜸뜬다. 뜨거워지면 곧 사마귀를 뽑는다.18)

 

소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고, 그것도 직접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끈으로 만드는 과정이 선행된다. 일종의 편의를 위한 준비일 것이다. 두 사례 모두 환부에 직접 뜸을 뜨는 것으로 뜸뜨는 행위는 제거를 위한 사전작업에 불과하다. 현대적 의미의 뜸이라고 하기 어렵고 침과의 연관성을 찾기도 어렵다. 이것은 단지 경험외치법의 일종일 뿐이다.

 

17)  “牡痔有蠃肉出, 或如鼠乳狀, 末大本小, 有空其中, □之, 疾久熱, 把其本小者而盩絶之.” 『五十二病方』.

18)  “疣取敝蒲席若藉之弱, 繩之, 卽燔其末, 以久疣末, 熱卽拔疣去之.” 『五十二病方』.

 

2)훈증에 쓰인 뜸

치질의 일종인 구양(朐癢)의 치료에서 그런 쓰임을 보이고 있다. 구양의 치법은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관련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양(朐癢): 버드나무에 나는 균류인 유심(柳蕈)과 비빈 쑥으로 치료한다. 무릇 이 둘로 하되, 화분크기 만하게 지면에 구멍을 파고 태워서 건조 시킨다. 그 속에 쑥을 두고 그 위에 유심을 둔 후, 쑥을 불사른다. … 환자를 거기에 걸터앉게 하여… 환부를 훈증토록 한다.19)

 

구(朐)는 항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양(養)은 가렵다는 양(瘍)과 같은 자로, 치질의 일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것은 쑥이지만 뜸의 용법과는 너무나 다르고 경맥과의 관련이라는 본고의 맥락과도 다르므로 굳이 언급하지는 않는다.

 

3)환부가 아닌 곳에 뜨는 뜸

현대적 뜸은 환부에 직접 뜨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치료는 탈장인 퇴병(㿗病)과 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증상을 가리키는 융병(癃病)에 보인다.

 

융병(癃病): 좌측 발의 중지에 뜸뜬다.20)

 

융(癃)은 후대의 림(淋)과 같은 뜻이다(小曾戶洋외, 2007: 84). 『소문』 「무자론(繆刺論)」에서는 시궐(尸厥)의 증상에 있어서 같은 자리에 자침한다고 하고 있다.21)

 

퇴병: 시구(枲垢)를 가져다가 쑥으로 싸서 탈장을 앓고 있는 환자의 중전(中顚)에 뜸뜬다. 뜸뜬 자리가 문드러지면 그만 둔다.22)

 

시구는 삼가루(麻屑), 중전은 정수리다.23)

 

19)  “治之以柳蕈一, 捼艾二, 凡二物, 爲穿地, 令廣心大如䀁, 燔所穿地. 令之乾. 置艾其中, 置柳蕈艾上, 而燔其艾..卽令痔者居䀁.. 令煙熏直.” 『五十二病方』.

20)  “灸左足中指.” 『五十二病方』.

21)  “尸厥… 刺足中趾爪甲上各一痏.” 『素問』, 繆刺論. 22)  “取枲垢, 以艾裹, 以久㿗者中顚, 令爛而已.” 『五十二病方』.

23)  재미있게도 뜸하면 연상되는 쑥은 주된 소재가 아닌 시구를 싸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의 관점에서 보자면 쑥임과 쑥 아님은 본류가 아니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24)  “㿗 先上卵, 引下其皮, 以砭穿其旁, □□汁及膏□, 撓以醇?, 又灸其痏, 勿令風及, 易瘳, 而灸其泰陰泰陽□□.” 『五十二病方』.

 

4)맥에 뜸 뜨는 사례

세 번째 사례는 맥에 뜸뜬다고 하고 있으므로 현대적 뜸과 부합하면서도 경맥과 뜸의 관련성을 함축한다.

 

퇴(㿗): 먼저 고환을 위로 들어 당기고 피부를 아래로 당긴다. 폄으로 음낭의 아래 옆쪽을 짼다. 그 상처에 즙과 고를 바르고 짙은 술을 붓는다. 또 그 상처에 뜸뜬다. 바람을 맞지 않게 하면 쉬이 낫는다. 태음맥과 태양맥에 뜸뜬다.24)

 

퇴병이 고환이 붓는 병이기 때문에, 염증을 치유하기 위한 외과치료의 과정이 보인다. 폄은 일종의 째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이 불완전해서 상당한 보정을 거쳐야 하는 문헌의 해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오십이병방』에서 ‘맥에 뜸뜬다.’고 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런데 태음맥과 태양맥은 정말로 퇴산병에 효과가 있는 것일까?

 

주일모는 “㿗疝病에 있어서의 치료가 태음맥이나 태양맥과 관련있다는 기재는 『十一脈灸經』이나 『황제내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千金要方』에는 태음맥과 태양맥이 퇴산병의 치료와 관련 있다는 기재가 있다. 예를 들어, 合陽과 中郄은 㿗疝崩中에 취한다고 하고 있는데 합양혈은 족태양맥에 속한다. 또 권 이십사에서는 남자의 음낭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증상에는 족태양에 오십장을 뜸뜬다. … 또 족태음에 오십장을 뜸뜬다고 하고 있다. 이외에 일종의 훈증의 방법으로 사용되는 예도 찾을 수 있다.”(周一謨主編, 1989: 147-8)고 말한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오십이병방』의 성립시기에는 이미 뜸과 맥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중 어떤 내용은 침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십이병방』에서 볼 수 있듯이 뜸은 주로 단순한 경험의술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마왕퇴 시기에 경험의술로서의 뜸이 경맥과 막 결합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뜸과 경맥이 결합된 후, 바로 침이 개입했다. 그리고 이후에 뜸은 침과 경맥을 공유했다. 그것은 ‘鍼灸’라는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표현 속에서 확인된다. 어떻게 이런 병존이 가능했을까?

 

추정컨대 경맥을 침과 함께 공유하되, 임무를 나눔으로써 병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침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뜸이 적절하다.”25) 침이 우선이고 뜸은 그 다음의 치법이었다.26) 특히 뜸은 맥이 오목하게 되면 사용되었다. “경맥이 아래로 꺼져 있으면 뜸으로 치료한다.”27) 그리고 허하면 뜸으로 치료했다.  “음양이 모두 허하면 뜸으로 치료한다.”28) 본래 瀉의 성질이 있는 침은 음양이 모두 허한 경우의 치료에 적절하지 않았고, 이런 문제를 뜸이 보완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뜸이 침보다 먼저 경맥과 묶여졌으므로, 침은 뜸으로부터 경맥과의 결합방식 등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마왕퇴 문헌인 『맥법』은 폄도 경맥에 토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폄으로 맥을 여는 이는 반드시 법식과 같이 해야 한다.”29) 그리고 째는(刺) 시술방식에 있어서 폄과 침은 유사하다. 그렇다면, 시술방식과 같은 침술의 본질적 특성 뿐 아니라, 경맥과의 결합방식에서도 폄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25)  “鍼所不爲, 灸之所宜.” 『靈樞』, 官能.

26)  실제로는 『황제내경』에 뜸을 사용한 예는 드물다. 癰疾과 狂(『靈樞』, 癰狂病), 癩라고도 불리는 大風(『素問』, 骨空論篇), 强直性痙攣인 瘛(『素問』, 玉機眞藏論篇)에서 각각의 특정한 증후를 동반하고 있는 몇 경우에 불과하다. 그 밖에, 『靈樞』 卷三, 經水에서는 지나치게 뜸을 뜬 경우의 나쁜 효과를 언급하고 있으며, 『靈樞』, 終始에는 “음양이 모두 족하지 않을 때는 뜸을 뜨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보인다.

27)  “經陷下者, 火則當之.” 『靈樞』, 官能.

28)  “陰陽皆虛, 火自當之.” 『靈樞』, 官能.

29)  “以砭啓脈者必如式.” 『脈法』.

 

4. 폄(砭)

 

침이 폄(砭)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가설을 개진한 인물 중 대표적인 이로 마백영(馬伯英)을 들 수 있다.(馬伯英, 1994: 193) 이 설의 연원은 깊고 근거자료도 풍부하다. 『남사(南史)』 「왕승유전(王僧孺傳)」의 설이 그 선구일 것이다. 『소문』의 주석을 기록하던 5~6세기에 살았던 전원기(全元起, 생몰년미상)가 왕승유에게 폄석에 관해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옛사람은 돌로 침을 만들었고 꼭 철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설문에 폄(砭)자가 있는데 허신(許愼, 기원후 30~123)은 ‘돌을 가지고 병을 자한다.’고 말했습니다. 『동산경(東山經)』에는 고씨의 산위에는 침석이 많다고 했는데, 곽박(郭璞)은 ‘이것을 가지고 폄침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춘추에는 보기에만 좋은 우환이 악석(惡石)만 못하다는 말도 보이는데 복자신(服子愼)의 주에서는 ‘돌이라는 것은 폄석이다.’라고 했습니다. 후세에는 벌써 좋은 돌이 없게 되었으므로 철로 대신했을 뿐입니다.”30)

 

30)  “古人當以石爲針, 必不用鐵. 說文有此砭字, 許愼云, 以石刺病. 東山經, 高氏之山多鍼石, 郭璞云可以爲砭針. 春秋美疢不如惡石, 服子愼注云, 石砭石也. 季世無復佳石, 故以鐵代之爾.” 『南史』, 王僧孺傳.

 

왕승유는 폄과 침의 쓰임새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가 인용한 허신, 곽박, 복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폄을 침으로 간주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후세의 설은 왕승유를 따랐고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침과 폄의 용도가 다르다는 점에 관해서는 이설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폄은 어떤 의료도구였을까? 구결성(區結成)은 한의학사를 다룬 짧은 책에서 폄을 사혈에 대응시켜서 말했다. “중서의학이 고대에 같거나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아야할 점은 그리스 로마 의학의 사혈요법은 갈레노스가 널리 보급하고 수백 년간 남용되어 오다가 결국에 도태되어 버렸으나, 중의학의 침자요법은 폄석에서 호침으로 사혈에서 취혈로 발전한 것이며…”(區結成저, 2010: 120)

 

구결성의 말처럼 서양에서는 사혈이 중시되었었고 19세기에 이르도록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갈렌은 통풍, 관절염, 어지럼증이나 실신, 간질, 우울증, 폐렴, 흉막염, 간의 질병, 안염 그리고 심지어는 출혈과 같은 다양한 질병에 사혈했다. 이것도 일부에 불과하다. 그는 “정맥사혈이 모든 중병의 본질적 치료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전통적이라고 보았다. 더 나아가서 이전의 위대한 의사들도 사혈을 “모든 질병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와 같게 보았다고 주장했다. 중세의 치료사들도 결코 덜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들도 원기왕성하게 만들기 위해 건강한 이 뿐 아니라 환자도 사혈했다... 17세기의 혈액순환발견에도 불구하고, 사혈에 대한 믿음은 쇠락하지 않았다. 윌리엄 하비(Willian Harvey)는 사혈을 최고의 일반치료술이라고 했다. … 자연주의자인 워터튼(Charles Waterton)은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후에도 예방요법으로서의 사혈에 의존했다.(Shigehisa Kuriyama, 2002: 195-200)

 

그러나 『황제내경』이전의 중국에서 사혈치료의 흔적은 뚜렷하지 않다. 미야시타 사부로(宮下三朗)는 갑골문에서 과거 조상을 병인으로 보는 질병관이 유행했을 때, 사특한 귀신을 몰아내기 위한 사혈이 확인된다고 밝히고 있다(D. C. Epler, 1980: 349). 그러나 마왕퇴 의서에는 순수한 사혈의 존재는 뚜렷하지 않다. 사혈은 『황제내경』에 이르러서야 존재가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소문·자학편(刺瘧篇)』에서는 각종의 학질(瘧疾)을 장부와 경맥에 따라 구분하면서 그 치료법을 말하는 중에 사혈을 몇 번이나 언급한다. 그 중 위학(胃瘧)의 치료를 보면, “위학이 걸리면 장차 병나려 함에 쉽게 배가 고파지지만 음식을 먹지 못하고 먹는다고 해도 가로로 걸린 듯한 느낌으로 배부르고 배가 커지게 된다. (그러면) 족양명태음의 락맥을 찔러서 사혈한다.”31) 그러나  『황제내경』에서도 사혈은 뒤로 갈수록 사라져가는 형편이었다.32) 에플러(D. C. Epler)는 사혈에 대한 태도변화가 이미 『황제내경』에서부터 보인다고 말한다. 

 

31)  “胃瘧者, 令人且病也, 善飢而不能食, 食而支滿腹大, 刺足陽明太陰橫脈出血.” 『素問』, 刺瘧篇. 

32)  『황제내경』은 여러 단편들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문헌으로, 구성 논문의 성립연대가 각각 다르다.

 

그는 『소문』내에서 사혈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재구성해냈다.

 

짧게 지금까지 논의해 온 개요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질병원인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였다. 왜냐하면 질병의 원인은 혈관 안에 머무를 수 있는 밖에서 침투해온 병인으로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소문』에서 변화를 찾을 수 있다. 『소문』의 논문이 누적되는 동안, 혈(血)은 점점 덜 언급되었고, 관심은 기와 기에 영향을 미쳐서 맥에서 기혈의 균형을 이뤄야 하는 필요성에 두어졌다. 단순히 몸에서 피를 제거하는 데 관심이 두어졌던 것은 아니다.(D. C. Epler, 1980: 356).

 

심지어 『황제내경』 주석서인 『난경(難經)』에서는 사혈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물론 마왕퇴 발굴문헌인 『맥법』에서는 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맥법』의 폄은 사혈용도구가 아니라 농을 제거하는 일종의 메스다. “옹종에 농이 있으면 그 크기에 따라 폄을 쓴다.”33) 그렇다면, 폄은 사혈용 도구가 아니란 말인가?

 

먼저, 『오십이병방』에는 폄이 딱 한 번 앞서 인용했던 탈장의 퇴병 치료에 나온다(山田慶兒, 1999: 45). “퇴(㿗): 먼저 고환을 위로 들어 당기고 피부를 아래로 당긴다. 폄으로 음낭의 아래 옆쪽을 짼다... 태음맥과 태양맥에 뜸뜬다.”34) 음낭의 옆을 째는 것은 고름을 빼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오십이병방』의 폄은 순수한 사혈용이 아니라 염증부위를 절개하고 고름을 짜내기 위한 도구라고 해야 한다. 다른 문헌에서는 어떨까? 야마다 게이지(山田慶兒)는 폄계열의 도구는 사혈용이 아니라 옹종치료용임을 밝히고 있다. “어쨌든 폄이라는 것은 옹종을 자하는 것이고 또한 그런 목적의 석제의 도구를 가리키는 말에 불과하다.”(山田慶兒, 1999: 18) 야마다에 따르면, 석(石), 지석(砥石), 폄석(砭石), 잠석(箴石), 도(刀)는 모두 화농성 종기나 혹 등의 외과치료에 쓰이던 일종의 메스라고 한다(山田慶兒, 1999: 18-26). 

 

33)  “癰腫有膿, 則稱其大小而爲之砭.” 『脈法』.

34)  “㿗 先上卵, 引下其皮, 以砭穿其旁, □□汁及膏□, 撓以醇□, 又灸其痏, 勿令風及, 易瘳, 而灸其泰陰泰陽□□.” 『五十二病方』.

 

『내경』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에서는 의술의 연원을 도식적으로 사방에 배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백성들은 모두 낯빛이 검고 피부가 거칠며, 그 병은 모두 옹양이니 치료에는 폄석이 적합하다. 그러므로 폄석은 동방에서 온 것이다.”35) 옹양(癰瘍)은 옹저(癰疽)와 같은 것으로 종기를 말한다. 폄이 동쪽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폄의 쓰임이 옹종치료에 있다는 말이다. 또 『영추·옹저』에서도 이 점을 명확히 하여, “겨드랑이 아래 붉고 단단하게 나는 것을 미저라고 하는데 폄석으로 치료합니다.”36)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혈용 도구는 무엇이었을까?

 

『소문』 「기병론(奇病論)」에서는 말하기를 “몸이 수척한 사람에게는 참석을 쓰지 않는다.”37)고 했는데, 참석은 「창공전」에도 두 번 보인다. 관련 내용을 보자면, 순우의는 “몸이 피폐한 사람은 뜸과 참석 그리고 약이 적합하지 않다.”38)고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양질이 안에 있고 음병이 밖으로 응하면 독한 약과 참석을 써서는 안 된다.”39)고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몸이 수척한 사람에게 쓰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사혈일 가능성이 있는데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참이 사혈용이라는 추정을 뒷받침하는 보다 강력한 정보가 『할관자(鶡冠子)』에 전한다. 『할관자』에서는 “혈맥에 참한다.”40)고 했다. 이것은 현재 몽골에서도 볼 수 있는 정맥사혈일 가능성이 있다.

 

35)  “其民皆黑色踈理, 其病皆爲癰瘍, 其治宜砭石. 故砭石者, 亦從東方來.” 『素問』, 異法方宜論.

36)  “發於腋下赤堅者, 名曰米疽, 治之以砭石.” 『靈樞』, 癰疽.

37)  “身羸瘦, 無用鑱石也.” 『素問』, 奇病論.

38)  “形獘者, 不當關灸鑱石及飮毒藥也.” 『史記』, 扁鵲倉公傳.

39)  “論曰陽疾處內, 陰形應外者, 不加悍藥及鑱石.” 『史記』, 扁鵲倉公傳.

40)  “鑱血脈.” 『鶡冠子』, 世賢.

 

물론, 폄은 사혈용이 아니라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인용했듯이 『맥법』에서는 “폄으로 맥을 여는 이는 반드시 법도와 같이 해야 한다.”41)고 말하고 있다. 폄은 맥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혈용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나 폄의 주된 용도는 어디까지나 종기치료 혹은 고름제거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폄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는 것과는 달리, 사혈은 그 존재가 미미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황은 『황제내경』에 이르러 역전된다. 『황제내경』에서 폄은 근근이 개괄적으로 언급될 뿐이지만, 사혈은 수십 차례나 등장한다.42) 그 까닭은 무엇일까?

 

41)  “以砭啓脈者必如式.” 『脈法』.

42)  폄은 대략 10여 회 언급되는데 그치지만 出血이나 見血로 확인되는 사혈은 수십 차례나 보인다.

 

5. 치미병(治未病)과 보정(保精, 정의 보존)의 이념

 

나는 전한기의 ‘시대정신’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듯이 오랜 전란을 통해 통일 제국을 이룩한 한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47~195)은 백성들을 쉬게 하면서 인구를 번성케 하는 휴양생식(休養生息)의 정책을 폈고, 이 정책은 문제(文帝, 기원전 180~157)와 경제(景帝, 기원전 157~141)로 이어졌다. 그 결과 한나라는 중국역사상 유래가 없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휴양생식은 소극적이었지만 더 큰 결과를 낳는 진정으로 적극적인 정책,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함이 없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정책이었다.

 

역사학자인 앙리 엘렌베르거는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Anne Harrington, 2009: 44). 그의 말은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하는 의학은 시대를 대표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시대정신과 결합하지 못하는 의학이 주류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면, 전한기의 의학은 어떤 식으로든  ‘무위이무불위’의 이념에 반응했을 것이라는 추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미 농이 생긴 후에 치료하는 폄의 치법은 ‘무위이무불위’의 이념에 적합하지 않다. 『영추』 「구침십이원(九鍼十二原)」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황제가 기백에게 물었다. “나는 만민을 자식으로 여기고, 백성을 기르면서 그 조세를 거둡니다. 나는 그들의 (천수를) 다하지 못함을 슬퍼하기에 질병 있음을 불쌍히 여깁니다. 나는 독약을 복용하지 않고, 폄석(砭石)을 사용함이 없게 만들고자 합니다. 미침(微鍼)을 가지고 그 경맥을 통하게 하고, 혈기를 조절하여, 그 역순과 출입의 기틀을 운영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43)

 

황제의 질문에는 폄석과 독약보다 침이 더 뛰어난 치법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미 곪은 후에 치료하는 폄의 효과는 곪기 전에 치료하는 침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옹저가 곪으면 살아남는 이는 열 사람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인은 화농이 되지 않도록 한다.”44) 이 말의 배후에서 ‘무위이무불위’의 의학적 버전이랄 수 있는 ‘치미병’(治未病)의 이념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43)  “黃帝問於岐伯曰, 余子萬民, 養百姓, 而收租稅. 余哀其不給, 而屬有疾病. 余欲勿使被毒藥, 無用砭石, 欲以微鍼通其經脈, 調其血氣, 營其逆順出入之會. 令可傳於後世.” 『靈樞』, 九鍼十二原.

44)  “膿已成, 十死一生, 故聖人弗使已成.” 『靈樞』, 玉板.

 

그런데 침과 마찬가지로 사혈도 일종의 예방의학적 처방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침술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부패가 사혈요법가의 몸 이미지를 구성했다. 사혈요법가는 질병을 특별한 부패로 받아들였다. 피는 건강한 신체의 실체였다. 그러나 과도하게 축적되면, 무기력하고 탐닉한 몸속의 잔존물로서 열과 염증을 초래하고 괴물처럼 자라서 농창이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과잉을 지속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으며, ‘예방’을 위해 사혈할 필요도 있다.”(Shigehisa Kuriyama, 2002: 223)  

 

 『황제내경』 이전에는 미미한 치법이었던 예방치료로서의 사혈은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라, 염증치료법이었던 폄을 밀어내고, 자신의 영역을 넓힐 기회를 잡았다. 폄은 시대정신과 어울리지 않는 치법이었고, 사혈은 시대정신에 어울리는 치법이었다. 그런데, 『황제내경』은 사혈서가 아니라 침술서이며, 앞에서 보았듯이 에플러의 연구에 따르면, 『황제내경』내에서도 이미 사혈이 쇠퇴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폄과 침은 모두 사(瀉)의 기능이 주되므로, 서로 보완적일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침이 아닌 폄이 쇠퇴한 까닭을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 병인론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즉, 사혈은 외인이 몸 안으로 들어와서 병이 생긴다는 관념과는 어울리지만, 몸의 불균형을 병으로 보는 관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불균형을 병으로 보는 병인론이 언제부터 유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침술이 토대한 주된 병인론은 균형론이다. “사혈이 과도함에만 집중하는데 반해, 침술은 양쪽의 편향을 바로잡는다.”(Shigehisa Kuriyama, 2002: 220) 그러나 이 가설은 마왕퇴 의서에 사혈의 흔적이 선명하지 않은 까닭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전자의 병인론이 지속되었는데도 사혈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이유도 밝히지 못한다.

 

나는 사혈과 생명관의 부조화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생명을 밖으로 유출시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것은 중국의 양생론부터 의론까지 전범위에 걸쳐서 전제되어 있던 기본이념이다. 우리는 이 점을 성교시의 사정을 금하는 동양 방중술의 흥미로운 가르침에서 유추할 수 있다. 동양인들에게 생명의 씨앗인 정(精)을 잃는 것은 곧 생명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런데 정은 혈을 타고 경맥을 따라 몸을 유주한다. 따라서 사혈을 한다면, 정의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사혈은 예방의학의 이념에 따라 일시적으로 영역을 확장했지만, 중국적 생명관과의 충돌을 극복하지 못하고 곧, 쇠퇴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혈요법이 폄을 밀어내면서 영역을 확장시켰던 것처럼, 침은 사혈요법을 밀어내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침은 사혈요법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던 치료법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의학의 시작을 알리는 혁신적 기술이었다. 

 

6. 논의의 정리

 

추정컨대 기원전 3세기인 전국 말부터 의사들은 경험의학지식을 체계적으로 이론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양생의 영역에서 성장한 경맥이론의 도입이었다. 경맥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중국의 의학은 생리학과 병리학 그리고 진단학을 통일적으로 결합한 체계적인 이론의학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최초로 경맥과 결합한 의술은 뜸과 폄이었다. 마왕퇴 시기에는 뜸과 폄만이 경맥과 결합되어 있었다.  

 

전한기의 시대정신이었던 ‘무위이무불위’는 의학에 적용되면서 ‘치미병’의 예방의학정신을 낳았다. 치미병의 이념 때문에 폄은 위축되고 사혈의 영역은 확장되었다. 그 배후에는 ‘열→염증’으로의 도식에서 열을 제거함으로써 염증을 예방할 수 있다는 착상과 치료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전에는 존재감이 미미했던 사혈이 『황제내경』에서 갑작스럽게 확장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혈은 중국인들의 생명관에 어울리지 않는 치법이다. 중국인의 생명관에 비춰보자면, 생명의 씨앗인 정(精)을 싣고 있는 혈을 빼내는 것은 생명의 유실을 뜻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의사들은 새로운 치법을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 침술이 탄생했다. 고대 중국의 의사들은 경맥과 경맥을 따라 들어온 양생의 정신에 맞춰 미리 기혈을 조절함으로써 생명의 씨앗을 꽃피워낼 수 있는 침을 창의적으로 구상해 냈으리라.

 

결국 침술은 이곳에서 무언가를 빌려오고 저곳에서 다른 것을 계승하면서 단계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그 발전은 다른 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단절적 발전이 아니라 다른 것을 중앙에서 밀어내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그런 누적적 발전이었다. 그 결과 한의학은 폄과 침, 뜸이 병존하는 복잡한 의학이 되었다. 우리는 『소문·병태론』에서 이 점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황제가 말했다. “좋습니다. 목에 옹종이 생기면 혹은 폄으로 치료하고 혹은 침구로 치료하는데 어느 경우에나 병이 낫습니다. 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백이 말했다. “이것은 이름은 같은데 병의 진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릇 옹종의 기운이 불어날 경우에는 마땅히 침으로 열어서 없애주어야 합니다. 무릇 기가 그득히 쌓이고 혈이 모여 있는 경우에는 마땅히 폄으로 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 바 같은 병에 치료법이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45)

 

침은 폄의 시대적 반응물이기는 했지만, 폄의 역할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무게 중심이 옮겨갔을 뿐이다. 구침(九鍼)도 이와 같은 누적적 발전의 증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구침 중의 봉침(鋒鍼)과 피침(鈹鍼)은 농을 치료하는 것으로 폄의 직계후손이다. “이미 곪아서 농혈이 된 것은 오직 폄석과 피침 그리고 봉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46) 그리고 참침은 사혈용 침이다. “참침은 머리가 크고 끝이 날카로운데 양기를 사하는데 쓰인다.”47) “병이 피부에 있고 일정한 자리가 없으면 참침으로 취하되 병소에 한다.”48) “참침은 건침에서 본뜬 것으로 끝에서 한 치 반 떨어져서 예리하게 하고 길이는 한 치 육 푼으로 머리와 몸에 열이 있는 것을 주로 한다.”49) “이름하여 부수병이라고 한다. 참침으로 절골에 자하고 출혈이 있으면 곧 멈춘다.”50)

 

45)  “帝曰, 善. 有病頸癰者, 或石治之, 或鍼灸治之, 而皆已, 其眞安在. 岐伯曰, 此同名異等者也. 夫癰氣之息者, 宜以鍼開除去之, 夫氣盛血聚者, 宜石而寫之, 此所謂同病異治也.” 『素問』, 病能論.

46)  “其已成膿血者, 其唯砭石鈹鋒之所取也.” 『靈樞』, 玉版.

47)  “鑱鍼者, 頭大末銳, 去瀉陽氣.” 『靈樞』, 九鍼論.

48)  “病在皮膚無常處者, 取以鑱鍼於病所.” 『靈樞』, 官鍼.

49)  “黃帝曰, 鍼之長短有數乎. 岐伯曰, 一曰鑱鍼者, 取法於巾鍼, 去末寸半, 卒銳之, 長一寸六分, 主熱在頭身也.” 『靈樞』, 九鍼論.

50)  “名曰胕髓病, 以鑱鍼, 鍼絶骨出血, 立已.” 『素問』, 刺瘧篇. 絶骨에 대해서는 懸鍾(張介賓)이라는 설과 陽輔(王氷)이라는 설이 있다.

 

이런 발전양상 즉, 전대의 것을 폐기하지 않고 병존시키는 발전양상은 병인론에서도 확인된다. 사혈에 어울리는 사기의 침입을 병인으로 보는 관점은 침에 어울리는 균형을 기준으로 병을 판단하는 병인론과 병존했다. 이처럼 모순적으로 보이는 병인론의 병존은 중국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한의학의 미래도 그렇게 될까? 직선적 발전모델을 갖고 있는 서양문화보다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한의학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과거의 유산을 병존시키는 방식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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